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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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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종희(黃宗羲)는 1663년에 본서를 완성하였다. 그는 여기서 명조(明朝)의 멸망 원인을 분석하면서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비판하고 근대적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이러한 정치사상은 청말민국(淸末民國) 시기의 여러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 저자

(1)성명:황종희(黃宗羲)(1610~1695)
(2)자(字)·별호(別號):자는 태중(太沖), 호는 남뢰(南雷), 이주(梨洲)
(3)출생지역:중국 절강성(浙江省) 여요현(餘姚縣) 남뢰(南雷)
(4)주요활동과 생애
황종희는 왕부지(王夫之)와 고염무(顧炎武)와 함께 명말(明末) 삼대유로(三代遺老)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로 청대(淸代) 고증학(考證學)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부친인 황존소(黃尊素)(1585~1626)는 명(明)나라 만력(萬曆) 44년(1616) 진사(進士)가 되어 영국부추관(寧國府推官)에 제수되었다. 천계제(天啓帝) 초기에 청렴한 관료들이 조직한 동림당(東林黨)과 환관의 엄당(閹黨)이 대립하는 가운데 어사(御史)로 발탁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동림당의 수장이었던 양련(楊漣)이 엄당의 수장인 위충현(魏忠賢)을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위충현에 의해 동림당이 조정에서 축출되면서 황존소도 삭탈관직되고 옥사(獄死)하고 말았다.
그는 아버지의 유명(遺命)에 따라 양명우파(陽明右派)의 유종주(劉宗周)에게 유학(遊學)하여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을 겸비하였다. 21세에 재야 신사(紳士)들을 중심으로 한 복사(復社)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4번 낙방하였다. 35세에 청(淸)나라에 의해 명(明)나라가 멸망하자 반청(反淸)활동을 전개하여 도피와 은신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사학(史學)에 힘써 그의 제자인 만사동(萬斯同), 전조망(全祖望)을 거쳐 장학성(章學誠)에 이르는 학맥을 형성하였으며, 후대에 이를 절동사학(浙東史學)이라 불렀다. 그는 청나라 조정의 부름은 거절하였으나, 아들 황백가(黃百家)와 만사동을 보내 《명사(明史)》 편찬에 협력하였다. 그는 경학과 사학뿐 아니라, 천문, 역학, 도교, 불교, 음악 등에도 뛰어났다.
40대에 반청운동을 접고 학문과 강학에 종사하면서, 53세(1662)에 《명이대방록》을 저술하기 시작하여 다음해 완성하였다. 이 책은 그 인생의 총결산으로 명조의 멸망 원인을 분석하고 당시 사회 문제들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이후 명대 학술사를 정리하여 본서를 완성하였으며, 이후 《송원학안(宋元學案)》의 저술에 착수했으나‚ 17권만을 완성하고 죽었다. 아들 황백가가 이어서 저술하였고 전조망(全祖望)이 절반 이상을 보충하여 완성했다.
(5)주요저작:《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송원학안(宋元學案)》,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 《율려신의(律呂新義)》 등.

3. 서지사항

명이(明夷)란 《주역(周易)》 64괘의 하나로서, 밝음이 어둠에 가려진 상태를 나타낸 괘이다. 명이대방(明夷待訪)이란 자신의 불행한 삶과 명나라가 망하고 암울한 상황에서 현명한 군주의 출현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총 13편으로, 〈원군(原君)〉, 〈원신(原臣)〉, 〈원법(原法)〉, 〈치상(置相)〉, 〈학교(學校)〉, 〈취사(取士)〉, 〈건도(建都)〉, 〈전제(田制)〉, 〈병제(兵制)〉, 〈재계(財計)〉, 〈서리(胥吏)〉, 〈엄환(奄宦)〉 등 개혁해야 할 주제에 대해 논하고 있다.

4. 내용

본서는 중국사에서 전제군주제의 폐단을 지적하는 대표적 저술로 청말민국초에 공화제를 모색하는 혁명파에게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여 중국의 민약론(民約論)(사회계약론)으로 불리었으며, 그는 중국의 루소로 일컬어졌다. 황제로 상징되는 전제군주제를 비판하고 신사층을 중심으로 한 개량된 봉건제와 의회적 기능의 학교제도를 중심으로 한 지방분권적 제도를 주장하였다. 전통적 농본(農本)사상에서 벗어나 공업과 상업도 산업의 근본으로 보았으며, 통일된 화폐 유통을 주장한 진보적 정치론이 담겨 있다.
〈원군〉과 〈원신〉은 군주론과 신하론이다. 명대에 황제의 독제체제가 강화되어 그 측근인 환관들의 폐해가 나타났으며, 이 때문에 명나라가 멸망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신하는 천하 통치를 분담하는 자로 군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천하 백성들을 위해 복무하는 자로 보았다. 이는 신사층 관료를 통한 황제권의 견제라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 된다.
〈원법〉과 〈치상〉은 법제론과 재상론에 대한 내용이다.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 이전의 법은 성왕(聖王)이 백성들을 위해 의식주(衣食住)와 각종 제도를 만들어 가르치고 다스린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후대의 군주들이 천하를 차지하고 세습하면서 그 폐단이 나타났기 때문에 군주의 권한을 제한할 법을 만들어야 된다고 보았다. 그 방도로 재상제(宰相制)를 통해 군주제(君主制)를 보완하거나 대신할 수 있다고 보았다. 명나라의 멸망도 재상제의 폐지와 관련 있다고 보았다.
〈학교〉와 〈취사〉는 학교 제도와 관리 선발에 대한 내용이다. 학교는 단지 선비를 양성하는 곳이 아닌 공론을 형성하여 국정을 감시하는 의회적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또한 인재 선발에 있어서 기존의 과거제를 비판하였는데, 제비뽑기를 해도 과거제보다 나을 것이라고 조롱하였다. 그러나 과거제의 폐지보다 보완을 주장하였다.
〈건도〉에서는 북경이 아닌 남경에 수도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병제(兵制)〉에서는 국경수비와 군사제도를 논하였다. 〈전제〉와 〈재계〉에서는 토지제도와 경제제도를 논하였는데, 정전제(井田制)를 통한 토지 국유, 공업과 상업의 중시, 화폐의 통일과 유통을 주장하였다. 〈서리〉와 〈엄환〉에서는 서리(胥吏)와 환관의 폐해를 지적하였다.

5. 가치와 영향

동양은 19세기 서양 열강의 침략을 받아 타율적으로 근대화 되었다는 인식이 강하였다. 그러나 동양 세계가 발전하면서 동양 사회는 서양의 침략 이전에 내재적으로 발전하여 근대화의 맹아(萌芽)가 싹트고 있다는 비판이 나타났으며, 그 근거로 《명이대방록》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또한 전근대적인 황제 독제체제를 비판했다는 점에서 중국 근대화 시기 개혁과 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삼대의 정치를 이상화하여 보수성과 복고주의를 면할 수 없다는 한계점도 가지고 있다.

6. 참고사항

(1)명언
• “자기 한 몸의 이익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고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익을 받게 하며, 자기 한 몸의 해를 해로 여기지 않고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 해로움을 없애주어야 한다.[不以一己之利爲利而使天下受其利 不以一己之害爲害而使天下釋其害]” 〈원군(原君)〉
• “세속의 유자(儒者)들이 살피지 않고 공업과 상업을 말단으로 여기고 망령된 의론으로 그것을 억눌렀다. 공인이 진실로 성왕이 오기를 원하는 바이고 상인도 그들로 하여금 길에 나오기를 원한 것이니, 이것이 모두 근본이다. [世儒不察 以工商爲末 妄議抑之 夫工固聖王之所欲來 商又使其願出於途者 蓋皆本也]” 〈재계(財計)3〉
• “천하 사람들의 골수를 빼먹고 천하의 자녀들을 이산시켜서 한 사람의 쾌락만을 받든다. [敲剝天下之骨髓 離散天下之子女 以奉我一人之淫樂]” 〈원군(原君)〉
(2)색인어:황종의(黃宗羲)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명말삼대유로(明末三代遺老), 고증학(考證學), 민약론(民約論),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 지방분권(地方分權)
(3)참고문헌
• 明夷待訪錄(《黃宗羲全集》 1책, 浙江古籍出版社)
• 明夷待訪錄(西田太一郞 譯, 東洋文庫)
• 明夷待訪錄(山田湧 譯, 平凡社)
• 명이대방록(전해종 譯, 삼성문화문고)
• 명이대방록(김덕균 譯, 한길사)
• 黃宗羲(小野和子, 人物往來社)
• 淸代學術槪論(梁啓超, 이기동 譯, 여강출판사)
【이효재】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7.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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