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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1)

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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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等文字 識見筆力 竝入西漢이라
臣以庸材 備員라가 하니 皆東方要地니이다
私竊以爲 守法令하고 治文書하고 赴期會로는 不足以報塞萬一일새
輒伏思念東方之要務 陛下之所宜知者하야 得其一二하야 草具以聞하오니 而陛下擇焉하소서
前任密州할새 建言 自古 河北 與中原離合하야 常係社稷存亡이어늘 所以灌輸河北이니
甁竭則 唇亡則齒寒이요
而其民 喜爲盜賊하야 爲患最甚이라하야 因爲陛下(盡)[畫]所以待盜賊之策하니이다
及移守徐州 覽觀山川之形勢하고 察其風俗之所上하며 而考之於載籍하니 然後 又知徐州爲南北之要하야 而京東諸郡安危所寄也니이다
夫以羽之雄略으로 捨咸陽而取彭城이면 則彭城之險固形便하야 足以得志於諸侯者 可知矣니이다
臣觀其地호니 三面被山하고 獨其西平川數百里 西走하니 使楚人開關而延敵호되 하고 突騎雲縱하면니이다
地宜菽麥하야 一熟而飽數歲하며 其城三面阻水하야 樓堞之下 以汴, 泗爲池하고 獨其南可通車馬하야在焉하니이다
其高十仞이요百步 若用武之世 屯千人其上하고하야 凡戰守之具 以與城相表裏하고 而積三年糧於城中이면 雖用十萬人이라도 不易取也리이다
其民 皆長大하고 膽力絶人하야 喜爲剽掠하야 小不適意하면 則有飛揚跋扈之心하니 非止爲盜而已니이다
其人以此自負하야 凶桀之氣 積以成俗하니이다
州之東北七十餘里이니 自古爲하야 商賈所聚 其民富樂하니이다
凡三十六冶 皆大家 藏鏹巨萬하야 常爲盜賊所窺로되 而兵衛寡弱하야 有同兒戱하니이다
臣中夜以思 卽爲寒心하니
使劇賊致死者十餘人 白晝入市하면 則守者皆棄而走耳리이다
地旣産精鐵하야 而民皆善鍛하니 散冶戶之財하야 以嘯召無賴하면 則烏合之衆 數千人之仗 可以一夕具也
順流南下하면 하야 而徐有不守之憂矣리이다
使不幸而賊有過人之才하야之徒 得徐而逞其志하면 則京東之安危 未可知也니이다
近者 河北 奏乞禁止利國監鐵하야 不許入河北한대 朝廷從之하니이다
況天下一家하야 東北二冶 皆爲國興利어늘 而奪彼與此 不已隘乎잇가
自鐵不北行으로 冶戶皆有失業之憂하야 詣臣而訴者니이다
臣欲因此하야 以征(徵)冶戶하야 爲利國監之捍屛하노이다
今三十六冶 冶各百餘人 採礦伐炭하니 多饑寒亡命强力鷙忍之民也니이다
臣欲使冶戶 每冶 各擇有材力而忠謹者하야 保任十人하고 籍其名於官하야 授以却刃刀槊하야 敎之擊호되 每月 集於知監之庭하야 而閱試之하고
藏其刃於官하야 以待大盜하며 不得役使하고 犯者 以違制論이니이다
冶戶爲盜所(擬)[睨] 久矣
民皆知之하니 使冶出十人以自衛하면 民所樂也 而官又爲除近日之禁하야 使鐵得北行이면 則冶戶皆悅而聽命하야 奸猾破膽하야 而不敢謀矣리이다
徐城 雖險固 而樓櫓敝惡하고 又城大而兵少하야 緩急不可守니이다
今戰兵千人耳 하오니 故徐人也
嘗屯於徐하야 營壘材石 旣具矣러니 而遷於南京하니이다
異時 하야 畏饋餉之勞하야 而移之西耳러니
今兩路爲一하니 其去來無所損益이요 而足以爲徐之重이니이다
城下數里 頗産精石無窮이요 數百人이니 臣願募石工以足之호되 聽不差出하야 使此數百人者 常採石以甃城이면 數年之後 擧爲하리니
要使利國監 不可窺 則徐無事 徐無事 則京東無虞矣리이다
沂州 山谷重阻하야하야 盜賊 每入徐州界中하니이다
陛下若採臣言하시고 不以臣爲不肖이신댄 하시고 且得兼領沂州하시면
必有以自效하리이다
京東惡盜 多出逃軍하니 逃軍爲盜 民則望風畏之 何也
技精而法重也일새니이다
技精則難敵하고 法重則致死 其勢然也니이다
自陛下置將官하고 修軍政으로 士皆精銳로되 而不免於逃者 臣嘗考其所由컨대 蓋自近歲以來 部送罪人하야 皆不使役人하고 而使禁軍하니
軍士當部送者 受牒卽行하야 往返 常不下十이라 道路之費 非取息錢이면 不能辦이니이다
百姓畏法하야 不敢貸하고 貸亦不可復得이요 惟所部將校 乃敢出息錢與之라가 歸而刻其糧賜
以故 上下相持하야 軍政不修하야 博弈飮酒하야 無所不至하고 窮苦無聊 則逃去爲盜하니이다
臣自至徐 卽取不係省錢百餘千하야 別儲之라가 當部送者 量遠近裁取호되 以三月刻納하고 不取其息하며 將吏有敢貸息錢者 痛以法治之하니
然後 嚴軍政하고 禁酒博이러니
比期年 士皆飽暖하야 練熟技藝하야 等第爲諸郡之冠하니이다
陛下遣敕使按閱하사 所具見也시니이다
臣願下其法諸郡하야 推此行之하시면
則軍政修而逃者寡하리니 亦去盜之一端也니이다
臣聞之호니 漢相
孝文帝時 安官樂職하야 上下相望하야 莫有苟且之意러니 其後 稍稍變易하야 公卿以下 轉相促急하고 司隷, 發揚陰私하야
吏或居官數月而退하고 二千石益輕賤하니 吏民慢易之하야 知其易危하고 小失意하면 則有離畔之心하니이다
從(縱)橫 吏士臨難하야 莫肯伏節死義者威權 素奪故也니이다
國家有急이면 取辦於二千石이니 二千石 尊重難危라야 乃能使下라하니이다
以王嘉之言而考之於今하면 郡守之威權 可謂素奪矣니이다
上有監司伺其過失하고 下有吏民持其長短하야 未及按問 而差替之命 已下矣니이다
欲督捕盜賊하야 法外求一錢以使人이라도 且不可得이라
盜賊凶人 情重而法輕者 守臣 輒配流之하면 則使所在法司 覆按其狀하야 劾以하니이다
惴惴如此하니 何以得吏士死力하야 而破奸人之黨乎잇가
由此觀之하면 盜賊所以滋熾者 以陛下守臣權太輕故也니이다
臣願陛下稍重其權하야 責以大綱하고 略其小過하시며 凡京東多盜之郡 自靑, 以降으로 如徐, 沂, 齊, 曹之類 皆愼擇守臣하고 聽法外處置强盜하시며 頗賜緡錢하야 使得以布設耳目하고 蓄養爪牙하노이다
然緡錢 多賜則難常이요 又不足於用이니 臣以爲每郡 可歲別給一二百千하야 使以釀酒하고 凡使人戢捕盜賊이면 得以酒予之하며 敢以爲他用者 坐贓論이니이다
賞格之外 歲得酒數百斛이면 亦足以使人矣리니 此又治盜之一術也니이다
이나 皆其小者 其大者 非臣之所當言이니 欲黙而不發이면 則又私自念컨대 遭値陛下英聖特達如此어늘 若有所不盡이면 非忠臣之義
昧死復言之하노이다
昔者 以詩賦取士러니 今陛下以經術用人하시니 名雖不同이나 然皆以文詞進耳니이다
考其所得하면 多吳, 楚, 閩, 蜀之人이요 至於京東, 西, 河北, 河東, 陝西五路하야는 蓋自古豪傑之場이라 其人 沈鷙勇悍하야 可任以事이나 欲使治聲律하고 讀經義하야 以與吳, 楚, 閩, 蜀之士 爭得失於毫釐之間이면 則彼有不仕而已
其得人常少하니이다
夫惟忠孝禮義之士 雖不得志라도 不失爲君子어니와 若德不足而才有餘者 困於無門이면 則無所不至矣
臣願陛下特爲五路之士하야 別開仕進之門하노이다
漢法 郡縣秀民 推擇爲吏하고 考行察廉하야 以次遷補하야 或至二千石하고 入爲公卿하니이다
古者 不專以文詞取人이라
得士爲多하니이다
起於卒史하고 奮於書佐하고 選於嗇夫하고 出於獄吏하며 其餘名臣循吏 由此而進者 不可勝數니이다
唐自中葉以後 方鎭 皆選하야 以掌하니 是時 四方豪傑 不能以科擧自達者 皆爭爲之하야 往往積功하야 以取旄鉞하니이다
雖老奸巨盜 或出其中이나 而名卿賢將으로之流 所得 亦已多矣니이다
王者之用人 如江河하니 江河所趨 百川赴焉하고 蛟龍生之하며
及其去而之他 則魚鼈無所還其體하고爲之制니이다
今世 皆奴僕庸人者 無他
以陛下不用也일새니이다
今欲用胥史牙校로되 而胥史行文書하고 治刑獄錢穀하면 其勢不可廢鞭撻이니 鞭撻一行이면 則豪傑不出於其間이니이다
凡士之刑者 不可用이요 而用者 不可刑이니이다
臣願陛下採唐之舊하야 使五路監司, 郡守 共選士人하야 以補호되 皆取人材하야 心力有足過人이나 而不能從事於科擧者 祿之以今之하고 而課之 督捕盜賊之類호되 自公罪杖以下聽贖하소서
依將校法하야 使長吏得薦其才者하야 第其功閥하고 書其歲月하야 使得出仕호되 而不以 限其所至하시며 朝廷察其尤異者하야 擢用數人이면
則豪傑英偉之士 漸出於此途하야 而奸猾之黨 可得而籠取也리이다
其條目委曲 臣未敢盡言이오니 惟陛下留神省察하소서
晉武平吳之後 詔天下罷軍役하야 州郡悉去武備어늘한대
帝見之하고 曰 天下名言也라호되 而不能用이러니
之後 盜賊蜂起호되 郡國皆以無備하야 不能制하야 其言乃驗하니이다
今臣於無事之時 屢以盜賊爲言하니 其私憂過計 亦已甚矣
陛下縱能容之 必爲議者所笑하리이다
使天下無事而臣獲笑 可也어니와 不然하야 事至而圖之하면 則已晩矣리이다
干犯天威하오니 罪在不赦니이다


03. 서주徐州에서 황제皇帝께 올린 글
이 글들은 식견識見필력筆力이 모두 서한西漢(前漢)의 경지에 들어갔다.
은 용렬한 재주로 책부冊府인원수人員數만 채우고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 두 고을을 맡으니, 이곳들은 모두 동방東方의 중요한 지역입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그저 법령法令을 지키고 문서文書를 다스리고 기회期會를 따르는 것만으로는 만분의 일이나마 은혜에 보답할 수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엎드려 동방東方요무要務로 폐하께서 마땅히 아셔야 할 것들을 가려내서 그중에 한두 가지를 대략 갖추어 아뢰오니, 폐하께서 채택採擇하소서.
이 전에 밀주密州를 맡았을 때에 건의하기를 “예로부터 하북河北 지방은 중원中原과 떨어졌다 합했다 해서 항상 국가國家존망存亡과 관계되었는데, 경동京東 지방은 하북河北 지방에 물자物資를 공급하는 곳입니다.
이 고갈됨은 (큰 병)의 수치이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입니다.
또 이 지역 백성百姓들은 도적盜賊이 되기를 좋아해서 폐해가 되는 것이 아주 심합니다.”라고 아뢰고, 인하여 폐하를 위해 도적을 대비하는 대책을 모두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자리를 옮겨 서주徐州를 맡게 되자 산천山川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고 풍속風俗숭상崇尙하는 바를 관찰하며 여러 전적典籍들을 살펴본 뒤에는, 또 서주徐州남북南北의 중요한 지역이 되어서 경동京東 지방의 여러 안위安危서주徐州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옛날 항우項羽관중關中으로 들어가서 함양咸陽을 불태우고 동쪽으로 돌아와서는 팽성彭城에 도읍했습니다.
항우項羽와 같이 뛰어난 지략智略을 가진 자가 함양咸陽을 버리고 팽성彭城을 취했으니, 그렇다면 팽성彭城험고險固하고 지형地形이 편리하여 충분히 제후諸侯들에게 뜻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 지역을 관찰해보니, 삼면三面으로 둘러싸여 있고 오직 서쪽만 내가 흐르는 수백 리의 평지平地가 있어서 서쪽으로 지방으로 왕래할 수 있으니, 만일 지방 사람들이 관문關門을 열고서 적을 맞이하되 재관材官들이 화살을 쏘고 돌기突騎(돌격 기병대)를 풀어놓는다면, 참으로 지붕 위에서 병을 세워 물을 쏟는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또 이 지역은 조와 보리가 잘 자라 한 번 풍년豊年이 들면 몇 년 동안 배불리 먹으며, 이 삼면三面이 물로 막혀 있어서 망루望樓성첩城堞 아래에는 변수汴水사수泗水해자垓子가 이루어져 있고, 오직 남쪽만 수레와 말이 통행할 수 있어서 희마대戱馬臺가 이곳에 있습니다.
그 높이는 열 길이고 넓이와 길이는 이니, 만약 무력武力을 행사하는 세상에 천 명을 희마대戱馬臺 위에 주둔시키고 뇌목櫑木포석炮石 등 모든 전투하고 수비하는 도구들을 모아서 과 서로 표리表裏가 되게 하고 3년 먹을 군량을 성안에 쌓아놓는다면, 비록 10만의 대군大軍을 사용하더라도 쉽게 점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지역 백성百姓들은 모두 키가 크고 담력膽力이 남보다 뛰어나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여 조금만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날뛰고 발호跋扈하는 마음을 가지니, 다만 도적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나라 고조高祖패현沛縣 사람이고 항우項羽숙천宿遷 사람이고 유유劉裕팽성彭城 사람이고 주전충朱全忠탕산碭山 사람인데, 이들 지역은 모두 서주徐州 수백 리 안에 있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자부하여 흉악하고 호걸스러운 기운이 쌓여서 풍속을 이루었습니다.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는 30만 대군大軍으로도 팽성彭城을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하였고, 왕지흥王智興이 졸병의 용렬한 자질資質서주徐州에서 눈을 부릅뜨고 제멋대로 굴었으나 조정朝廷에서 또한 이들을 토벌하지 못했으니, 이는 어찌 그 지형地形이 편리하고 인민人民병졸兵卒들이 용맹하고 사납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서주徐州에서 동북방으로 70여 리 되는 지점이 바로 이국감利國監이 있는 곳인데, 예로부터 을 맡은 관청으로 상고商賈들이 모이는 곳이라서 백성百姓들이 부유하게 잘삽니다.
모두 36개의 야호冶戶(대장간)가 있는데 이 야호冶戶들은 모두 부유한 집안들로서 쇠(돈꿰미) 거만巨萬을 보관하여 항상 도적들이 엿보는데도, 수비하는 병졸들이 적고 약하여 아이들 놀이와 같습니다.
이 한밤중에 이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목숨을 내놓은 사나운 10여 명이 백주白晝시장市場으로 들어오면 지키는 자들이 모두 대장간을 버리고 도망갈 것입니다.
이 지역은 이미 정철精鐵이 생산되어서 백성百姓들이 다 단련을 잘하니, 야호冶戶의 재물을 흩어서 무뢰배無賴輩들을 불러 모은다면, 오합지중烏合之衆으로 모인 수천 명의 병기兵器를 하루 저녁에 갖출 수가 있습니다.
흐르는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신시辰時에 출발하면 사시巳時에 이르러서 서주徐州를 지키지 못하는 우환憂患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도적들 중에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어서 여포呂布유비劉備와 같은 무리가 서주徐州를 점령하고 그 뜻을 편다면, 경동京東안위安危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근자에 하북전운사河北轉運司에서 이국감利國監을 금지하여 하북河北 지방으로 들여오지 못하게 할 것을 청하자, 조정朝廷에서 그 의견을 따랐습니다.
옛날에 나라 사람이 활을 잃고 나라를 잊지 못하자, 공자孔子께서 오히려 그릇이 작다고 여기셨습니다.
하물며 〈지금〉 천하天下가 한 집안이 되어서 동쪽과 북쪽 두 대장간이 있는 곳이 모두 나라를 위하여 이익利益을 일으키고 있는데, 저기의 것을 뺏어다가 여기에 주는 것은 너무 편협偏狹하지 않겠습니까?
을 북쪽 지방으로 수출하지 못하게 되자, 야호冶戶들이 모두 실업失業할 우려가 있어서 에게 찾아와 하소연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야호冶戶를 징발해서 이국감利國監의 울타리로 만들고자 합니다.
지금 36개의 야호冶戶에 각각 백여 명의 인부人夫들이 철광을 채굴하고 숯을 만들 나무를 베고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추위와 굶주림에 쫓겨서 망명亡命한 자들로 힘이 세고 사납고 잔인한 백성百姓들입니다.
야호冶戶로 하여금 야호冶戶마다 각각 재주와 힘이 있고 성품이 충성스럽고 삼가는 자들을 선발하여 10명씩 보임保任하게 하고 그 이름을 관청의 장부에 올린 다음, 날을 세우지 않은 칼과 창을 주어서 치고 찌르는 방법을 가르치고 매월 두 번 아참衙參할 때에 지감知監의 뜰에 모이게 해서 이들을 사열査閱하려 합니다.
그리고 시험한 뒤에는 그 병기를 관청에 보관하여 큰 도적을 대비하게 하며, 이들을 사역使役시키지 못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황제의 제명制命을 어긴 로 논하고자 합니다.
야호冶戶들은 도둑들에게 노림을 당한 지가 오래입니다.
백성百姓들이 다 이것을 알고 있으니, 야호冶戶마다 10명씩을 내어서 스스로 지키게 한다면 백성百姓들이 기꺼이 따를 것이고, 관청에서 또 근일近日금령禁令을 제거해서 을 북쪽으로 수출하게 한다면 야호冶戶들이 모두 기뻐하고 명령을 따라서 간활奸猾한 자들이 낙담落膽하여 감히 다른 일을 도모하지 못할 것입니다.
서주성徐州城은 비록 험고하나 망루望樓가 허물어지고 조악하며 또 은 큰데 병력兵力이 적어서 위급할 때에 지킬 수가 없습니다.
현재 전투할 수 있는 군사가 겨우 1천 명뿐이니, 남경南京에서 새로 모은 기사군騎射軍의 두 지휘指揮서주徐州로 옮길 것을 청하오니, 이들은 원래 서주徐州 사람들입니다.
일찍이 서주徐州에 주둔해서 영루營壘(주둔지)를 만들 재목과 돌이 이미 구비되었었는데, 영루營壘남경南京으로 옮기고 말았습니다.
예전에는 전운사轉運使동로東路서로西路로 나뉘어 이들을 궤향饋餉하는 수고로움을 꺼려서 서쪽으로 옮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西 양로兩路가 하나가 되었으니, 〈두 지휘指揮서주徐州로 옮긴다면〉 이리 가든 저리 가든 손해되거나 이익되는 바가 없고 충분히 서주徐州의 중요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주성徐州城 아래 몇 리에는 자못 좋은 돌이 무궁하게 생산되고 봉화奉化상군廂軍은 현재 결원이 수백 명이니, 은 원컨대 석공石工을 모집하여 이 결원을 채우되 다른 일에 차출되지 않도록 하고, 이 수백 명으로 하여금 항상 돌을 채취하여 을 쌓게 한다면 몇 년 뒤에는 모두가 금성탕지金城湯池의 험고한 이 될 것입니다.
요컨대 이국감利國監을 적들로 하여금 엿보지 못하게 한다면 서주徐州가 무사할 것이고, 서주徐州가 무사하다면 경동京東에 우려할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기주沂州는 산과 골짜기가 겹겹으로 막혀 있어 도망하는 자들의 소굴이 되어서 도적들이 매번 서주徐州 경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만약 의 말을 채택하시고 불초不肖하다고 여기지 않으신다면, 원컨대 다시 3년 동안 서주徐州를 맡기시고 또 겸하여 기주沂州병갑순검공사兵甲巡檢公事를 관장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신다면 반드시 스스로 좋은 성과成果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경동京東 지방의 흉악한 도적들은 대부분 도망병 출신이니, 도망병들이 도적이 되면 백성들이 풍문만 듣고도 두려워하는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무예武藝
가 정밀하고 국법國法엄중嚴重하기 때문입니다.
무예武藝가 정밀하면 상대하기가 어렵고 국법國法이 엄중하면 사력死力을 다하여 대항하게 되니, 이는 형세가 그러한 것입니다.
폐하께서 장관將官을 설치하고 군정軍政을 닦으신 이래로 군사들이 모두 정예병이 되었으나 도망하는 것을 면치 못하는 것은, 이 일찍이 그 까닭을 살펴보건대 근년 이래로 죄인罪人을 압송하여 군대에 배정하는 일을 모두 역인役人을 시키지 않고 금군禁軍(황제의 친위군)을 시킵니다.
죄인을 압송하는 일을 맡은 군사들이 죄인을 압송하라는 문서를 받으면 즉시 길을 떠나는데, 오고 가는 날짜가 항상 열흘 이상이 걸려 도로道路의 경비를 이자를 내는 돈이 아니면 장만하지 못합니다.
백성들은 을 두려워해서 감히 이것을 빌려주지 못하고 빌려주더라도 다시 받을 수가 없으며, 오직 거느리고 있는 장교將校가 감히 이식전利息錢을 내어주었다가 돌아오면 녹봉으로 받는 양식에서 깎아버립니다.
이 때문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대립하여 군정軍政이 다스려지지 못해서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는 등 못하는 짓이 없고, 매우 곤궁하고 괴로워서 무료하면 도망가서 도적이 되는 것입니다.
서주徐州에 부임하자마자 아무 데에도 속하지 않은 성전省錢 백여 (千)을 취하여 따로 저축해두었다가 죄인을 압송하는 일이 있게 되면 거리의 원근을 헤아려서 적당히 가져가게 하되 3개월로 시한을 정하여 바치게 하고 이식利息을 취하지 않았으며, 장수將帥관리官吏들 중에 감히 이식전利息錢을 빌려주는 자가 있으면 통렬히 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런 뒤에 군정軍政을 엄하게 하고 술 마시고 도박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1년이 지나자 군사들이 모두 배부르고 따뜻하여 무예武藝를 익숙하게 익혀서 등급이 여러 의 으뜸이 되었습니다.
이는 폐하께서 칙사를 보내어 조사하고 살피셔서 자세히 보신 바입니다.
은 원컨대 이 방법을 여러 에 내려서 이것을 미루어 행하게 하소서.
그러면 군정軍政이 닦여져서 도망병이 적어질 것이니, 또한 도적을 제거하는 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 들으니, 나라 승상 왕가王嘉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효문제孝文帝 때에는 이천석二千石장리長吏가 관청을 편안히 여기고 직책을 즐거워하여서 상하上下가 서로 바라보면서 구차한 뜻이 없었는데, 그 뒤에 차츰차츰 변하여 공경公卿 이하가 더욱 서로 각박해지고, 사례司隷자사刺史들이 남의 은밀한 일을 들추어냅니다.
그리하여 관리가 혹 관직에 있은 지 수개월 만에 물러나고 이천석二千石이 더욱 가볍게 여겨지고 천시당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이들을 깔보고 업신여기며 이들을 위태롭게 하기가 쉽다는 것을 알고는 조금만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이반離反의 마음을 갖습니다.
전에 산양山陽의 도망한 무리 소령蘇令이 제멋대로 횡행하는데도 관리와 군사들이 을 당하여 절의節義를 위해 기꺼이 죽으려는 자가 없었던 것은 권위權威가 평소에 실추되었기 때문입니다.
국가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이천석二千石에게 책임을 맡기니, 이천석二千石의 지위가 존중되고 위태롭게 하기가 어려워야 비로소 아랫사람을 부릴 수 있습니다.”
왕가王嘉의 말을 가지고 지금에 고찰해보면 군수郡守의 권위가 평소 실추되었다고 이를 만합니다.
위에서는 감사監司가 그의 과실을 사찰하고 있고 아래에서는 아전과 백성들이 그의 장단점을 평가하는 권한을 쥐고 있어서, 미처 나라에서 조사하여 죄를 묻기도 전에 교체하라는 이 이미 내려옵니다.
수령守令들이 도적을 독촉하여 잡고자 해서 밖에 1을 구하여 사람을 부리려 하더라도 이조차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도적과 흉악한 자들의 죄질罪質이 정상은 중하나 은 가벼운 자들을 수령守令이 〈을 무겁게 내려〉 곧 유배流配 보내면, 이들이 소재지所在地법사法司로 하여금 자신의 범죄 상황을 조사하게 하여 실입失入으로 탄핵합니다.
수령守令들이 이와 같이 벌벌 떨고 있으니, 어떻게 관리와 군사들이 죽을힘을 다하여 간악한 자들의 도당을 깨뜨리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도적들이 더욱 더 치성熾盛하는 까닭은 폐하의 수령守令들의 권력이 너무 가볍기 때문입니다.
은 원컨대 폐하께서 태수太守들의 권한을 조금 중하게 해서 큰 강령만을 책임 지우고 작은 허물은 가볍게 넘기시며, 경동京東 지방 중 도적이 많은 고을인 청주靑州운주鄆州 이하로 서주徐州기주沂州제주齊州조주曹州와 같은 지역에는 모두 태수太守들을 신중히 선발하고 밖으로 강도强盜들을 처치하는 것을 허락하시며, 또 약간의 민전緡錢을 하사해서 그들로 하여금 이목耳目(정탐꾼)을 널리 배치하고 조아爪牙(용맹한 병사들)를 기르게 하소서.
그러나 민전緡錢은 많이 하사하면 계속하기가 어렵고 적으면 또 쓰기에 부족하니, 은 생각하건대 군마다 1년에 별도로 1, 2백 (緡)을 주어서 이 돈으로 술을 빚게 하고, 사람을 시켜서 도적을 체포하게 했으면 이 술을 가지고 상을 주며 감히 달리 이 술을 쓰는 자는 장률贓律(뇌물죄)로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으로 주는 것 외에 해마다 술 수백 섬을 얻는다면 또한 충분히 사람을 부릴 수 있을 것이니, 이것도 도적을 다스리는 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자질구레한 것이고 큰 것은 이 마땅히 말할 바가 아니니, 침묵하고 발설하지 않고자 하였으나 또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건대 이와 같이 영성英聖하고 특달特達한 폐하를 만났는데도 만일 말을 다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충신忠臣의 의리가 아니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죽을죄를 무릅쓰고 다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시부詩賦로 선비를 뽑았는데 지금 폐하께서는 경학經學으로 인재를 등용하시니, 시부詩賦경학經學은 이름은 비록 같지 않으나 모두 문장文章으로 등용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선발된 것을 살펴보면 지방과 지방의 사람이 많고, 경동京東경서京西하북河北하동河東섬서陝西의 다섯 에 이르러서는 예로부터 호걸들이 배출된 장소라서 이 지역 사람들은 침착하고 사납고 용맹하여 일을 맡길 수는 있으나, 이들로 하여금 시부詩賦의 음률을 배우고 경의經義를 읽게 해서 지방 사람들과 털끝만 한 사이에서 득실得失을 다투게 한다면, 이들은 오직 벼슬하지 않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서 과거로 사람을 뽑은 것이 항상 적은 것입니다.
충효忠孝예의禮義의 선비는 비록 뜻을 얻지 못하더라도 군자君子가 되려는 뜻을 잃지 않지만, 만약 이 부족하고 재주가 유여有餘한 자는 등용할 문이 없어 곤궁하게 되면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 원컨대 폐하께서 특별히 이 다섯 의 선비들을 위하여 별도로 벼슬에 등용되는 문을 열어주셨으면 합니다.
나라 법에 군현郡縣의 빼어난 백성을 추천하고 선발하여 관리로 삼고는 그 사람의 행실을 고찰하고 청렴도를 살펴서 차례로 승진시켜 보임하여, 혹은 이천석二千石에까지 이르고 조정에 들어가서 공경公卿이 되기도 했습니다.
옛날에는 오로지 문장만으로 사람을 뽑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선비를 얻은 것이 많습니다.
황패黃霸졸사卒史에서 발신하였고 설선薛宣서좌書佐에서 분발했고 주읍朱邑색부嗇夫에서 선용選用되고 병길丙吉옥리獄吏 출신이며, 그 나머지 이름난 신하들과 순리循吏에 이르기까지 이로 말미암아 등용된 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나라는 중엽 이후로 방진方鎭(節度使)들이 모두 열교列校를 자신들이 선발해서 아병牙兵을 관장하게 하니, 이때 사방의 호걸 중에 과거를 통해 스스로 영달하지 못한 자들이 모두 다투어 열교列校가 되어서 왕왕 공로를 쌓아 모월旄鉞을 취했습니다.
비록 늙은 간신과 큰 도적이 혹 그 가운데서 나오기도 했지만, 이름난 공경公卿과 어진 장수로 예컨대 고선지高仙芝봉상청封常淸이광필李光弼내진來瑱이포옥李抱玉단수실段秀實과 같은 무리들을 얻은 것이 또한 이미 많습니다.
왕자王者가 인물을 등용하는 것은 강하江河와 같으니, 강하江河가 흘러가는 곳에 온 냇물이 다 모여들고 교룡蛟龍도 생장합니다.
그런데 강하江河가 떠나서 다른 곳으로 흘러가면 물고기와 자라도 제 몸을 돌릴 곳이 없고 큰 암고래와 작은 미꾸라지들도 제재를 받습니다.
지금 세상에 서사胥史아교牙校들이 모두 노복奴僕과 용렬한 사람들인 것은 딴 이유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이들을 등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서사胥史아교牙校를 등용하려 하되 서사胥史에게 문서를 돌리고 형옥刑獄전곡錢穀을 다스리게 한다면 형편상 이들에게 채찍질을 내리지 않을 수 없으니, 채찍질이 한번 행해지면 호걸들이 그 사이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선비 중에 형벌을 받은 자는 등용하지 말아야 하고 등용될 자는 형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은 원컨대 폐하께서 나라의 옛 제도를 택하셔서 다섯 감사監司군수郡守로 하여금 모두 선비를 선발하여 아직牙職을 보임하되 모두 인재를 가려 뽑아, 마음과 힘은 충분히 남보다 뛰어나나 과거에 종사할 수 없는 자는 지금의 용전庸錢으로써 녹봉을 주고, 이들에게 진세鎭稅장무場務와 도적을 감독하여 잡는 일 따위를 책임 지우되 국가의 형벌刑罰장형杖刑 이하는 돈을 내어 죄를 면제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장교將校을 따라 장리長吏(太守)로 하여금 그중에 재주가 있는 자를 천거해서 그 공적을 차례로 등급 매기고 그가 근무한 기간을 기록해서 이들로 하여금 나와 벼슬하기를 임자任子와 같게 하시되, 유외流外라고 해서 승진하는 것을 제한하지 않게 하시며, 조정朝廷에서는 이 가운데 더욱 특이한 자를 찾아내어 몇 사람을 특별히 발탁 등용하소서.
이렇게 하면 호걸스럽고 뛰어난 선비들이 점점 이 길로 나와서 간활奸猾한 무리를 통째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목條目의 자세한 것까지는 이 감히 다 말씀드릴 수 없으니,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유념留念하여 살피소서.
옛날 나라 무제武帝나라를 점령한 다음 천하에 조칙을 내려 군역軍役을 파하게 해서 군현郡縣에서 모두 무비武備를 제거하였는데, 오직 산도山濤만이 그 불가함을 논하였습니다.
무제武帝가 이를 보고 말하기를 “천하天下명언名言이다.”라고 하였으나, 그 말을 끝내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영녕永寧 이후에 도적들이 봉기하였으나 에서 모두 대비가 없어서 제재하지 못하여, 그제야 산도山濤의 말이 맞다는 것이 증험되었습니다.
지금 이 일이 없는 때에 여러 번 도적을 가지고 말씀을 올리니, 사사로운 우려와 지나친 계산이 또한 너무 심합니다.
폐하께서 비록 이를 용납하시더라도 반드시 의론議論하는 자들에게 비웃음을 사게 될 것입니다.
만일 천하가 무사해서 이 비웃음을 받는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아서 일이 닥친 뒤에 도모하려고 한다면 너무 늦을 것입니다.
하늘의 위엄을 범하오니, 죄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역주
역주1 徐州上皇帝書 : 本集에는 이 편 머리에 ‘元豐元年十月□日 尙書祠部員外郞 直史館 知徐州軍州事 臣蘇軾 謹冒萬死 再拜上書皇帝陛下’라는 39字가 있다. 이로써 이 글이 元豐 元年(1078)에 쓰여졌으며, 이때 蘇軾이 知徐州事로 在任 中임을 알 수 있다.
역주2 冊府 : 皇帝의 書冊들을 관리하고 보관하는 곳이다. 당시 蘇軾은 尙書祠部 員外郞 直史館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3 出守兩郡 : 太守는 본래 漢나라 景帝가 秦나라의 郡守를 바꿔 이름한 것인데 이후 널리 쓰여졌다. 宋나라는 郡을 州로 개칭하였으므로 공식적으로는 太守 대신 知州가 쓰였다. 여기서 兩郡이라고 한 것은 蘇軾이 熙寧 7년(1074)부터 4년간 知密州事로 있다가 知徐州事로 移任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4 京東之地 : 京東은 당시의 수도인 開封의 동쪽 지역을 가리킨다. 宋나라는 開封의 동쪽에 京東東路와 京東西路를 두었다. 路는 宋代의 行政區域으로 현재 中國의 省과 같다.
역주5 : 뢰
역주6 昔에 項羽入關하야 旣燒咸陽하고 而東歸하야는 則都彭城 : 項羽(B.C. 221~B.C. 206)는 이름이 籍으로 楚나라 장수 項燕의 아들인데, 秦나라 말기에 봉기하여 제후들을 거느리고 秦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동쪽으로 돌아와 스스로 楚 霸王이 되어 彭城에 도읍하였다.《史記 項羽本紀》 徐州가 바로 彭城이다.
역주7 梁宋 : 梁은 大梁으로 北宋 때의 도읍인 汴梁을 이르는데, 지금의 河南省 開封이다. 宋은 南京 應天府로 지금의 河南省 商丘인데, 春秋時代에 宋나라가 있었고 唐나라 때에는 宋州였으므로 宋이라 한 것이다.
역주8 材官騶發 : 材官은 武官을 이르며 騶는 菆로 좋은 화살을 이른다.
역주9 若屋上建瓴水也 : 지붕 위에서 병을 거꾸로 세워 병속에 들어 있는 물을 쏟아내는 것과 같음을 이른다. 漢나라 田肯이 高祖에게 用兵의 유리한 형세에 대해 진언을 하면서, 마치 “지붕 꼭대기에 앉아 물병을 거꾸로 들고 아래로 쏟는 것처럼[居高屋之上 建瓴水] 막힘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곧 명령이나 지휘가 일사천리로 막힘없이 전달될 수 있음을 비유한다.
역주10 戱馬臺 : 徐州 본성 남쪽에 있는 臺 이름으로 項羽가 축조했다고 한다.
역주11 : 무
역주12 櫑木炮石 : 櫑木은 크고 둥근 나무로 옛날 이것을 성 위에 쌓아놓았다가 적군이 성으로 다가오면 일제히 굴려 적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炮石은 대포로 돌을 날림을 이른다.
역주13 漢高祖는 沛人也 : 漢 高祖는 劉邦으로 高祖는 그의 廟號이며, 沛는 지금의 江蘇省 沛縣으로 徐州의 북쪽에 있다.
역주14 項羽는 宿遷人也 : 《史記》 〈項羽本紀〉에 “項羽는 下相 사람이다.”라고 하였는데, 下相은 바로 지금의 江蘇省 宿遷으로 徐州 동쪽에 있다.
역주15 劉裕는 彭城人也 : 劉裕(363~422)는 南北朝時代 南朝 宋나라를 창건한 武帝의 이름이다. 본래 徐州 사람으로 처음 晉나라에서 벼슬하였는데, 많은 공을 세워 세력이 커지자 끝내 禪讓을 받아 東晉을 멸하고 宋나라를 세웠다.
역주16 朱全忠은 碭山人也 : 朱全忠(852~912)은 五代 梁나라의 太祖이다. 본래의 이름은 溫인데 뒤에 晃으로 개명하였다. 도적 黃巢의 장수였다가 882년 관군에 항복하여 唐나라 僖宗으로부터 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 뒤 황소의 잔당과 그 밖의 군웅을 평정하여 梁王에 봉해지고 각지의 절도사를 겸하는 등 화북 제일의 실력자가 되었다. 뒤에 昭宗을 살해하고 哀帝를 세웠다가 907년에 唐나라를 멸망시키고 梁나라를 세웠다. 碭山은 徐州 서쪽에 있다.
역주17 魏太武……不能下 : 太武帝는 北魏의 拓跋燾를 가리킨다. 南朝의 宋나라 文帝 元嘉 27년(450)에 文帝가 군사를 내어 魏나라를 정벌하자, 太武帝가 大軍을 이끌고 黃河를 건너 徐州를 포위하고 3개월간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南史 宋本記》
역주18 王智興……朝廷亦不能討 : 王智興(758~836)은 兵卒 출신으로 徐州刺史 李洧의 부하로 있다가 唐나라 憲宗 元和 13년(818)에 李師道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沂州刺史에 제수되었다. 이후 徐州에서 반란을 일으켜 조정에 대항하였는데, 唐나라에서는 여러 차례 병력을 내어 토벌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자 어쩔 수 없이 그를 徐州刺史로 임명하였다. 《舊唐書 王智興傳》
역주19 利國監 : 철광을 채취하고 철물을 주조하던 관서의 이름이다.
역주20 鐵官 : 宋나라는 소금과 철을 관에서 전매하였는데, 이를 관장하는 官署의 이름이다.
역주21 冶戶 : 鐵을 제련하는 대장간을 이른다. 宋나라 때에 冶鐵業은 주로 徐州, 兗州, 相州에 성행하였는데, 규모에 있어서 徐州가 으뜸이었다.
역주22 辰發巳至 : 신속히 도착할 수 있음을 이른다. 오늘날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辰時는 7시부터 8시까지이고, 巳時는 9시부터 10시까지이다.
역주23 呂布, 劉備 : 呂布는 後漢 말기의 武將으로 자는 奉先이며 五原郡 九原縣 사람이다. 뛰어난 무용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끝내 曹操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劉備는 蜀漢을 건국한 昭烈皇帝를 이른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한때 徐州刺史로 있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역주24 轉運司 : 宋代에는 各路를 통치하기 위해 轉運司‧提點刑獄‧安撫使의 三司를 두고 이들을 모두 監司라고 칭하였는데, 이 중 轉運司는 財賦와 漕運을 관장하였다.
역주25 昔에 楚人亡弓하고 不能忘楚한대 孔子猶小之 : 春秋時代 楚나라 共(恭)王의 고사이다. 共王이 사냥을 나갔다가 활을 잃었는데,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이를 찾으려 하자 王이 이것을 말리면서 “楚王이 잃었으니 楚나라 사람이 얻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孔子는 이 말을 듣고 말씀하시기를 “안타깝게도 그 度量이 그다지 크지 못하도다. ‘사람이 활을 잃었으니 사람이 이를 얻었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굳이 楚나라를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孔子家語》
역주26 : 삭
역주27 : 척
역주28 兩衙 : 두 번 衙參하는 것을 이르는데, 衙參은 관리들이 衙門에 나아가 자신의 업무를 보고하고 政事를 결정하는 일을 이른다.
역주29 臣欲乞移南京新招騎射兩指揮於徐 : 宋나라의 4京 가운데 하나인 南京은 지금의 河南省 商丘縣이다. 騎射는 京東路의 여러 州에 설치된 騎兵인 騎射軍을 이르며, 兩指揮는 軍을 지휘하는 都指揮使와 副指揮使를 이른다. 《宋史 兵志》
역주30 轉運使分東西路 : 宋나라 때에는 지방 조직인 路를 합치기도 하고 나누기도 하였는데, 예컨대 京東路 같은 경우는 하나로 합치기도 하고 京東東路와 京東西路로 나누기도 하였다. 至道 3년(997)에는 徐州와 南京 應天府가 모두 京東路였으나, 熙寧 7년(1074)에는 東‧西 2路로 나누어 徐州는 京東東路에, 南京 應天府는 京東西路에 속하였다.
역주31 奉化廂軍 : 奉化縣의 지방군을 이른다. 宋代의 兵制는 전국의 군대를 禁軍, 廂軍, 鄕軍, 藩軍의 네 가지로 나누었는데, 禁軍은 황제의 친위군인 중앙군으로 首都에 주둔하다가 윤번제로 지방 州縣에 나가 근무하였다. 廂軍은 地方軍으로 州의 수비를 주임무로 하였으며, 鄕軍과 藩軍은 비상설 조직으로 鄕軍은 각 지역 壯丁을 뽑아 자신의 지역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藩軍은 귀순한 이민족의 병사로 변경을 수비하게 하였다.
역주32 : 현
역주33 金湯之固 : 金湯은 ‘金城湯池’의 줄임말로 쇠로 만든 철옹성과 펄펄 끓는 물로 채워진 것과 같은 험한 垓子가 있는 견고한 요새지를 말한다.
역주34 逋逃淵藪 : 도망하는 자들이 모여 숨어 지내는 곳을 이른다. 淵은 깊은 물로 물고기가 모이는 곳이고, 藪는 수풀로 짐승들이 모이는 곳이다.
역주35 願復三年守徐 : 宋나라 때 州와 縣을 맡은 지방관의 임기는 3년이었는데, 蘇軾이 자신을 知徐州事에 連任시켜 줄 것을 청한 것이다.
역주36 兵甲巡檢公事 : 한 지방의 軍事를 관장하는 무관직을 이른다.
역주37 配軍 : 죄인을 변경으로 유배 보내어 수자리 살게 하는 것을 이른다.
역주38 王嘉 : 前漢 哀帝 때의 승상으로 字는 公仲이며 平陵 사람이다. 위의 내용은 《漢書》 〈王嘉傳〉에 보인다.
역주39 二千石長吏 : 二千石은 본래 漢代의 관리 등급으로 俸祿의 多寡에 따른 명칭인데, 三公 이하에 中二千石으로부터 百石에 이르기까지 모두 14등급으로 나누었으나, 여기서는 지방을 관장하는 太守의 의미로 쓰였다. 長吏는 지방의 장관을 이른다. 石은 고대의 용량 단위로, 1石은 10斗이다. 《漢書 百官公卿表》
역주40 部刺史 : 漢나라 때에 전국을 13개의 部로 나누고 部마다 刺史를 두었다.
역주41 山陽亡徒蘇令 : 蘇令은 前漢 成帝 때 山陽(現 金鄕縣)에 있던 鐵官의 인부였는데, 永始 3년(B.C. 14)에 2백여 명의 무리와 함께 민란을 일으켜 19개 郡‧國을 횡행하며 東郡太守와 汝南都尉를 죽이고 스스로 장군이라고 칭하였다. 뒤에 汝南太守 嚴訢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역주42 守相 : 郡의 太守와 諸侯國의 相을 이른다.
역주43 失入 : 법 적용을 가혹하게 하여 잘못 죄에 넣어 억울한 처벌을 내림을 이른다.
역주44 : 운
역주45 黃霸 : 字는 次公으로 前漢 宣帝 때의 循吏이다. 처음에 左馮翊의 二千石 卒史로 발신하여 백성들에게 善政을 베풀고 穎川太守로 있으면서 치적이 천하의 제일로 승상에 오르고 建成侯에 봉해졌다. 《漢書 循吏傳》
역주46 薛宣 : 字는 贛君이다. 前漢 元帝 때 廷尉의 書佐로 몸을 일으켜 成帝 때 刺史를 거쳐 승상에 이르렀으며 高陽后에 봉해졌다. 《漢書 薛宣傳》
역주47 朱邑 : 字는 仲卿인데, 젊어서 桐鄕의 嗇夫로 벼슬을 시작하여 大司農에 이르렀다. 嗇夫는 지방에서 聽訟과 賦稅를 담당한 말단 관직이다. 《漢書 循吏傳》
역주48 丙吉 : 邴吉로도 쓰는데, 漢나라 宣帝 때의 名臣이다. 자는 少卿으로 魯國 北海 사람이다. 미관말직인 獄吏로 관직을 시작하여 廷尉右監과 御史大夫를 거쳐 승상이 되었고, 사후에 定侯에 봉해졌다. 《漢書 丙吉傳》
역주49 列校 : 여러 하급 軍官을 이른다.
역주50 牙兵 : 軍士의 한 종류로 대장을 수행하여 본진에 있는 군사를 이르는데, 여기서는 節度使의 친위군을 이른 것으로 보인다.
역주51 高仙芝……段秀實 : 高仙芝는 본래 高句麗 사람으로 唐나라 玄宗 開元 29년(741)에 安西副都護가 되었다가 곧 四鎭都知兵馬使가 되었다. 玄宗 天寶 6년(747)에 吐蕃이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팽창하던 唐나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진하자, 그는 行營節度使에 발탁되고 吐蕃을 정벌하기 위하여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파미르고원을 넘어가 기습공격으로 吐蕃의 군사기지인 連雲堡를 격파하였으며, 계속 진격하여 小勃律國의 수도인 阿弩越城을 점령해서 서역 일대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귀국하여 御史中丞에 오르고 이어서 特進 兼左金吾大將軍 同正員이 되었으며, 755년에는 密雲郡公의 봉작을 받았다. 封常淸은 高仙芝의 부하로 그 막하에서 공을 세우고 玄宗 天寶 6년(747)에 節度判官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伊西節度等使를 역임하였다. 李光弼은 安祿山의 난에 郭子儀의 천거로 河東節度使가 되어 많은 군공을 세워 臨淮郡王에 봉해졌다. 來瑱은 天寶 11년(752)에 伊西北庭行軍司馬에 제수되었다가, 安祿山의 난에 潁川太守가 되어 많은 군공을 세워 벼슬이 開府儀同三司에 이르렀다. 李抱玉은 肅宗 乾元 元年(758)에 李光弼의 천거로 偏裨가 되었다가, 安祿山의 난에 많은 공을 세우고 벼슬이 司空에 이르렀다. 段秀實은 唐나라 德宗 때 馬璘의 行軍司馬와 司農卿을 지냈으며, 朱泚의 난에 거짓으로 朱泚에게 투항하여 그를 격살하려 하다가 피살되었다. 德宗이 뒤에 그의 충렬을 기려 太尉에 추증하였다.
역주52 鯢鰍 : 예추
역주53 胥史牙校 : 胥史는 여러 관아에서 관리를 돕는 胥吏를 이르고, 牙校 또한 관아에서 숙위하는 하급장교를 이른다.
역주54 牙職 : 관아의 일반직 관원이나 관아를 숙위하는 장교를 이른다.
역주55 庸錢 : 부역과 관련하여 거둔 세금을 이른다. 모든 백성들은 부역의 의무를 져서 1년에 24일을 부역하였으며, 부역을 하지 않는 자는 하루에 絹 3尺을 대신 납부하게 하였는데, 이를 ‘庸’이라고 하였다. 庸은 ‘傭’과 통한다.
역주56 鎭稅, 場務, : 鎭稅는 관아의 세금 관련 업무이며, 場務는 市場을 다스리는 업무를 이른다.
역주57 任子 : 郊祀 등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적에 평소 功이 있는 公卿의 子弟들에게 특별히 관직을 내리는 제도이다.
역주58 流外 : 後魏(386~534) 때에 시작된 관직제도이다. 관직의 등급을 1品에서 9品까지 두고 다시 正과 從으로 나누었는데 이를 流內라고 하였으며, 9品 이외에 따로 正과 從의 구별없이 9級을 두고서 이를 流外라고 하였다. 이들은 미관말직들로 流內로 승진될 수 없었다.
역주59 山濤論其不可 : 山濤는 晉나라 때의 이름난 문신이다. 자는 巨源이며 河內 懷縣 사람으로 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이다. 武帝가 吳나라를 평정한 다음 천하에 조칙을 내려 軍役을 파하게 하자, 이의 부당함을 강력하게 논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뒤에 武備가 허술하여 五胡十六國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역주60 永寧 : 晉나라 惠帝 때의 年號(301)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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