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知其可以王而王者
는 也
요 自知其不可以王而霸者
는 也
라
或者之論에 曰 圖王不成이면 其弊猶可以霸라하니 嗚呼라
使齊桓, 晉文而行湯, 武之事하면 將求亡之不暇하리니 雖欲霸나 可得乎아
夫王道者는 不可以小用也니 大用則王이요 小用則亡이라
故로 夫有可以得天下之道요 而無取天下之心이라야 乃可與言王矣라
는 雖非
나 然亦可謂剛毅果敢
하고 卓然不惑
하야 而能有所必爲者也
라
此二人者는 以爲區區之仁義가 不足以易吾之大計也라하니라
論者以爲
하니 此其所以無成者
는 出於不幸
이요 而非用兵之罪
라
然이나 當時使昭王尙在하야 反間不得行이라도 樂毅終亦必敗하리라
諸侯乘之于內
하고 齊擊之于外
하면 當此時
하야 雖
라도 不能無敗
리라
然이나 樂毅以百倍之衆으로 數歲而不能下兩城者는 非其智力不足이요 蓋欲以仁義로 服齊之民이라
夫以齊人
이 하니 樂毅苟退而休兵
하야 治其政令
하고 寬其賦役
하며 하고 安其老幼
하야 使齊人無復鬪志
면 則
者 獨誰與戰哉
아
以燕, 齊之衆
으로 壓其城而急攻之
런들 可
이라도 其誰曰不可
리오
欲王則王하고 不王則審所處하야 無使兩失焉而爲天下笑也니라
樂毅去趙後 累數十年
에 其子與孫
이 功名不滅
하고 而
하니 大略毅之風度 亦似可傾動天下者
라
자신이 왕 노릇할 수 있음을 스스로 알아서 왕 노릇한 자는 삼왕三王이요, 자신이 왕 노릇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아서 패자霸者가 된 자는 오패五霸이다.
혹자는 논하기를 “왕을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최소한 패자霸者는 될 수 있다.”라고 하니, 아!
만일 제 환공齊 桓公과 진 문공晉 文公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였더라면 장차 망하는 것을 구원하기에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니, 패자霸者가 되고자 하나 될 수 있었겠는가?
왕도王道라는 것은 작게 써서는 안 되니, 크게 쓰면 왕자王者가 되고 작게 쓰면 망한다.
옛날에 서 언왕徐 偃王과 송 양공宋 襄公은 일찍이 인의仁義를 행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끝내 자기 몸을 망치고 나라를 잃었던 것은 어째서인가?
그 베푼 것이 자기가 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하를 얻을 수 있는 방도가 있고 천하를 취할 마음이 없어야 비로소 왕도王道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범려范蠡와 유후留侯(장량張良)는 비록 〈이윤伊尹과 강태공姜太公처럼〉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훌륭한 보좌는 아니었으나, 또한 굳세고 과감하고 우뚝하여 동요하지 않아서 무슨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오왕 부차吳王 夫差가 고소산姑蘇山에서 곤궁에 처해 자신에게 목숨을 애걸하는 것을 보자, 월왕 구천越王 句踐은 용서하고자 하였으나, 범려范蠡가 홀로 ‘불가하다.’ 하고 북채를 당겨 진군해서 오왕 부차吳王 夫差가 끝내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게 하였으며,
항적項籍(항우項羽)이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돌아갈 적에 고제高帝(한 고조漢 高祖 유방劉邦)도 군대를 해산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유후留侯가 간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그를 망치고자 하는 것이니 서둘러 공격하여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저 범려范蠡와 유후留侯 두 사람은 하찮은 인의仁義가 자신들의 큰 계책을 바꿀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악의樂毅는 전국시대의 영웅이었으나 대도大道를 알지 못하였고, 그가 일찍이 들었던 인의仁義란 것은 자기 몸을 망치기에 충분했을 뿐이었다.
의논하는 자가 이르기를 “연 혜왕燕 惠王이 불초하여 반간反間하는 말을 따라서 악의樂毅 대신 기겁騎劫을 장수로 삼아 끝내 악의樂毅를 도망하게 하였으니, 악의樂毅가 공을 이루지 못했던 것은 불행에서 나온 것이고 용병을 잘못한 탓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소왕昭王이 그대로 살아 있어서 제齊나라의 반간反間이 행해지지 못했더라도 악의樂毅는 끝내 또한 반드시 패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연燕나라가 제齊나라를 병합하는 것은 진秦나라와 초楚나라와 삼진三晉(한韓ㆍ위魏ㆍ조趙)의 이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악의樂毅가 백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두 성城의 남은 적을 공격하였는데, 몇 년이 되어도 해결하지 못해서 군대가 밖에서 지쳤다면 반드시 그 빈틈을 타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후諸侯들이 안에서 빈틈을 타고 제齊나라가 밖에서 공격한다면, 이때를 당해 비록 강태공姜太公과 사마양저司馬穰苴라도 실패가 없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악의樂毅가 백 배나 많은 병력으로 몇 년이 되도록 두 성城을 함락시키지 못했던 것은 그 지혜와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아마도 인의仁義를 가지고 제齊나라의 백성들을 복종시키려 한 듯하다.
그러므로 차마 맹렬히 공격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제齊나라 백성들이 민왕湣王의 강하고 포악함에 시달렸으니, 악의樂毅가 만일 후퇴하여 군대를 쉬게 하면서 정령政令을 다스리고 부역賦役을 너그럽게 하며 전리田里를 되돌려주고 늙은이와 어린이들을 편안하게 하여서, 제齊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는 싸울 마음이 없게 하였더라면, 전단田單이라는 자가 홀로 누구와 함께 싸우겠는가?
어찌하여 백만의 병력을 가지고 서로 버티면서 결단하지 못했단 말인가?
이는 진실로 제齊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서서히 연燕나라를 도모하게 만든 것이었다.
전국시대에 군대가 강성하여 남의 나라를 병탄하는 자가 어찌 다만 나(악의樂毅 자신)뿐이었겠는가?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항복한 병력으로 두 성城을 압박하고 급히 공격했더라면, 제齊나라의 남은 두 성城을 멸망시키고 난 다음 밥을 먹는다 해도 누가 불가하다 하겠는가?
왕王 노릇하고자 하면 왕 노릇을 하고 왕 노릇하지 못할 경우에는 대처할 바를 살핌으로써, 두 가지를 모두 잃어서 천하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악의樂毅가 조趙나라로 간 뒤 수십 년 동안, 그 아들과 손자들의 공명功名이 없어지지 않았고, 한 고제漢 高帝가 일어나 천자가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사모하여 찾아갔으니, 대략 악의樂毅의 풍도風度가 또한 천하 사람들을 경동시킬 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남은 풍도가 쇠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