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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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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사전(高士傳)》은 서진(西晉)의 황보밀(皇甫謐)이 지은 중국 고대 필기류筆記類 인물전기집(人物傳記集) 가운데 하나로 총 91조(96명)의 고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내용은 요(堯) 시대의 피의(被衣)로부터 위말(魏末)의 초선(焦先)까지 ‘청고(淸高)’하고 ‘고일(高逸)’한 은군자(隱君子)들의 언행과 일화를 수록하고 있다.

2. 저자

(1) 성명:황보밀(皇甫謐)(215~282)
(2) 자(字)·별호(別號):아명은 정(靜), 자는 사안(士安), 자호는 현안선생(玄晏先生)이다.
(3) 출생지역:본래는 안정(安定) 조나(朝那)(현 감숙성(甘肅省) 영태현(靈台縣) 조야진(朝野鎭)) 출신이었으나 나중에 신안(新安)(현 하남성(河南省) 승지현(澠池縣))으로 이적했다.
(4) 주요활동과 생애
황보밀은 동한(東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20년(215)에 태어나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강(太康) 3년(282)에 죽었다. 동한 태위(太尉) 황보숭(皇甫嵩)의 증손이었지만 그의 세대에 이르러서는 가세가 이미 기운 상태였다. 20살 때까지도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방탕하게 생활했으나, 나중에 숙모의 충고에 감동받아 학문에 열중했다. 집안이 가난해 직접 농사를 지었는데, 밭을 갈면서도 책을 놓지 않아 마침내 여러 전적과 제자백가서에 널리 통달했다. 성품이 차분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저술에 전념했다. 나중에는 중풍에 걸려 몸이 마비되었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당시 사람들이 그를 ‘서음(書淫, 책벌레)’이라 불렀다. 위(魏)나라 때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고 상국(相國)이 등용하려 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진晉나라 때는 무제(武帝)가 여러 차례 초징(招徵)의 뜻을 밝혔으나 끝내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무제에게 책을 빌려달라는 표문(表文)을 올리자 무제가 한 수레의 책을 하사했다. 그 후 병환 중에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인 지우(摯虞)・장궤(張軌)・우종(牛綜)・석순(席純) 등은 모두 진나라의 명신이 되었다.
(5) 주요저작:평생 지은 시(詩)・부(賦)・뇌(誄)・송(頌) 등이 매우 많았는데, 본래 문집 2권이 있었으나 이미 망실되었다. 중요한 저작으로는 〈삼도부서(三都賦序)〉・〈석권론(釋勸論)〉・〈현수론(玄守論)〉・〈독종론(篤終論)〉 등의 문장과 《제왕세기(帝王世紀)》・《연력(年曆)》・《일사전(逸士傳)》・《열녀전(列女傳)》 등의 역사전기서, 《현안춘추(玄晏春秋)》・《음양역술(陰陽曆術)》・《귀곡자주(鬼谷子注)》 등의 철학서, 《침구갑을경(針灸甲乙經)》 등의 의학서가 있다.

3. 서지사항

《고사전》에서 취하고 있는 기술방법은 이른바 ‘열전체(列傳體)’로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확립된 것이다. 사마천은 대상인물의 신분・사상・행위・지역 등에 따라 분전(分傳)하거나 합전(合傳)하여 열전에 기록했는데, 이러한 기술방법은 《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로 이어지면서 정사 인물열전의 전범이 되었다. 그 후 이를 바탕으로 하여 ‘~별전(別傳)’・‘~내전(內傳)’・‘~외전(外傳)’과 같은 개별 전기가 지어졌고, 더 나아가 신선(神仙)・열녀(烈女)・기구(耆舊)・선현(先賢)・명사(名士)・열사(烈士)・일사(逸士)・고사 등을 표제로 한 동류(同類)의 인물 합전이 단독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고사전》은 바로 당시에 유행했던 이러한 열전체의 기술방법을 취했는데, 그중에서 한대(漢代)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과 《열선전(列仙傳)》의 체재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고사전》의 주요 판본은 다음과 같다.
• 황성증(黃省曾) 간본(3권) : 명明 만력(萬曆) 연간 황성증 간본이다.
• 《고금일사(古今逸史)》본(3권) : 명 오관(吳琯)이 황성증 간본을 교간한 것으로 추정한다.
• 《비서이십일종(秘書二十一種)》본(3권) : 청(淸) 강희(康熙) 무신년(戊申年)(1668) 왕사한(汪士漢) 교간본이다.
•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본(3권) : 청 건륭(乾隆) 41년(1776) 간본이다.
• 왕각(王刻) 《한위총서구십육종(漢魏叢書九十六種)》본(3권) : 청 건륭 56년(1791) 왕모(王謨) 각본으로, 남성(南城) 장사함(張斯涵)이 교감했다.
• 《고사전도상(高士傳圖像)》본(3권) : 청 함풍(咸豊) 8년(1858)에 임위장(任渭長)이 회도(繪圖)하고 채조(蔡照)가 조판하고 왕석령(王錫齡)이 교간했다.
• 숭문서국(崇文書局) 개조본(開雕本)(3권) : 청 광서(光緖) 기원(紀元)(1875)에 호북(湖北)에서 간행했다.
• 《사부비요(四部備要)》본(3권) : 《한위총서》본에 근거해 교간했다.
• 《총서집성(叢書集成)》본(3권) : 《고금일사》본을 영인했다.
• 《필기소설대관(筆記小說大觀)》본(3권) : 《한위총서》본을 영인했다.
• 《역대필기소설집성(歷代筆記小說集成)》본(3권) : 《고금일사》본을 영인했다.

4. 내용

‘고사(高士)’는 품행이 고상한 선비 또는 재야의 은군자(隱君子)를 뜻하는 말로 ‘은사(隱士)’와 같은 의미로 쓰이며, 처사(處士)・일사(逸士)・유인(幽人)・고인(高人)・처인(處人)・일민(逸民)・유민(遺民)・은자(隱者)・은군자 등으로도 불린다. 이러한 고사층의 형성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주된 요인을 찾아본다면 사회적으로는 춘추전국, 서한 말, 동한 말, 위진 교체 시기 등 혼란한 시대 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처세 방법적 모색을 들 수 있겠고, 사상적으로는 난세에 풍미했던 도가의 피세은일(避世隱逸) 사상을 들 수 있다.
상중하 3권 91조에 총 96명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고, 각 조마다 4언 8구로 된 찬(贊)이 달려 있으며, 권상의 제요(帝堯) 시대 〈피의〉부터 권하의 위말(魏末) 〈초선〉까지 시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권상(卷上)에는 총 28조 29명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피의(被衣)〉・〈왕예(王倪)〉・〈설결(齧缺)〉・〈소부(巢父)〉・〈허유(許由)〉(이상 요시대인(堯時代人) 5명), 〈선권(善卷)〉・〈자주지부(子州支父)〉・〈양부(壤父)〉・〈석호지농(石戶之農)〉・〈포의자(蒲衣子)〉(이상 순시대인(舜時代人) 5명), 〈피구공(披裘公)〉・〈강상장인(江上丈人)〉・〈소신직(小臣稷)〉・〈현고(弦高)〉・〈상용(商容)〉・〈노자이이(老子李耳)〉・〈경상초(庚桑楚)〉・〈노래자(老萊子)〉・〈임류(林類)〉・〈영계기(榮啓期)〉・〈하궤(荷蕢)〉・〈장저걸닉(長沮桀溺)〉・〈석문수(石門守)〉・〈하조장인(荷篠丈人)〉・〈육통(陸通)〉・〈증참(曾參)〉・〈안회(顔回)〉・〈원헌(原憲)〉이다.
권중(卷中)에는 총 35조 39명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한음장인(漢陰丈人)〉・〈호구자림(壺丘子林)〉・〈노상씨(老商氏)〉・〈열어구(列禦寇)〉(이상 춘추시대인 23명), 〈장주(莊周)〉・〈단간목(段干木)〉・〈동곽순자(東郭順子)〉・〈공의잠(公儀潛)〉・〈왕두(王斗)〉・〈안촉(顔斶)〉・〈검루선생(黔婁先生)〉・〈진중자(陳仲子)〉・〈어부(漁父)〉(이상 전국시대인 9명), 〈안기생(安期生)〉(이상 진대인(秦代人) 1명), 〈하상장인(河上丈人)〉・〈악신공(樂臣公)〉・〈개공(蓋公)〉・〈사호(四皓)〉・〈황석공(黃石公)〉・〈노이징사(魯二徵士)〉・〈전하(田何)〉・〈왕생(王生)〉・〈지준(摯峻)〉・〈한복(韓福)〉・〈성공(成公)〉・〈안구망지(安丘望之)〉・〈송승지(宋勝之)〉・〈장중울(張仲蔚)〉・〈엄준(嚴遵)〉・〈팽성노인(彭城老人)〉・〈한순(韓順)〉・〈정박(鄭樸)〉・〈이홍(李弘)〉(이상 서한대인(西漢代人) 23명), 〈상장(向長)〉・〈민공(閔貢)〉이다.
권하(卷下)에는 총 28조 28명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왕패(王霸)〉・〈엄광(嚴光)〉・〈우뢰(牛牢)〉・〈동해은자(東海隱者)〉・〈양홍(梁鴻)〉・〈고회(高恢)〉・〈대동(臺佟)〉・〈한강(韓康)〉・〈구흔(丘訢)〉・〈교신(矯愼)〉・〈임당(任棠)〉・〈지순(摯恂)〉・〈법진(法眞)〉・〈한빈노인(漢濱老父)〉・〈서치(徐穉)〉・〈하복(夏馥)〉・〈곽태(郭太)〉・〈신도반(申屠蟠)〉・〈원굉(袁閎)〉・〈강굉(姜肱)〉・〈관녕(管寧)〉・〈정현(鄭玄)〉・〈임안(任安)〉・〈방공(龐公)〉・〈강기(姜岐)〉・〈순정(荀靖)〉(이상 동한대인(東漢代人) 28명), 〈호소(胡昭)〉・〈초선(焦先)〉(이상 위대인(魏代人) 2명)이다.
《고사전》에 수록된 고사 가운데 황보밀 자신이 창작한 것은 39조이고, 나머지 52조는 전대의 여러 전적에서 그대로 채록하거나 몇 군데에서 채록해 조합하거나 또는 일부는 채록하고 일부는 개작하는 등의 방법으로 기술되어 있다. 채록한 전적을 살펴보면 《장자(莊子)》에서 16조를 채록하여 가장 많고, 다음으로 《사기(史記)》에서 8조, 《한서(漢書)》에서 6조, 《논어(論語)》와 《열자(列子)》에서 각 5조, 《열선전(列仙傳)》과 《열녀전(列女傳)》에서 각 3조, 《전국책(戰國策)》・《한시외전(韓詩外傳)》・《회남자(淮南子)》에서 각 2조를 채록했으며, 그밖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맹자(孟子)》・《한비자(韓非子)》・《여씨춘추(呂氏春秋)》・《초사(楚辭)》・《논형(論衡)》・《설원(說苑)》・《공총자(孔叢子)》 등에서 각 1조씩을 채록했다.

5. 가치와 영향

《고사전》은 현존하는 최초의 은일전집(隱逸專集)으로 후대 중국의 은일문학(隱逸文學)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서 명대 황보효(皇甫涍)가 편찬한 《속고사전(續高士傳)》(《일민전(逸民傳)》이라고도 함)은 진대(晉代)부터 송대(宋代)까지의 일사(逸士) 100명의 전기를 수록한 것으로 비교적 유명하다. 그 밖에 청대 고조(高兆)의 《속고사전》은 진대부터 명대까지의 고사 143명의 전기를 수록해 놓았다. 또한 《고사전》은 《후한서(後漢書)》 〈일민열전(逸民列傳)〉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대부분의 후대 정사(正史)에서 〈은일전(隱逸傳)〉을 따로 입전(入傳)하는 기풍을 조성했다.
《고사전》은 후대 시문의 창작에 많은 제재와 전고를 제공해 주었다. 위진남북조의 좌사(左思)・도연명(陶淵明)・사영운(謝靈運)과 같은 시인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고사전》의 고사를 전고로 즐겨 사용했다. 특히 허유(許由)와 소부(巢父)의 고사는 황보밀의 손을 거쳐 완정(完整)한 고사로 성립되어 후대에 널리 유전되었는데, 왕적(王積)・진자앙(陳子昂)・왕유(王維)・이백(李白)・두보(杜甫) 등과 같은 당대(唐代)의 저명한 시인들이 모두 그들의 작품에서 《고사전》의 허유・소부 고사를 전고로 원용(援用)한 바 있다.
《고사전》은 후대 여러 전적의 인용 집록(輯錄) 자료로 널리 활용되었다. 《고사전》의 고사는 《세설신어(世說新語)》주・《삼국지(三國志)》주・《후한서(後漢書)》주와 같은 주석서류, 《예문유취(藝文類聚)》・《태평어람(太平御覽)》・《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과 같은 유서류(類書類) 등에 계속 인용 집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바로 중국문학에 있어서 《고사전》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황보밀의 《고사전》이 언제 국내에 전래되었는지 그 정확한 시기는 규명하기 어렵지만, 고려(高麗) 선종(宣宗) 때인 1090년 즈음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사전》은 국내에 전래된 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은일을 지향하던 많은 문인학사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조선시대 허균(許筠)의 《한정록(閒情錄)》을 들 수 있는데, 《한정록》에는 《고사전》의 고사 수십여 조가 채록되어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내 즐거움은 아주 많소. 하늘이 지어내신 만물 중에서 오직 사람이 귀한 존재인데 나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오. 남녀 간의 구별 중에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여 자고로 남자가 귀한 존재인데 나는 남자가 되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오. 사람으로 태어나 해와 달도 보지 못하고 강보에 싸인 처지를 면하지도 못한 채 죽는 자가 있는데 나는 이미 90년을 살았으니,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오. 가난이란 선비들에게 일상적인 일이고 죽음이란 사람의 종말인데, 일상에 거하면서 종말을 기다리니 어찌 즐겁지 않겠소?[吾樂甚多 天生萬物 唯人爲貴 吾得爲人矣 是一樂也 男女之別 男尊女卑 故以男爲貴 吾旣得爲男矣 是二樂也 人生有不見日月 不免襁褓者 吾旣已行年九十矣 是三樂也 貧者士之常也 死者民之終也 居常以待終 何不樂也]” 〈권상(卷上) 영계기(榮啟期)〉
• “내가 듣건대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도를 배우고서도 배운 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을 병이라 하더군요. 그러니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이 아니지요. 세간의 명성을 바라서 행동하고 파당을 만들어 사귀며,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공부하고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가르치며, 인의를 더럽히면서 거마나 장식하는 짓은 내가 차마 할 수 없지요.[憲聞之 無財謂之貧 學道而不能行謂之病 若憲貧也 非病也 夫希世而行 比周而友 學以爲人 敎以爲己 仁義之慝 輿馬之飾 憲不忍爲也]” 〈권상 원헌(原憲)〉
•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 고기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편안히 걸으면 수레를 타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죄가 없으면 귀한 것과 마찬가지이니, 맑고 깨끗하고 곧고 바른 마음으로 스스로 즐거워합니다.[晩食以當肉 安步以當車 無罪以當貴 淸淨貞正以自虞]” 〈권중(卷中) 안촉(顔斶)〉
(2) 색인어:고사전(高士傳), 황보밀(皇甫謐), 서진(西晉), 은일(隱逸), 필기(筆記)
(3) 참고문헌
• 《고사전》(김장환 역, 예문서원)
• 〈皇甫謐《高士傳》初探〉(魏明安, 蘭州大學報)
• 〈析論皇甫謐之高士傳〉(蔡信發, 國立中央大學文學院院刊)
• 〈皇甫謐と高士伝󰠏隱逸者の生涯〉(丹羽兌子, 名古屋大學文學部硏究論集)
• 〈隱士皇甫謐論〉(石川忠久, 漢魏文化)

【김장환】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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