諸侯之義는 守先君之封土하야 而不敢有失也요 守天子之疆界하야 而不敢有過也라
故로 夫以力而相奪하고 以兵而相侵者는 春秋之所謂暴君也요 侵之를 雖不以兵하고 奪之를 雖不以力이라도 而得之不義者는 春秋之所謂汙君也라
하고 는 此諸侯之以不義而取魯田者也
요 하고 하고 은 此魯之以不義而取諸侯之田者也
니
諸侯以不義而取魯田하고 魯以不義而取諸侯之田은 皆不容於春秋者也니라
夫子之於庶其, 牟夷, 黑肱也
에 責之薄
하시고 而於魯也
엔 罪之深
하시니 彼其竊邑叛君
하야 爲
之事
는 市人屠沽
도 且羞言之
하나니 而安足以重辱君子之譏哉
리오
夫魯는 周公之後로 守天子之東藩이어늘 招聚小國叛亡之臣하야 與之爲盜竊之事하니 孔子悲傷而痛悼之라
故로 於三叛之人에 具文直書하사 而無隱諱之詞하시니 蓋其罪魯之深也시니라
使天下之諸侯 皆莫肯容夫如此之人이면 而穿窬盜竊之事 將不禁而自絶하리니 此는 春秋之所以用意於其本也니라
故로 書曰 欒盈入於晉이라하니 黑肱도 或者旣絶于邾라가 而歸竊其邑以叛歟아
當時之簡牘旣亡하야 其詳을 不可得而聞矣라 然이나 以類而求之하면 或亦然歟인저
04. 흑굉黑肱이 남濫 땅을 가지고 도망온 것에 대한 논論
제후諸侯들의 의리는 선군先君의 영토를 지켜서 감히 잃지 않고, 천자天子가 봉해준 국경을 잘 지켜서 감히 더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력으로써 서로 빼앗고 군대로써 서로 침략하는 자는 《춘추春秋》에 이른바 폭군이란 것이고, 비록 군대를 사용하여 침략하지 않고 비록 무력을 사용하여 영토를 빼앗지 않았다 하더라도 의義롭지 못하게 얻은 자는 《춘추春秋》에 이른바 탐욕스런 군주란 것이다.
정백鄭伯이 벽옥璧玉을 가지고 허許 땅의 전지田地를 빌리고, 진후晉侯가 한천韓穿으로 하여금 노魯나라에 와서 문양汶陽의 전지를 제齊나라에 돌려주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제후諸侯들이 의義롭지 못한 방법으로 노魯나라의 토지를 취한 것이요, 주邾나라의 서기庶其가 칠漆 땅과 여구閭丘를 가지고 도망오고 거莒나라의 모이牟夷가 방防 땅과 자玆 땅을 가지고 도망오고 흑굉黑肱이 남濫 땅을 가지고 도망왔으니, 이것은 노魯나라가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제후諸侯들의 땅을 취한 것이다.
제후諸侯가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노魯나라의 토지를 취하고 노魯나라가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제후諸侯들의 전지田地를 취한 것은 모두 《춘추春秋》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들이다.
부자夫子(공자孔子)께서 서기庶其와 모이牟夷와 흑굉黑肱에 대해서는 가볍게 책망하시고 노魯나라에 대해서는 깊이 죄책罪責하셨으니, 저 고을을 훔치고 임금을 배반하여 천유穿窬의 일을 하는 것은 시장의 장사꾼과 백정과 술 파는 자도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일이니, 어찌 욕되게 군자君子의 비판을 거듭할 필요가 있겠는가?
저 노魯나라는 주공周公의 후손으로 천자天子의 동쪽 번병藩屛을 지키고 있었는데, 나라를 배반하고 도망온 약소국의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그들과 함께 도적질을 하였으니, 공자孔子께서 이것을 서글퍼하고 가슴 아파하셨다.
그러므로 배반한 세 사람에 대해서 문장을 자세히 갖추어서 곧바로 쓰시고 숨기는 말씀이 없으셨으니, 이는 노魯나라를 깊이 죄책하신 것이다.
그런데 선유先儒들의 말은 배반한 사람의 과악過惡에 대해 구구하게 말하고 있으니, 그 의논이 진실로 너무 좁다.
그리고 《춘추春秋》가 어찌 남의 집 담장을 뚫고 담장을 넘어가서 도적질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지어졌겠는가?
만약 천하天下의 제후諸侯들이 모두 이와 같은 사람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담장을 뚫고 담장을 넘어가서 도적질하는 일이 장차 금지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질 것이니, 이 때문에 《춘추春秋》에서 그 근본에 뜻을 둔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르기를 “혹은 이름이 드러나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혹은 자기 과오를 덮고자 해도 이름이 드러났으니, 이 때문에 제표齊豹를 도盜라고 쓰고 배반한 세 사람의 이름을 쓴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말은 가장 엉성하고 잘못되어서, 이르기를 “흑굉黑肱은 숙술叔術의 후손後孫으로 남濫 땅을 온 천하에 통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흑굉黑肱을 주邾나라에 달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아!
누가 공자孔子께서 숙술叔術을 어질게 여겼다고 말하는가?
흑굉黑肱을 주邾나라에 달지 않은 것은 짐작하건대 난영欒盈을 진晉나라에 달지 않은 것과 같을 것이다.
난영欒盈이 제齊나라로 도망하였다가 다시 돌아와 곡옥曲沃에 들어가서 배반하였다.
그러므로 “난영欒盈이 진晉나라로 들어갔다.”라고 썼으니, 흑굉黑肱도 어쩌면 주邾나라와 이미 관계를 끊었다가 돌아와 자기 고을을 도둑질하여 배반했는가 보다.
당시의 간독簡牘이 이미 없어져서 자세한 내용을 얻어 들을 수 없으나 비슷한 종류를 가지고 찾아보면 혹 이것이 옳을 듯하다.
그런데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는 이르기를 “주邾나라를 말하지 않은 것은 남濫 땅을 주邾나라와 구별한 것이요, 남자濫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천자天子가 봉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더더욱 우활하여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