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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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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行文 如行雲하고 如江流하야 曲盡文家游衍之妙하니라
天子者 以其一身으로 寄之乎巍巍之上하고 以其一心으로 運之乎茫茫之中하야 安而爲太山하고 危而爲累卵하야 其間 不容毫釐
是故 古之聖人 不恃其有可畏之資하고 而恃其有可愛之實하며 不恃其有不可拔之勢하고 而恃其有不忍叛之心하니이다
何則
其所居者 天下之至危也일새니이다
天子恃公卿하야 以有其天下하고 公卿大夫士 以至於民 轉相屬也하야 以有其富貴하나니
苟不得其心이요 而欲羈之以區區之名하고 控之以不足恃之勢者 其平居無事 猶有以相制어니와 一旦有急이면 是皆行道之人이라 掉臂而去하리니 尙安得而用之리잇고
古之失天下者 皆非一日之故 其君臣之(權)[歡] 去已久矣어늘 適會其變이라 是以 一散而不可復收하니이다
方其未也 天子甚尊하고 大夫士甚賤하야 奔走萬里하야 無敢後先하니
儼然南面하야 以臨其臣하야시리오하면 百官 俯首就位라가 斂足而退하야 兢兢惟恐有罪하야 群臣相率하야 爲苟安之計
賢者旣無所施其才하고 而愚者亦有所容其不肖하야 擧天下之事 聽其自爲而已니이다
及乎事出於非常하고 變起於不測하야는 視天下 莫與同其患하야 雖欲分國以與人이나 而且不及矣니이다
蓋用此術하야 以至於顚沛而不悟하니 豈不悲哉리잇가
天下者 器也 天子者 有此器者也 器久不用하고 而置諸篋笥하면 則器與人不相習이라
是以 扞格而難操니이다
良工者 使手習知其器하고 而器亦習知其手하야 手與器相信而不相疑
夫是故 所爲而成也니이다
天下之患 非經營禍亂之足憂 而養安無事之可畏니이다
何者
懼其一旦至於扜格而難操也일새니이다
昔之有天下者 日夜淬勵其百官하고 撫摩其人民이라
爲之하야 以交諸侯之歡하고 月朔 하고 飮酒하야 以遂萬民之情이라
有大事 自庶人以上으로 皆得至於하야 以盡其詞호되
猶以爲未也하야 而五載一巡守하야 朝諸侯于之下하고 親見其賢士大夫하야 以周知天下之風俗하니
凡此者 非以爲苟勞而已 將以馴致服習天下之心하야 使不至于扜格而難操也니이다
及至後世하야는 壞先王之法하야 安於逸樂하고 而惡聞其過
是以 養尊而自高하고 務爲深嚴하야 使天下拱手하야 以貌相承而心不服하며
其腐儒老生 又出而爲之說하야 曰 天子 不可以妄有言也 史且書之하고 後世且以爲譏라하야
使其君臣으로 相視而不相知하니 如此 則偶人而已矣
天下之心 旣已去어늘 而倀倀焉抱其空器하야 不知英雄豪傑已議其後하니이다
臣嘗觀西漢之初컨대 高祖創業之際 事變之興 亦已繁矣 而高祖以項氏創殘之餘 爭馳於中原하니 此六七公者 皆以絶人之姿 據有土地甲兵之衆하야 其勢足以爲亂이니이다
이나 天下終以不搖하고 卒定於漢하야 傳十數世矣러니
而至於元, 成, 哀, 平하야 四夷嚮風하야 兵革不試로되乃擧而移之 不用寸兵尺鐵이나 而天下屛息하야 莫敢或爭하니 此其故 何也
創業之君 出於布衣하야 其大臣將相 皆有握手之歡하고 凡在朝廷者 皆有嘗試擠掇하야 以知其才之短長이라
彼其視天下 如一身하야 苟有疾痛이면 其手足 不期而自救하니 當此之時하야는 雖有近憂 而無遠患하니이다
及其子孫하야는 生于深宮之中하고 而狃於富貴之勢하야 尊卑闊絶하야 而上下之情疏하고 禮節繁多하야 而君臣之義薄이라
是故 不爲近憂而常爲遠患하니 及其一旦하야는 固已不可救矣니이다
聖人 知其然이라
是以 去苛禮而務至誠하고 黜虛名而求實效하야 不愛高位重祿하야 以致山林之士하야 而欲聞切直不隱之言者 凡皆以通上下之情也니이다
昔我 旣有天下 法令簡約하고 不爲崖岸하시니 當時大臣將相 皆得從容終日하야 歡如平生하고 下至士庶人하야도 亦得以自效
天下稱其言至今하니이다
非有文采緣飾이요 而開心見誠하야 有以入人之深者 此英主之奇術이요 御天下之大權也니이다
方今治平之日 久矣
臣愚以爲宜日新盛德하야 以激昻天下久安怠惰之氣
陳其五事하야 以備採擇하노이다
其一曰 將相之臣 天子所恃以爲治者 宜日夜召論天下之大計 且以熟觀其爲人이니이다
其二曰 天子所寄以遠方之民者 其罷歸 皆當問其所以爲政 民情風俗之所安이요 亦以揣知其才之所堪이니이다
其三曰 左右 本以論說古今興衰之大要 非以應故事備數而已 經籍之外 苟有以訪之라도 無傷也리이다
其四曰 吏民上書 苟小有可觀者어든 宜皆召問優(游)[慰]하야 以養其敢言之氣니이다
其五曰 天下之吏以上으로 雖其至賤하야 無以自通於朝廷이나 然人主之爲 豈有所不可哉잇가
察其善者하야 卒然召見之호되 使不知其所從來
如此 則遠方之賤吏 亦務自激發爲善이요 不以位卑祿薄하야 無由自通于上이라하야 而不修飾하리이다
使天下 習知天子樂善親賢恤民之心 孜孜不倦如此하면 翕然皆有所感發하야 知愛於君하야 而不可與爲不善이리이다
亦將賢人衆多하고 而姦吏衰少하야 刑法之外 有以大慰天下之心焉耳리이다
唐荊川曰
此文 論時弊處 皆借古爲諭하니 亦一體也니라


05. 책략策略 5
문장을 써내려간 것이 마치 떠도는 구름과 같고 흘러가는 강물과 같아서 문장가들의 자유자재로 종횡하는 묘미를 곡진히 다하였다.
천자天子는 자기 한 몸을 매우 높은 곳에 올려두고 자기 한 마음을 아득하고 측량할 수 없는 가운데에서 운용하여, 편안하면 태산太山의 형세가 되고 위태로우면 누란累卵의 형세가 되어서 그 사이에 털끝만큼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옛날 성인聖人들은 자신에게 남들이 두려워할 만한 자질이 있음을 믿지 않고 자신에게 남들이 사랑할 만한 실제가 있음을 믿었으며, 자신에게 뽑을 수 없는 확고부동한 형세가 있음을 믿지 않고 백성들이 차마 배반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자신이 처해 있는 지위가 천하天下에 지극히 위험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자天子공경公卿에게 의지하여 천하天下를 소유하고, 공경公卿대부大夫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는 돌아가면서 서로 연결되어 부귀를 소유합니다.
만일 천자天子가 상대방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구구한 명분으로써 옭아매고 믿을 수 없는 권세를 가지고 억압하고자 한다면, 평소 무사할 때에는 그래도 제재할 수 있지만 위급한 일이 하루아침에 발생하게 되면 이는 모두 길을 가는 남남의 사이가 되어 팔뚝을 휘젓고 갈 뿐이니, 그러고도 어떻게 이들을 쓸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천하天下를 잃은 자들은 모두 하루아침의 변고 때문이 아니요, 군신간의 환심이 떠난 지 이미 오래인데 마침 변란을 만나서이니, 이 때문에 한 번 흩어지면 다시는 수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변란이 나기 전에는 천자天子가 매우 높고 대부大夫가 매우 천하여, 만 리를 달려와서 감히 뒤늦거나 먼저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천자天子가 엄숙히 남면南面하고 신하에게 군림하여 말씀하기를 “하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라고 하면, 백관들이 머리를 숙이고 자기 자리로 나아갔다가 발을 거두고 물러나며 조심조심 행여 죄를 저지를까 두려워해서 군신群臣들이 서로 따라서 구차히 편안할 계책을 세웁니다.
그리하여 어진 자가 재주를 베풀 곳이 없고 어리석은 자 또한 불초함을 용납할 곳이 있어서 온 천하의 일을 군주 스스로 처리하도록 내버려둘 뿐입니다.
그러다가 비상사태가 발생하고 변란이 예측하지 못한 데서 일어나게 되면, 온 천하를 살펴보아도 군주와 환란을 함께 할 자가 없어서 비록 나라를 나누어 상대방에게 주고자 하더라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
나라 이세황제二世皇帝나라 덕종德宗이 이 방법을 사용하여 결국은 낭패함에 이르면서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천하天下는 기물이요 천자天子는 기물을 소유한 자이니, 기물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상자 속에 넣어두면 기물과 사람이 서로 익숙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손에 익지 않아서 기물을 사용하기 어렵게 됩니다.
훌륭한 공인工人은 손으로 하여금 기물을 익숙히 알게 하고 기물 또한 손과 익숙해지게 해서, 손과 기물이 서로 믿고 의심하지 않게 합니다.
이 때문에 하는 일마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하天下의 환란 중에 일을 경영하다가 생기는 환란은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니요, 편안히 길러져 무사한 것은 두려울 만한 것입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편안히 길러지다가 하루아침에 일이 생기면 손에 익지 않아서 기물을 사용하기 어렵게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옛날 천하天下를 소유한 자들은 밤낮으로 백관들을 장려하고 백성들을 위로하고 돌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조빙朝聘하고 회동會同하고 연향燕享하여 제후諸侯들과 환심을 나누고, 세시歲時와 매월 초하루에 백성들을 모아 을 읽어주고 사제蜡祭납제臘祭에 술을 마시게 하여 만백성의 마음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국가에 큰일이 있게 되면 서인庶人 이상으로는 누구나 모두 바깥 조정(외조外朝)에 이르러 자기 말을 다하게 하였습니다.
그러고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겨서 5년에 한 번 제후국諸侯國순수巡守하여 방악方岳의 아래에서 제후諸侯들에게 조회받고, 그 지방의 기로耆老와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을 친히 접견해서 천하天下의 풍속을 두루 알았습니다.
무릇 이렇게 한 것은 구차히 수고로운 짓을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장차 천하天下 사람들의 마음을 길들여 복종시키고 익숙하도록 만들어, 하여금 서툴러서 기물을 사용하기 어렵게 되는 데 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선왕先王의 법을 파괴하여 안일安逸향락享樂을 편안히 여기고 자신의 잘못을 듣기 싫어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군주가 지나치게 몸을 보호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고 되도록 엄격하게 사람들을 대하여, 천하天下 사람들로 하여금 공손히 손을 모아서 모양으로만 받들고 마음은 복종하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고루한 선비와 늙은 생도들은 또 나와서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함부로 말씀해서는 안 되니, 사관史官이 장차 그 말씀을 역사책에 기록하고 후세 사람들이 장차 비난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군주와 신하로 하여금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알지 못하게 하니, 이와 같다면 이것은 허수아비일 뿐입니다.
이에 천하天下의 인심이 이미 떠났는데, 군주가 멍하니 빈 기물(지위)만을 안고서 영웅호걸들이 이미 뒤에서 자신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 일찍이 서한西漢의 초기를 살펴보니, 고조高祖가 창업하던 즈음에 사변이 또한 너무도 많이 일어났고, 또 고조高祖항씨項氏(항우項羽)에게 상해를 입은 뒤에 한신韓信영포英布의 무리들과 함께 중원에서 다투어 치달렸으니, 이 예닐곱 명의 장수들은 모두 남보다 뛰어난 자질로 넓은 토지와 갑옷과 병기를 보유하여 그 형세가 충분히 난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하天下가 끝내 동요되지 않고 마침내 나라로 안정되어 10여 대를 전해왔습니다.
그런데 원제元帝성제成帝 그리고 애제哀帝평제平帝에 이르러서는 사방의 오랑캐들이 우리 중국을 사모하여 병기와 갑옷을 동원하지 않았으나 왕망王莽이라는 하찮은 녀석이 마침내 천하天下를 들어서 제가 차지할 적에 한 치의 병기와 한 자의 쇳조각(조그마한 무력武力)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천하天下가 숨을 죽여서 감히 다투지 못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창업한 군주는 포의布衣의 출신이기 때문에 대신大臣장상將相들과 모두 손을 맞잡고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고, 무릇 조정에 있는 자들은 모두 한번 시험해보아 버리고 취함이 있어서 재주의 장단점을 알았습니다.
고조高祖천하天下를 보기를 자기와 한 몸처럼 여겨서 만약 질병의 고통이 있으면 손과 발이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구원하듯이 하였으니, 이때를 당해서는 비록 가까운 우환은 있었으나 먼 환란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손에 이르러서는 깊은 궁중에서 생장하고 부귀의 권세에 익숙해서 군신간君臣間의 신분의 차이가 매우 현격하여 상하간上下間의 정이 소원해지고 예절이 너무 번잡해서 군신간君臣間의 정의가 박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가까운 우환은 되지 않았으나 항상 먼 환란이 되었으니, 하루아침 변란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진실로 이미 구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인聖人은 이러한 것을 아셨습니다.
이 때문에 까다로운 를 버리고 지극한 정성을 힘썼으며 헛된 명성을 내치고 실제 효험을 구하여, 높은 지위와 많은 녹봉을 아끼지 않고 천하天下의 선비들을 초치해서 간절하고 솔직하여 숨기지 않는 말을 듣고자 하였으니, 이는 모두 상하간上下間의 정을 소통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옛날 우리 나라의 태조太祖태종太宗께서 천하天下를 소유하시자 법령이 매우 간략하고 군신간君臣間에 간격을 두지 않으시니, 당시의 대신大臣장상將相들이 모두 조용히 하루를 마쳐서 평소처럼 즐거워하였고, 아래로 서인庶人에 이르러도 스스로 자기 정성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천하天下가 지금까지도 그 말씀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문채文采로 아름답게 꾸밈이 있지 않고, 마음을 열어 정성을 보여서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영명英明한 군주의 기이한 방법이요, 천하天下를 어거하는 큰 권도입니다.
지금 우리 국가가 다스려지고 평안한 날이 오래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은 생각하건대 성상聖上께서는 마땅히 날로 성덕盛德을 새롭게 해서 오랫동안 편안하여 나태해진 천하天下 사람들의 기운을 격앙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일을 아뢰어서 채택하시는 데 대비합니다.
첫 번째, 신하 중에 장수와 정승은 천자天子가 믿고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니, 마땅히 밤낮으로 불러서 천하天下대계大計를 의논하고 또 그 인품을 익숙히 살펴야 합니다.
두 번째, 태수太守자사刺史천자天子가 먼 지방의 백성을 맡겨 다스리는 자들이니,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적에 모두 그 지방을 다스린 방법과 민정과 풍속이 편안히 여기는 바를 묻고, 또한 그 재주가 감당할 수 있는 바를 헤아려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 좌우에서 호종扈從하는 신하와 시독관侍讀官시강侍講하는 사람은 본래 고금의 흥망성쇠의 대요大要를 논설하고자 하는 것이요 고사故事에 응하여 인원수만을 채우려 한 것이 아니니, 진실로 경적經籍 외의 것을 묻더라도 나쁠 것이 없습니다.
네 번째, 관리와 백성들이 올린 글 가운데 만일 조금이라도 볼만한 내용이 있으면 글을 올린 자들을 모두 불러들여 묻고 우대하여 용감하게 말하는 기운을 길러줘야 합니다.
다섯 번째, 천하天下일명一命 이상의 관리는 신분이 비록 지극히 미천하여 자신이 직접 조정朝廷에 통할 수는 없으나 군주가 이들과 의사를 소통하심이 어찌 불가한 일이 있겠습니까?
한 자를 살펴서 갑자기 불러들여 접견하시되 그로 하여금 어떻게 자신을 알고 불렀는지를 알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시면 먼 지방의 천한 관리들도 힘써 스스로 격동되고 분발되어 을 행할 것이요, 지위가 낮고 녹봉祿俸이 작아서 직접 윗사람에 스스로 통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여 행실을 꾸미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천하天下 사람들로 하여금 천자天子께서 을 즐거워하고 현자를 친애하고 백성을 구휼하시려는 마음이 부지런하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으심이 이와 같음을 익숙히 알게 한다면, 천하天下 사람들이 모두 보고 감동하여 군주를 사랑할 줄을 알아 결국 함께 불선不善을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장차 어진 사람이 많아지고 간사한 관리들이 점점 적어져서 형법刑法 이외의 것으로 천하天下의 인심을 크게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이 글은 시폐時弊를 논한 부분에 모두 옛날을 빌어 비유하였으니, 또한 문장의 한 이다.”


역주
역주1 策略 五 : 이 글은 仁宗 嘉祐 6년(1061)에 蘇軾이 올린 〈策略〉 5편 가운데 다섯 번째 편이다.
역주2 天何言哉 : 이 내용은 《論語》 〈陽貨〉에 “孔子께서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시니, 子貢이 ‘선생님께서 만일 말씀하지 않으시면 저희들이 어떻게 道를 전수 받겠습니까?’라고 묻자, 孔子께서 ‘하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그런데도 四時가 運行되고 온갖 물건이 生長하나니, 하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라고 하셨다.[子曰 予欲無言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라고 보인다. 여기서는 황제가 침묵을 지키고 위엄으로 신하들을 대함을 말한 것이다.
역주3 秦二世唐德宗 : 秦二世는 始皇帝의 둘째아들 胡亥로 始皇帝가 죽은 뒤 宦官 趙高와 李斯의 모의에 의해 二世皇帝로 즉위하였다. 在位時에 趙高에게 모든 정사를 맡겼는데, 陳勝과 吳廣이 봉기하자 곧바로 趙高에게 시해되었다.
唐德宗은 代宗의 태자 李适로 大曆 14년(779)에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 문란해진 租․庸․調의 세제를 兩稅法으로 바꾸는 등 政事에 진력하고 皇權을 강화하여 한때 중흥의 군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기심이 많고 성품이 강퍅해서 공신들을 멀리하고 盧杞 등의 小人을 등용하여 조정이 문란해졌다. 이에 藩鎭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長安을 점령하자 결국 京師(長安)를 버리고 奉天으로 파천하여 군신이 流離하게 되었다.
역주4 朝聘會同燕享 : 朝聘은 고대에 제후들이 정기적으로 天子를 朝見하는 것을 말한다. 《禮記》 〈王制〉에 “諸侯는 天子에 대해서 매년 한 번 小聘을 하고 3년에 한 번 大聘을 하고 5년에 한 번 朝會를 한다.[諸侯之於天子也 比年一小聘 三年一大聘 五年一朝]”라고 보이는데, 鄭玄은 이에 대해 “比年은 매년이다. 小聘은 大夫를 보내고 大聘은 卿을 보내며 朝會는 군주가 스스로 간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제후들끼리도 聘問을 하였다.
會同은 고대에 제후가 일이 있어 天子를 朝見하는 것을 會라 하고 여러 제후가 모여 함께 朝見하는 것을 同이라고 하였는데, 후대에는 군주가 백관을 朝會하는 것도 會同이라고 하였다. 燕享은 군주가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는 것을 이른다.
역주5 歲時 : 정월 초하루와 사계절의 명절을 이르는데, 《禮記》 〈哀公問〉에 “歲時로써 제사를 공경히 올리고 宗族을 차례한다.[歲時以敬祭祀 以序宗族]”라고 보인다.
역주6 致民讀法 : 周나라 때에는 州長과 黨正이 정월 초하루와 歲時의 제사 때에 백성들을 모아놓고 1년의 政令과 敎法 등을 읽어주었는데 이를 讀法이라 하였다. 州와 黨은 지방의 행정 단위로 州는 2,500가호이고, 黨은 500가호이며, 州長과 黨正은 그 책임자이다.
역주7 蜡(獵)[臘] : 蜡祭와 臘祭로, 蜡祭는 《禮記》 〈郊特牲〉에 “天子의 큰 蜡祭가 여덟이니, 伊耆氏가 처음 蜡祭를 만드셨다. 蜡祭라는 것은 찾는다는 뜻이니, 매년 12월에 萬物을 모아서 神을 찾아 제향하는 것이다.[天子大蜡八 伊耆氏始爲蜡 蜡也者 索也 歲十二月 合聚萬物而索饗之也]”라고 보인다.
鄭玄의 注에 “蜡는 여덟 神에게 祭祀하니, 先嗇이 첫 번째이고 司嗇이 두 번째이고 農神이 세 번째이고 郵表畷이 네 번째이고 고양이와 호랑이의 神이 다섯 번째이고 제방의 神이 여섯 번째이고 水庸이 일곱 번째이고 昆蟲의 神이 여덟 번째이다.”라고 하였다.
伊耆氏는 堯帝를 가리키며, 郵表畷은 권농관인 田畯을 가리킨다. 郵는 郵亭의 집이니, 밭고랑이 서로 연결된 곳에 표시하여 郵亭를 만들고 田畯이 여기에 머물면서 농사짓는 농부들을 독려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臘祭 또한 12월에 지내는 제사로 蜡祭의 異稱으로 보기도 하며 혹은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를 별도로 臘祭라고 하기도 한다.
역주8 外朝 : 天子는 外朝, 治朝, 內朝의 三朝를 두었는데 가장 밖에 있는 것을 外朝라 한다. 이곳에는 법령에 관한 것들을 매달아두고 백성들이 와서 보게 하였다. 왕궁에는 모두 다섯 개의 門이 있어서 가장 밖에 있는 것을 皐門, 두 번째를 規門, 세 번째를 庫門, 네 번째를 應門, 다섯 번째를 路門이라고 하는데, 庫門 밖에 있는 것을 外朝라 하고, 路門 밖에 있는 것을 治朝라 하고 路寢의 뜰에 있는 것을 內朝(燕朝)라고 칭하였다. 天子는 治朝에서 조회를 보고 물러가 內朝에 가서 政事를 다스렸다.
역주9 方岳 : 四岳을 이른다. 東岳은 岱宗인 泰山, 南岳은 衡山, 西岳은 華山, 北岳은 恒山을 이르는데, 天子가 巡狩할 적에 方岳에서 해당 방위의 제후들을 접견하였다. 이 내용은 《書經》 〈虞書 舜典〉에 보인다.
역주10 耆老 : 나이가 많은 사람을 이르는데 60세를 耆, 70세를 老라고 하였다.
역주11 信布之徒 : 信은 韓信이고 布는 英布이다.
韓信은 처음 楚나라의 項羽를 섬겼으나 뒤에 漢 高祖 劉邦에게 귀의하여 大將軍에 오르고 뛰어난 兵略으로 漢나라의 開國三傑이 되었으며 楚王에 봉해졌으나 高祖의 의심을 받고 淮陰侯로 강등되자 반란을 획책하다가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英布는 일찍이 죄를 지어 얼굴에 자자하는 형벌을 받고 黥布로 불렸는데 용맹이 뛰어났다. 처음에는 項羽를 섬겼으나 뒤에 劉邦에게 귀의하여 漢나라 開國에 큰 공을 세우고 九江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韓信과 彭越이 차례로 잡혀 죽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역주12 王莽一竪子 : 王莽은 자가 巨君으로 漢나라 元帝의 妃인 孝元皇后의 친정 조카인데, 成帝에 의해 新都侯로 봉해졌으며 大司馬가 되어 처음에는 善政을 베풀어 宰衡이라고 일컬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平帝 元始 5년(A.D. 5)에 平帝를 시해하고 孺子 嬰을 세워 섭정하다가 뒤이어 帝位를 찬탈하고는 국호를 新이라 하였는데, 在位 15년 만에 光武帝 劉秀에게 토벌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竪子는 小子란 뜻으로 사람을 경멸하여 부르는 말이다. 宰衡은 官名으로 周나라 周公이 맡았던 冢宰와 商나라 伊尹이 맡았던 阿衡을 겸하여 붙인 이름인데, 곧 어린 成王을 보필한 周公과 혼우한 太甲을 축출하였다가 개과천선시켜 복위시킨 伊尹의 임무를 함께 들어 자칭한 것이다.
역주13 太祖太宗 : 太祖는 宋나라를 개국한 趙匡胤이고 太宗은 宋나라 2대 황제인 趙匡胤의 아우 趙匡義를 이른다.
역주14 太守刺史 : 太守와 刺史는 옛날에 사용하던 官名이고 宋代에는 知州事와 知縣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역주15 扈從侍讀侍講之人 : 모두 황제의 곁에서 侍從하고 자문하는 측근 신하들이다. 扈從은 侍從으로 宋代에는 翰林學士와 給事中, 六部의 尙書와 侍郞 등을 侍從이라고 칭하였으며, 中書舍人, 起居郞, 起居舍人을 小侍從이라고 칭하였다. 侍讀은 天子에게 강학하는 관직으로 唐나라 開元 연간에 처음 설치하였다가 뒤에 폐지하였는데, 宋 太宗 太平興國 연간에 翰林侍讀學士와 翰林侍讀의 관직을 두었다. 侍講은 관직명으로 侍讀과 직무가 같았다. 唐나라 때 처음으로 侍講學士를 두었으며 宋나라도 따라 설치하였는데, 대부분 문학하는 선비가 담당하였다.
역주16 一命 : 옛날 관직을 제수할 적에 一命에서부터 九命까지 있었는바, 一命은 가장 낮은 관직으로 朝鮮朝의 九品과 같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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