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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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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학집(初學集)》은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학자이자 문인인 전겸익(錢謙益(1582~1664))의 시문집이다. 모두 110권으로 되어 있으며 그 중 시가 20권, 산문이 80권이다. 《태조실록변증(太祖實錄辯證)》 5권과 《독두소전(讀杜小箋)》 3권 및 《독두전(讀杜箋)》 2권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점은 일반 문집의 체례와 다른 점이다. 청나라 성립 이전에 쓴 시문을 모은 것으로, 그 내용 중에 동북쪽 변방의 전란에 대한 우려라든가 환관과 권간權奸에 대한 통한의 심정을 표현하고 적장(敵將)에 항거한 충성스러운 인물을 찬양한 것이 많다.

2. 저자

(1) 성명:전겸익(錢謙益(1582~1664))
(2) 자(字)・별호(別號):전겸익의 자는 수지(受之), 호는 목재(牧齋)이다. 만년의 호는 몽수(蒙叟)・동간노인(東澗老人)이다. 학자들은 우산선생(虞山先生)이라 칭했다. 오위업(吳偉業), 공정자(龔鼎孶)와 더불어 강좌삼대가(江左三大家)로 일컬어진다.
(3) 출생지역:소주(蘇州) 상숙현(常熟縣(현 중국 강소성(江蘇省) 상숙시(常熟市)))
(4) 주요활동과 생애
명(明) 만력(萬曆) 26년(1598) 17세에 부학(府學)의 생원(生員)이 되었고, 만력 38년(1610) 2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에 임명되었으며, 천계(天啓) 연간에 《신종실록(神宗實錄)》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다. 숭정(崇禎) 연간에 관직이 이부시랑(吏部侍郎) 겸 한림원시독학사(翰林院侍讀學士)에 이르렀다. 명이 멸망한 1644년, 남명(南明) 정부에서 태자태보(太子太保) 겸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고, 1646년 청(淸)에 의해 남경(南京)이 함락되자 투항하여 5개월간 내비서원학사(內祕書院學士) 겸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 명사부총재(明史副總裁)의 자리에 있었다. 곧 사직한 후 귀향하였고 이후 구식사(瞿式耜) 등과 연계하여 반청복명(反淸復明)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다.
출옥한 뒤로는 강운루(絳雲樓)에서 저술활동을 하고 동림서원(東林書院)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데 주력했다. 59세에 여성 시인 유여시(柳如是)를 아내로 맞아 함께 작품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시인이자 비평가, 역사가, 편찬자로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으나 명청교체기에 한결같지 않은 처신을 보인 바 그에 대한 평가에는 논란이 분분하다. 전겸익의 사후에 청 정부는 그의 저술을 금서(禁書)로 지정했고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이전 왕조의 실절(失節)한 신하로서 비루하게 여겼다. 이와 같은 평가는 대체로 20세기 초까지 상당한 영향을 끼쳐, 동아시아의 학자들이 그의 업적에 균형 있게 접근하는 데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5) 주요저작:문집으로 《유학집(有學集)》과 《투필집(投筆集)》, 《고해집(苦海集)》이, 편저로 《열조시집(列朝詩集)》이 있으며, 장서(藏書) 목록집인 《강운루서목(絳雲樓書目)》도 유명하다.

3. 서지사항

《초학집》은 전겸익의 편정 및 검토를 거쳐 그의 문인 구식사(瞿式耜(1590~1650))가 숭정(崇禎) 16년(1643) 계미년에 판각하였다. 추후 전증(錢曾(1629~1701))이 문집 중 시 20권에 대해 전주(箋注)를 달아 편찬한 옥조당(玉詔堂) 각본(刻本)의 《초학집전주(初學集箋注)》가 있는데, 구식사가 간행한 원본과는 자구(字句) 등의 출입이 있다. 《초학집》은 건륭(乾隆) 연간에 금서가 되었으며 청나라 말 선통(宣統) 2년(1910)에 구식사 간행본과 옥조당 각본을 상호 대조하여 수한재(邃漢齋)에서 활자본으로 간행했다. 1920년대에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영인하여 《사부총간(四部叢刊)》에 들어가게 되었다.

4. 내용

권1에서 권20까지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권1~2는 환조시집(還朝詩集)으로 1620년부터 1624년까지 쓴 작품을 수록했다. 첫머리에 실린 시는 〈구월초이일봉신종현황제유조어경구성복곡림공부만사사수(九月初二日奉神宗顯皇帝遺詔於京口成服哭臨恭賦挽詞四首)〉이다. 권3~4는 귀전시집歸田詩集으로 1625년부터 1627년까지의 작품이 실려 있다. 권5~10은 숭정시집(崇禎詩集)으로 〈숭정원년원일입춘(崇禎元年元日立春)〉 이하 1628년부터 1636년까지 쓴 작품을 수록했다. 권11은 상림시집(桑林詩集)으로 1637년 3월부터 윤4월까지 쓴 시가 실려 있다. 권12 임우시집(霖雨詩集)에는 1637년 5월부터 1년간 쓴 작품이, 권13~14 시첩시집(試帖詩集)에는 1638년 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쓴 작품이 실려 있다. 권15~16은 병사시집(丙舍詩集)으로 1639년 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쓴 작품을 수록했고, 권17 이거시집(移居詩集)에는 1640년 3월부터 10월까지의 작품이 실려 있다. 권18~20의 동산시집(東山詩集)에는 1640년 10월부터 1643년까지 쓴 작품을 수록했다.
권21부터 권100까지는 산문이 실려 있다. 권21~27은 잡문(雜文)으로, 〈춘추론(春秋論)〉, 〈향언(嚮言)〉, 〈서영국공사실(書瀛國公事實)〉 등이 수록되었다. 권28~권33에는 〈황명개국공신사략서(皇明開國功臣事略序)〉, 〈중각방정학문집서(重刻方正學文集序)〉, 〈정씨청언서(鄭氏清言敘)〉, 〈탕의잉선생문집서(湯義仍先生文集序)〉 등 제가(諸家)의 문집과 서적 서문(序文)이 실려 있다. 권34~39에는 〈송구기전령영풍서(送瞿起田令永豐序)〉, 〈수복청공육십서(壽福清公六十序)〉, 〈방태부인정씨팔십서(方太夫人鄭氏八十序)〉 등 송서(送序)와 수서(壽序)가 실려 있고, 권40에는 〈작비암일찬삼집서(昨非庵日纂三集序)〉 등 서적의 서문이 실려 있다. 권41~46은 〈고양손씨합문충효기(高陽孫氏闔門忠孝記)〉, 〈중수소심당기(重修素心堂記)〉, 〈우경당기(耦耕堂記)〉, 〈유황산기(游黃山記)〉 등 기문(記文)을 수록하고 있다.
권47~49에는 〈호광제형안찰사첨사진계조열대부관공행장(湖廣提刑按察司僉事晉階朝列大夫管公行狀)〉 등 행장(行狀)이 실려 있다. 권50~61에는 〈병부우시랑손공묘지명(兵部右侍郎孫公墓志銘)〉, 〈이장형묘지명(李長蘅墓志銘)〉, 〈서원회묘지명(徐元晦墓志銘)〉, 〈진유인장씨묘지명(陳孺人張氏墓志銘)〉, 〈수재손함처왕씨묘지명(秀才孫鋡妻王氏墓誌銘)〉 등 묘지명(墓誌銘)을 수록했다. 권62~65에는 〈자정대부병부상서증태자소보신공신도비명(資政大夫兵部尚書贈太子少保申公神道碑銘)〉 등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실려 있고, 권66~67에는 〈남해황부인묘표(南海黃夫人墓表)〉 등 묘표(墓表)를 수록했다. 권68~69에는 〈감산대사여산오유봉탑명(憨山大師廬山五乳峰塔銘)〉, 〈화산설랑대사탑명(華山雪浪大師塔銘)〉 등 승려의 탑명(塔銘)이 실려 있다. 권70~73은 전(傳)으로 〈서하객전(徐霞客傳)〉, 〈자염장군전(紫髥將軍傳)〉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74~76 보첩(譜牒)에는 〈고숙부산동안찰사부사춘지부군행장(故叔父山東按察司副使春池府君行狀)〉, 〈문림랑호광도감찰어사전부군묘표(文林郎湖廣道監察御史錢府君墓表)〉 등이 실려 있다. 권77에는 〈제우충숙공문(祭于忠肅公文)〉 등 제문(祭文)이, 권78에는 〈반첨사애사(潘僉事哀辭)〉 등 애사(哀辭)가 수록되었다. 권79에는 〈하복청상공계(賀福清相公啓)〉 등 계(啓)가, 권80에는 〈복양선상공서(復陽羨相公書)〉 등 서(書)가, 권81에는 〈오대산모조존봉흠사장경보탑소(五臺山募造尊奉欽賜藏經寶塔疏)〉 등 소(疏)가 실려 있다.
권82는 찬(贊)으로 〈감산대사진찬(憨山大師眞贊)〉 등이 수록되었다. 권83~86에는 〈제회록당시초(題懷麓堂詩鈔)〉, 〈발송판좌전(跋宋版左傳)〉, 〈서동도사략후(書東都事略後)〉, 〈기청명상하도권記清明上河圖卷〉, 〈발동현재소릉시권(跋董玄宰書少陵詩卷)〉 등 제발문(題跋文)이 실려 있다. 권87은 소(疏)로 〈몽은소설공신사사미곤소(蒙恩昭雪恭伸辭謝微悃疏)〉 등이 수록되었다. 권88~90은 제과(制科)로 〈만력삼십팔년회시묵권(萬曆三十八年會試墨卷)〉, 〈천계원년절강향시정록(天啓元年浙江鄉試程錄)〉 등이 실려 있다. 권91~100의 외제(外制)로는 〈황후책문(皇后冊文)〉, 〈태복시삼십오도(太僕寺三十五道)〉, 〈공과급사중위대중수징사랑(工科給事中魏大中授徵仕郎)〉 등이 실려 있다.
권101~105에는 《태종실록변증(太祖實錄辨證)》이, 권 106~108에는 《독두소전(讀杜小箋)》이, 권109~110에는 《독두전(讀杜箋)》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5. 가치와 영향

청 건륭제(乾隆帝)는 《초학집》을 읽은 후 쓴 시에서 “평생 절의를 말하더니, 두 성씨의 군왕을 섬겼네. 진퇴에 도무지 근거가 없으니, 문장에 어찌 빛이 나리오?[平生談節義 兩姓事君王 進退都無據 文章那有光]”라고 평가했다 한다. 《초학집》에 표현된 충절과 작가의 삶이 부합하지 않음을 비웃은 것이다. 이후 《초학집》은 금서가 되어 훼손되기에 이르렀으나, 동아시아의 한문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전겸익은 ‘학문’이 있으면 ‘성정’은 자연히 수렴된다는 주장을 하였고, 이지(理智)를 중시하는 그의 시는 청대 종송파(宗宋派)의 기점이 된다. 그런 만큼 명시(明詩)와 청시(淸詩)의 전변(轉變) 과정에서 전겸익의 시풍은 전환점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전겸익의 저술을 심도 있게 열독한 조선의 지식인 유만주(兪晩柱)(1755~1788)는 그에 대해 “목재(牧齋) 전겸익의 문장은 청나라 문장의 조종(祖宗)이 된다. 청나라 사람의 문장은 목재에게 근본을 두지 않은 것이 없다. 대가라고 내세우며 자고자대(自高自大)하는 자들도 모두 목재의 후예다. 그러므로 그 문장이 대저 도리를 설파하는 데 능하여 넉넉히 의취가 있고, 고적(古籍)에 대해 논정할 때에는 정밀하고 박식하며 허탄하지 않다. 명나라 3백 년의 문체는 대개 목재의 것과 상반된다. 그런즉 목재의 문장이 어찌 명나라의 문장이겠는가? 명나라의 문장도 아니고 고문(古文)도 아니면서 청나라의 문풍을 열었으니 사해(四海)가 한 가지 투식으로 인도되어 그를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牧齋之文 淸文之祖宗也 淸人之文 無一不本於牧齋 其標爲大家 高自矜莊者 都是牧齋之支裔 故其文 大抵長於開說道理 紆餘有致 論訂古籍 精博不誕 明三百年文體 蓋皆與牧齋一反 則牧齋之文 豈明文哉 非明非古 恰開淸人 導四海於一套 所靡然而趨之]”라고 하여 청의 문장에 끼친 영향을 강조하는 평가를 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누우면 살 썩는 냄새 풍겨 오는데 臥熏腐胔臭
목마르면 송장 썩은 물을 마신다 渴飮伏屍漿
밤마다 바늘구멍에 들어가고 夜夜入針孔
아침마다 칼끝에 앉는다 朝朝坐劍鋩
《초학집(初學集)》 권12 〈송하사룡남귀겸간노자방일백십운(送何士龍南歸兼簡盧紫房一百十韻)〉
• “후세의 군자로 역사의 일에 뜻을 둔 자는 믿을 만한 일을 믿을 만하다고 전하고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럽다고 전해야 한다. 기이한 일을 좋아하여 섞어 넣음으로써 만대의 신뢰할 만한 역사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後之君子 有志於史事者 信以傳信 疑以傳疑 無好奇攛異而遺誤萬世之信史 則可也]” 《초학집》 권22 〈서치신록고후(書致身錄考後)〉
• “옛사람은 책을 읽으며 초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들은 한줌의 재주도 없으면서 게으르게 마음을 소모하는 것이 풀무치가 곡식 잎을 갉아먹듯 양식만 축내는 것과 같다. 옛사람의 책을 읽으며 1권도 채 다 읽지 못하고 하품을 하며 졸려 하는 것이다.[古人讀書多手鈔……吾輩無升合之才 慵墮玩心曷空蝗梁黍 讀古人書 未終卷 欠申思睡]” 《초학집》 〈권85 발파서도연명집(跋坡書陶淵明集)〉
(2) 색인어:전겸익(錢謙益), 유학집(有學集), 초학집(初學集), 명청교체기, 강좌삼대가(江左三大家)
(3) 참고문헌
• 中國詩史(송용준,명문당, 2017)
• 錢謙益의 反前後七子論考(강정만,《중국문학연구》 9, 1991)
• 錢謙益의 詩 本質論考(강정만,《중국문학연구》 10, 1992)
• 錢謙益의 主情詩論과 創作實際考(강정만, 《중국문학연구》 11, 1993)
• 兪晩柱의 錢謙益 수용: 조선후기 지식인이 명청 교체기 문학을 읽는다는 것(김하라, 《한국문화》 65, 2014)
• 朝鮮後期文人들의 錢謙益批評(윤지훈, 《대동문화연구》 69, 2010)
• 兪晩柱의 〈錢牧齋年譜〉 연구(김하라, 《한국한문학연구》 57, 2015)

【김하라】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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