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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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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양수(歐陽脩)는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한 정치가이자 한유(韓愈)의 고문이론을 계승하여 송대 시문 혁신 운동을 이끈 문학가이자 《신당서(新唐書)》 편찬과 《신오대사(新五代史)》를 저술한 사학가이다. 《신오대사》는 당 이후 유일하게 개인이 저술한 정사(正史)이며,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략 1053년경에는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본서는 총 72권으로 구성되었으며, 본기 12권, 열전 45권, 고(考) 3권, 세가 및 연보 11권, 四夷附錄 3권으로 구성되었다. 금 장종(金章宗) 태화(泰和) 7년(1207) 학령(學令)이 반포된 이후 《구오대사(舊五代史)》가 점점 잊혀져간데 반해서 널리 읽혀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저자

(1) 성명:구양수(歐陽脩)(1007~1072)
(2) 자(字)‧별호(別號):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 육일거사(六一居士) 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 출생 지역:강서(江西) 여릉(廬陵)(현재 중국 길안(吉安))
(4) 주요 활동과 생애
송나라 진종(眞宗) 경덕(景德) 4년(1007)에 출생하여 신종(神宗) 희녕(熙寧) 5년(1072)에 졸하였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삼촌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였다. 10살 때 한유의 《昌黎先生文集》 6권을 얻은 후 깊이 심취하였으며, 이는 훗날 시문 혁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인종 천성(天聖) 원년(1023)과 4년(1026)에 응거하였으나 낙방하였으며, 8년(1029) 진사에 합격하여 시비서성교서랑(試秘書省校書郎)에 제수되었다. 경우(景祐) 원년(1034) 시학사원(試學士院)이 되어 《숭문총목(崇文總目)》 편수에 참여하였다. 경우 3년(1035) 교류가 깊었던 범중엄(范仲淹)이 추진한 개혁에 동참하였다가 실패한 후 이릉현령(夷陵縣令)(현재 호북성 의창시(宜昌市))으로 좌천되었다. 강정(康定) 원년(1040) 경사로 돌아온 후 《숭문총목(崇文總目)》 편수에 다시 참여하였다. 仁宗인종 경력(慶曆) 3년(1043) 범중엄(范仲淹), 한기(韓琦), 부필(富弼) 등과 경력신정(慶曆新政)에 참여하여 이치(吏治), 군사(軍事), 과거 등의 개혁을 주장하였으나 수구파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는 저주(滁州)(현재 안휘성 저주)태수로 좌천되었으며, 이곳에서 불후의 명작 《취옹정기(醉翁亭記)》를 저술하였다. 인종 황우(皇祐) 원년(1049) 한림학사, 사관수찬(史館修撰) 등을 역임하였으며, 지화(至和) 원년(1054) 송기(宋祁)와 함께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신은 《오대사기(五代史記)》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가우(嘉祐) 2년(1057) 지공거가 되어 소식(蘇軾), 소철(蘇轍), 증공(曾鞏) 등을 선발하였으며, 그는 이들과 더불어 송대 문풍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우 연간 추밀부사(樞密副使),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역임하였다. 신종(神宗) 희녕(熙寧) 2년(1069) 왕안석이 시행한 신법 가운데 청묘법(靑苗法)에 대해서 비평을 가하였으며, 희녕 5년(1074) 66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구양수는 한유의 고문이론을 계승하여 송대 시문 혁신 운동을 이끌었다.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소식(蘇軾), 소순(蘇洵), 소철(蘇轍), 왕안석(王安石), 증공(曾鞏) 등과 더불어 당송팔대가로 불리고 있다. 구양수는 중국문학사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데, 그는 시문 혁신 운동을 주창하여 당말송초의 형식주의의 문풍과 시풍을 개혁하였다. 그는 왕안석, 증공, 소순, 소식, 소철 등 산문가를 지도하여 그들의 산문창작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평이한 문풍은 원, 명, 청대까지 영향을 주었다.
(5) 주요저작:《신당서(新唐書)》, 《歐陽文忠集》, 《집고록(集古錄)》

3. 서지사항

《신오대사》의 원명은 《오대사기(五代史記)》이며 후세의 사가들이 설거정(薛居正)의 《구오대사》와 구분하기 위해서 이렇게 불렀다. 구양수는 설거정의 《구오대사》가 역사적 사실을 잃어버린 것이 많고 번잡하기 때문에 오대사(五代史)를 다시 편찬한다고 하였다. 《신오대사》의 저술 기간과 완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윤수(尹洙), 이숙(李淑), 매요신(梅堯臣) 등과 주고받은 서신을 보면, 인종(仁宗) 경우(景祐) 3년(1036)에 《신오대사》를 편찬하기 시작해서 인종(仁宗) 황우(皇祐) 5년(1053)에 대략 완성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구양수가 졸한 신종(神宗) 희녕(熙寧) 5년(1072)에 신종이 《신오대사》를 진상하도록 함으로써 개인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정사(正史)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신오대사》는 구양수와 윤수(尹洙)가 각각 후량(後梁)‧후한(後漢)‧후주(後周)와 후당(後唐)‧후진(後晉)을 분담하고, 십국지(十國志)는 함께 만들기로 하였다. 하지만 인종 경력(慶曆) 5년(1045)까지 윤수는 십국지 일부만 작성한 채 이듬해 죽었다. 구양수는 이 부분만 이용했을 뿐 대부분은 그가 편찬하였다. 《신오대사》는 《구오대사》에서 누락된 내용을 다수 첨가하였지만 간단한 서술을 위해서 다수의 내용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고증도 소홀히 한 부분이 많다. 《신오대사》의 해석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서무당(徐無黨)의 주가 있는데, 《신오대사》의 본기에 부기된 내용이 서무당이 지은 것이다. 북송 때 오신(吳紳)이 저술한 《오대사찬오(五代史纂誤)》는 《신오대사》가 지닌 잘못된 부분을 많이 수정하였다. 청대에는 서형(徐炯)의 《오대사기주보(五代史記注補)》와 팽원서(彭元瑞)‧유봉고(劉鳳誥)의 《오대사기보주(五代史記補注)》 등이 저술되었다.
《신오대사》는 포폄과 선악을 중시하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도입하였으며, 이후 정통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송 초기 후량은 당을 멸한 존재로 위정(僞庭)으로 인식되었는데, 구양수는 후당의 세력은 당(唐)의 충신이 아니므로 이존욱(李存勖)이 후량을 멸한 것은 위정을 멸한 것이라 아니라는 관점에서 후량을 정통의 연장선상에 놓았다. 구양수는 당시 내우외환에 직면해 있던 송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변법을 적극 지지하는 한편 송 초기 이래로 지속되어 온 ‘묵수(墨守)’ 사상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신오대사》에는 그의 이런 시대감각도 많이 투영되었다.
현재 전하는 판본으로는 송대에 간행된 잔본이 대만국가도서관(臺灣國家圖書館)에 일부 보관되어 있으며, 남송 영종(寧宗) 경원 연간에 간행된 경원본(慶元本), 원 대덕 연간 종문서원(宗文書院)에 간행한 종문본(宗文本) 등도 전하고 있다. 명대의 급고각본(汲古閣本), 왕문성본(汪文盛本), 청대 무영전본(武英殿本), 백납본(百衲本), 귀지유씨(貴池劉氏)의 남송본, 숭문서국(崇文書局)의 악본(鄂本), 미경서원(未經書院) 각본 등이 전하고 있다. 현재 중화서국(中華書局)의 표점교감본(標點校勘本)은 백납본을 저본으로 해서 다수의 서적을 대조하여 편집하였다.

4. 내용

《신오대사》는 본기 12권, 열전 45권, 고(考) 3권, 세가 10권, 십국세가연표 1권, 사이부록(四夷附錄) 3권 총 74권으로 구성되었다. 본기와 열전은 오대를 조대별로 나누지 않고 후량에서 후주까지 통사 형식으로 서술하여 단대사의 한계를 돌파하였다. 열전은 인물의 성격에 따라 분류를 행하여 가인전(家人傳), 사절전(死節傳), 사사전(死事傳), 일행전(一行傳), 당육신전(唐六臣傳), 의아전(義兒傳), 영관전(伶官傳), 환자전(宦者傳), 잡전(雜傳)으로 분류하였다. 가인전에는 양가인(梁家人) 17명, 당가인(唐家人) 37명, 진가인(晉家人) 12명, 한가인(漢家人) 6명, 주가인(周家人) 19명, 양신전(梁臣傳) 25명, 당신전(唐臣傳) 36명, 진신전(晉臣傳) 3명, 한신전(漢臣傳) 9명, 주신전(周臣傳) 3명, 사절전 3명, 사사전 11명, 일행전 5명, 당육신전 7명, 의아전 8명, 영관전 4명, 환자전 2명, 잡전 145명, 세가 43명을 수록하였다. 구양수는 열전을 구성할 때 한 왕조에서 활약한 인물들은 양신전 등에, 두 왕조 이상을 섬긴 이들은 모두 잡전에 수록하고, 양신전 등에 수록된 이들이라고 해서 모두 존귀한 이들이 아니며 잡전에 수록된 이들은 군자의 수치라고 하였다.
구양수는 열전 다음에 전장제도를 수록한 고(考)를 설정하고, 오대에는 예와 악이 무너져 이와 관련된 내용을 수록할 것이 없지만 그래도 후세를 위해서 단지 2권만 저술하였다. 고(考)는 내용과 연보의 형식을 늘려서 설사(薛史)에 비하여 간결하고 명료하게 오대십국의 전장제도 및 연혁을 보여준다. 고(考) 다음에 십국과 관련된 세가(世家)를 구성하였는데, 오대를 정통으로 하고 십국을 위정(僞庭)으로 삼아 오대의 정통을 명확하게 설정하였다. 주변 나라와 관련된 내용은 정문이 아닌 부록으로 기재하였다. 사이부록(四夷附錄)에는 거란, 해(奚), 토혼(吐渾), 달단(韃靼), 당항(党項), 돌궐(突厥), 토번(吐蕃), 회골(回鶻), 우전(于闐), 고려(高麗), 발해(渤海), 신라(新羅), 흑수말갈(黑水靺鞨), 남조만(南詔蠻), 장가만(䍧牱蠻), 곤명(昆明), 점성(占城) 등이 수록되었는데, 구양수가 부록을 만든 이유는 화이(華夷)의 구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5. 가치와 영향

《신오대사》는 《구오대사》에 비하여 사료상 많이 부분이 누락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 관계도 틀린 부분이 많다. 또한 《신오대사》는 대담하게도 필기소설류 등에 수록된 내용 다수를 인용하였다. 그럼에도 구양수의 걸출한 문학 재능은 《신오대사》에도 잘 나타나는데, 평이한 문장과 간결한 서술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비견할 만하다고 평가를 받는다.
《신오대사》는 각 조대의 《실록(實錄)》 등에서 천인감응을 매개한 천명으로 창건자를 미화한 내용을 비판하고, 참위와 같은 미신을 반대하였다. 또한 불교를 통한 혹세무민하는 행위를 비판하고 도교를 통한 미신 행위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또한 기존의 정사(正史) 서술 형식을 탈피하여 다시 포폄을 중시하는 춘추필법으로 오대의 인물과 사건에 대한 평을 가하였다. 이러한 《신오대사》의 내용은 이후 정통론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범조우(范祖禹)의 《당감(唐鑑)》, 주희(朱熹)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등도 영향을 받았다. 또한 금 장종의 정통 인식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그가 《구오대사》를 배척하고 《신오대사》를 강조한 것은 중원 지역의 오대를 정통을 보는 정통론에 근거하여 중원 지역을 차지한 본인들이 정통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신오대사》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다양하다. 고염무(顧炎武), 전대흔(錢大昕) 등은 역사적 사실을 소홀히 한 점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했으며, 장학성(章學誠)은 역사서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왕명성(王鳴盛)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이하지만 대강을 서술한 문장은 설사(薛史)가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조익(趙翼)은 설사에 비해서 분량은 미치지 못하지만 오류를 바로 잡은 노력을 배가 들었다고 하였다. 장태염(章太炎)은 문학적인 가치는 있으나 역사서의 가치는 《구오대사》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대개 재목(材木)는 장인을 기다려 완성되고, 신하는 인군을 기다려 등용된다.[蓋材待匠而成 臣待君而用]” 〈권31 주신전(周臣傳)〉
‧ “사람에 대해서 기술하지만 하늘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는다[書人 不書天]” 〈권59 사천고(司天考)〉
‧ “아! 세상의 도리가 쇠퇴하고, 인간의 윤리가 파괴되어서, 친함과 소원함의 도리는 상도(常道)를 뒤집었으며, 전쟁은 혈친 사이에서 일어나고, 성씨가 서로 다른 이들이 마음이 맞아 부자가 되었다.[嗚呼 世道衰 人倫壞 而親疏之理反其常 干戈起於骨肉 異類合爲父子]” 〈권36, 의아전(義兒傳)〉
(2) 색인어:구양사(歐陽脩), 신오대사(新五代史), 오대사기(五代史記), 오대사찬오(五代史纂誤), 정통(正統), 당감(唐鑑), 통감강목(通鑑綱目)
(3) 참고문헌
‧ 新五代史(中華書局)
‧ 舊五代史‧新五代史 外國傳 譯註(동북아역사재단)
‧ 新舊五代史編纂異同之批敎(姜海軍 史學史硏究)
‧ 新五代史硏究(張明華, 中國社會科學出版社)
‧ 新五代史徐無黨注述評(張承宗‧方南波, 文獻)
‧ 新五代史宋元本溯源(唐雯, 文史)
‧ 〈歐陽脩 ≪新五代史≫의 筆記 자료 채택 고찰〉(안예선, 중국어문논총)

【김종섭】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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