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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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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사(宋史)》는 북송(北宋)과 남송(南宋) 320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의 정사(正史)이다. 원대(元代)에 황제의 명으로 탈탈(脫脫)이 도총재관(都總裁官)이 되어 편찬한 관찬사서이다. 본기(本紀) 47권, 지(志) 162권, 표(表) 32권, 열전(列傳) 255권 등 전 496권으로 구성되어 있어 중국 정사 가운데 최대의 분량이다. 북송 이래 각 황제마다 편찬한 국사나 실록(實錄), 일력(日曆) 등을 기초로 하였다. 편집 때에 삭제된 부분이 많지만 원사료(原史料)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사료적 가치는 적지 않다.

2. 저자

(1) 성명:도총재관 탈탈(脫脫)(1314~1355), 총재관 구양현(歐陽玄)(1274~1358). 순제(順帝) 지정(至正) 3년(1343) 정사를 편찬하기 위한 사국(史局)이 설치되었고, 승상 탈탈이 도총재관(都總裁官) 겸감수국사(兼監修國史)를 맡고, 철목아탑식(鐵木兒塔識), 하유일(賀惟一), 장기암(張起岩), 구양현(歐陽玄), 이호문(李好文), 왕기(王沂), 양종서(楊宗瑞) 등 7명이 총재관(總裁官)이 되어 진행되었다. 《송사》는 이외 사관 23명을 더하여 30명의 집단창작물이다. 가장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도총재관 탈탈과 총재관 구양현이다.
(2) 자(字)·별호(別號):몽골어로 톡토 테무르이며, 탁극탁(托克托), 탈탈첩목아(脫脫帖木兒)라고도 하며 성은 멸리걸씨(蔑里乞氏)이고, 자는 대용(大用). 구양현의 자는 원공(元功), 호는 규재(圭斋).
(3) 출생지역:톡토는 몽고인, 구양현은 호남(湖南) 유양(瀏陽)(현 중국 호남성).
(4) 주요활동과 생애
탈탈은 어릴 때 백부(伯父) 백안(伯顔)에게 길러졌다. 처음에 황태자겁설관(皇太子怯薛官)이 되었다 순제(順帝) 지원(至元) 원년(1335) 백안이 권신 당기세(唐其勢)를 숙청할 때 공을 세웠다. 지원 4년(1338)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올랐다. 지원 6년(1340) 백안을 축출하고 지정(至正) 원년(1341) 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에 올라 백안의 옛 정치를 모두 개혁하고 과거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를 회복했다. 지정(至正) 3년(1343) 도총재관(都總裁官)이 되어 송·요·금의 역사를 편수하는 일을 주관했다. 그 후 지정 4년(1344)에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지정 9년(1349)에 다시 재상이 되었다. 지정 12년(1352), 군대를 이끌고 서주(徐州)의 홍건군(紅巾軍)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탄핵을 받아 운남(雲南)으로 유배를 갔고, 순제의 조서(詔書)를 받고 자살하였다.
다만 편수 도중 승상직에서 물러난 다음 중서우승상 아로도(阿魯圖)가 도총재관이 되어 송·요·금 삼사(三史)의 찬수를 주관하였다. 다만 그는 한자를 몰라서 실제 편찬 작업에 참여하지는 않고 재정, 관리, 사료 제공 등에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구양현은 원대 사학가(史學家)이자, 문학가, 관리로 활동했다. 어릴 때부터 문명(文名)을 떨쳤고, 원 인종(元仁宗) 연우(延祐) 2년(1315) 진사(進士)가 되고, 평강주동지(平江州同知)에 올랐다. 이후 무호(蕪湖)와 무강(武岡)의 현윤(縣尹)을 지냈는데,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엄정하게 법을 집행을 했으며 농업발전에 기여했다. 무호(蕪湖) 일대는 명승고적이 많아서 그가 많은 시를 지었다.
입조하여 국자박사(國子博士)와 감승(監丞)을 역임했다. 순제 지정 연간(1342~1367)에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가 되어 송·요·금 삼사(三史)의 역사를 총재관으로서 편찬했다. 그는 총재관 중에서도 원고를 최종적으로 감수하였으며 논찬(論贊)과 표주(表奏)도 거의 대부분 작성하였다. 삼사를 완성한 뒤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가 되었다. 40여 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종묘와 조정의 문책(文冊)과 제고(制誥)가 대개 그의 손에서 나왔다. 전국의 명산대천(名山大川)과 사찰도관(寺刹道觀), 왕공귀인(王公貴人)들의 묘비(墓碑) 역시 그의 손을 빌린 다음에야 빛을 발했다고 한다.
(5) 주요저작:구양현의 저작은 《태평경국(太平經國)》, 《지정조격(至正條格)》, 《경고대전(經考大典)》, 《찬수통의(纂修通議)》, 《원률(元律)》 등 저작이 1120권, 《지재문집(圭齋文集)》 15권, 《원시선(元詩選)》 《전금원사(全金元詞)》 등.

3. 서지사항

전체적인 구성은 본기 47권, 지(志) 162권, 표 32권, 열전 255권으로 모두 496권에 달해 역대의 정사 가운데 최대의 분량이다.
본기(本紀)(47권, 16제(帝) 2왕(王))는 북송의 태조(太祖) 태종(太宗) 진종(眞宗) 인종(仁宗) 영종(英宗) 신종(神宗) 철종(哲宗) 휘종(徽宗) 흠종(欽宗)과 남송의 고종(高宗) 효종(孝宗) 광종(光宗) 영종(寧宗) 이종(理宗) 도종(度宗) 영국공(瀛國公)이며, 단종(端宗)과 제병(帝昺)은 본기에서 제외했다. 또한 《신당서(新唐書)》의 예에 따라 기본적으로 조령(詔令)을 수록하지 않았다.
지(志)(162권 15류(類))는 천문(天文) 오행(五行) 율력(律曆) 지리(地理) 하거(河渠) 예(禮) 악(樂) 의위(儀衛) 여복(輿服) 선거(選擧) 직관(職官) 식화(食貨) 병(兵) 형법(刑法) 예문(藝文)으로 구성하였다. 지는 책 전체 내용의 3분 1을 점하고 있는데, 그 기술 내용이 매우 상세하여 송대 사회와 경제, 제도, 문화 등의 다양한 발전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리·식화·직관·병지는 더욱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표(表)(32권 2류)는 재보(宰輔), 종실세계(宗室世系)로 구성되어 있으며, 재보표(宰輔表)는 재상을 기록했는데, 집정(執政)·임면(任免) 사실이 비교적 명백하다.
열전(列傳)(255권 12류)은 2,800여 명을 수록했는데, 그 가운데 도학(道學)은 처음으로 세운 항목이다. 십국(十國)에서 송나라에 항복한 인물은 세가(世家)에 올렸다.

4. 내용

원 세조 쿠빌라이는 남송 정복 후인 지원 16년(1279), 사신(史臣)에게 송·요·금 시대의 역사서 편찬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송사의 편찬 작업은 의례(義例), 즉 사서의 체제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정통론 문제로 지체되었다. 《송사》와 《요사》, 《금사》의 편찬 방식이 확정되어 구체적인 작업이 시작된 것은, 64년이 지난 순제(順帝) 지정(至正) 3년(1343)의 일이었다. 원 조정은 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 탈탈(脫脫)을 도총재관(都總裁官)으로 삼아 편찬 작업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탈탈은 당시까지 지속되던 의례의 논쟁을 중단시키고, 독단적으로 “송·요·금 삼국에 모두 정통성을 부여하고 각각의 연호를 사용한다.[三國各與正統 各繫其年號]”는 원칙을 확정하였다. 결국, 지정 3년(1343) 2월부터 요‧송‧금 삼국 정사의 편찬사업이 시작되었다. 그해 3월에는 당대(唐代) 이래로 확립된 ‘설관수사(設館修史)’의 전통을 계승하여 정사를 편찬하기 위한 사국(史局)이 설치되었고, 탈탈이 도총재관(都總裁官) 겸감수국사(兼監修國史)를 맡고, 구양현(歐陽玄) 등 7명이 총재관(總裁官)이 되어 진행되었다. 총재관 중에서도 작업 과정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구양현이었다. 송·요·금 삼국 정사의 편찬사업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지정 4년(1344) 3월에 《요사》 116권이 완성되었고, 11월에는 《금사》 135권이, 지정 5년(1345) 10월에는 《송사》 496권이 차례로 완성되었다.
《송사》는 북송과 남송 320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의 정사이다. 구체적으로는 960년 태조 조광윤의 건국으로부터 1127년 이른바 정강(靖康)의 변으로 북송이 멸망할 때까지 168년에 걸친 북송과, 1127년 고종의 즉위로부터 1279년 최후의 황제인 상흥제(祥興帝)가 광동 애산(崖山)의 앞바다에서 투신함으로써 송조가 최종적으로 멸망하기까지 153년에 걸친 남송의 역사를 담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위에 서술한 바와 같다.
《송사》의 편찬 작업에 소요된 시간은 2년 7개월에 불과하였다. 총 496권으로서 역대 정사 가운데 최대 분량을 자랑하는 사서가 단기간에, 어떤 면에서는 졸속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는 336권의 《명사》가 67년에 걸쳐 세심하게 가다듬어진 연후에 출간된 것과 전적으로 대조된다. 그런데 《송사》의 편찬 작업이 신속하게 종결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관련 자료가 잘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송대에는 기록의 분량이 대폭 늘어나고, 그 관리도 체계화되어 다양한 성격의 사서(史書)가 편찬되었다. 당대에 정비된 기거주(起居注), 시정기(時政記), 실록(實錄), 회요(會要) 등의 제도에 더하여 일력(日曆), 국사(國史) 등의 편찬 제도가 단계별로 완성되었다. 이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사찬 역사서도 저술되었다. 이도(李燾)의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 이심전(李心傳)의 《건염이래계년요록(建炎以來繫年要錄)》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자료들이 남송의 멸망 이후 원조에 고스란히 전해져, 《송사》 편찬의 기초 자료로 이용되었다. 송대에 저술된 여러 서적 중에서도 《송사》 편찬에 있어 가장 기초가 된 것은 국사였다. 《송사》에서는 국사를 구사(舊史)라 지칭하고 있다. 《송사》의 편찬은 국사에 근거하여 그것을 개작한 저작이란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대의 사평가들은 《송사》가 국사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완성된 산물이라고까지 지적하기도 하였다.
《송사》는 너무 단기간에 편찬되었던 때문에, 저작의 완성도란 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국사나 실록의 문장을 초록하며 전후의 문맥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사료에 대한 고증과 사실 관계의 확인도 대단히 미흡하다. 전체 내용에 중복된 부분이 지나치게 많으며 전후의 기술 사이에 혼란과 모순도 적지 않다. 심지어 한 인물에 대해 두 개의 전(傳)을 설정하고 있는 사례도 있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송사》는 역대 최악의 정사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면치 못하였다.
하지만 비교적 풍부한 사료를 간직하고 있으며, 송대의 정치·경제·군사·문화 등 각 방면의 새로운 특징이 균등하게 반영되었다. 또한 당시 많은 인물들의 사적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송대를 연구하는데 있어 기본사료의 역할을 하고 있다.

5. 가치와 영향

《송사》의 주요 사료는 송대의 국사(國史), 실록(實錄), 일력(日曆) 등 송조 사관의 일차적 기술인데 이러한 사적들이 오늘날에는 거의 모두 없어졌다. 비록 다른 책에 인용된 부분이 있으나 완전하지 않다. 송대의 각종 문헌 가운데 오직 《송사》가 경제, 군사, 사상, 문화 등 각 방면의 상황을 비교적 전체적이고 계통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내용이 광범위하고 풍부하여 사료가치가 상당히 높다.
후세사람들은 이 책의 번잡하고 장황함에 불만을 느껴 개찬한 것이 많다. 명대에는 가정(嘉靖) 25년(1546) 왕수(王洙)가 《송사질(宋史質)》 100권,가정 34년(1555) 가유기(柯維祺)가 《송사신편(宋史新編)》 200권,왕유검(王惟儉有) 《송사기(宋史記)》 250권 등을 편찬하였다. 명대에 《송사》를 개수한 저술은 대부분 송나라에 정통을 부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송사》 기록의 잘못을 고친 것은 많지 않았고, 자료는 삭제만 하고 더한 것은 없어서 그 사료 가치는 도리어 원서보다 못하였다. 또한 청대 진황중(陳黃中) 《송사고(宋史稿)》 219권, 육심원(陸心源) 《송사익(宋史翼)》 40권 등이 있다. 《송사익》에는 열전만 있는데 《송사》 여러 열전의 결함을 보완해주고 있지만 대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선의 정조가 편찬한 《송사전(宋史筌)》 148권은 《송사》의 오류와 문제점을 수정·보완하고 번잡한 내용들을 통일하며, 체재를 정비한 책이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대개 그 책(송사)은 송대인들의 국사를 기본원고로 삼았다. 송대인들은 〈북송〉 동도(東都)(즉 개봉(開封))의 일을 즐겨 서술하였기 때문에 역사기록도 비교적 상세하다. 〈남송 초〉 건염 연간 이후에는 점점 더 간략해져서 이종(理宗)과 도종(度宗) 두 황제 시기에는 송대인들이 기재한 바가 드물다. 따라서 사서(史書)가 또한 역시 일관되지 못하였다.[蓋其書以宋人國史爲稾本 宋人好述東都之事 故史文較詳 建炎以後稍略 理度兩朝 宋人罕所紀載 故史傳亦不具首尾]”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권46 사부(史部) 정사류(正史類)2 송사(宋史)〉
• “여직(女直)(즉 女眞)은 송초에 여러 차례 명마(名馬)를 진상하였으나 후일에 강대해지자 요나라에게 원한을 갚게 되었다. …… 송나라와 통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해상(海上)의 맹약을 어겨서 곧 큰 난리를 일으켰다. 송나라는 드디어 치욕을 당하게 되었으니 어찌 스스로 얻은 과오가 아니겠는가. 전에 송나라의 구사(舊史)(즉 국사(國史))에는 여직전이 있었는데 오늘날 《금사(金史)》가 이미 만들어져 있으니 〈여직전을〉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국(夏國)(즉 서하(西夏))은 비록 향배(向背)가 일정하지 않지만 금나라와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따라서 구사에 기록된 것에 따라 남겨 둔다.[女直在宋初屢貢名馬 他日彊大 修怨於遼 …… 猶知以通宋爲重 及渝海上之盟 尋構大難 宋遂爲所絀辱 豈非自取之過乎 前宋舊史有女直傳 今旣作金史 義當削之 夏國雖偭鄕不常 而視金有間 故仍舊史所錄存焉]” 《송사(宋史)》 〈권485 외국(外國傳) 하국(夏國) 상〉
(2) 색인어 : 송사(宋史), 탈탈(脫脫), 아로도(阿魯圖), 구양현(歐陽玄), 정사, 관찬사서, 기전체
(3) 참고문헌
• 宋史(中華書局標點校勘本, 1977)
• 宋史 外國傳 譯註(동북아역사재단, 2011~2013)

【박지훈】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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