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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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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霸者之論 自是刺骨이니라
自知其可以王而王者 自知其不可以王而霸者
或者之論 曰 圖王不成이면 其弊猶可以霸라하니 嗚呼
使齊桓, 晉文而行湯, 武之事하면 將求亡之不暇하리니 雖欲霸 可得乎
夫王道者 不可以小用也 大用則王이요 小用則亡이라
이나 終以亡其身, 喪其國者 何哉
其所施者 未足以充其所求也일새라
夫有可以得天下之道 而無取天下之心이라야 乃可與言王矣
雖非 然亦可謂剛毅果敢하고 卓然不惑하야 而能有所必爲者也
此二人者 以爲區區之仁義 不足以易吾之大計也라하니라
嗟夫
論者以爲 하니 此其所以無成者 出於不幸이요 而非用兵之罪
이나 當時使昭王尙在하야 反間不得行이라도 樂毅終亦必敗하리라
今以하야 師老于外 此必有乘其虛者矣
諸侯乘之于內하고 齊擊之于外하면 當此時하야라도 不能無敗리라
이나 樂毅以百倍之衆으로 數歲而不能下兩城者 非其智力不足이요 蓋欲以仁義 服齊之民이라
不忍急攻而至於此也니라
夫以齊人 하니 樂毅苟退而休兵하야 治其政令하고 寬其賦役하며 하고 安其老幼하야 使齊人無復鬪志者 獨誰與戰哉
奈何以百萬之師 相持而不決
固所以使齊人得徐而爲之謀也니라
當戰國時하야 兵彊相呑者 豈獨在我리오
以燕, 齊之衆으로 壓其城而急攻之런들이라도 其誰曰不可리오
嗚呼
欲王則王하고 不王則審所處하야 無使兩失焉而爲天下笑也니라
樂毅去趙後 累數十年 其子與孫 功名不滅하고하니 大略毅之風度 亦似可傾動天下者
其餘風不衰하니라


01. 악의樂毅에 대한
패자론霸者論은 진실로 뼈를 찌른다.
자신이 왕 노릇할 수 있음을 스스로 알아서 왕 노릇한 자는 삼왕三王이요, 자신이 왕 노릇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아서 패자霸者가 된 자는 오패五霸이다.
혹자는 논하기를 “왕을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최소한 패자霸者는 될 수 있다.”라고 하니, 아!
만일 제 환공齊 桓公진 문공晉 文公탕왕湯王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였더라면 장차 망하는 것을 구원하기에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니, 패자霸者가 되고자 하나 될 수 있었겠는가?
왕도王道라는 것은 작게 써서는 안 되니, 크게 쓰면 왕자王者가 되고 작게 쓰면 망한다.
옛날에 서 언왕徐 偃王송 양공宋 襄公은 일찍이 인의仁義를 행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끝내 자기 몸을 망치고 나라를 잃었던 것은 어째서인가?
그 베푼 것이 자기가 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하를 얻을 수 있는 방도가 있고 천하를 취할 마음이 없어야 비로소 왕도王道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범려范蠡유후留侯(장량張良)는 비록 〈이윤伊尹강태공姜太公처럼〉 탕왕湯王무왕武王의 훌륭한 보좌는 아니었으나, 또한 굳세고 과감하고 우뚝하여 동요하지 않아서 무슨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오왕 부차吳王 夫差고소산姑蘇山에서 곤궁에 처해 자신에게 목숨을 애걸하는 것을 보자, 월왕 구천越王 句踐은 용서하고자 하였으나, 범려范蠡가 홀로 ‘불가하다.’ 하고 북채를 당겨 진군해서 오왕 부차吳王 夫差가 끝내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게 하였으며,
항적項籍(항우項羽)이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돌아갈 적에 고제高帝(한 고조漢 高祖 유방劉邦)도 군대를 해산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유후留侯가 간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그를 망치고자 하는 것이니 서둘러 공격하여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저 범려范蠡유후留侯 두 사람은 하찮은 인의仁義가 자신들의 큰 계책을 바꿀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아!
악의樂毅는 전국시대의 영웅이었으나 대도大道를 알지 못하였고, 그가 일찍이 들었던 인의仁義란 것은 자기 몸을 망치기에 충분했을 뿐이었다.
의논하는 자가 이르기를 “연 혜왕燕 惠王이 불초하여 반간反間하는 말을 따라서 악의樂毅 대신 기겁騎劫을 장수로 삼아 끝내 악의樂毅를 도망하게 하였으니, 악의樂毅가 공을 이루지 못했던 것은 불행에서 나온 것이고 용병을 잘못한 탓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소왕昭王이 그대로 살아 있어서 나라의 반간反間이 행해지지 못했더라도 악의樂毅는 끝내 또한 반드시 패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라가 나라를 병합하는 것은 나라와 나라와 삼진三晉()의 이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악의樂毅가 백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두 의 남은 적을 공격하였는데, 몇 년이 되어도 해결하지 못해서 군대가 밖에서 지쳤다면 반드시 그 빈틈을 타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후諸侯들이 안에서 빈틈을 타고 나라가 밖에서 공격한다면, 이때를 당해 비록 강태공姜太公사마양저司馬穰苴라도 실패가 없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악의樂毅가 백 배나 많은 병력으로 몇 년이 되도록 두 을 함락시키지 못했던 것은 그 지혜와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아마도 인의仁義를 가지고 나라의 백성들을 복종시키려 한 듯하다.
그러므로 차마 맹렬히 공격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나라 백성들이 민왕湣王의 강하고 포악함에 시달렸으니, 악의樂毅가 만일 후퇴하여 군대를 쉬게 하면서 정령政令을 다스리고 부역賦役을 너그럽게 하며 전리田里를 되돌려주고 늙은이와 어린이들을 편안하게 하여서,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는 싸울 마음이 없게 하였더라면, 전단田單이라는 자가 홀로 누구와 함께 싸우겠는가?
어찌하여 백만의 병력을 가지고 서로 버티면서 결단하지 못했단 말인가?
이는 진실로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서서히 나라를 도모하게 만든 것이었다.
전국시대에 군대가 강성하여 남의 나라를 병탄하는 자가 어찌 다만 나(악의樂毅 자신)뿐이었겠는가?
나라와 나라의 항복한 병력으로 두 을 압박하고 급히 공격했더라면, 나라의 남은 두 을 멸망시키고 난 다음 밥을 먹는다 해도 누가 불가하다 하겠는가?
슬프다!
노릇하고자 하면 왕 노릇을 하고 왕 노릇하지 못할 경우에는 대처할 바를 살핌으로써, 두 가지를 모두 잃어서 천하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악의樂毅나라로 간 뒤 수십 년 동안, 그 아들과 손자들의 공명功名이 없어지지 않았고, 한 고제漢 高帝가 일어나 천자가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사모하여 찾아갔으니, 대략 악의樂毅풍도風度가 또한 천하 사람들을 경동시킬 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남은 풍도가 쇠하지 않은 것이다.


역주
역주1 樂毅論 : 郎曄의 《經進東坡文集事略》 〈進論〉의 제목 아래에 “이 글은 制科에 응시했을 때에 올린 試券이다.”라고 하였다. 蘇軾은 仁宗 嘉祐 6년(1061)에 制科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에는 “蘇長公의 本集에 실린 여러 論과 經義, 經解, 策別, 策斷 등 여러 작품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이 가운데 〈正統論〉만 직접 仁宗 至和 2년(1055)의 저작이라고 注하였고, 나머지 작품들은 젊은 시절의 저작으로 추측할 뿐 자세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당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공부가 이와 같았던 듯하다.”라고 하였다.
樂毅는 전국시대 燕나라의 명장이다. 전국시대 중엽에 燕나라는 燕王 噲가 辯士인 蘇代의 말을 따라 王位를 정승인 子之에게 禪讓하였다가 나라가 큰 혼란에 빠졌다. 그리하여 齊나라의 침공을 받아 燕王 噲가 죽고 나라가 거의 망하게 되었는데, 燕나라 사람들이 太子 平을 세우니, 이가 바로 昭王이다.
당시 齊 湣王은 宋나라를 멸망시키고 자만에 빠져 기고만장하였다. 昭王은 齊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樂毅를 大將軍으로 등용하고, 제후들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齊나라를 공격해서 70여 城을 함락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昭王이 죽고 태자인 惠王이 즉위하였는데, 惠王이 齊나라의 反間計에 말려들어 樂毅를 의심하고 대장군의 직위를 박탈하자, 樂毅는 趙나라로 망명하였다. 趙나라에서 樂毅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樂毅는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史記 樂毅列傳》
역주2 三王 : 夏․商․周 三代의 임금으로 夏나라의 禹王, 商나라의 湯王, 周나라의 文王과 武王을 이른다.
역주3 五霸 : 춘추시대의 제후 중에 霸業을 이룬 다섯 명의 제후를 이른다. 《春秋左氏傳》의 杜預의 注에는 齊 桓公, 晉 文公, 秦 穆公, 宋 襄公, 楚 莊王이라고 하였는데, 史家에 따라서는 宋 襄公 대신 吳王 夫差나 越王 句踐을 꼽기도 한다.
역주4 昔者……嘗行仁義矣 : 徐나라는 周나라 때의 제후국인데 皐陶의 아들인 伯翳(伯益)의 후손으로 성이 嬴이다. 본래 伯爵으로 봉해졌는데, 偃王이 하구를 준설하다가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는 하늘이 내린 祥瑞라고 기뻐하며 왕을 참칭하였다.
《韓非子》 〈五蠹〉에 “徐 偃王은 漢水의 동쪽 지방 500里를 차지하고 仁義를 행하며 땅을 떼어 제후들을 分封해서 朝會 오는 나라가 36國이나 되었다. 이에 荊(楚) 文王이 자기 나라를 해칠까 두려워하고 군대를 일으켜 공격해서 멸망시켰다.”라고 보인다.
저본에 “몸을 망치고 나라를 잃었다.”고 한 것은 偃王이 楚나라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전쟁의 화를 입을까 염려하여 仁義를 내세우고 싸우지 않다가 멸망당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宋 襄公은 이름이 玆父인데, 춘추시대의 군주로 史家에 따라서는 춘추시대 五霸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楚나라와 泓水에서 싸울 적에 仁義를 강조하여, 楚나라의 군대가 泓水를 반쯤 건넜을 적에 공격하자는 司馬 子魚의 간언을 물리치고 楚軍이 물을 다 건너고 대열을 갖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싸워 크게 패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자신은 몸에 부상을 입고 宋나라는 큰 망신을 당하였다.
역주5 范蠡留侯 : 范蠡는 춘추시대 越王 句踐을 섬긴 정치가이자 정략가로 字는 少伯이다. 越나라가 吳나라에게 패한 이후 句踐을 도와 각고의 노력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어 결국 吳나라를 멸망시켰다.
留侯는 張良의 封號로 字는 子房이고 시호는 文成이다. 뛰어난 智略으로 秦나라 말기에 漢나라를 개국한 高祖 劉邦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여 蕭何, 韓信과 함께 開國三傑로 불렸고 留侯로 봉해졌다.
역주6 湯武之佐 : 商나라의 湯王을 보좌한 伊尹과 周나라의 武王을 보좌한 姜太公(呂望)을 가리킨다. 伊尹은 이름이 摯로 有莘國에 은거하다가 湯王의 초빙을 받고 세상에 나와 夏나라의 桀王에게 천거되기도 하였으나, 桀王이 포악한 정사를 계속하자, 湯王을 보필하여 夏나라를 공격해서 승리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姜太公은 呂氏이고 이름이 尙이며 太公은 그의 시호이다. 殷나라 말기 난세를 피하여 渭水에서 낚시질하다가 周 文王(姬昌)을 만나 國師로 기용되어 尙父로 일컬어지고 周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며, 文王이 죽고 武王 發이 즉위하자 8백 명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殷나라의 紂王을 공격하여 牧野의 一戰으로 통일천하를 이룩하였다. 이후로 伊尹과 姜太公은 伊․呂라 하여 開國한 名臣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밖에도 周나라에는 周公 旦과 召公 奭이 있었으나 周公은 文王의 아들이고 召公은 종친이며 戰略에는 크게 작용하지 않았으므로 주로 太公을 말한다. 一說에는 召公 역시 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역주7 吳王困於姑蘇之上……卒刎其頸 : 吳나라는 지금의 蘇州, 越나라는 지금의 杭州에 있었는데, 춘추시대 말기 두 나라는 오랫동안 전쟁하여 원수지간이 되었다. 吳王 夫差가 越王 句踐과 會稽山에서 싸워 승리하였는데, 句踐이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하자 夫差는 句踐을 죽여야 한다는 伍員(伍子胥)의 말을 듣지 않고 많은 공물을 받고 句踐을 풀어주었다.
그 후 句踐은 명재상인 范蠡와 文種을 등용하고 선정을 베풀어 국력을 강화하다가, 교만에 빠진 吳王 夫差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越軍이 笠澤에서 吳軍을 대파하고 吳나라 도성을 3년 동안 포위하였다.
夫差가 도성에서 탈출하여 姑蘇山으로 들어가 농성하자, 句踐이 추격하여 다시 포위하였다. 夫差가 越王에게 강화를 청하며 말하기를 “옛날 제가 會稽山에서 대왕에게 죄를 지었으나 이제는 감히 명을 거스를 수 없어 대왕께 강화를 청합니다. 오늘 대왕께서 외로운 臣을 징벌하기 위해 玉步를 옮기셨으니, 臣은 단지 그 명에 따를 뿐입니다. 바라건대 예전 會稽山에서처럼 저에게도 관용을 베풀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句踐이 차마 모질게 대하지 못하고 허락하려고 하였다.
이에 范蠡가 아뢰기를 “會稽山에서의 일은 하늘이 우리 越나라를 吳나라에게 준 것인데, 吳나라가 취하지 않아 이제 하늘이 吳나라를 우리 越나라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어찌 우리가 하늘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吳나라를 취하기 위해 계획을 세워 노력한 것이 이제 22년이 되었는데, 어찌 하루아침에 이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직접 북채를 잡고 북을 두드려 군대를 진군시켰다. 越王이 애처롭게 여겨 吳王에게 사자를 보내 甬東에다가 1백 家를 주어 살게 하겠다고 하였으나, 吳王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史記 越王句踐世家》
역주8 項籍之解而東……急擊勿失 : 秦나라 말기 陳勝과 吳廣의 반란을 시발점으로 秦나라는 각처에서 義兵이 蜂起하였다. 楚나라 장군이었던 項燕의 아들 項梁과 項燕의 손자 項羽(項籍)가 起兵하였으며, 沛邑의 劉邦도 起兵하여 秦나라를 쓰러뜨린 다음, 項羽는 스스로 西楚의 霸王이 되고 劉邦은 漢中王에 봉해져 각각 제후들을 병탄하였다.
그러나 漢王 劉邦은 楚王 項羽에게 백전백패하여 도망다니기에 겨를이 없었다. 漢王이 張良과 陳平의 계책으로 楚나라의 군주와 신하를 이간시켜 결국 楚나라의 謀士인 范增이 화병으로 죽고 장군 鍾離昧 등이 제거되었으며, 漢나라는 韓信의 연전연승으로 魏, 趙, 齊를 차례로 평정하자, 楚나라는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때 劉邦의 아버지인 太公과 劉邦의 아내인 呂后는 楚나라에 사로잡혀 인질로 있었으며, 楚나라는 漢軍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에 項羽는 마침내 漢나라와 강화하기로 약속하고, 천하를 반으로 나누어 鴻溝 以西는 漢나라가 차지하고 以東은 楚나라가 차지하게 하였다.
B.C. 203년 9월에 項羽는 太公과 呂后를 돌려보내고 병력을 인솔하여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漢王이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자, 張良과 陳平이 설득하기를 “지금 우리 漢나라가 천하의 태반을 소유하였고 제후가 모두 따르며, 楚나라는 병사들이 피로하고 식량이 다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망하게 하는 때입니다. 이제 놓아주고 공격하지 않으면 이른바 범을 길러 스스로 화를 남긴다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漢王이 그 말을 따랐다.
그 결과 漢나라는 垓下의 一戰으로 項羽를 목 찔러 죽게 만들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일부 學者들은 張良이 楚나라와의 강화약속을 깨고 공격하도록 권한 사실을 비판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東坡는 徐 偃王과 宋 襄公의 하찮은 仁義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 것이다.
역주9 樂毅戰國之雄……則足以亡其身而已矣 : 齊나라의 반간계에 속은 燕 惠王이 전쟁에 패한 뒤에 크게 후회하여 趙나라에 망명해 있던 樂毅에게 돌아오기를 권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樂毅가 이에 답하는 편지에 ‘臣聞之(신이 듣기에)’를 반복하며 구구절절 자신이 들은 仁義에 대해 말하였으므로 蘇軾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0 燕惠王不肖……卒走樂生 : 燕 惠王은 昭公의 아들인데 太子로 있을 때부터 樂毅를 좋아하지 않았다. 昭王의 뒤를 이어 즉위한 惠王은 齊나라의 反間을 듣고는 樂毅를 소환하고 대신 騎劫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反間은 적의 간첩을 역이용하는 것으로 《孫子兵法》 〈用間〉에 “反間은 적의 첩자를 이용하는 것이다. 무릇 적의 군대와 성읍을 공격하려거나 적장을 제거하려 할 경우에는 반드시 적의 守將과 대상 인물을 알아낸 다음, 자기편의 첩자로 하여금 자국에 와서 활동하는 적국의 첩자를 찾아내어 자기 측에 유리하게 이용하고 유도해서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적국의 첩자를 역이용하는 것이다.[反間者 因敵間而用之也……故反間可得而用也]” 하였다. 樂生은 樂毅를 가리킨다.
역주11 燕之幷齊 非秦楚三晉之利 : 三晉은 韓․魏․趙를 가리킨다. 이들은 춘추시대 晉나라의 卿들이었는데 전국시대 초기 晉나라를 3등분하여 차지하고 성씨를 따라 각각 나라를 세웠으므로 三晉이라 칭한 것이다.
당시 燕나라는 齊 湣王의 교만함으로 인해 韓․魏․趙의 三晉과 秦나라와 연합하여 齊나라를 공격하였으며, 오직 楚나라만이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淖齒라는 장수를 보내어 齊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淖齒는 燕나라와 함께 齊나라 땅을 분배할 욕심으로 도리어 湣王을 시해하고 연합군에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소위 七雄 가운데 6國이 齊나라를 침공한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燕나라가 齊나라를 겸병하여 강대국이 되는 것은 秦․楚와 三晉에게 모두 불리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역주12 百萬之師……而數歲不決 : 兩城은 齊나라의 莒와 卽墨 두 城을 가리키며, 殘寇는 잔폐한 敵을 가리킨다. 樂毅는 5년 동안 齊나라와 싸워 모두 70여 개 城邑을 점령하고 이를 郡縣으로 만들어 燕나라에 복속시켰다. 그러나 莒와 卽墨 두 城을 3년 동안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역주13 太公穰苴 : 太公은 周 武王의 軍師로 周나라의 군대를 지휘하여 商나라를 멸망시킨 太公望을 이른다. 본명은 呂尙으로 姓이 姜이어서 姜太公이라고도 불리는데, 兵略에 뛰어나 周나라를 천자국으로 만들었으며 兵法書인 《六韜》와 《三略》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穰苴는 춘추시대 齊나라의 장군이자 뛰어난 병법가로 관직이 司馬였기 때문에 보통 司馬穰苴로 불린다. 본래 齊나라의 强族인 田氏의 庶出로 兵法에 통달하였다. 齊 景公 때에 晉나라와 燕나라가 齊나라를 침공해오자, 穰苴는 명재상인 晏嬰의 천거로 장군이 되어 엄정하게 군을 통솔하니, 晉나라와 燕나라에서는 이 소문을 듣고 모두 철병하였다. 현존하는 兵法書인 《司馬法》은 그가 周나라의 관직제도인 《周禮》 즉 《周官》의 司馬와 兵法들을 모아 저술한 것이라 한다.
역주14 苦湣王之彊暴 : 齊나라의 湣王은 성질이 고집스럽고 난폭하였으며, 宋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더욱 교만해져 남쪽으로 楚나라를 침략하고 서쪽으로 三晉을 공격하고, 天子國인 周나라와 東周를 겸병하여 天子가 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을 자주 전쟁에 동원하였고, 여러 열국들로부터 미움을 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5 反其田里 : 田里는 농지와 주택으로, 燕나라에서 탈취한 齊나라 백성들의 농지와 주택을 다시 돌려줌을 이른다.
역주16 田單 : 당시 齊나라의 宗室인데 도성인 臨淄의 관리로 있었다. 田單은 安平에서 燕軍과 싸울 적에 宗人(官名)들로 하여금 수레바퀴 축을 잘라 수레바퀴 통과 똑같게 만들고 쇳조각을 수레바퀴 축의 끝부분에 붙인 다음 빗장을 鐵籠 가운데에 걸어서 바퀴통을 제어하여 견고하고 전진하기 쉽도록 고치게 하였다. 臨淄가 함락될 때 사람들이 다투어 성문을 나오다가 수레의 차축이 모두 부러져 사로잡혔으나, 유독 田單의 宗人들만은 죽음을 면하고 卽墨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당시 齊나라 땅이 모두 燕나라에 소속되었으나 오직 莒와 卽墨만이 함락되지 않았다. 燕나라 장수 樂毅가 卽墨을 포위하자 卽墨의 大夫(邑宰)가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卽墨 사람들은 서로 말하기를 “지난번 安平 전투에서 田單의 宗人들이 수레바퀴에 鐵籠을 붙여 온전할 수 있었으니, 그는 지혜가 많고 兵法에 익숙한 자이다.”라고 하고는 田單을 장수로 추대하고 함께 燕軍에게 항거하였다. 湣王이 齊나라를 구원하러 온 楚將 淖齒에게 시해당하자, 齊나라 사람들은 민간에 숨어 있던 太子 法章을 찾아내어 왕으로 세우니, 이가 襄王이다.
한편 樂毅는 卽墨을 포위한 지 3년이 되었으나 齊나라 백성들에게 仁義를 베풀어 맹공을 가하지 않고 저절로 항복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樂毅를 전적으로 신임하던 昭王이 죽고 惠王이 즉위하자 그는 樂毅를 의심하였다.
이때 田單은 反間의 계책을 사용하여 “燕將 樂毅는 惠王과 사이가 좋지 못하므로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齊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오랫동안 兵權을 유지하고 스스로 王이 되기 위해 일부러 齊나라에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齊나라 사람들은 樂毅가 그대로 있기를 바라며 혹시라도 딴 장수가 와서 卽墨을 공격할까 두려워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첩자들이 이러한 첩보를 전하자, 惠王은 樂毅를 소환하고 騎劫을 장수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樂毅가 趙나라로 도망하자 燕나라 군사들은 惠王의 처사에 크게 불만을 품고 전의를 상실하였다.
이때 田單은 몸소 병졸들과 일하면서 苦樂을 함께하고 모든 음식을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갑옷 입은 군사들은 모두 숨기고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城으로 올려보내 항복할 것을 약속하게 하니, 燕나라 군사들은 더욱 해이해졌다.
田單은 은밀히 城 밑으로 굴을 뚫어 燕軍으로 향하는 큰 지하갱도를 만들어놓았으며, 城 안에 있는 소를 모두 수색하여 천여 마리를 얻어, 소의 몸에는 비단으로 용의 문채를 입히고 뿔에는 칼날을 묶어매고 꼬리에는 갈대로 만든 횃불을 묶은 다음,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한밤중에 지하갱도로 燕軍을 향해 달려 나가게 하고 군사들이 뒤따르게 하였다. 소들이 꼬리가 뜨거워지자 성내어 燕軍에게 달려드니, 燕나라 군사들은 불의의 야간 기습공격에 놀라 대패하였다. 그리하여 田單은 齊나라의 70여 城을 모두 수복하고 安平君에 봉해졌다.
역주17 滅此而後食 : 아침밥을 먹기 전 단숨에 적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신속하게 적을 공격하여 멸망시킴을 이른다.
춘추시대에 魯나라의 季孫行父 등이 晉나라의 卻克과 衛나라의 孫良父, 曹나라의 公子 首와 함께 齊侯를 맞이하여 鞍 땅에서 싸웠는데, 이때 齊侯가 큰소리치기를 “내 우선 이들을 멸망시키고서 아침밥을 먹겠다.[余姑翦滅此而朝食]”라고 하고는 말에 갑옷을 입히지도 않고 달려가 출전하였다가 대패하였다. 《春秋左氏傳 成公 2年》 여기서는 이 고사를 빌어 齊侯의 말처럼 樂毅가 맹공을 가했다면 齊나라의 남은 두 성을 단숨에 점거할 수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18 漢高帝之興 猶向往之 : 《史記》 〈樂毅列傳〉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이므로 말한 것이다.
“高帝(漢 高祖 劉邦)는 천하를 통일한 다음 趙 지방을 지나다가 樂毅의 遺風을 듣고 그를 흠모하여 ‘樂毅가 후손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 신하 중에 ‘樂叔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자가 있었다. 高祖가 그를 樂鄕에 봉하고 華成君이라 칭호하니, 華成君은 樂毅의 손자이다. 樂氏 집안에 또 樂瑕公과 樂臣公이 있었는데, 樂臣公은 趙나라가 秦나라에게 멸망당하자 齊나라의 高密로 도망하였다. 樂臣公은 黃帝와 老子의 학설을 잘 배워 齊 지방에 크게 알려져 어진 스승으로 일컬어진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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