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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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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매일 깨달음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 이 책은 명(明) 왕조의 멸망을 통해 통치 기제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며, 고염무(顧炎武) 자신의 정치적 문제의식까지 명료하게 드러내는 정치 개혁론이기도 하다. 전체 1021항목 중에서 고증의 사례, 정치제도, 사회·경제제도, 전통과 풍속, 경학 해석, 역사의식, 박문(博聞)의 일곱 가지 세부 영역으로 구분해 총 69개 항목을 직접 발췌했다.

2. 저자

(1)성명:고염무(顧炎武)(1613∼1682)
(2)자(字)·별호(別號):본명은 계곤(繼坤)인데 강(絳)으로 고쳤다. 자는 충청(忠淸)이고, 호는 정림(亭林)이다. 남도(南都)가 패한 뒤 이름은 염무(炎武), 자는 영인(寧人)으로 고쳤다.
(3)출생지역:강남(江南) 곤산(昆山)
(4)주요활동과 생애
명(明)나라 만력(萬曆) 41년(1613) 강소성 곤산에서 출생해 청(淸)나라 강희(康熙) 21년(1682) 산서성(山西省) 곡옥(曲沃)에서 사망했다. 고염무는 청대 고증학의 개조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일지록(日知錄)》을 고증학의 표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명나라 때 14세로 제생(諸生) 자격을 취득한 이후 고염무는 명나라 멸망 때까지 양조부인 고소불(顧紹芾)의 교육과 지도하에 고전과 당대의 정치·경제에 대한 심도 깊은 학습을 받았다. 더욱이 초서(抄書)를 강조했던 양조부의 영향은 고염무의 3대 정치 저작으로 알려진 《일지록》, 《천하군국이병서(天下郡國利病書)》, 《조역지(肇域志)》 찬술의 기초로 작용했다고 한다. 젊었을 때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에 관심을 두었다. 청나라가 침략하자 곤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저항했지만 패하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청나라가 들어 선 뒤에도 반청(反淸) 투쟁을 벌였다. 화북(華北) 등지를 두루 돌아다니다 만년에는 섬서(陜西) 화음(華陰)에 은거했다.
(5)주요저작:《좌전두해보정(左傳杜解補正)》, 《구경오자(九經誤字)》, 《석경고(石經考)》, 《음학오서(音學五書)》, 《운보정(韻補正)》, 《오경동이(五經異同)》, 《금석문자기(金石文字記)》 등

3. 서지사항

《일지록(日知錄)》은 왕부지(王夫之)·황종희(黃宗羲)와 함께 삼대 유로(遺老)로 알려진 고염무의 역작이다. 고염무는 일지(日知)의 의미에 대해 《일지록》의 목차(目次) 앞에 “나 고염무가 어릴 적부터 책을 읽다가 깨달은 바가 있으면 그때마다 기록해 두었는데 합치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때때로 다시 고쳤다.……자하(子夏)의 말을 취해 이름 짓기를 일지록이라 했으니 이를 통해 후대의 군자를 바로 잡겠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즉 일지는 《논어(論語)》 〈자장(子張)〉의 “날마다 알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고 달마다 할 수 있는 것을 잊지 않으면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 可謂好學也已矣]”라는 구절에서 기원한다. 따라서 《일지록》은 ‘매일 깨달음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 동시에 고염무 자신의 정치적 문제의식이 명료하게 드러나 있는 정치 개혁론이기도 하다.
고염무는 명 왕조의 멸망을 과거 순기능으로 작용했던 통치 기제의 합리성이 붕괴된 결과로 판단했다. 특히 통치 이념으로서 성리학이 본래 지닌 실용적이고 경세적인 측면이 쇠락하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원리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체제 내부의 문제에 대응하지 못했다고 파악했다. 왜냐하면 성리학의 심학화(心學化)는 개인의 수양에 국한된 세계관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정치 과정에 진입한 학습된 관료들 역시 해결 능력의 부족 내지 통치 기제의 합리성에 대한 몰이해라는 문제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고염무는 명의 멸망 원인 중 하나로 당시의 학술적 폐해를 지적한다. 즉 관념적·추상적 원리로 경도된 심학으로서의 이학(理學)의 폐해로부터 벗어나 경전에 대한 충실한 독서와 경전에 내포된 본래의 의미, 즉 경세(經世)를 위한 학문으로서의 취지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해답은 경학(經學)을 중심으로 하는 경세적인 학문 태도로의 복귀와 이에 의거해서 학습된 인재의 등용을 통한 명 왕조의 부활이었다. 결국 《일지록》은 실패한 통치 기제의 원인 분석과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대안의 모색이라는 정치 개혁론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4. 내용

《일지록》은 총 32권 1021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지록》의 구성을 보자면 1∼7권은 〈경의(經義)〉, 8∼12권은 〈정사(政事)〉, 13권은 〈세풍(世風)(풍속)〉, 14권은 〈예제(禮制)〉, 16∼17권은 〈과거(科擧)〉, 18∼21권은 〈예문(藝文)〉, 22∼24권은 〈명의(名義)〉, 25권은 〈고사진망(古事眞妄)〉, 26권은 〈사법(史法)(역사)〉, 27권은 〈주법(注法)(해석)〉, 28권은 〈잡사(雜事)〉, 29권은 〈병사(兵事)(군대)〉, 30권은 〈천상술수(天象術數)(천문)〉, 31권은 〈지리(地理)〉, 32권은 〈잡고증(雜考證)〉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를 다시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눈다면 경의(經義), 치도(治道), 박문(博聞)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경의는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한대(漢代) 유학으로의 복귀)을 시도하는 경학론이고, 치도는 사회·경제적 상황을 분석해서 일종의 흥망의 법칙을 추출하려는 통치론이며, 박문은 고금의 역사와 천문, 지리를 관통하는 지식론이다. 비록 고염무가 언제부터 이를 구상하고 집필을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지록》은 각종 경전과 기록을 정독하고 요체만을 추출해 고증한 그 자신의 평생에 걸친 기록이자 고염무를 청대 고증학(考證學)의 개조(開祖)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일지록》의 최초본은 강희(康熙) 9년(1670) 고염무의 나이 58세 때 8권 771항목으로 회안(淮安)에서 간행됐는데 이를 부산당초각본(符山堂初刻本)이라고 부른다. 1682년 고염무가 사망한 이후인 강희 34년(1695), 고염무를 사숙한 제자 반뢰(潘耒)가 고염무의 집안에서 《일지록》의 원고 전부를 얻어 복건(福建)에서 32권으로 발행했는데 이를 수초당각본(遂初堂刻本)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이전 부산당초각본에서 제외된 140항목이 첨가되었고 이후 《일지록지여(日知錄之餘)》 4권이 추가되었을 때 첨가된 102항목과 황간(黃侃)의 《교기(校記)》에서 더해진 2개 항목을 합쳐 1015항목이 되었다. 도광(道光) 14년(1834) 가정학자(嘉定學者) 황여성(黃汝成)은 수초당각본을 저본으로 하고 염약거(閻若璩)·심동(沈彤)·양녕(楊寧)·전대흔(錢大昕) 등의 교본을 참고해 도광 연간 이전 90여 명의 학자들이 이룬 《일지록》의 연구 성과를 담아 《일지록집석(日知錄集釋)》 32권을 완성했다. 이후 《일지록간오(日知錄刊誤)》와 《일지록속간오(日知錄續刊誤)》 각 2권을 연이어 간행함으로써 수초당각본의 심각한 오류를 교정하여 최종적인 완성을 이루었다. 현재 《일지록》은 황여성의 통행본(通行本)과 1958년 장계가 간행한 원초본(原抄本)이 있으며, 양자 간에는 편차의 차이가 있으나 내용에는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한다.

5. 가치와 영향

고염무가 스스로 언급했듯이 그의 저서 중에 평생의 뜻과 사업이 담긴 책은 32권짜리 《일지록》이다. 그가 책의 이름을 ‘일지록’이라 한 것은 30년간 학문을 좋아해서 형성한 저작이며, 결코 쉽게 써낸 즉석의 찰기(札記)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일지록》은 고거(考據)의 방법을 이용해 쓴 책으로 “한 사실을 논하는 데 반드시 증거가 갖추어진 다음 스스로 그 소신을 표명하였다.” 그의 고거는 실사구시(實事求是)였고,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옛날을 인용해 지금을 계획하는 일을 일종의 수단으로 삼았으며, 고거만을 위한 고거를 하지 않았다.
고염무로부터 비롯된 청대 고증학의 융성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 특히 김정희(金正喜)로 대표되는 실사구시 학파에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청대 고증학의 실증주의정신을 받아들여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명제로 천명하며 훈고를 통해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양계초(梁啓超)의 평론에 의하면, 고염무는 객관적인 측면에서 사무의 조리를 연구·고찰하였고, 학문 연구의 방법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염무는 평생 경세치용의 학문에 유의하고, 학술의 깊고 순수함과 인격의 숭고함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청말(淸末)에 이르러 그의 정신이 후인들에 의해 부활하게 되었다.

6. 참고사항

(1)명언 3개 추가 요망
• “통유(通儒)의 학문이 있고 속유(俗儒)의 학문이 있으니, 학문은 장차 이로써 체(體)를 밝히고 용(用)에 맞게 하려는 것이다.[有通儒之學 有俗儒之學 學者 將以明體適用也] 〈일지록원서(日知錄原序)〉
• “요(堯)와 순(舜), 우(禹)는 모두 이름이다. 옛날에는 호(號)가 없었으니 이 때문에 제왕들을 모두 이름으로써 기록하였고, 글을 적을 때 휘(諱)하지 않았다.[堯舜禹皆名也 古未有號 故帝王皆以名紀 臨文不諱也]” 〈제왕명호(帝王名號)〉
• “비록 공자(孔子) 같은 성인이 지금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하례(夏禮)와 은례(殷禮)를 배우려 하지만 근거할 데가 없고, 주례(周禮)를 배우려 해도 또한 근거할 데가 없을 것인데, 하물며 공자만 못한 사람이랴. 이것이 어찌 역사의 저술을 금하는 데만 철저하고 적당한 저작자를 발굴하는 데는 소홀하며, 장서(藏書)하는 데만 능숙하고 가르침을 펴는 데는 졸렬한 것이 아니겠는가.[雖以夫子之聖 起於今世 學夏殷而無從 學周禮而又無從也 況其下焉者乎 豈非宻於禁史 而疎於作人 工於藏書 而拙於敷教者邪]” 〈비서국사(祕書國史)〉
(2)색인어:고염무(顧炎武), 일지록(日知錄), 일지록지여(日知錄之餘), 일지록집석(日知錄集釋), 일지록간오(日知錄刊誤) 일지록속간오(日知錄續刊誤)
(3)참고문헌
• 日知錄校注(陳垣, 安徽大學出版社)
• 日知錄集釋(浙江古籍出版社)
• 日知錄集釋(黃汝成 集釋, 欒保群·呂宗力 校點, 上海古籍出版社)
• 日知錄校釋(張京華, 嶽麓書社)
• 日知錄(고염무 저, 윤대식 역, 지식을 만드는 사람들)
【서영수】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8.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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