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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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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후한(後漢) 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저술한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서로 전 120권이다. 《전한서(前漢書)》 또는 《서한서(西漢書)》라고도 부른다. 《사기(史記)》와 함께 중국 사학사(史學史)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처음 반고의 아버지 반표(班彪)는 《사기》가 무제(武帝) 태초(太初) 연간(B,C. 104~B.C. 101)까지만 서술되었고, 유향(劉向)·풍상(馮商) 등이 보충하였지만 부족하다고 느껴서, 《사기후전(史記後傳)》 65편을 쓰게 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반고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수사(修史)의 일을 시작하였으나, 사사로이 국사를 개작한다고 고발을 당해 한때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고의 원고를 본 명제(明帝)는 그를 칭찬하고 《한서(漢書)》의 저작을 명하였다. 그리하여 장제(章帝) 건초(建初) 연간(76~83)에 일단 완성을 보았으나 〈팔표(八表)〉와 〈천문지(天文志)〉가 미완성인 채 그가 죽자, 누이동생 반소(班昭)가 화제(和帝)의 명으로 계승하였고, 다시 마속(馬續)의 보완(補完)으로 완성되었다.

2. 저자

(1)성명:반고(班固)(32~92)
(2)자(字)·별호(別號):자는 맹견(孟堅)
(3)출생지역:부풍(扶風) 안릉(安陵)(현 섬서성 함양)
(4)주요활동과 생애
반고는 호족이요 외척이자 관료로, 가학의 전통이 있는 가정 출신이었다. 그는 한(漢) 무제 때의 월기교위(越騎校尉)를 지낸 반황(班况)의 증손자이다. 그의 부친 반표가 사망하자, 곧 《사기후전》의 정리에 착수하여 부친의 업적을 이루자 하였으나, “사사롭게 국사를 개작한다.”고 고발당해 투옥당하고 집안의 원고도 빼앗겼다. 그러나 원고를 본 명제의 눈에 들어 난대령사(蘭臺令史)라는 관직까지 얻었다. 그 후 반고는 16년에 걸쳐 《한서(漢書)》를 편찬했다. 40대 중반에 그는 장군 두헌(竇憲)을 따라 흉노(匈奴) 정벌에 나서기도 했다. 두헌이 유배되자, 반고도 상관의 몰락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문초를 당했으며, 60세에 옥에 갇힌 채 죽었다.
(5)주요저작:〈양도부(兩都賦)〉, 《백호통의(白虎通義)》, 〈답빈희(答賓戲)〉, 〈유통부(幽通賦)〉 등

3. 서지사항

《한서》는 《사기》가 사마천(司馬遷) 개인의 편찬이었던 것과는 달리 일종의 칙찬사서(勅撰史書)라 할 수 있는데, 《한서》는 명제가 반고에게 집필의 완성을 명령함으로써 완성될 수 있었다. 반고의 사상과 감정이 한나라 황제와 상통하였던 것이다. 즉 《한서》는 유씨(劉氏)의 한 왕조 통치를 옹호하기 위한 것으로, 유심주의의 신학 관점이 관통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사기》의 체제를 채용하였고, 한 문제(文帝) 이전의 서술은 《사기》 원문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사마천의 사상적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반고는 사서의 편찬에는 ‘성인’의 시비를 시비로 삼아야 하고 대도를 논하려면 유교 경전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한서》는 곧 유가의 표준으로써 시비를 저울질했기 때문에, 유씨 왕조의 입장에서 역사사건과 인물을 평가했다.
그는 《사기》가 한 왕조의 건립자인 유방(劉邦)을 여러 왕 가운데 끝에 끼워 넣어, 유방의 역사적 지위를 낮췄다고 보았다. 따라서 《한서》는 유씨의 한 왕조의 이름을 사서의 명칭으로 삼았으며, 한 고조(高祖)를 〈본기(本紀)〉의 첫 장에 위치하게 하고 항우(項羽)를 〈열전(列傳)〉으로 끌어내렸다. 아울러 ‘천통(天統)’을 얻었다고 선양하였다.
또한, 《사기》와는 달리 효혜황제(孝惠皇帝)를 위한 〈본기〉를 세우고, 고조와 여후(呂后)가 집정하기 전 사이에 아주 짧은 〈혜제기(惠帝紀)〉를 삽입함으로써, 유씨의 한 왕조의 국통을 밝히고 유심주의적으로 이 기간의 정권은 여전히 유씨에게 귀속된 것이지 여치(呂稚)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했다. 또한, 왕망(王莽)에 대해서도 〈왕망본기(王莽本紀)〉를 세우지 않고 〈열전(列傳)〉 말미에 위치시켰다.
이처럼, 《한서》는 사서를 통해 왕조교체에 대한 하나의 ‘정통’ 관념을 제시한 셈이다. 하늘이 정하는 정통 관념은 이전부터 있어왔으나, 정식으로 사서의 편찬을 이끈 것은 반고부터이며, 이후 중국사학의 전통 관념이 되었다.

4. 내용

《한서》의 명칭은 반고 스스로가 붙인 것이다. 앞에 ‘전(前)’ 자를 추가한 것은 양 원제(梁元帝) 시기에 편찬된 《금루자(金樓子)》의 〈취서편(聚書篇)〉에 처음 보이는데, 대체로 《후한서》가 간행되자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한서》의 기본 자료는 무제 이전은 대부분 《사기》에서, 그 이후는 반표가 지은 《후전(後傳)》 65편을 저본으로 하였다. 이 밖에 《칠략(七略)》·《상서(尙書)》·《홍범오행전(洪範五行傳)》·《전국책(戰國策)》·《과진론(過秦論)》·《신어(新語)》와 유흠(劉歆)·왕충(王充)·양웅(楊雄) 등의 논저들을 참고로 하였다. 《한서》는 《수서(隋書)》에는 115권이라 하였고, 《통지(通志)》에는 120권이라 하여 권수에 차이가 있으나, 이는 본래 100편인 것을 안사고(顏師古)가 주할 때 권질을 나누어놓았기 때문에 20권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대체로 《한서》의 체제는 《사기》를 답습하였으나, 〈세가(世家)〉를 두지 않고 〈서(書) 〉는 〈지(志) 〉로, 〈본기〉는 〈제기(帝紀)〉로 고쳤다.
《한서》의 내용 중 권 1부터 권 12까지는 〈제기〉로, 고제(高帝)(고조)부터 평제(平帝)까지 12편 13권으로 되어 있다. 특징적인 것은 《사기》에는 〈고조본기(高祖本紀)〉 뒤에 〈여후본기(呂后本紀)〉가 있으나, 《한서》에서는 〈여후기(呂后紀)〉 앞에 〈혜제기〉를 두고 있다. 또 《사기》에서의 〈항우본기(項羽本紀)〉·〈진섭세가(陳涉世家)〉를 《한서》에서는 모두 〈열전〉에 넣었다.
권13부터 권20까지는 〈표(表) 〉로 〈이성제후왕표(異姓諸侯王表)〉·〈제후왕표(諸侯王表)〉·〈왕자후표(王子侯表)〉·〈고혜고후효문공신표(高惠高后孝文功臣表) 〉·〈경무소선원성애공신표(景武昭宣元成哀功臣表) 〉·〈외척은택후표(外戚恩澤侯表)〉·〈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고금인표(古今人表)〉로 8편 10권으로 되어 있다. 《사기》에는 본래 10편으로 되어 있으나 《한서》는 8편으로 하였다. 그중 〈외척은택후표(外戚恩澤侯表)〉와 〈고금인표(古今人表)〉는 《사기》에는 없는 것을 새로 만든 것이다.
권21부터 권30까지는 〈지(志) 〉로 율력(律曆)·예악(禮樂)·형법(刑法)·식화(食貨)·교사(郊祀)·천문(天文)·오행(五行)·지리(地理)·구혁(溝洫)·예문(藝文) 10편 18권으로 되어 있다. 〈지〉는 《사기》의 〈서〉와 같은 것으로, 《사기》의 〈예서(禮書)〉·〈악서(樂書)〉를 〈예악지(禮樂志)〉로, 〈율서(律書)〉·〈역서(曆書)〉를 〈율력지(律曆志)〉로, 〈천관서(天官書)〉를 〈천문지(天文志)〉로, 〈봉선서(封禪書)〉를 〈교사지(郊祀志)〉로, 〈하거서(河渠書)〉를 〈구혁지(溝洫志)〉로, 〈평준서(平準書)〉를 〈식화지(食貨志)〉로 고쳤다. 그리고 〈형법지(刑法志)〉·〈지리지(地理志)〉·〈예문지(藝文志)〉는 새로 추가하였다.
권31부터 권100까지는 〈열전〉으로 〈진승항적열전(陳勝項藉列傳)〉으로부터 〈서전(敍傳)〉까지 70편 79권으로 되어 있다. 〈열전〉에는 〈유림전(儒林傳)〉·〈순리전(循吏傳)〉·〈혹리전(酷吏傳)〉·〈화식전(貨殖傳)〉·〈유협전(游俠傳)〉·〈영행전(佞倖傳)〉·〈외척전(外戚傳)〉과 〈흉노전(匈奴傳)〉, 〈서남이양월조선전(西南夷兩粤朝鮮傳))〉, 〈서역전(西域傳)〉 등이 실려 있다. 《사기》의 〈세가〉가 〈열전〉으로 바뀌고 〈자객(刺客)〉·〈골계(滑稽)〉·〈일자(日者)〉·〈구책(龜策)〉의 4전이 생략된 반면 〈서역전(西域傳)〉이 추가되었다. 《한서》의 외국관계 기사는 《사기》에 비해서 훨씬 충실하다. 특히 〈흉노열전〉과 〈서역전〉은 《한서》의 가치를 높여주는 부분으로 손꼽힌다. 반면 〈조선전(朝鮮傳)〉은 사기를 거의 전재한 것으로 가치가 떨어지나 〈지리지〉와 함께 당시 낙랑군을 비롯한 한의 동방진출과정을 전하고 있어 연구자료로서 의의가 있다.
《한서》는 후한·삼국(三國)·수(隋)·당(唐)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보충하였는데, 그중 복건(服虔)·응소(應劭)·신찬(臣瓚)이 대표적이며, 당의 안사고(顏師古)는 위의 주석가들의 설을 종합하였다. 청대(淸代)에서도 전대소(錢大昭)의 《한서변의(漢書辨疑)》, 심흠한(沈欽韓)의 《한서소증(漢書疏證)》, 주수창(周壽昌)의 《한서주교보(漢書注校補)》, 왕선겸(王先謙)의 《한서보주(漢書補注)》 등이 있으며, 이 중에서 왕선겸의 《한서보주》는 안사고 이래 제일 잘된 것이다. 《한서》의 간본으로는 청(淸)나라 건륭(乾隆)의 무영전판(武英殿版) 《한서》와 왕선겸이 송(宋)나라로부터 이후 청나라 말기까지의 제학자의 주석을 수집 증보한 《한서보주》 120권이 대표적이다.

5. 가치와 영향

《한서》는 후대의 사학의 발전과 사서편찬에서 《사기》의 역사적 의의를 능가하고 있다. 사서의 편찬학으로 볼 때, 반고의 업적은 기전체의 정통화와 규범화를 완성시켰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당시 대부분의 사서가 몇 조대를 함께 서술하고 적어도 두 조대를 함께 서술하였거나 아니면 한 조대 안에서 짧은 시기를 택하거나 또는 하나의 사실(史實)을 서술하였다. 그런데 단대사의 방식으로 한 조대의 역사를 서술한 것은 반고의 《한서》가 처음이다.
그러나 유지기가 비평한 것처럼 〈오행지(五行志)〉는 크게 잘못된 것으로, 춘추(春秋) 이래 엉터리 미신에 대하여 기록했기 때문에 후세에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와 〈부서지(符瑞志)〉와 같은 좋지 못한 예를 남기게 되었다.

6. 참고사항

(1)명언
• “태초(太初)(B,C. 104~B.C. 101) 이후는 《사기(史記)》에 빠지고 기록되지 않은 탓에 이전의 기록을 찾고 소문을 모아 《한서(漢書)》를 서술하니 고조(高祖)로부터 시작하여 평제(平帝), 왕망(王莽)의 찬탈에 이르기까지 12대 230년의 일을 기록하였다.[太初以後 闕而不錄 故探篹前記 綴輯所聞 以述漢書 起于高祖 終于孝平王莽之誅 十有二世 二百三十年] 〈서전(敍傳)〉
• “흐름을 타면 그대로 가고, 험난한 곳을 만나면 멈춰 선다.[乘流則逝 遇坎則止]” 〈가의전(賈誼傳)〉
• “〈임금이〉 언로를 열고 간언을 구할 때에 얼굴색을 온화하게 하고 받아들이더라도……선비들은 오히려 두려워서 감히 다 말하지 못합니다.……더구나 위엄으로 떨게 하고 권세로 억누른다면 비록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 같은 지혜와 맹분(孟賁)과 같은 용맹이 있더라도 꺾이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開道而求諫 和顔色而受之……士猶恐懼而不敢自盡……震之以威 壓之以重 則雖有堯舜之智孟賁之勇 豈有不摧折者哉]” 〈가추매로전(賈鄒枚路傳)〉
• “서역(西域)은 무제(武帝) 때 처음으로 교류하였는데, 본래 36국이었으나 그 후 점차 나뉘어 50여 개국이 되었으며, 모두 흉노(匈奴)의 서쪽, 오손(烏孫)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西域以孝武時始通 本三十六國 其後稍分至五十餘 皆在匈奴之西烏孫之南]” 〈서역전(西域傳)〉
(1)색인어:반고(班固), 반소(班昭), 마속(馬續), 한서(漢書), 전한서(前漢書), 서한서(西漢書), 한서보주(漢書補注)
(2)참고문헌
• 漢書(班固 撰, 標點校勘本, 中華書局)
• 漢書補註(王先謙 補注, 王雲五 主編, 臺灣商務印書館)
• 漢書全譯(許嘉璐 主編, 二十四史全譯, 漢語大詞典出版社)
• 漢書辭典(倉修良 主編, 山東敎育出版社)
• 漢書人表考(梁玉繩 撰, 臺灣商務印書館)
• 漢書及補注綜合引得(洪業 等 編, 上海古籍出版社)
• 漢書 外國傳 譯註(김유철․하원수, 동북아역사재단)
• 漢書(小竹武夫 譯, ちくま文庫)
【서영수】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8.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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