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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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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蘇氏父子之論虜情 一一深中하니라
古者 之衆 不過漢一大縣하니이다
이나 所以能敵之者 其國 無君臣上下之節하고 其民 無穀米絲麻耕作織絍之勞하며 其法令 以言語爲約이라之繁하고 其居處以逐水草爲常이라 無城郭邑居聚落守望之助하고 其旃裘肉酪 足以爲養生送死之具
戰則人人自鬪하고 敗則驅牛羊遠徙하야 不可得而破하니이다
蓋非獨古聖人法度之所不加 亦其天性之所安者 猶狙猿之不可使冠帶하고 虎豹之不可被以羈紲也
所得繒絮 皆以馳草棘中하야 使衣袴弊裂하야 以示不如旃裘之堅善也하고 得漢食物이면 皆去之하야 以示不如湩酪之便美也하니이다
由此觀之하면 中國 以法勝이요 而匈奴 以無法勝이니이다
聖人知其然이라
是故 精修其法而謹守之하야 築爲城郭하고 塹爲溝池하며 大倉廩, 實府庫하고 明烽燧, 遠斥堠하며 使民知金鼓進退坐作之節하야
勝不相先하고 敗不相棄하니
此其所以謹守其法而不敢失也니이다
一失其法이면 則不如無法之爲便也
夫各輔其性而安其生이면
則中國與胡 本不能相犯이어늘 惟其不然이라 是故 皆有以相制하니 胡人之不可從中國之法 猶中國之不可從胡人之無法也니이다
今夫佩玉, 服紱하고 冕而垂旒者 此宗廟之服이니 所以登降揖讓折旋俯仰爲容者也 而不可以騎射
今夫蠻夷而用中國之法이면 豈能盡如中國哉리오
苟不能盡如中國하고 而雜用其法이면 則是佩玉, 服紱, 冕而垂旒하고 而欲以騎射也니이다
吳之先 斷髮文身하야 與魚鼈龍蛇居者 數十世로되 而諸侯不敢窺也러니
夫吳之所以强者 乃其所以亡也니이다 何者
以蠻夷之資 而貪中國之美하니 宜其可得而圖之哉니이다
紛紜於中國이요 而其豪傑間起하야 爲之君長하니 皆以絶異之姿 驅駕一時之賢俊하야 其强者 至有天下太半하니이다
이나 終於覆亡相繼하야 遠者 不過一傳再傳而滅 何也
其心 固安於無法也어늘 而束縛於中國之法하고 中國之人 固安於法也어늘 而苦其無法하야 君臣相戾하고 上下相厭이라
是以 雖建都邑하고 立宗廟 而其心岌岌然하야 常若寄居於其間하니 而安能久乎잇가
且人而棄其所得於天之分이면 未有不亡者也니이다
歸而竊習焉하고
旣爲所幷하니 則中國士大夫 有立其朝者矣
其朝廷之儀 百官之號 文武選擧之法 都邑郡縣之制 以至於衣服飮食 皆雜取中國之象하니이다
이나 其父子聚居 貴壯而賤老하고 貪得而忘失하며 勝不相讓하고 敗不相救者 猶在也
其中 하니 此其所以自投於陷穽網羅之中이어늘
而中國之人 猶曰 非古也
其措置規畫 皆不復蠻夷之心하야 以爲不可得而圖之라하니 亦過計矣니이다
且夫天下 固有沈謀陰計之士也
先王 欲圖大事, 立奇功인댄 則非斯人이면 莫之與共하시니이다
하니 此亦王者之心 期以紓天下之禍而已니이다
彼契丹者 有可乘之勢三이어늘 而中國未之思焉하니 則亦足惜矣니이다
臣觀其朝廷百官之衆하니 而中國士大夫 交錯於其間하야 固亦有賢俊慷慨不屈之士어늘
而詬辱 及於公卿하고鞭扑 行於殿陛하야 貴爲將相이나 而不免囚徒之恥하니 宜其有惋憤鬱結而思變者로되 特未有路耳
凡此 皆可以致其心이니
雖不爲吾用이나 亦以間疏其君臣하니 니이다
自宋之興으로 所在賢俊 雲合響應하야 無有遠邇 皆欲洗濯磨淬하야 以觀上國之光이어늘 而此一方 하니이다
聞之諜者하니 曰 幽州士民 謀欲執其帥하야 以城降者러니 聞乘輿之還하고 無不泣下라하니이다
且胡人 以爲諸郡之民 非其族類故 厚斂而虐使之하니 則其思內附之心 豈待深計哉잇가
此又足爲之謀也니이다 使其上下相猜하고 君民相疑然後 可攻也리이다
하고 分置守宰하야 倉廩府庫 莫不備具하니 有一旦之急이면 適足以自累
守之不能하고 棄之不忍이요 華夷雜居하야 易以生變이니 如此 則中國之長 足以有所施矣리이다
이나 非特如此而已也
中國 不能謹守其法하고 慕中國之法而不能純用이라
是以 勝負相持하야 而未有決也니이다
夫蠻夷者 以力攻하고 以力守하고 以力戰하야 顧力不能則逃하나니
中國則不然하야 其守以形하고 其攻以勢하고 其戰以氣
百戰而力有餘하니이다
形者 有所不守로되 而敵人莫不忌也하고 勢者 有所不攻이로되 而敵人莫不憊也하고 氣者 有所不戰이로되 而敵人莫不懾也하니
苟去此三者하고 而角之於力이면 則中國 固不敵矣 尙何云乎잇가
伏惟國家留意其大者而爲之計하소서
其小者 臣未敢言焉이니이다
荊川曰
此文 極其變化하야 橫發而不可羈制하니라


06. 책단 하
소씨 부자蘇氏 父子가 오랑캐의 정세를 논한 것이 하나하나 매우 실정에 맞는다.
옛날에 흉노匈奴의 병력은 나라의 한 큰 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흉노匈奴나라를 대적할 수 있었던 까닭은 흉노匈奴의 조정에는 군신간君臣間상하간上下間에 조회하여 뵙고 회동하는 예절이 없고, 백성은 곡식과 쌀, 실과 삼을 얻기 위하여 농지를 경작하고 직조하는 수고로움이 없으며, 그들의 법령은 언어로 약속하기 때문에 문서와 부전符傳의 번잡함이 없고, 사는 곳은 늘 수초水草를 따라 옮기기 때문에 성곽城郭읍거邑居취락聚落의 지키고 망보는 도움이 필요 없고, 털옷과 갖옷과 고기와 우유가 충분히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이를 장송하는 도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싸우면 사람마다 각자 용감히 싸우고, 패하면 소와 양을 몰고 멀리 옮겨가서 중국中國이 그들을 격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비단 옛 성인聖人법도法度할(시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천성天性에 편안히 여기는 것이니, 마치 원숭이에게 을 씌우고 띠를 묶게 할 수 없고 호랑이와 표범에게 굴레를 씌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중항열中行說흉노匈奴선우單于에게 ‘나라의 물건을 좋아하지 말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라에서 얻은 비단과 솜으로 만든 옷을 입고서 풀과 가시덤불 사이를 달려서 옷과 바지가 찢기고 해어지게 하여 털옷과 갖옷만큼 단단하고 좋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나라의 음식물을 얻으면 모두 버려서 젖과 유제품만큼 편리하고 맛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중국中國으로써 이기고 흉노匈奴무법無法으로 이깁니다.
성인聖人은 그러함을 아셨습니다.
이 때문에 법을 정밀하게 제정하고 삼가 지켜서, 돌과 흙을 쌓아 성곽을 만들고 땅을 파서 해자를 만들며 창고를 크게 짓고 곡식을 가득히 채우며 봉수烽燧를 밝히고 척후를 멀리 보내며, 백성들로 하여금 징을 치고 북을 쳐서 전진하고 후퇴함과 앉고 일어나는 절도를 알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승리하여도 서로 먼저 달려가지 않고 패하여도 서로 버리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중국中國 사람들이 법을 삼가 지키고 감히 잃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그 을 잃으면 오랑캐들의 무법無法의 편리함만 못합니다.
이 때문에 각각 그 성정性情을 길러서 생업에 안주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중국中國과 오랑캐가 본래 서로 침범할 수 없는데, 중국中國에서 이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 서로 견제하였으니, 오랑캐 사람들이 중국의 을 따를 수 없는 것은 중국 사람들이 오랑캐 사람들의 무법無法을 따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을 차고 슬갑을 입고 면류관을 쓰고서 면류관 술을 드리우는 것은 종묘에서 제사지내는 복식이니, 계단을 오르내리고 읍하고 사양하며 ㄱ 모양으로 꺾어 돌고 몸을 숙이고 우러르는 용모를 하는 것이요, 이런 차림으로 말을 타고 활을 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저 오랑캐들이 중국의 법을 사용한다면 어찌 모두 중국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모두 중국과 같이 하지 못하면서 중국의 법을 뒤섞어 쓴다면, 이는 을 차고 슬갑을 입고 면류관에 술을 늘이고서 말을 타고 활을 쏘려는 것과 똑같습니다.
옛날 나라의 선조는 단발斷髮하고 문신文身하여 물고기와 자라, 과 뱀과 함께 수십 대를 살았으나 제후諸侯들이 감히 넘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라 신공 무신申公 巫臣이 처음으로 수레를 타는 방법과 활 쏘고 말 모는 방법을 나라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군대를 내어 나라를 침략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왕吳王합려闔廬부차夫差는 또 만족함이 없는 욕망을 부려서 운하運河를 파서 물길을 통하게 하여, 나라와 나라와 함께 강성함을 다투면서 황지黃池의 모임에 억지로 스스로 을 쓰고 띠를 매니, 나라 사람들이 그 병폐를 이기지 못해서 끝내 나라에 먹히고 말았습니다.
나라를 강성하게 했던 것들이 바로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으니, 어째서이겠습니까?
오랑캐의 자질資質로서 중국의 아름다움을 탐하였으니, 당연히 중국 사람들이 나라를 도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진西晉이 망할 적에 흉노족匈奴族선비족鮮卑族, 저족氐族강족羌族의 무리들이 중국에 분분하였고 호걸豪傑들이 간간히 일어나서 군장君長이 되었으니, 예컨대 흉노匈奴유원해劉元海전진前秦부견苻堅, 후조後趙석륵石勒후연後燕모용준慕容雋 같은 무리들은 모두 크게 뛰어난 자질로서 한때의 어진 이와 준걸들을 임용해서, 강한 자는 천하天下의 태반을 소유함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끝내 연이어 전복하고 멸망하여, 오래 간 자도 불과 한 나 두 를 전하고 멸망했던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들의 마음은 진실로 무법無法을 편안히 여기는데 중국의 에 속박을 당하였고, 중국 사람들은 진실로 을 편안히 여기는데 무법無法을 괴로워하여, 군주와 신하가 서로 어긋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비록 도읍을 세우고 종묘宗廟를 세웠으나 그 마음이 언제나 위태롭고 위태로워서 항상 그 사이에 더부살이하는 것과 같았으니, 이러고서 어찌 오래 갈 수 있었겠습니까?
또 사람이 하늘에게서 얻은 분수를 버린다면 망하지 않는 자는 있지 않습니다.
거란契丹()은 오대시대五代時代부터 남침하였는데, 석진石晉(후진後晉)의 난리를 틈타 곧바로 경사京師에 와서 중원의 부유하고 화려함과 종묘․사직과 궁궐의 장대함을 보고 좋아하였으나, 여기에 오랫동안 머물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돌아가서 몰래 중국의 제도를 익혔습니다.
산전山前의 여러 이 이미 병합되니, 중국의 사대부士大夫들 중에 거란의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정의 의식과 백관百官의 칭호와 문과文科무과武科선거選擧하는 방법과 도읍都邑군현郡縣의 제도로부터 의복과 음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국의 모양을 뒤섞어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비와 자식이 모여 살면서 건장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늙은이를 천히 여기며 얻는 것을 탐하고 잃는 것을 잊으며, 승리하면 서로 양보하지 않고 패하여도 서로 구원하지 않는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마음속에 개와 양과 승냥이의 성질을 바꾸지 못하고, 겉으로만 중국 사람들의 법에 끌려갔으니, 이는 함정과 그물 속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격입니다.
그런데도 중국 사람들은 말하기를 “지금의 흉노匈奴(거란契丹)는 옛날의 흉노匈奴가 아니다.
그들이 조치하고 계획하는 것이 모두 다시는 옛날 오랑캐의 마음이 아니어서 우리가 도저히 도모할 수 없다.”라고 하니, 또한 잘못된 계책입니다.
천하天下에는 진실로 침착하게 도모하고 은밀히 계획하는 선비가 있습니다.
옛날 선왕先王들이 대사大事를 도모하고 기이한 공을 세우고자 할 경우, 이 사람이 아니면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울료자尉繚子나라의 진평陳平은 모두 술동이와 도마 사이에서 적국의 운명을 제압하였으니, 이는 또한 왕자王者의 마음에 천하天下를 늦추려고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거란契丹에게는 우리가 틈탈 만한 형세가 세 가지 있는데 중국에서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니, 또한 애석합니다.
이 거란의 조정과 백관의 무리를 살펴보니, 우리 중국의 사대부士大夫들이 그 사이에 뒤섞여 있어서 진실로 또한 어질고 준걸스럽고 비분강개하여 굽히지 않는 선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란契丹 군주의 꾸짖음과 모욕이 공경公卿들에게 미치고 채찍질과 매질이 궁전의 계단에서 행해져서 신분은 존귀한 장상將相이 되었으나 감옥에 갇힌 죄수의 치욕을 면치 못하니, 저들 가운데 분하고 답답하여 변란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는 자가 마땅히 있을 것이나, 다만 변란을 일으킬 방법이 없을 뿐입니다.
무릇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우리 나라에게 그 마음을 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쓰임이 되지 못하더라도 또한 그 군주와 신하를 이간시키고 소원하게 할 수 있으니, 이것은 옛날 유여由余나라에 들어가 활동했던 이유입니다.
의 땅은 예로부터 영웅호걸이 많기로 알려져 있어서 역사책에 이름난 자가 왕왕 이 지역 사람들입니다.
나라가 일어나고부터 도처에서 어진 이와 준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메아리처럼 호응해서,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모두 자신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 정신을 갈고 연마하여 상국上國의 훌륭한 광채를 보고 싶어 하였는데, 유독 이 한 지방만이 홀로 나쁜 족류族類에 빠져 있습니다.
옛날 태종황제太宗皇帝께서 친히 유주幽州를 정벌하셨다가 이기지 못하고 군대를 돌렸습니다.
그 후 첩자에게 들으니 “유주幽州사민士民들이 상의하여 자신들의 장수를 사로잡아 을 바치고 항복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황제의 수레가 그대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오랑캐들은 산전 제군山前 諸郡의 백성들을 자기 족류族類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거두고 모질게 부리니, 그들이 속으로 우리 나라에 붙고자 하는 마음을 어찌 깊이 계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또 쉽게 도모할 수 있으니, 적으로 하여금 상하 간에 서로 시기하고 군주와 백성이 서로 의심하게 한 뒤에 적을 공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쥐가 구멍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구수窶藪를 물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 오랑캐들이 참람하게 네 곳에 도읍을 세우고 각 고을에 수령과 읍재를 나누어 두고서 창름倉廩부고府庫를 구비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러한 것들은 하루아침에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다만 스스로에게 가 될 뿐입니다.
지킬 수도 없고 차마 버리지도 못하며 중국 사람과 오랑캐 사람이 뒤섞여 살아서 변란이 생기기 쉬우니, 이와 같으면 중국의 장점을 충분히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단 이와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중국은 을 삼가 지키지 못하고, 저 오랑캐들은 중국의 법을 사모하나 순수하게 사용하지를 못합니다.
이 때문에 승부가 서로 팽팽하여 결판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이蠻夷들은 힘으로 공격하고 힘으로 지키고 힘으로 싸워서, 다만 힘으로 할 수 없으면 도망갑니다.
그런데 중국은 그렇지 않아서 지형地形으로써 지키고 형세로써 공격하고 기운으로써 싸웁니다.
그러므로 백 번 싸워도 힘이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지형地形은 지키지 않아도 적들이 꺼리지 않음이 없고, 형세形勢는 공격하지 않아도 적들이 피로하지 않음이 없고, 기운은 싸우지 않아도 적들이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만일 이 세 가지를 버려두고 힘으로 다투려 한다면 중국이 진실로 적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니, 그러고도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국가에서는 큰 것에 유념하여 계책을 세우소서.
그 작은 것은 이 감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이 글은 지극히 변화해서 자유분방하여 제재할 수 없다.”


역주
역주1 策斷 下 : 이 글은 〈策斷〉 3편 가운데 세 번째 편으로 본래의 제목은 〈策斷 三〉이다. 本集에는 편 머리에 ‘其次請論北狄之勢’의 여덟 字가 있다.
역주2 匈奴 : 중국 북방의 유목 기마민족으로 周나라부터 漢나라 때까지 중국을 자주 침범하여 중국의 가장 큰 우환이 되었다. 獯鬻(훈육), 獫狁(험윤) 또는 玁狁이라고도 칭한다.
역주3 朝覲會同 : 朝覲은 신하가 조회하여 군주를 알현함을 이른다. 《周禮》 〈春官 大宗伯〉에 “손님의 禮로 邦國을 친히 하니, 봄에 뵙는 것을 朝라 하고 가을에 뵙는 것을 覲이라 한다.[以賓禮親邦國 春見曰朝 秋見曰覲]”라고 보인다.
會同은 제후가 일이 있어 天子를 朝見하는 것을 會라 하고, 여러 제후가 모여 함께 朝見하는 것을 同이라고 한다.
역주4 文書符傳 : 文書는 公文을 이르고, 符傳은 고대에 出征할 적에 조정에서 발급하는 將領들의 신분증을 이른다.
역주5 中行說……以示不如湩酪(동락)之便美也 : 中行說은 漢 文帝 때의 宦官으로 성이 中行이고 이름이 說이다. 文帝가 稽粥單于에게 公主를 시집보낼 적에 수행하여 보냈는데, 匈奴에 가서 漢나라를 배반하고 單于에게 항복하여 單于의 총애를 받았다. 湩은 소나 양 등의 가축의 젖을 이르고, 酪은 乳汁을 이른다.
이 내용은 《史記》 〈匈奴列傳〉에 “稽粥單于가 처음 즉위하자, 孝文帝(漢 文帝)가 다시 종실의 공주를 單于의 왕비로 시집보냈는데, 宦者인 燕나라 사람 中行說로 하여금 공주를 시종하게 하였다. 中行說은 匈奴에 가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국가에서 억지로 보내니, 말하기를, ‘내가 그 곳에 가면 반드시 漢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中行說은 흉노에 가자마자 單于에게 항복하니, 單于가 그를 몹시 총애하였다.
처음에 匈奴가 漢나라의 비단과 솜으로 만든 옷과 음식을 좋아하니, 中行說이 이르기를 ‘匈奴의 무리가 많다 하나 漢나라의 한 郡에도 필적하지 못한다. 그러나 匈奴가 강한 것은 衣服과 飮食이 달라서 漢나라를 우러러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單于가 풍속을 바꿔 漢나라의 문물을 좋아하게 되면, 漢나라의 문물이 10분의 2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匈奴는 모두 漢나라에 귀속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漢나라에서 얻은 비단과 솜으로 만든 옷을 얻으면 풀과 가시덤불 사이를 달려서 옷과 바지가 찢기고 해어지게 하여 털옷과 갖옷만큼 단단하고 좋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漢나라의 음식물을 얻으면 모두 버려서 젖과 유제품만큼 편리하고 맛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稽粥單于初立 孝文皇帝復遣宗室女公主 爲單于閼氏 使宦者燕人中行說傅公主 說不欲行 漢彊使之 說曰 必我行也 爲漢患者 中行說旣至 因降單于 單于甚親幸之 初匈奴好漢繒絮食物 中行說曰 匈奴人衆 不能當漢之一郡 然所以彊者 以衣食異 無仰於漢也 今單于變俗好漢物 漢物不過什二 則匈奴盡歸於漢矣 其得漢繒絮 以馳草棘中 衣袴皆裂弊 以示不如旃裘之完善也 得漢食物 皆去之 以示不如湩酪之便美也]”라고 보인다.
역주6 楚申公巫臣……使出兵侵楚 : 이 내용은 《史記》 〈吳泰伯世家〉에 “吳王 壽夢 2년(B.C. 584)에 楚나라 대부 申公 巫臣이 楚나라 장수 子反에게 원한을 품고 晉나라로 망명하였다. 巫臣은 晉나라로부터 吳나라로 사신와서 吳나라 군사들에게 用兵術과 전차 타는 법을 가르치고 그의 아들로 하여금 吳나라의 行人이 되게 하였다. 吳나라는 이에 비로소 중원의 제후국들과 통하였으며 楚나라를 공격하였다.[王壽夢二年 楚之亡大夫申公巫臣 怨楚將子反而犇晉 自晉使吳 教吳用兵乘車 令其子爲吳行人 吳於是始通於中國 吳伐楚]”라고 보인다. 行人은 외교를 맡은 관직의 이름이다.
역주7 闔廬夫差又逞其無厭之求……卒入於越 : 闔廬와 夫差는 모두 吳나라의 왕들이다. 吳王 僚를 시해하고 왕이 된 闔閭는 楚나라를 공격하여 즉위 9년에 楚나라를 대패시키고 도읍인 郢 땅을 점령하여 기세를 떨쳤으며, 19년에는 越나라를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나 越王 句踐과의 싸움에 패하고 전투 중에 입은 부상 때문에 죽고 말았다.
闔閭의 뒤를 이어 왕이 된 夫差는 섶나무를 깔고 자면서 절치부심하여 국력을 키운 다음 越王 句踐과 싸워 대패시키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그러나 越나라와의 승리에 도취되어 교만해진 夫差는 중원의 패자로 군림할 욕심을 내어 북쪽으로 齊나라를 침공하고, 마침내 즉위 14년에 북쪽으로 나아가 패자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여, 제후들을 黃池에 소집하고 晉 定公과 다투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越王 句踐이 吳王 夫差가 원정 나간 틈을 이용하여 吳나라의 都城을 공격해서 吳나라의 太子 友를 포로로 잡았다. 夫差가 군대를 이끌고 吳나라로 돌아왔으나 국력이 이미 쇠진해져서 越나라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마침내 笠澤의 싸움에서 越나라에게 대패하여 夫差는 자결하여 죽고 吳나라는 멸망하였다.
역주8 西晉之亡 : 西晉은 265년 司馬炎(武帝)이 魏나라의 元帝 曹奐을 압박하여 帝位를 선양받고 洛陽을 도읍지로 하여 건국한 나라인데, 316년에 永嘉의 亂으로 멸망하였다.
304년에 흉노의 족장 劉淵이 晉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漢王이라 칭하며 西晉을 공격하다가 308년에 平陽에 도읍하고 漢나라를 건국한 다음 황제를 칭하였다. 310년에 劉淵의 뒤를 이어 아들 劉聰이 즉위하자 晉나라를 공격하여 313년에 낙양을 함락시키고 懷帝를 시해하였으며, 洛陽에서 도주하여 長安에서 즉위한 愍帝가 316년에 劉曜에게 항복하여 西晉은 마침내 멸망하였다. 이에 西晉의 琅瑘王 司馬睿가 建康(지금의 南京)에서 晉나라의 명맥을 이었는바 이를 東晉이라 한다.
永嘉는 懷帝의 연호로 307년부터 313년까지이다.
역주9 匈奴鮮卑氐羌之類 : 당시 중국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나라를 세운 변방 민족들이다. 西晉의 멸망 이후에 중국은 五胡가 세운 13국과 漢族이 세운 3국이 부침을 거듭하였는데 이를 五胡十六國時代라 칭한다. 五胡는 바로 匈奴․羯․鮮卑․氐․羌의 5개 변방 민족을 이른다.
역주10 劉元海苻堅石勒慕容雋之儔 : 劉元海(?~310)는 匈奴族으로 이름은 淵이며 元海는 그의 字이다. 劉元海는 晉나라가 혼란해진 틈을 타서 漢나라를 개국하였다.
苻堅(338~385)은 氐族으로 前秦의 3대 황제인데 본래의 姓은 蒲였으나 苻堅이 苻로 바꿨다. 前秦은 苻堅 在位時에 명재상 王猛을 등용해서 北朝 중에 가장 강성하여 중국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苻堅은 東晉을 함부로 공격하지 말라는 王猛의 유언을 무시하고, 建元 19년(383)에 東晉을 정벌하기 위해 대군을 출병하였다가 東晉의 장군 謝玄과 劉牢之에게 淝水에서 대패하였는데, 苻堅 사후에 前秦은 바로 멸망하였다.
石勒(274~333)은 羯族으로 字가 世龍인데 後趙를 세운 자이다. 본래 낙양에 살았는데 집안이 몰락하여 노예가 되었다가 입신하고 劉元海에게 귀의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319년에 독립하여 趙王이라고 칭하다가 328년에 漢나라를 계승한 前趙를 멸망시킨 다음 330년에 後趙를 세우고 稱帝하였다.
慕容雋(319~360)은 鮮卑族으로 字가 宣英이다. 아버지 慕容皝을 계승하여 燕王이 되었다가 352년에 前燕을 세우고 稱帝하였다.
역주11 契丹自五代南侵……歸而竊習焉 : 契丹族은 본래 東胡族인데 4세기 이래로 遼河 상류인 西拉木倫(시라무렌)河와 老哈(랴오허)河 유역 일대에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유목과 수렵을 생업으로 하며 거주하였다. 그러다가 중국의 혼란기인 五代十國時代에 통일의 기운이 일어나면서 916년 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 다음 契丹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하였으며, 뒤에 국명을 遼로 바꿨다.
石晉은 後晉으로 936년에 石敬瑭이 後唐을 멸하고 開封을 수도로 하여 中原에 세운 나라인데, 947년에 契丹에게 멸망당하였다. 처음 後唐을 세운 莊宗(李存勖)이 부하 무장들에게 시해당하고, 莊宗의 아버지 李克用의 양자인 李嗣源이 즉위하여 明宗이 되었는데, 明宗의 양자인 從珂와 石敬瑭은 明宗과 함께 많은 전공을 세워, 從珂는 潞王에 봉해지고 石敬瑭은 河東節度使에 제수되었다.
明宗이 죽고 從珂(末帝)가 즉위하자, 자신보다 무용이 뛰어난 石敬瑭을 시기하여 天雄節度使로 바꾸니, 石敬瑭이 太原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從珂가 石敬瑭을 토벌하자, 石敬瑭이 契丹에게 구원을 청하면서 契丹의 君主인 耶律德光을 아버지로 칭하며, 반란이 성공할 경우 땅을 떼어주고 신하를 칭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契丹軍이 대거 남하하여 後唐을 멸망시키고 石敬瑭을 황제로 즉위시키니, 이가 바로 後晉의 高祖이다. 石敬瑭은 이 댓가로 契丹에 화북의 燕雲 16州를 떼어주고 매년 비단 30만 필을 조공으로 바쳤다.
石敬瑭이 죽고 그의 조카인 石貴重이 즉위하면서 後晉이 契丹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하자, 契丹은 즉각 군대를 남하시켜 947년에 後晉을 멸망시키고 開封을 점령한 다음 국호를 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漢族들의 반항에 직면하자 중국통치의 어려움을 깨닫고 開封에서 물러났는데, 이후 中國人 고문을 두고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배워, 중국인 지역에는 南面官을 두어 唐나라의 군현제도를 유지하고, 契丹族 지역에는 北面官을 두어 契丹族의 관습법으로 다스리는 胡漢分治制度 등을 시행하며, 통치체제를 서서히 바꾸어 이후 中原의 화북 지역과 중국 북방 전역을 통괄하는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역주12 山前諸郡 : 화북의 燕雲 16州를 이른다. 16주는 지금의 河北省과 山西省의 북부 지역으로, 幽州, 薊州, 涿州, 順州, 檀州, 瀛州, 莫州, 新州, 嬀州, 儒州, 武州, 蔚州, 雲州, 應州, 寰州, 朔州 등이다.
역주13 未能革其犬羊豺狼(시랑)之性 而外牽於華人之法 : 遼나라는 중국식의 통치제도를 답습하고 중국의 문물을 일부 받아들였으나 자신들의 정체성이 흐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고유의 의식․음식․복제 등을 유지하였으며 漢字를 쓰지 않고 契丹文字를 고안하여 사용하는 등 종족 주체성 유지에 노력하였는바, 이러한 상황을 東坡는 遼나라가 북방 오랑캐의 야만적인 문화를 버리지 못하고 중국의 제도만을 답습하고 있으므로 제도와 문화의 불일치가 결국 그들을 멸망시키는 함정이 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遼나라는 그 후 신흥세력인 女眞族의 金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역주14 今之匈奴 : 匈奴는 원래 北方의 유목민족으로 蒙古族을 지칭하나, 東坡는 契丹이 북쪽에 있다 하여 北狄 또는 匈奴로 청한 것이다.
역주15 秦之尉繚……皆以樽俎之間而制敵國之命 : 尉繚는 戰國時代 魏나라 大梁 사람으로 商君學을 하여 명성이 높았으며 저서로는 병법서인 《尉繚子》 25편이 있다.
《史記》 〈秦始皇本紀〉에 “大梁 사람 尉繚가 와서 秦王에게 아뢰기를 ‘秦나라의 강함에 비추어 보면 제후들은 비유하건대 秦나라 郡縣의 군주와 같습니다. 다만 臣은 제후들이 合從해서 힘을 합하여 불시에 秦나라를 공격할까 두렵습니다. 이것이 智伯과 夫差 및 湣王이 멸망한 원인입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재물을 아끼지 마시고 제후들의 대신들에게 나누어주소서. 그들의 지모를 어지럽게 하는 데는 불과 30만 근의 황금(황동)이면 충분하니, 이렇게 하면 제후들을 모두 멸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秦王이 그 계책을 따랐다.[大梁人尉繚來 說秦王曰 以秦之彊 諸侯譬如郡縣之君 臣但恐諸侯合從 翕而出不意 此乃智伯夫差湣王之所以亡也 願大王毋愛財物 賂其豪臣 以亂其謀 不過亡三十萬金 則諸侯可盡 秦王從其計]”라고 보인다. 尉繚가 大梁 사람이기 때문에 原文의 ‘秦之尉繚’가 一本에는 ‘梁之尉繚’로 표기되어 있다.
智伯은 春秋時代 말엽 晉나라의 六卿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성한 智氏의 수장으로 이름이 瑤인데 지나치게 교만하였다. 智伯은 韓氏와 魏氏 두 집안과 함께 趙氏를 공격하였는데, 멸망 직전에 몰려 晉陽城에서 농성하던 趙無恤(襄子)이 교만하고 욕심이 많은 智伯의 평소 성품을 들어 韓氏와 魏氏를 설득하자, 韓氏와 魏氏 두 집안이 智伯을 배반하고 趙氏와 연합해서 智伯을 공격하여 죽이고 智氏 집안을 멸족시켰다. 韓․魏․趙 세 집안이 智氏의 영토를 나누어 갖고 뒤에 晉나라를 삼분하여 제후가 되니, 이로부터 戰國時代가 열리게 되었다.
湣王은 戰國時代 齊나라의 王으로 이름은 地이다. 평소 교만하여 齊나라의 국력을 믿고 수시로 주변 제후들을 침략하였다. 이에 燕나라가 湣王의 교만함을 성토하여 韓․魏․趙의 三晉과 秦나라와 연합하여 齊나라를 공격하였다. 湣王은 연합군을 이끄는 燕나라의 장수 樂毅에게 臨淄城에서 대패하자 도망쳐 莒城으로 들어갔다. 楚나라가 淖齒라는 장수를 보내어 齊나라를 구원하였으나 淖齒는 燕나라와 齊나라 땅을 분배할 욕심으로 도리어 湣王을 시해하였다.
陳平은 陽武 사람으로 漢 高祖의 책사가 되어 여섯 번이나 기이한 계책을 내어 高祖를 위기에서 구출하였으며, 뒤에는 丞相이 되어 漢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漢王으로 있던 劉邦은 楚王 項羽에게 연전연패하여 매우 위급한 상황에 빠졌는데, 陳平이 황금 4만 근으로 反間計를 써서 項羽와 신하들을 이간시켜 項羽의 謀士인 范增과 용맹한 장수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결국 유방으로 하여금 天下를 통일하게 하였다. 《史記 陳丞相世家》
역주16 此由余之所以入秦也 : 由余는 춘추시대 秦나라의 명재상이다. 본래 晉나라 사람으로 西戎에 들어가 戎王에게 등용되었다가 戎王의 사신이 되어 秦나라에 왔었는데, 穆公이 그의 유능함을 알아보고 계략을 써서 억류하고 戎王과 틈이 벌어지게 한 다음 재상으로 발탁하였다. 由余는 이에 穆公을 도와 西戎을 정벌해서 20여 개의 나라를 얻고 국토를 천 리나 넓혀 秦나라는 서쪽 일대의 패자가 되었다. 《史記 秦本紀》
역주17 幽燕之地……往往而是 : 幽燕之地는 燕雲 16州를 이른다. 燕은 옛날 燕나라 땅으로 지금의 北京 지역인데, 이들 지역에는 예로부터 비분강개하는 義士와 勇將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바, 《漢書》 〈江充傳〉에 “燕나라와 趙나라 땅에는 진실로 奇士가 많다.[燕趙固多奇士]”라고 보인다.
역주18 獨陷於非類 : 宋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래 契丹이 점거하고 있는 燕雲 16州를 수복하기 위해 몇 차례의 전쟁을 치렀으나 끝내 수복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9 太宗皇帝親征幽州 未克而班師 : 太宗皇帝는 宋나라 2대 황제 趙匡義를 이른다. 형인 太祖 趙匡胤과 함께 宋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으며, 태조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였다. 太平興國 4년(979)에 아직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吳․越과 北漢을 정벌하여 宋나라를 명실상부한 통일 왕조로 만들었다. 幽州는 燕雲 16州의 일부로 지금의 河北 일대이다. 太宗은 北漢을 정벌한 여세를 몰아 契丹이 차지하고 있던 燕雲 16州를 수복하기 위해 契丹 정벌을 도모하였으나 幽州에서 대패하고 회군하였다.
역주20 語有之……銜窶數也 : 窶數는 물건을 머리에 일 때 머리에 쓰는 똬리이다. 이 내용은 《漢書》 〈楊惲傳〉에 “내가 스스로를 보존하지 못한 것은 眞人의 이른바 ‘쥐가 굴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똬리를 물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我不能自保 眞人所謂 鼠不容穴銜窶數者也]”라고 보인다.
음식물을 담은 그릇을 머리에 일 때 쓰는 똬리에는 음식물의 냄새가 나므로 쥐가 이것을 물고 있다가 구멍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인데, 세속의 작은 이익 때문에 몸을 망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楊惲은 漢 宣帝 때의 문신으로 字가 子幼인데 司馬遷의 外孫으로 《史記》를 후대에 전하였다. 청렴하고 사사로움이 없었으나 자신의 행실과 재능을 자랑하고 또 성질이 각박하여 太僕인 戴長樂의 상소로 平通侯의 爵位를 잃고 廢庶人이 되었는데, 조정을 원망하고 비판하다가 뒤에 大逆無道罪로 腰斬刑에 처해졌다.
역주21 僭立四都 : 遼나라는 上京, 南京, 中京, 東京의 네 도읍을 두었다. 上京은 皇都를 이르고, 南京은 지금의 북경인 幽州를 이르고, 東京은 지금의 遼陽을 이르고, 中京은 聖宗城을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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