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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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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頓首再拜하노이다
伏蒙再示先人墓表 特載一篇하시니 恭覽涕泗하야 不知所云하노이다
竊惟先人 早歲汨沒이라가 晩乃有聞이라
雖當時學者 知師尊之 然於其言語文章에도 猶不能盡이어든 而況其中之不可形者乎잇가
所謂知之盡而信其然者 擧世 惟公一人이니 雖若不幸이나니이다
辨姦之始作也 自軾與舍弟 皆有嘻其甚矣之諫하니 不論他人이어늘 獨明公一見하고 以爲與我意合이라하시니이다
公固已論之先朝하고 載之史冊하시니 今雖容有不知 後世決不可沒이어니와
而先人之言 非公表而出之 則人未必信이니이다
信不信 何足深計리오마는 然使斯人用區區小數하야 以欺天下어늘 天下莫覺莫知하리니 此墓表之所以作이요 而軾之所以流涕再拜而謝也니이다
林宗 於人材 小大畢取하야 所賢非一人이요 而叔度之賢 無一見於外者로되 而後世猶信 徒以林宗之重也니이다
今公之重 不減林宗이어늘 所賢惟先人하야 而其心迹 粗若可見하니 其信於後世 必矣니이다
多言 何足爲謝리오
聊發一二하노이다


06. 장태보張太保선인先人묘갈명墓碣銘을 지어준 것에 사례한 편지
소식蘇軾은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합니다.
두 번째 보여주신 선인先人묘표墓表에 특별히 〈변간론辨姦論〉 한 편을 기재하셨으니, 공손히 보고 눈물이 흘러 말씀드릴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선인先人께서는 소년시절에는 명성이 없이 그대로 몰골沒汨하다가 말년에야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당시에 배우는 학자들이 스승으로 높일 줄 알았으나 선인先人의 언어와 문장도 오히려 다 알지 못했는데, 하물며 마음속에 형용할 수 없는 것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른바 극진히 알고 그 옳음을 믿어주시는 분은 온 세상에 오직 한 분이시니, 비록 불행한 것 같으나, 자신을 알아주는 자가 드문 것을 바로 노씨老氏(노자老子)는 귀하게 여겼습니다.
변간론辨姦論〉을 처음 지을 적에 저와 사제舍弟도 모두 너무 심함을 하였으니 다른 사람은 말할 것이 없는데, 명공明公께서는 한 번 보시고 “나와 뜻이 부합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께서는 진실로 이것을 이미 선왕조에서 논하셨고 역사책에 기재하셨으니, 지금은 비록 혹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나 후세에 결코 선인先人의 업적이 매몰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인先人의 말씀을 표창해서 드러내신 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이것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고 안 믿고를 어찌 굳이 깊이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이 사람(왕안석王安石)이 구구하게 작은 술수를 써서 천하 사람들을 속였는데 천하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고, 천하 사람들이 알지 못하면 후세에 반드시 나라에 사람이 없다는 탄식이 있게 될까 염려되니, 이것이 께서 묘표를 짓게 된 이유이고 제가 눈물을 흘리고 재배하면서 감사하는 이유입니다.
황숙도黃叔度는 인품이 담담하여 크게 한 일이 없으나 곽림종郭林宗의 한마디 말 때문에 지금까지 당대의 안자顔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곽림종郭林宗은 인재에 있어서 크고 작은 인물을 모두 취하여 어질게 여긴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고, 또 황숙도黃叔度의 어짊은 한 가지도 외면에 드러난 것이 없었는데도, 후세 사람들이 황숙도黃叔度를 당대의 안자顔子라고 믿고 있는 것은 오직 곽림종郭林宗의 명망이 중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의 명망의 중함은 곽림종郭林宗보다 덜하지 않은데 어질게 여기신 분이 오직 선인先人이어서 후세 사람들이 선인先人심적心迹을 대략 볼 수 있을 듯하니, 후세 사람들이 믿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말을 많이 한들 어찌 충분히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애오라지 한두 말씀을 올릴 뿐입니다.


역주
역주1 謝張太保撰先人墓碣書 : 이 글은 哲宗 元祐 초기에 쓰여진 듯하다. 張太保는 張方平(1007 ~1091)으로 字가 安道이며 應天 宋城(河南省 商丘) 사람이다. 仁宗 景祐 원년(1034)에 進士로 출사하여 神宗 때에 벼슬이 參知政事에 이르렀다. 哲宗이 즉위한 후에 太子太保에 제수되었으므로 張太保라 한 것이다. 張方平이 四川에 있을 적에 蘇洵과 평생의 지기가 되었고 이후 蘇軾을 諫官으로 추천하였으며, 蘇軾이 烏臺詩案으로 하옥되었을 적에도 蘇軾의 사면을 간청하는 등 은혜를 베풀어 蘇軾은 평생 동안 은인으로 섬겼다. 先人은 蘇軾의 부친인 蘇洵으로 英宗 治平 3년(1066)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蘇軾의 나이 31세였다. 張方平이 일찍이 蘇洵을 위해 〈老蘇文安先生墓表〉를 지었으므로 蘇軾이 이 글을 지어 사례한 것이다.
역주2 辨姦 : 蘇洵이 지은 〈辨姦論〉을 이른다. 이 글은 王安石의 간악함을 논박하였다.
역주3 知我者希 正老氏之所貴 : 《道德經》 70장에 ‘知我者希 則我者貴’라고 보이는데, 이 句의 해석은 사람에 따라 분분하다. 蘇軾은 “나를 아는 이가 많지 않은 것은 道를 통달한 자만이 나를 알기 때문이니, 이는 참으로 내가 귀한 것이다.”라고 해석한 듯하다.
역주4 後世必有秦無人之嘆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文公 13년조에 보인다. 晉나라의 謀士인 士會가 정변으로 秦나라에 망명 와 있었는데, 晉나라에서는 秦나라가 士會를 중용할까 우려한 나머지 魏壽餘를 시켜 士會를 유인해서 데려가려 하였다. 秦나라의 대부로 지혜가 출중하였던 繞朝는 士會를 晉나라로 보내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자신의 계책이 쓰여지지 못하여 士會가 결국 晉나라로 가게 되자, 그에게 채찍을 주면서 “자네는 우리 秦나라에 지혜로운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다만 나의 계책이 쓰여지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역주5 黃叔度……至今以爲顔子 : 黃叔度는 後漢의 隱士인 黃憲으로 叔度는 그의 字이다. 자품이 청수하고 어질어, 후대 사람들이 顔子에 비유하여 칭송하였다. 顔子는 孔子의 高弟로 이름은 回이고 字는 子淵이다. 郭林宗은 後漢의 高士인 郭泰로 인물을 잘 알아보고 품평을 잘하였다. 당대에 黃憲을 顔子로 비유한 것은 郭泰가 아니고 潁川 출신의 名士인 荀淑이다. 荀淑이 黃憲을 만나보고 그의 인품에 감복하였는데, 나중에 袁閎을 만나 “그대의 고을에 顔子가 있는 것을 아는가?”라고 묻자, 袁閎이 “우리 叔度를 만나보았는가?”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郭泰 또한 黃憲에 대해 “叔度의 그릇은 千頃의 물처럼 넓고 깊어서 사람들이 맑게 할 수도 없고 흐려지게 할 수도 없으니, 도저히 측량할 수가 없다.”라고 칭송한 적이 있다. 여기서는 蘇軾이 착각한 듯하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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