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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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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명학좌파(陽明學左派)의 우두머리인 이탁오(李卓吾)의 수많은 저서 중 하나로서 만력(萬曆) 27년(1599)에 간행된 사서(史書)이자 사론(史論)이다. 이 책은 춘추시대(春秋時代) 말부터 원대(元代)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사기(史記)》 이후의 사서에서 가려낸 뒤 〈세기(世紀)〉, 〈열전(列傳)〉의 2부로 나누어 배열하였다.
저자인 이탁오는 이 책에 대해 “《장서(藏書)》와 같은 논저는 개역(改易)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나의 정신심술(精神心術)이 걸려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 다른 저작인 《분서(焚書)》와 같이 자신의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사상이나 역사관이 당대(當代)에 용납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 책은 다만 스스로 즐기고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라는 뜻으로 ‘장서(藏書)’라 이름했다. 그래서 혼자만의 즐김이나 몇몇 동호인의 완상(玩賞)으로 그치고, 천 년 뒤 후학의 이해를 기대했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장서(藏書)》와 《분서(焚書)》는 그의 생전에 판각되었다. 그는 당시 부패한 정치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예교(禮敎)와 도학(道學)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이러한 행위로 인해 도학가들과 위정자들로부터 공격과 박해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혹세무민’한다는 죄목으로 체포되고 자결의 길을 걷고 말았다.

2. 저자

(1)성명:이지(李贄)(1527~1602)
(2)자(字)·별호(別號):이름은 재지(載贄)이고 호는 탁오(卓吾). 이지의 초명은 임재지(林載贄)였으나 장성하여 종가의 성(姓)을 따라 이지(李贄)라고 개명했다. 별호로는 굉보(宏甫), 탁오자(卓吾子), 이화상(李和尙), 독옹(禿翁), 백천거사(百泉居士) 등이 있다. 이름 바꾸기를 즐겨 생전에 무려 47가지에 달하는 호를 사용했다.
(3)출생지역:천주부(泉州府) 진강현(晉江縣)
(4)주요활동과 생애
이지의 집안은 대대로 상업에 종사하였는데 원(元)나라 때 선조들은 해상무역, 통역관 등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明)나라가 들어서면서 주원장(朱元璋)의 쇄국정책으로 무역의 길이 막히자 이지의 집안은 가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훗날 주자학(朱子學)과 양명학(陽明學)은 물론 노장(老莊)과 선종(禪宗), 제자백가, 기독교, 회교(回敎)까지 두루 섭렵한 이력으로 인해 그의 사상은 중국 근대 남방문화의 결정체로 설명된다. 26세 때 거인(擧人)에 합격하고 줄곧 하급 관료생활을 하다가 54세 되던 해 퇴직했다. 40세 전후 심학(心學)에 몰두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불교에 심취해 62세에 출가하고 절에서 기거하였다. 유가의 정통사관에 도전하는 《장서》를 집필했고, 성현이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경전을 해설한 《사서평(四書評)》을 출간했으며, 선진(先秦) 이래 소외받던 《묵자(墨子)》의 가치를 재조명하기도 했다. 스스로 이단을 자처하며 유가(儒家)의 말기적 폐단을 공격하고 송명이학(宋明理學)의 위선을 폭로했다. 세인(世人)들은 이지에게 성인과 요물이란 극단적인 평가를 부여했다. 결국 혹세무민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서 76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저작들은 명청대(明淸代)의 가장 유명한 금서였지만 대부분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빌린 수많은 위작 또한 횡행하고 있다.
(5)주요저작:《속장서(續藏書)》, 《분서(焚書)》, 《속분서(續焚書)》, 《설서(說書)》, 《구정역인(九正易因)》, 《계중팔절(系中八絶)》, 《이탁오선생유서(李卓吾先生遺書)》, 《명등도고록(明燈道古錄)》 이외에도 다수의 저작이 있다. 용조조(容肇祖)의 《이지연보(李贄年譜)》를 보면 그가 76세로 죽을 때까지 10여 년에 걸쳐 다양한 분야의 매우 많은 저작을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서지사항

이지(李贄)는 20여 년간의 관직생활을 마감하고 만력 9년(1581) 호북성(湖北省) 황안(黃安)에 사는 친구 경정리(耿定理)의 집에 묵으면서 독서와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몇몇 절친한 친구와의 왕래를 제외하고는 시간과 정력을 모두 독서와 연구 및 저술 활동에 쏟았다. 62세에 정식으로 출가하고 절에서 기거하면서 유가의 정통사관에 도전하는 《장서》를 집필하는 등, 그의 주요 저작은 거의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장서》는 이지의 사상이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책으로 일컬어진다. 총 68권 20책의 방대한 분량으로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로부터 원대(元代)에 이르기까지 800여 명의 역사인물의 전기이다. 〈본기〉와 〈열전〉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장서》가 처음 판각된 것은 이지가 죽기 3년 전인 만력 27년(1599)에 지우(知友)였던 초횡(焦竑)의 주도로 금릉(金陵)에서 이루어졌다. 이후로도 명대에만 두 번의 각인(刻印)이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1959년과 1974년 두 번에 걸쳐서 정리와 수정을 가해 출판되었다.
저작 동기는 이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장서세기열전총목전론(藏書世紀列傳總目前論) 〉에 잘 드러나 있는데, 이 글의 태반을 할애하여 시비론(是非論)을 피력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야말로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일차적인 책무라고 피력하고 있다.

4. 내용

《장서》는 〈본기〉와 〈열전〉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본기는 전국시대로부터 원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제후나 제왕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간에 속한 모든 제왕에 대해서 기록한 일반적인 역사서와는 다르다. 이지는 자신만의 관점과 가치관에 입각하여 제왕을 선별하여 다루고 있다. 그는 〈본기〉를 31개 항목으로 나누어 각 항목마다 네 글자의 표제(標題)를 달았으며, 때로는 한 항목에 ‘부(附)’의 편제를 취하여 몇몇 제왕과 왕조를 처리하고 있다. 이지는 본기를 서술하기에 앞서서 〈세기총론(世紀總論)〉을 적어 왕조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역사관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치란(治亂)의 순환과 문질(文質)의 상호교체를 들어 역사의 진행을 설명하고 있다.
〈열전〉은 〈대신전(大臣傳)〉 5문(門), 〈명신전(名臣傳)〉 8문, 〈유신전(儒臣傳)〉 2문, 〈무신전(武臣傳)〉, 〈적신전(賊臣傳)〉 7문, 〈친신전(親臣傳)〉 5문, 〈근신전(近臣傳)〉 3문, 〈외신전(外臣傳)〉 4문 등 8개로 분류하였으며, 각 분류마다 또다시 몇 개의 문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5. 가치와 영향

송명(宋明)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를 꼽으라면 주자(朱子), 왕양명(王陽明), 이탁오(李卓吾)를 들 수 있다. 이들의 학문은 조선에 전해졌는데, 조선에서 최초로 이탁오의 학문을 접한 학자는 허균(許筠)이다. 허균은 《분서》와 《장서》를 읽고서 유불(儒佛)의 교섭과 정감을 중시하는 그의 사상에 깊이 감복하였다. 한편 조선후기 대표적 경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은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를 저술하면서 이탁오가 저술한 《논어평(論語評)》의 해석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였는데, 특히 주자학에서 벗어난 경전해석을 할 경우 그 근거로 인용하곤 하였다. 그리고 조선 말기의 명문장가이자 양명학자였던 이건창(李建昌)은 자기 삶의 좌표로서 자득적(自得的) 체험을 중시한 이탁오를 칭송하였다. 조선유학사에서 주자학과 양명학은 가문과 학파를 중심으로 집단적(集團的) 형태로 수용되었다. 이에 비해 이 세 학자들의 이탁오 수용은 자신들이 처한 사회, 가문, 학파와 무관한 개별적(個別的) 수용형태를 지닌다. 이처럼 조선에서의 이탁오 수용은 개별적 수용에 그쳤지만, 이로 인해 조선의 사상사는 주자학 또는 양명학이라는 단조로움에서 탈피하여 정감의 중시, 유불의 교섭, 탈주자학적(脫朱子學的) 사유, 자득적 체험의 중시 등 다채로운 면모를 더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청조의 멸망 이후, 근대성의 논의와 함께 이탁오 연구 열풍이 불기 시작한다. 이탁오는 그의 생존시대에 유교의 반역자로서 평가받았지만, 근대 이후의 중국에서는 유물주의 사관에 의해 혁명적 진보적 사상가로서 재평가되었다. 그것은 이탁오의 저작 속에 기존의 유교사회질서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근현대의 정치적 상황에서 볼 때 이탁오의 사상이 정치적 선전과 홍보에 매우 적합한 이론적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렇게 이탁오는 근대 중국에서 재조명을 받게 되었고, 지금까지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삼국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6. 참고사항

(1)명언
• “모두가 공자의 시비(是非)로 시비를 가렸기에 일찍이 시비가 존재한 적이 없다.[咸以孔子之是非爲是非 故未嘗有是非]” 〈세기열전총목전론(世紀列傳總目前論)〉
• “책의 이름을 ‘장서(藏書)’라고 지었으니 ‘장서’라고 이름지은 것은 어째서인가. 이 책은 단지 나 혼자만의 즐거움으로 삼을 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장서’라고 이름한 것이다.[名之曰藏書 藏書者何 言此書但可自怡 不可示人 故名曰藏書也]” 〈세기열전총목전론(世紀列傳總目前論)〉
• “《사기(史記)》는 사마천(司馬遷)이 분노를 분출시키기 위해 지은 책이다.……소위 창작이란 감정이 일어나 의지로 멈출 수 없거나, 치밀어 오르는 격정이 있어서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을 미룰 수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史記者 遷發憤之所爲作也……夫所謂作者 謂其興于有感而志不容已 或情有所激而詞不可緩之謂也]” 〈사마천(司馬遷)〉
(2)색인어:이탁오(李卓吾), 이지(李贄), 임재지(林載贄), 장서(藏書), 분서(焚書), 시비론(是非論), 양명학(陽明學), 양명좌파(陽明左派)
(3)참고문헌
• 藏書(中華書局)
• 李贄全集註(社會科學文獻出版社)
• 李贄年譜考略(林海權, 福建人民出版社)
• 이탁오와 조선유학(이영호, 한국양명학회)
• 이지의 《臧書》 연구(이재하, 동아대학교 석당전통문화연구원)
【서영수】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7.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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