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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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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자건집(曹子建集)》은 조식(曹植)의 문집이다. 조식은 건안칠자(建安七子)로 일컬어지는 후한(後漢) 말기 최고의 문인들 중에서도 정점에 자리한 인물이다. 난세(亂世)에 공업(功業)을 세우겠다는 포부와 열망, 정치적 박해로 인해 포부를 펼치지 못한 울울함 등을 시(詩), 부(賦), 산문(散文)의 다채로운 장르와 다양한 제재를 통해 문학으로 구현하였다. 《조자건집》은 이러한 조식 문학의 집대성으로 현재 10권이 전한다.

2. 저자

(1) 성명:조식(曹植)(192~232)
(2) 자(字)·별호(別號):자는 자건(子建), 시호는 ‘사(思)’이며, 이로 인해 진사왕(陳思王)으로도 불린다.
(3) 출생지역:패국(沛國) 초현(譙縣)(현재 안휘성(安徽省) 호주시(亳州市))
(4) 주요활동과 생애
조식은 조조(曹操)와 변씨(卞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비(曹丕)의 동생이다. 조식은 후한 헌제(獻帝) 초평(初平) 3년(192)에 태어나 위(魏)나라 명제(明帝) 태화(太和) 6년(232)에 41세의 나이로 죽었다. 조식의 생애는 건안(建安) 25년(220) 조조가 죽은 해를 경계로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기는 다시 두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태어난 해인 192년부터 216년까지가 하나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조식이 아버지 조조의 기대와 총애를 받으며 지낸 때이다. 두 번째 시기는 217년에서 219년까지의 시기로, 조식이 조조의 눈 밖에 나던 때이다.
조식은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난세에 태어나 군중(軍中)에서 자랐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조식이 살았던 시대는 후한 황제의 힘이 미약해져 외척(外戚)·환관(宦官)과 관료들 사이에 정권 다툼이 극심하고 황건적(黃巾賊)의 난과 같은 민란이 일어나 군웅이 할거하던 아주 혼란한 시기였다. 건안 9년(204)에 이르러서야 조조가 원소(袁紹)를 격파한 뒤,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여 비로소 중국 북부 지역의 대체적인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아버지 조조가 정치가인 동시에 문장가이기도 하여 주위에 많은 문인들이 모여 들었기에, 조식은 어려서부터 이들과 접촉을 하면서 자랐다. 10살 때 이미 시문(詩文)과 사부(辭賦)를 외웠으며 글을 잘 지어 아버지 조조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조식은 일찍이 청년 시절 여러 차례 조조를 따라 전쟁에 나갔다. 그의 상소문 〈구자시표(求自試表)〉에서 “남쪽으로는 적벽(赤壁)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동해(東海)에 갔으며 서쪽으로는 옥문관(玉門關)을 바라보고 북쪽으로 장성(長城)을 나섰다.”라고 한 것처럼, 처음에 조식은 조조의 큰 기대를 받고 자랐다. 건안 19년(214), 조식이 임치후(臨淄侯)로 봉해진 그 해 7월, 조조가 손권(孫權)을 치러 가면서 조식에게 명을 내려 금병(禁兵)을 관장하고 남아서 업성(鄴城)을 지키게 하였다. 조식에게 당부하기를, “내가 옛날 돈구령(頓丘令)이었을 때, 나이가 스물셋이었다. 이때에 행한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도 아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 이제 너도 나이가 스물셋이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 말에는 조조가 아버지로서 아들 조식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있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다 건안 22년(217), 조식이 사마문(司馬門)을 마음대로 열고 나가 조조가 화를 크게 낸 일이 발생하였으며, 이로 인해 조조는 조식에게 실망하게 되었고, 조식을 달리 보게 되었다. 이해 조조는 조비를 위나라의 태자로 선포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진사왕전(陳思王傳)〉의 기록을 보면, 조식은 문인들과 자리를 함께 할 때 위의(威儀)를 갖추지 않았으며 수레와 말과 복식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숭상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기세로 남을 누르는 태도가 없었으며 문인들을 성실하게 대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호감을 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자신을 가다듬는 데에 힘쓰지 않으며 술을 마심에 절제를 하지 않는 일면도 있었다고 한다. 자유분방하고 소탈한 이러한 성격이 대사(大事)를 맡기려는 조조의 눈 밖에 난 것으로 보인다. 건안 24년(219) 8월에 위군(魏軍)이 양양(襄陽)에서 패하여 주장(主將) 조인(曹仁)이 거느리던 군대가 촉(蜀)나라의 관우(關羽)에게 포위되어 곤경에 처하였다. 조조는 조식을 남중랑장(南中郞將)에 임명하여 급히 가서 구원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조식은 이때 술에 취해 명령을 받을 수 없었다. 이 뒤로 조식은 조조의 총애를 잃어버리고 더 이상 조조로부터 중용(重用)을 받지 못하였다. 반면, 조비는 태자가 될 목적으로 조조의 눈에 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끝에 결국 태자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214년에 조조가 조식에게 보여주었던 기대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시들해진 결정적인 사건은 217년의 사마문 사건이었고, 219년에 조인과 관련된 일은 조조의 실망을 더욱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후기도 두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앞 시기는 220년에 조조가 죽고 조비가 제위에 올라 문제(文帝)가 되었던 6년간 황초(黃初)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던 시기이고, 뒤의 시기는 226년에 조비가 죽고 아들 조예(曹叡)가 뒤이어 제위에 올라 명제가 되고 태화로 연호를 바꾼 이후의 6년간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조식은 삶의 전기를 여유롭고 즐겁게 보내다가 후기에 접어들어 조비와 조예, 두 부자에게 갖가지 시기와 핍박을 당하며 고통스럽게 지내게 된다. 이러한 전후의 두 시기는 서로 극명한 대비를 보인다. 명제 때는 문제 때에 비하여 핍박이 상대적으로 덜하였으나 조식이 바라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울울하게 지낸 점은 그 앞 시기였던 조비 제위 때와 마찬가지였다.
건안 25년 10월, 조조가 죽자 조비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이어서 후한 헌제를 핍박하여 선양(禪讓)을 하도록 하고, 연호를 황초로 바꾸었다. 이때 조식이 위나라가 후한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프게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조비가 자신이 대위(大位)에 오르는 이 좋은 때를 맞아 천하에 우는 사람이 있느냐고 화를 냈다고 전해진다.
조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로부터 조식은 그의 인생에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며 극도의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조비는 자신의 통치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제후왕들의 힘을 약하게 만들어 그들을 더욱 엄격하게 통제하는 한편, 정치상의 적대 세력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조비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조식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식의 절친한 친구였던 정의(丁儀)와 정이(丁廙), 그리고 공계(孔桂)를 죽였다. 동시에 명령을 내려 조식과 여러 왕들이 모두 자기 봉국(封國)으로 가도록 하고, 감국알자(監國謁者)를 파견하고 지방관을 시켜 그들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기회를 엿보아 죄를 덮어씌우도록 시켰는데, 조식이 바로 이 때문에 죄를 지어 폄적을 당하게 되었다. 또 조식이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조식의 봉지(封地)를 바꾸고 식읍(食邑)을 깎았다. 황초 2년(221)에 감국알자 관균(灌均)이 조식이 술에 취해 오만하고 사자(使者)를 위협한다고 보고하여 조식은 하마터면 극형에 처해질 뻔하였다. 다행히 변태후(卞太后)가 극력 비호한 덕분에 겨우 죽음은 면하였으나 임치후(臨淄侯)에서 안향후(安鄕侯)로 관작이 깎였다. 그해에 다시 견성후(鄄城侯)로 바뀌어 봉해졌다. 황초 3년에는 견성왕(鄄城王)으로 되었고, 황초 4년에는 다시 옹구왕(雍丘王)으로 옮겨져 봉해졌다. 자주 봉지를 옮겨 다니느라 정신적·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으며, 물질적으로도 형편이 상당히 어려웠다.
황초 7년(226)에 조비가 죽고 조예가 즉위하니 바로 명제이며 태화로 연호를 바꾸었다. 조식의 처지는 여전히 호전되지 않았고, 그의 봉지 또한 자주 바뀌었다. 태화 원년(227)에 준의(浚儀)로 옮겨 봉해졌고, 태화 2년에는 다시 옹구(雍丘)로 돌아왔으며, 태화 3년에는 동아(東阿)로 옮겨졌으며, 태화 6년에는 진(陳) 땅의 겨우 4현을 다스리는 진왕(陳王)에 봉해졌다. 그래도 이전에 비해 통제가 다소 완화되었기에 조식은 희망을 품고 명제에게 몇 차례에 걸쳐 글을 올려 자신을 기용해주길 청했지만 시종 답이 없었다. 이러하여 조식은 만년에 홀로 지내게 되었는데, 좌우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오직 하인들뿐이었고, 마주하는 사람이라고는 오직 처자뿐이었다. 고상한 담론을 같이 나누고 이야기를 하고자 하여도 함께 할 사람이 없었다. 결국 태화 6년(232) 11월 쓸쓸하게 죽으니 향년 41세였다. 결코 많다 할 수 없는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5) 주요저작:시로는 〈공연(公宴)〉과 〈백마편(白馬篇)〉, 〈야전황작행(野田黃雀行)〉, 〈부평편(浮萍篇)〉, 〈유선(遊仙)〉, 〈오유영(五遊詠)〉, 〈승천행(升天行)〉, 〈하선편(鰕䱇篇)〉 등이 있다. 부(賦)는 〈낙신부(洛神賦)〉, 〈등대부(登臺賦)〉, 〈구수부(九愁賦)〉, 〈칠계(七啓)〉, 〈귤부(橘賦)〉, 〈백학부(白鶴賦)〉 등이 유명하다. 산문으로는 〈구자시표〉, 〈한이조우열론(漢二祖優劣論)〉, 〈진심거표(陳審擧表)〉 등의 여러 작품이 있다.

3. 서지사항

조식은 생전에 일찍이 자신의 부를 모아 《전록(前錄)》을 편찬하여 젊었을 때 지은 부 78편을 수록하였다. 그가 죽은 뒤 오래지 않은 경초(景初) 연간(237~239), 위나라 명제는 조서를 내려 조식이 지은 부와 송(頌), 시, 명(銘), 잡론(雜論) 등 모두 100여 편을 찬록(撰錄)하게 하였다.
당대(唐代)에는 《진사왕집(陳思王集)》이 30권본과 20권본, 두 종류가 있었으나 뒤에 모두 망실되었다. 송대(宋代) 이후에 통행된 것은 뒷사람이 편집·정리한 10권본이며, 《예문유취(藝文類聚)》와 《백씨육첩(白氏六帖)》, 《초학기(初學記)》 등의 유서(類書)에서 조식의 시문을 모았다. 남송(南宋) 초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 권17에 의하면, 적어도 남송 초에는 시문 200편의 10권본이 이미 유전(流傳)되었으며, 서명도 《조식집(曹植集)》으로 개칭(改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명대(明代)에는 권수가 다른 각종 각본(刻本)의 조식의 문집이 있었다. 설응기(薛應旗)가 각(刻)한 4권본, 장부(張溥)가 각한 2권본이 있었으나, 가장 성행한 것은 제목이 《조자건집》으로 된 10권본이었다. 이 10권본은 송각(宋刻) 10권본을 뒤이은 것으로, 명대에는 몇 종류의 다른 각본과 활자본(活字本)이 있었다. 《사부총간(四部叢刊)》, 《사부비요(四部備要)》 중의 《조자건집》은 바로 각기 명대 활자본과 각본에 근거하여 번인(翻印)한 것이다.
후세에 전하는 판본 가운데에서 비교적 좋은 것은 청(淸)나라 정안(丁晏)의 《조집전평(曹集銓評)》과 주서증(朱緖曾)의 《조집고이(曹集考異)》와 근대 사람 황절(黃節)(1873~1935)의 《조자건시주(曹子建詩注)》이다. 청나라 동치(同治) 연간(1862~1874) 정안이 찬(纂)한 《조집전평》은 명나라 만력(萬曆) 휴양(休陽) 정씨(程氏)의 각본에 의거하였고, 명나라 장부(張溥)본과 《문선(文選)》을 가지고 교정(校訂)하였으며, 또한 각종의 유서를 참고하여 일문(逸文)을 수집하고 누락된 것을 보정(補正)하여 비교적 선본(善本)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안의 《조집전평》은 전 10권이며, 이 외에 일문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4. 내용

조식은 41세라는 길지 않은 생애에서 정치적으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문학상으로는 오히려 큰 성과를 거두어 문학사에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그의 문학세계는 상당히 다양하다.
조식의 문학을 대표하는 장르는 역시 시가이다. 조식의 시는 현재 109수에 잔구(殘句) 57구가 전해 온다. 당시로서는 최대의 다산(多産)작가였다. 제재와 내용 또한 다양하여, 영회(詠懷), 영사(詠史), 연유(宴遊), 증별(贈別), 종군(從軍), 출새(出塞), 전원(田園), 산수(山水), 유선(遊仙), 그리고 잡시(雜詩) 등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조식의 시는 서정(抒情)과 술회(述懷)의 작품이 대다수이다. 또 전기에 귀공자로서 즐겁게 생활하던 때에 지은 작품과 후기에 문제와 명제의 핍박을 받으며 지내던 시기에 지어진 작품 간에 차이가 있는데 이 또한 조식 시의 특색이다. 전기 시에서는 귀공자로 지내며 친구들과 즐거이 교유하는 생활의 모습을 보이거나, 공업을 세우겠다는 의지, 혹은 강개한 마음을 보였다. 이와 달리 후기 시에서는 자신의 궁핍한 생활과, 버림을 받은 뒤의 슬픔과 원망,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의지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
조식은 어려서부터 부를 좋아하였다. 조식의 부는 형식상 그의 이전에 이미 생겨나 전해져 내려오는 소체부(騷體賦)와 산체부(散體賦)를 비롯하여 영물부(詠物賦), 서정부(抒情賦) 등 다양한 부의 체제를 두루 섭렵하면서 부의 표현 영역을 넓혔다. 대표적인 소체부로는 〈구수부〉가 있다. 여기서 조식은 굴원이 간인(姦人)의 참언으로 쫓겨난 신세를 서술하면서 동시에 작자 조식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 마음을 담았다. 산체부 중 대표작인 〈칠계〉에서는 공업을 세우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서정부와 영물부에서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갖가지 감정과 사상을 나타내고 사물을 묘사하는 등 비교적 다양한 내용을 다루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낙신부〉는 낙수(洛水)의 여신을 만나 연모의 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조식은 시와 부 외에도, 장(章), 표(表), 령(令), 문(文), 칠(七), 서(序), 서(書), 론(論), 설(說), 뢰(誄), 애사(哀辭) 등 다양한 성격의 글을 남겼다. 다양한 성격의 산문을 통해 조식은 통치론에서부터 문학 비평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조식이 살았던 시기의 산문은 이전의 실용성 위주의 글에서 점차 예술성을 추구하는 쪽으로 나아갔는데, 조식의 산문은 바로 이러한 경향과 성취를 잘 대표하여 간결한 필치로 심후한 정감을 표현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앞서 시, 부, 산문의 순으로 조식의 문학세계를 살폈다. 여기서도 그 순서를 따라 가치와 영향을 밝히겠다.
조식은 오언시(五言詩)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켰다. 오언시는 전한(前漢)의 온양기(醞釀期)를 거쳐 후한의 반고(班固)에 이르면 전편이 오언으로 이루어지는 성립기를 맞이하지만 작품 자체는 아직 예술적 성취가 그다지 높지 못하였다. 이후 무명씨(無名氏)의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를 거쳐 건안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문인이 지은 진정한 오언시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때의 대표 시인이 바로 조식으로, 당시 작가들 중 가장 많은 작품 활동을 통하여 오언시를 한 단계 끌어 올리는 성취를 거두었다. 조식 시의 특색은 이전의 서사(敍事)를 서정으로 전환하며 개성화(個性化)하는 특색이 매우 뚜렷하였다. 한대(漢代)의 악부(樂府)·민가(民歌)는 서사적인 경향이 선명하였으며, 〈고시십구수〉는 비록 서정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그 내용은 당시의 중·하층 지식인들의 보편적인 정서이지, 개성화의 특징은 아직 그다지 선명하지 않았다. 건안시기에 이르러서도, 조조는 악부 옛 제목을 빌려 한말(漢末)의 시사(時事)를 시에서 읊었으며, 조비는 비록 더러 개인적인 정감을 표현하였지만 여전히 〈고시십구수〉와 민가의 특징을 보존하며 개성적인 특징이 뚜렷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조식은 처음부터 시를 통하여 개인의 감정을 매우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그의 시를 보면 고민, 적막, 슬픔, 이상, 갈망 등등 다양한 정감과 진실된 느낌이 잘 드러나 있다. 이것은 중국의 고시(古詩)가 조식에 이르러 한 차례 변화를 맞이하게 됨을 의미한다. 시가 창작에 있어서도 다양한 형식과 표현에 힘을 기울였다. 자구(字句)와 성률(聲律)을 갈고 다듬어 전아(典雅)하고 화미(華美)한 시풍을 이루어 후대의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또 시의 구조에 있어서도 경구(警句)의 안배나 대장(對仗)의 공정(工整)에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점들은 후세의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요컨대 조식의 시가는 이전의 민가와는 달리 문인화(文人化)된 전아한 길을 후세 사람들에게 열어주었으며, 예술적 기교와 수사(修辭), 연구(練句), 장법(章法)의 안배 등 또한 후대의 문인들이 따르고 학습하는 대상이 되었다. 내용과 형식 체제가 다양하고 풍부하여, 위로는 선진(先秦)과 양한(兩漢)의 시를 계승하면서 아래로는 육조(六朝)의 시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중국 시 역사상의 조식 시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겠다.
조식은 당대 문인들 중에서 가장 많은 부를 지었다. 사부의 발전 역사상, 조식의 부의 특색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개괄할 수 있다. 우선, 부의 제재와 내용을 확대하였다. 이전의 사부가 대체로 경도(京都), 궁전(宮殿), 수렵(狩獵), 조수(鳥獸) 등에 대한 묘사를 위주로 하였던 것에 비해, 조식은 여기에 가정의 일상사나 남녀 간의 감정 등을 부로 지어, 새로운 시도를 꾀하였다. 동시에 조식의 부는 또 현실성이 두드러지고, 서정성이 뛰어나다. 조식의 부는 이전의 부가 화려한 말을 늘어놓으며 외관상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나타내었으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감의 표현은 두드러지지 않은 것과는 달리 조식 자신의 현실 생활 속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진실한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다음으로, 조식의 부는 위로는 초사(楚辭)와 한부(漢賦)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아래로는 고부에서 변려부(騈儷賦)로 나아가 변화 발전하는 육조시대의 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대에는 대부(大賦)가 성행하였으나 조식에 이르러서는 소부(小賦)가 많이 지어졌으며, 위진 시대에 시작되어 남북조에 성행한 새로운 문체인 변려부의 형성에 조식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식 이전에도 대장을 부에서 사용한 예가 없지 않으나 전체 작품으로 봐서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조식의 경우에는 대장의 구가 작품 중에서 상당한 편폭을 차지하고 있으며, 언어 표현에서는 미사여구의 나열에 빠지지 않고 청신(淸新)하면서 유려한 표현을 추구하였다. 이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부의 시화(詩化) 현상을 잘 보여준다.
조식이 살았던 시기의 산문은 이전의 실용성(實用性) 위주의 글에서 점차 예술성(藝術性)을 추구하는 쪽으로 나아갔는데, 조식은 이러한 경향과 성취를 산문에 반영하여 간결한 필치로 심후한 정감을 표현하였다. 유협(劉勰)은 《문심조룡(文心雕龍)》 〈장표(章表)〉 편에서 조식의 표를 높이 평가하여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위에서 살핀 조식의 시, 부, 산문에서의 성취는 그가 중국문학사상 걸출한 문학가란 것을 증명한다. 문학사에서 조식의 위상은 후대 오랜 세월을 거치도록 쇠퇴하지 않았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콩 삶으려 콩깍지 태우니, 콩이 가마솥 안에서 우네. 본디 같은 뿌리에서 났건만, 지지고 볶는 것 어찌 이리도 급한가.[煮豆燃豆萁 豆在釡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 〈칠보시(七步詩)〉
• “나는 듯한 몸매는 놀란 기러기 같고, 유연함은 노니는 용과 같다네. 빛나기는 가을 국화요, 화사함은 봄 소나무네.[翩若驚鴻 婉若遊龍 榮曜秋菊 華茂春松]” 〈낙신부(洛神賦)〉
• “게다가 금수(禽獸)도 그 어미를 사랑할 줄 알고 그 효를 안다. 백호와 기린만을 인수(仁獸)라고 칭하는 것은 그로써 성쇠(盛衰)를 밝힐 수 있고 치란(治亂)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효(孝)는 가까운 사람에게 베풀어지고 인(仁)은 먼 사람에게도 미친다.[且禽獸悉知愛其母 知其孝也 唯白虎麒麟稱仁獸者 以其明盛衰 知治亂也 孝者施近 仁者及遠]” 〈인효론(仁孝論)〉
(2) 색인어:조식(曹植), 조자건집(曹子建集), 진사왕(陳思王), 건안칠자(建安七子), 백마편(白馬篇), 낙신부(洛神賦),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3) 참고문헌
• 曹植集校注(趙幼文 校注, 明文書局)
• 曹子建詩註(黃節, 文海出版社)
• 新譯曹子建集(曹海東, 三民書局)
• 三曹詩文全集譯注(傅亞庶, 吉林文史出版社)
• 曹集銓評(丁晏, 世界書局)
• 조자건집(이치수·박세욱 역, 소명출판)

【심경호】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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