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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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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予與荊川으로 嘗力稱子由之文 自不易得이러니 而子瞻亦云如此
頓首文潛縣丞張君足下하노라
久別思仰이나 到京 公私紛然하야 未暇奉書러니
忽辱手敎하야 且審起居佳勝하니 至慰至慰
惠示文編 三復感歎하니 甚矣 君之似子由也
之文 實勝僕이어늘 而世俗不知하고 乃以爲不如
其爲人 深不願人知之하니 其文 如其爲人이라 汪洋澹泊하야之聲하니
而其秀傑之氣 終不可沒일새하야 乃稍自振厲하야 若欲以警發憒憒者어늘 而或者便謂僕代作이라하니 此尤可笑
文字之衰 未有如今日者也
其源 實出於王氏하니 王氏之文 未必不善也로되 而患在於好使人同己
自孔子 不能使人同하야 顔淵之仁 子路之勇 不能以相移어늘 而王氏欲以其學同天下
地之美者 同於生物이나 不同於所生이요 惟荒瘠斥鹵之地 彌望 皆黃茅白葦하니 此則王氏之同也
近見호니 言先帝晩年 甚患文字之陋하사 欲稍變取士法이나 特未暇耳라하니라
議者欲稍復詩賦하고 立春秋學官하니 甚美
老矣
使後生으로 猶得見古人之大全者 正賴與君等數人耳
如聞君作太學博士라하니 願益勉之하라
我儀圖之 愛莫助之로라
此外 千萬善愛하라
偶飮하고 來人求書하야 不能覼縷로라


05. 장문잠張文潛에게 답한 글
나는 일찍이 당형천唐荊川(당순지唐順之)과 함께 자유子由(소철蘇轍)의 글이 본래 얻기 쉽지 않은 문장이라고 강력하게 칭찬하였는데, 자첨子瞻도 또한 이와 같이 말하였다.
문잠 현승장군文潛 縣丞張君 족하足下께 머리 조아립니다.
작별한 지 오래되어 그리운 마음 간절하였으나 도성에 이르러는 공사公私간에 분분하여 편지를 받들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손수 쓴 편지를 받아서 우선 기거起居가 건승함을 살피니, 지극히 위로되고 지극히 위로됩니다.
보내주신 문편文編을 세 번 반복하여 읽고 감탄하였으니, 그대의 문장이 자유子由와 참으로 유사합니다.
자유子由의 문장이 실로 나보다 나은데, 세속에서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나보다 못하다고 여깁니다.
자유子由의 사람됨은 남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깊이 원하지 않으니, 글도 인품과 똑같아서 끝없이 넓고 담박하여 한 사람이 하면 세 사람이 감탄하는 순후한 소리가 있습니다.
그 빼어나고 걸출한 기운을 끝내 없앨 수가 없으므로 〈황루부黃樓賦〉를 지어 비로소 약간 스스로 진작하고 떨쳐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일깨우고자 하였는데, 혹자는 이를 내가 대신 지었다고 말하니, 이는 더욱 가소로운 일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나의 선기善機를 본 때문일 것입니다.
문장의 쇠퇴함이 요즘과 같은 적은 있지 않았습니다.
그 근원은 실로 왕안석王安石에게서 나왔으니, 왕안석王安石의 글이 반드시 좋지 않은 것은 아니나 병통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자기와 같아지기를 좋아하는 데에 있습니다.
공자孔子께서도 제자들을 똑같게 하지 못해서 안연顔淵의 어짊과 자로子路의 용맹을 서로 바꾸지 못하셨는데, 왕안석王安石은 자기의 학문을 가지고 천하 사람을 똑같이 하고자 합니다.
비옥한 땅이 물건을 내는 것은 똑같으나 내는 물건은 똑같지 않으며, 오직 거칠고 척박하고 또 소금기 있는 바닷가의 땅은 멀리서 바라봄에 모두 누런 억새와 흰 갈대뿐이니, 이것이 바로 왕안석王安石이 원하는 똑같음입니다.
근래에 장자후章子厚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선제先帝께서도 말년에 문자의 누추함을 매우 염려하셔서 선비를 선발하는 방법을 약간 바꾸고자 하셨으나 다만 겨를이 없으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차츰 시부詩賦를 복구하고 《춘추春秋》의 학관學官을 세우고자 하니, 매우 아름답습니다.
저는 늙었습니다.
그래서 후생들로 하여금 그래도 고인의 크게 완전한 것을 볼 수 있게 하려면 바로 황로직黃魯直, 진소유秦少游, 조무구晁無咎, 진리상陳履常과 그대와 같은 몇 사람들을 의뢰할 뿐입니다.
듣건대 이 태학의 박사가 되었다 하니, 더욱 힘쓰기 바랍니다.
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으나 이것을 능히 거행하는 이가 드뭅니다.
내 도와주려고 도모해보나 사랑하여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이 밖에 천 번 만 번 건강을 잘 아끼시오.
우연히 아침술을 마셔서 취하였고, 온 사람이 편지를 요구하여 자세히 쓰지 못합니다.


역주
역주1 答張文潛書 : 元豐 8년(1085) 神宗의 뒤를 이어 哲宗이 즉위하자, 蘇軾은 6월에 朝奉郞으로 복직되고 知登州事에 임명되었으며, 곧바로 10월에 起居舍人으로 제수되어 京師로 소환되었는데, 이 글은 蘇軾이 京師에 도착한 후에 쓰여졌다. 張文潛(1054~1114)은 이름이 耒로 文潛은 字이며 楚州 淮陰(現 淮安市) 사람이다. 熙寧 연간에 진사로 출사하였는데 蘇軾에게 인정을 받고 깊이 교유하여 黃庭堅, 秦觀, 晁補之와 함께 蘇門四學士로 칭송되었다.
역주2 子由 : 蘇軾의 아우 蘇轍의 字이다.
역주3 一唱三嘆 : 한 사람이 노래하면 세 사람이 화답하는 것으로 원래 노래가 단순하고 질박함을 이르는 말인데, 《荀子》 〈禮論〉의 “淸廟에서 연주하는 노래는 한 사람이 선창하면 겨우 세 사람이 감탄한다.[淸廟之歌 一倡(唱)而三嘆也]”라는 말에서 나왔다. 淸廟는 깨끗하고 정숙한 宗廟로 《詩經》 〈周頌〉에 〈淸廟〉이 보인다. 후대에는 詩文이 순후하고 깊이 있음을 칭찬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역주4 黃樓賦 : 熙寧 11년(1078)에 知徐州事로 있던 蘇軾이 水災를 대비하여 徐州의 성벽을 쌓으면서 東門 위에 黃樓를 지었는데 이 樓가 낙성되자, 蘇轍이 〈黃樓賦〉를 지어 보내 축하하였다.
역주5 殆見吾善者機也 : 機는 기미인데, 이 내용은 《莊子》 〈應帝王〉에 나온다. 鄭나라에 季咸이라는 신들린 무당이 있어 觀相으로 사람의 길흉화복을 정확히 맞추었다. 이에 감복한 列子가 자신의 스승 壺子에게 자랑하자, 壺子가 道를 터득한 자는 千變萬化의 기상이 있어 결코 相으로 점칠 수 없음을 말하고 季咸을 불러 자신의 相을 보게 하였다. 과연 季咸은 壺子의 相을 볼 때마다 다른 相을 보았다. 壺子가 첫 번째는 大地의 相을 보여주자 季咸은 壺子의 죽음을 점쳤고, 두 번째는 天地의 相을 보여주자 季咸은 壺子가 다시 살 것을 점쳤고, 세 번째는 虛無의 相을 보여주자 季咸은 일정한 相을 보지 못하였고, 마지막에는 本質 그대로의 相을 보여주자 季咸은 相을 보지 못하고 두려워 도망갔다. 壺子가 두 번째로 天地의 相을 보여주어 季咸이 다시 살아날 것을 점치자, 壺子가 列子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아마도 나의 善機를 본 때문일 것이다.[殆見吾善者機也]”라고 하였다.
역주6 章子厚 : 章惇(1035~1105)으로 子厚는 그의 字이다.
역주7 黃魯直……陳履常 : 黃魯直은 黃庭堅(1045~1105)으로 魯直은 그의 字이며 號는 山谷道人이다. 洪州 分寧(現 江西省 九江縣) 사람으로 詩賦와 書藝에 뛰어나 蘇門四學士의 수장으로 꼽힌다. 그는 治平 4년(1067)에 진사로 출사하여 起居舍人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나 고위직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詩賦의 創新을 주장하고 독특한 시풍을 이루어 江西詩派의 원조가 되었다. 秦少游는 秦觀(1049~1100)으로 少游는 그의 字이고 號는 淮海居士이며 揚州 高郵(現 江蘇省 高郵縣) 사람이다. 元豐 8년(1085)에 진사로 출사하여 蔡州敎授, 秘書省正字 등을 역임하였는데, 아름답고 사색적인 문장으로 이름났다. 晁無咎는 晁補之(1053~1110)로 無咎는 그의 字이고 호는 歸來子이며 濟州 巨野(現 山東省 巨野縣) 사람이다. 元豐 3년(1080)에 진사로 출사하여 太學正, 著作佐郞 등의 벼슬을 거쳤다. 詩賦와 書藝에 뛰어났고 黃庭堅․秦觀․張耒와 함께 蘇門四學士에 들었다. 陳履常은 陳師道(1053~1102)로 履常은 그의 字이고 號는 后山居士이며 彭城(現 江蘇省 徐州) 사람이다. 蘇軾의 천거로 徐州敎授로 등용되었고 太學博士, 秘書省正字 등을 역임하였다. 詩賦와 書藝에 뛰어났다.
역주8 德輶如毛……愛莫助之 : 이 내용은 《詩經》 〈大雅 蒸民〉에 보인다.
역주9 卯酒 : 卯時는 아침 5시에서 7시 사이이니, 아침 일찍 공복에 마신 술을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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