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동양고전해제집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 개요

황종희(黃宗羲)가 1663년에 완성한 명대(明代) 학술사로, 그 내용은 양명학(陽明學)의 변천 등 학술적 내용뿐만 아니라 당파의 변화까지도 다루고 있다.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학술사(學術史)로서 후대 학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저자

(1)성명:황종희(黃宗羲)(1610~1695)
(2)자자(字)·별호(別號):자는 태중(太沖), 호는 남뢰(南雷), 이주(梨洲).
(3)출생지역:중국 절강성(浙江省) 여요현(餘姚縣) 남뢰(南雷)
(4)주요활동과 생애
황종희는 왕부지(王夫之)와 고염무(顧炎武)와 함께 명말(明末) 삼대유로(三代遺老)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로 청대(淸代) 고증학(考證學)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부친인 황존소(黃尊素)(1585~1626)는 명(明)나라 만력(萬曆) 44년(1616) 진사(進士)가 되어 영국부추관(寧國府推官)에 제수되었다. 천계제(天啓帝) 초기에 청렴한 관료들이 조직한 동림당(東林黨)과 환관의 엄당(閹黨)이 대립하는 가운데 어사(御史)로 발탁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동림당의 수장이었던 양련(楊漣)이 엄당의 수장인 위충현(魏忠賢)을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위충현에 의해 동림당이 조정에서 축출되면서 황존소도 삭탈관직되고 옥사(獄死)하고 말았다.
그는 아버지의 유명(遺命)에 따라 양명우파(陽明右派)의 유종주(劉宗周)에게 유학(遊學)하여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을 겸비하였다. 21세에 재야 신사(紳士)들을 중심으로 한 복사(復社)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4번 낙방하였다. 35세에 청(淸)나라에 의해 명(明)나라가 멸망하자 반청(反淸)활동을 전개하여 도피와 은신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사학(史學)에 힘써 그의 제자인 만사동(萬斯同), 전조망(全祖望)을 거쳐 장학성(章學誠)에 이르는 학맥을 형성하였으며, 후대에 이를 절동사학(浙東史學)이라 불렀다. 그는 청나라 조정의 부름은 거절하였으나, 아들 황백가(黃百家)와 만사동을 보내 《명사(明史)》 편찬에 협력하게 하였다. 그는 경학과 사학뿐 아니라 천문, 역학, 도교, 불교, 음악 등에도 뛰어났다.
40대에 반청운동을 접고 학문과 강학에 종사하면서, 53세(1662)에 《명이대방록》을 저술하기 시작하여 다음해 완성하였다. 이 책은 그 인생의 총결산으로 명조의 멸망 원인을 분석하고 당시 사회 문제들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이후 명대 학술사를 정리하여 본서를 완성하였으며, 이후 《송원학안(宋元學案)》의 저술에 착수했으나‚ 17권만을 완성하고 죽었다. 아들 황백가가 이어서 저술하였고 전조망(全祖望)이 절반 이상을 보충하여 완성했다.
(5)주요저작:《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송원학안(宋元學案)》,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 《율려신의(律呂新義)》 등.

3. 서지사항

전 62권으로 명대 여러 학자들의 문집 등을 모아서 이를 학파별로 나누어 본서를 완성했다. 〈사설(師說)〉에서 명대의 주요 학자의 학설을 다루었으며, 권1에서 권62까지는 숭인학파(崇仁學派)에서 즉산학파(蕺山學派)에 이르기까지 명대 주요학파를 19학안(學案)으로 분류하고 각 학파의 학자 208명에 대해 서술하였다.

4. 내용

〈사설〉에는 명초(明初) 대유(大儒)인 방효유(方孝孺), 왕수인(王守仁) 등의 학설을 설명하고 있다.
각 학안(學案)에서는 맨 앞에 소서(小序)를 두어 그 학파의 학술 연원과 요지를 서술하였다. 학파 인물들마다 소전(小傳)을 지어 일생을 개괄하고 그 사승관계를 밝혔다. 그리고 간간이 비평하여 자신의 견해를 나타냈다.
그는 명대 학술사를 초·중·말기로 분류하고 있다. 초기에는 정주학(程朱學)이 유행하여 오여필(吳與弼)의 숭인(崇仁)학파와 설선(薛瑄)의 하동(河東)학파가 성립되었는데, 이들은 순수하게 주자학(朱子學)만을 추종하는 학파였다. 이 시기에 진헌장(陳獻章)을 시조로 하여 백사(白沙)학파가 성립되었는데, 이들은 주자학뿐 아니라 육학(陸學)을 섭렵하여 양명학(陽明學)의 시초가 되었다고 보았다.
중기에는 양명학이 번성하게 되어 요강(姚江)학파가 설립되었고‚ 절동(浙東)·강우(江右) 등의 학파가 생겨나서 양명학을 계승 발전시켜 양명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보았다. 말기에는 고헌성(顧憲成)과 고반룡(高攀龍)을 시조로 한 동림(東林)학파, 유종주(劉宗周)을 시조로 하는 즙산(蕺山)학파가 성립하여 양명학의 폐단을 수정하는 것을 주로 하였으며, 명말청초(明末淸初) 고증학(考證學)과 절동(浙東)학파를 여는 단서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는 본서에 대해 황종희는 요강(姚江) 출신으로 왕수인을 높이고 설선(薛瑄)을 낮추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왕수인을 낮추고 설선을 높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이지(李贄)에 대한 학안이 없으며 동림당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높아 한쪽 견해로 치우쳐 있다는 평가하였다.

5. 가치와 영향

본서는 명대 학파의 발생과 분파의 연원이 상당히 자세하여 각 학파의 득실을 볼 수 있고 명대 당파(黨派)의 유래를 알 수 있다. 또한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학술사로 후대 학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6. 참고사항

(1)명언
• “말을 신중히 하지 않으면 마음이 보존되지 않으니, 마음이 보존되면 말이 신중해 진다.[言之不謹 心不存也 心存則言謹矣]” 〈권7 하동학안 상(河東學案上)〉
• “예로부터 성현(聖賢)의 성덕(大業)과 대업(盛德) 중에 배움을 통해 이루지 않은 경우는 없다.[自古聖賢 盛德大業 未有不由學而成者也]” 〈권17 강우왕문학안(江右王門學案)2〉
• “학문을 하고 일을 하는 데 눈앞의 이익을 구하는 것을 꺼려야 하니, 만일 눈앞의 이익만을 구하면 스스로 한계를 긋고 기(氣)가 막혀 연원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爲學作事 忌求近功 求近功 則自劃氣沮 淵源莫及]” 〈권52 제유학안 중(諸儒學案中)6〉
(2)색인어:황종의(黃宗羲), 명유학안(明儒學案), 양명학(陽明學), 동림당(東林黨), 송원학안(宋元學案)
(3)참고문헌
• 明儒學案標點本(中華書局)

【이효재】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