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동양고전해제집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 개요

《한문고이(韓文考異)》는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1197년에 당(唐)나라 문장가인 한유(韓愈(768~842))의 문집인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에 수록된 시문을 교감하여 본집과는 별도로 10권으로 편찬한 책이다.

2. 저자

(1) 성명:주희(朱熹(1130~1200))
(2) 자(字)・별호(別號):주희의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산인(雲谷山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 등이 있다.
(3) 출생지역:남검주(南劍州) 우계(尤溪(현 복건성(福建省) 남평시(南平市)))
(4) 주요활동과 생애
남송(南宋) 고종(高宗) 소흥(紹興) 21년(1151) 22세 때 이부(吏部) 임관시험에 합격하여 천주(泉州) 동안현(同安縣) 주부(主簿)로 임명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러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직책이었다. 유년시절에는 부친인 주송(朱松)으로부터 도학(道學)과 고전을 배웠다. 14세 때 부친의 유언에 따라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을 사사(師事)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보였으나, 24세 때 연평(延平) 이통(李侗)을 만나면서 유학에 복귀하였다.
46세인 1175년에는 여조겸(呂祖謙)과 함께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하였고, 강서성(江西省) 여산현(鉛山顯) 아호(鵝湖)를 유람하면서 당시의 저명한 유학자 육구연(陸九淵)과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주희는 북송오자(北宋五子)라 일컬어지는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소옹(邵雍)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성리학을 확립하였다. 특히 사서(四書) 주석을 집필하는 작업에 40년 동안 몰두하였고, 그 결과 61세인 1190년에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한데 모아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하였다. 이 외에도 80여 종의 책을 편찬하였는데, 《한문고이》는 주희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68세에 《주역참동계고이(周易參同契考異)》와 함께 완성한 책이다.
(5) 주요저작:《근사록(近思錄)》,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 《주역본의(周易本義)》, 《시집전(詩集傳)》, 《초사집주(楚辭集註)》, 《회암집(晦庵集)》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한문고이》는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주희가 살아 있을 때에 간행되지 못하고 제자인 장흡(張洽)에 의해 1208년에 간행되었는데, 이 본(本)은 현재 《문연각사고전서(文淵閣四庫全書)》 1073책에 《원본한문고이(原本韓文考異)》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 후 남송 이종(理宗) 보경(寶慶) 3년(1227)에 왕백대(王伯大)가 《한문고이》에 주(注)를 달아 해당 작품의 끝에 산입(散入)하여 남건주(南劍州)에서 《주문공교창려선생집(朱文公校昌黎先生集)》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책을 간행한 서방(書房)에서는 각 편의 끝에 붙여놓은 주석이 찾아보기 불편하다고 여기고, 이들 주석을 각 구절의 아래에 옮겨놓고 같은 이름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이후 이 책이 세상에 널리 유전되면서 주희의 원본으로 인식되었다.
왕백대는 이 책에 주석을 달면서 일정한 체제에 따라 주희의 《한문고이》와 제가의 주석을 절충하거나 통합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 책은 현재 《문연각사고전서》에 《별본한문고이(別本韓文考異)》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고, 고려대도서관에는 원판본(元版本)으로 추정되는 《주문공교창려선생집(朱文公校昌黎先生集)》 영인본 1책(권13~권15)이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명(明)나라에 들어와 정통(正統) 13년(1448)에 서림(書林) 왕종옥(王宗玉)에 의해 다시 간행되었고, 이후 만력(萬曆) 33년(1605)에 주희의 후손인 주오필(朱吾弼)에 의해 다시 세상에 나왔다.
한편 왕백대가 1227년에 《주문공교창려선생집》을 간행한 지 40여 년이 지난 남송 도종(度宗) 함순(咸淳) 연간(1265~1274)에 요영중(廖瑩中)이 항주(杭州)에서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을 간행하였다. 요영중은 이 책에 주석을 달면서 주희의 《한문고이》와 제가(諸家)의 주석을 절충하여 작품의 행간이나 글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 책은 요영중의 서재 이름인 세채당(世綵堂)을 본떠 세채당본이라고 일컫는다.
이 책은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1573~1619)에 서시태(徐時泰)에 의해 강소성(江蘇省) 장주(長州)에서 다시 간행되었다. 당시 서시태가 간행한 책은 그의 서재 이름을 본떠 동아당본(東亞堂本)이라고 일컫는다. 이어 명 숭정(崇禎) 6년(1633)에 장지교(蔣之翹)가 《당한창려집(唐韓昌黎集)》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장지교는 이 책에 주석을 달면서 주희의 《한문고이》를 중심으로 하여 제가의 주석을 대폭 축약하였다.
현재 서시태가 간행한 동아당본은 《문연각사고전서》에 《동아당한창려집(東雅堂韓昌黎集)》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고, 국립중앙도서관에는 표지 제목이 《송판한창려전집(宋板韓昌黎全集)》이라는 이름으로 40권 11책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서울대규장각에는 장지교가 간행한 《당한창려집》 2종이 소장되어 있다.

4. 내용

현전하는 한유 문집의 주석서 중에서 시기가 가장 앞선 것은 방숭경(方崧卿)이 1189년에 편찬한 《한집거정(韓集擧正)》 10권이다. 방숭경은 이 책을 편찬하면서 당시에 전해져온 상부(祥符)의 항본(杭本), 가우(嘉祐)의 촉본(蜀本) 및 이한로(李漢老)와 사임백(謝任伯)이 고증한 관각본(館閣本) 등의 주석서를 중심으로 제가의 주석을 절충해 놓았다. 그러나 주희는 방숭경이 이 책을 간행하면서 관각본을 지나치게 존숭하여 비록 오류가 있더라도 이를 곡종(曲從)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주희는 그가 한유의 글을 익숙하게 읽고 정밀하게 생각해 제본(諸本)의 동이(同異)와 오류를 논하지 않고, 단지 명망이나 형세를 쫓아 그 진위가 분명하지 않은 삼본(三本)만을 존숭함으로써 적지 않은 오류를 범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주희가 편찬한 《한문고이》 10권은 위와 같은 《한집거정》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주희는 한유가 도의 본원을 깊이 탐구하여 육경六經을 보좌하였고, 한유의 문장은 도의 단서를 잡아 앞사람을 본받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희는 한유가 도를 천하에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도의 본체가 자신의 한 몸에서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주희는 《한문고이》를 편찬하면서 자신이 집대성한 도학적 문학관에 기초해 문세(文勢)와 문리(文理)에 초점을 맞추어 한유의 시문을 교감하였고, 당시 세상에서 전하던 항본(杭本)과 촉본(蜀本), 관각본(官刻本)을 포함한 제본들의 동이와 오류를 바로잡았으며, 한유와 불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의 학문에 대한 득실과 공과를 평하였다. 이렇듯 주희는 《한문고이》를 편찬하면서 고도의 철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체계화한 도학적 문학관을 주도면밀하게 적용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한문고이》를 중심으로 제가의 주석을 붙여놓은 한유의 문집이 간행되었고, 이들 책이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한유의 시문은 조선조 전시대에 걸쳐 문장가는 물론 도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5. 가치와 영향

조선 시대에 활동한 문장가와 도학자들은 주희가 《한문고이》에서 도학적 문학관에 기초하여 한유 문장의 공과와 득실을 논한 것에 대한 이해 방식이 서로 달랐고, 이에 따라 이들은 한유의 산문을 고문의 전범으로 인식하면서도 그 내용에 있어 많은 차이를 보여주었다. 먼저 도학가인 이황(李滉)과 이덕홍(李德弘)은 《고문진보후집(古文眞寶後集)》에 수록된 한유의 산문에 대해 도학적 의리를 잣대로 의리를 살피거나 주석에서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이와 달리 문장가인 윤근수(尹根壽)와 최립(崔岦)은 한유의 산문을 토석(吐釋)하면서 도학가의 재도론(載道論)에 대응하는 문장가의 문학 이론을 정립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장가들은 각자의 학문 경향이나 관심 분야에 따라 한유의 산문에 대한 전범(典範) 인식을 다양하게 표출하였다. 바로 이 점에서 주희가 편찬한 《한문고이》는 우리나라에서 중국 문학을 수용한 양상과 그 전개 과정을 파악하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대체로 남을 위해 글을 지을 때 몸이 혹 멀리 있게 되면 직접 볼 방도가 없는 데다, 모각(摹刻)한 것이 이미 탈자나 오자가 있어 또다시 글이 훼손된 경우에는, 노력을 거듭해도 끝내 바로잡을 수가 없다.[大凡 爲人作文 而身或在遠 無由親視 摹刻 旣有脫誤 又以毁之 重勞 遂不能改]” 《한문고이(韓文考異)》 〈운주계당시병서주(鄆州溪堂詩幷序註)〉
• “한유의 문장은 비록 고고(高古)하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또한 감히 일부러 신기하고 교묘하게 지어 엄숙하고 평이한 문체를 잃게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사이에서 반복되고 변화무쌍하여 사리(事理)를 모두 말하였으니, 곧 이것은 참된 문장으로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미칠 수가 없다.[韓公之文 雖曰高古 然於此等處 亦未嘗敢故爲新巧 以失莊敬平易之體 但其間 反覆曲折 說盡事理 便是眞文章 他人自不能及耳]” 《한문고이》 〈체협의주(禘祫議註)〉
• “〈원도(原道)〉에 드러난 한유의 학문은 비록 그 대용(大用)이 널리 행해지는 것은 알았으나 본연(本然)의 전체에 대해서는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일용(日用)하는 사이에 또한 존양성찰(存養省察)하여 몸으로 체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이런 까닭에 비록 그가 자임한 것이 무겁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평생 힘을 쓴 깊은 곳은 끝내 문자와 언어의 정교함에서 떠나지 못하였다.[韓公之學 見於原道者 雖有以識夫大用之流行 而於本然之全體 則疑其有所未睹 且於日用之間 亦未見其有以存養省察 而體之於身也 是以 雖其所以自任者 不爲不重, 而其平生用力深處 終不離乎文字言語之工]” 〈여맹상서주(與孟尚書註)〉
(2) 색인어:한문고이(韓文考異), 원본한문고이(原本韓文考異), 별본한문고이(別本韓文考異), 주문공교창려선생집(朱文公校昌黎先生集),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 당한창려집(唐韓昌黎集).
(3) 참고문헌
• 原本韓集考異(朱熹, 《문연각사고전서文淵閣四庫全書》 1073책)
• 別本韓文考異(王伯大 編, 《문연각사고전서文淵閣四庫全書》 1073책)
• 朱文公校昌黎先生文集(王伯大 編, 고려대도서관, 만송貴中-24)
• 東雅堂韓昌黎集註(徐時泰 刊, 《문연각사고전서文淵閣四庫全書》 1075책)
• 宋板韓昌黎全集(徐時泰 刊, 冠山堂藏板本, 국립중앙도서관, 일산貴3747-100)
• 唐韓昌黎集(蔣之翹 刊, 서울대규장각, 奎中3952-v1-14)
• 唐韓昌黎集(蔣之翹 刊, 서울대규장각, 一蓑古895.1081-H19d)
• 한유 문집 연구(정재철, 한국학술정보, 2019)

【정재철】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