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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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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如歐文忠公이라
詔語春溫 하고 天降 在故事以嘗聞이나 豈平生之敢望이리잇고
省循非稱하야 愧汗交深이로소이다
竊以 自唐爲盛이라
雖職親事秘하야 號爲之榮이나 而祿薄地寒하야 至有하니 豈如 一振儒風이리오
非徒好爵之縻 兼享太烹之養하니이다
旣厚其禮하고 愈難其人이어늘 而臣以空疎冗散之材 衰病流離之後 生還萬里하야 坐閱三遷하야
不緣左右之容하고躐處賢豪之上하니이다
此蓋伏遇皇帝陛下生資文武하고 天祚聖神하사
首擇輔臣하고 次求法從하실새 知人材之難得하야 采虛名而用臣하시니 敢不益勵初心하야 力圖後效리잇고
才不逮古하야 雖慙之名이나 志常在民하야 庶免私人之誚호리이다


02. 한림학사원翰林學士院으로 부르신 명에 사례한
내용이 구문충공歐文忠公(구양수歐陽脩)만 못하다.
조서詔書의 말씀이 봄볕처럼 따뜻함에 재명再命을 받고 더욱 허리를 구부리고, 사화使華가 하늘(궁궐)에서 내려옴에 일절一節로 부르시면 종종걸음으로 간다는 것은, 고사故事에 있어서 일찍이 들었으나 어찌 평소에 감히 에게 내리기를 바랐겠습니까?
자신을 돌아봄에 걸맞은 자리가 아니어서 부끄러운 마음이 깊고 진땀이 쏟아집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시초視草하는 관직은 나라 때부터 성대하게 여겼습니다.
비록 직책이 군주를 가까이 모시고 일이 비밀스러워 북문학사北門學士의 영화라고 이름났으나 녹봉이 박하고 지위가 빈한하여 경조京兆의 아전 자리를 청함에 이르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우리 성대聖代에서 한결같이 유풍儒風을 진작함만 하겠습니까?
다만 좋은 벼슬로써 여러 선비들을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아울러 훌륭한 요리의 공양도 누리게 됩니다.
옥당玉堂전서篆書로 쓴 글을 내려주시니 순화淳化 연간의 성대한 문채文彩를 우러르고, 보대寶帶에 황금을 더하여 원풍元豐의 새로운 은혜를 두르고 있습니다.
이미 그 예우禮遇를 후하게 하시고 적임자를 더욱 신중히 구하시는데, 은 엉성하고 쓸모없는 재주와 노쇠하여 병들고 유리流離하던 끝에 만리 밖에서 살아 돌아와서 가만히 앉아서 세 번 승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좌우 신하들의 주선을 통하지 않고 곧바로 건너뛰어 어질고 호걸스러운 선비의 윗자리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태어나실 때부터 문무文武의 자질을 겸비하시고 하늘이 신성神聖함을 내려주신 황제 폐하를 만나서입니다.
폐하께서는 비록 상중喪中이라 말씀하지 않으시어 옛날 고종高宗의 덕을 그대로 숨기고 계시나 방락訪落의 도움을 구하시는 것이 이미 성왕成王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먼저 보필하는 신하를 가려 뽑고 다음으로 시종侍從하는 신하를 구하셨는데 인재를 얻기 어려움을 아시고 허명虛名을 취하시어 을 등용하시니, 감히 더욱 초심初心을 가다듬어 후일의 효험을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재주가 고인古人에게 미치지 못하여 비록 내상內相의 이름에 부끄러우나, 마음은 항상 백성들에게 있어서 행여 사사로운 사람들의 비난을 면할까 합니다.


역주
역주1 謝宣召入院表 : 이 글은 元祐 元年(1086) 8월에 哲宗이 蘇軾을 翰林學士 知制誥에 기용하고 翰林院으로 불러들이자, 이에 사례한 表이다. 本集에는 이 편 머리에 ‘右臣今月日 西頭供奉官充待詔董士隆 至臣所居 奉宣聖旨 召臣入院充學士者’라는 32字가 있다.
역주2 再命而僂 : 再命은 황제의 두 번째 명으로 관직을 임명함을 말하며, 僂는 두려워 몸을 굽힘을 이른다. 이 말은 원래 孔子의 선조인 正考父의 鼎銘에 “첫 번째 명을 받고서는 몸을 숙이고 두 번째 명을 받고서는 몸을 구부리며 세 번째 명을 받고서는 더욱 몸을 구부려 담장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니, 또한 나를 감히 업신여기지 못한다.[一命而僂 再命而傴 三命而俯 循牆而走 亦莫余敢侮]”라고 한 내용을 인용하면서 글자를 바꿔 쓴 것이다. 옛날 벼슬할 적에 첫 번째 명으로 士가 되고 두 번째 명으로 大夫가 되고 세 번째 명으로 卿이 되었는데, 벼슬이 높아질수록 더욱 공손하게 처신함을 말한 것이다.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蘇軾이 翰林學士 知制誥에 제수되자 이를 사양하는 表를 올렸는데, 이에 다시 翰林院으로 들어오라는 詔書가 내려졌으므로 再命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3 使華 : 황제의 使臣을 이른다.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서는 ‘華’를 ‘華章’이라 하여 황제의 詔書로 보았는데, 이 또한 통한다.
역주4 一節以趨 : 節은 玉으로 만든 信物로, 군주의 명령을 돕는 물건이다. 《禮記》 〈玉藻〉에 이르기를 “군주가 2節로 부르면 달려가고 1節로 부르면 바쁜 걸음으로 간다.”라고 하였으며, 또 “군주가 使者를 시켜 신하를 부를 적에 2節로 부를 때가 있고 1節로 부를 때가 있다. 일의 느림과 빠름에 따라 급하면 2節로 부르기 때문에 달려가고, 급하지 않으면 1節로 부르기 때문에 바쁜 걸음으로 간다.”라고 하였다.
역주5 視草之官 : 制誥를 초안하는 관원으로 翰林學士 知制誥를 가리킨다. 翰林學士 知制誥는 詔書, 赦令, 황제의 문장 등을 모두 맡아 草稿하였다.
역주6 北門學士 : 翰林院의 學士를 가리킨다. 唐나라 高宗이 弘文館直學士 劉禕之와 著作郞 元萬頃 등을 중용하여 翰林院에서 制書를 초하게 하고 時政을 의논하는 등 재상의 권한을 나누어주었는데, 翰林院이 銀臺門(승정원)의 북쪽에 있었으므로 여기에 소속된 학사들은 南門을 경유하지 않고 곧장 北門으로 출입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北門學士라고 칭하며 선망하였다.
역주7 京兆掾曹之請 : 京兆는 都城을 가리키며, 掾曹는 낮은 직책의 벼슬을 이른다. 唐나라 때에는 翰林學士들이 淸宦職으로 文章과 학식이 높았으나 녹봉이 너무 낮아 생계수단으로 都城의 낮은 벼슬을 겸직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하여 德宗 때의 한림학사 姜公輔는 임기를 마치고 尙書로 전보될 적에 노모를 봉양해야 하는 이유로 京兆의 戶曹參軍을 겸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고, 憲宗 때의 白居易도 가족의 부양을 위해 翰林學士에 京兆의 戶曹參軍을 겸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8 聖代 : 聖君이 통치하는 시대로 宋나라를 이른다.
역주9 玉堂賜篆 仰淳化之彌文 : 玉堂은 본래 侍中들이 거처하는 처소였는데, 宋나라 太宗이 翰林院에 ‘玉堂之廬’라는 글씨를 써서 내려준 이후로 翰林院을 가리키게 되었다. 淳化는 太宗의 年號(990~994)이다.
역주10 寶帶重金 佩元豐之新渥 : 寶帶는 금으로 장식한 띠를 말한다. 神宗 元豐 연간(1078~1085)에 관제를 개혁하여 學士와 6명의 尙書들에게 寶帶를 두르게 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1 亮陰不言 尙隱高宗之德 : 亮陰은 제왕이 執喪하는 곳으로, 이 내용은 《書經》 〈說命 上〉과 《論語》 〈憲問〉에 보인다. 商王 高宗(武丁)이 아버지 小乙의 뒤를 이어 즉위하고 삼년상을 치르면서 禮를 따라 말을 하지 않았다. 元豐 8년(1085)에 神宗이 승하하고 哲宗이 즉위하여, 元祐 元年(1086)은 哲宗이 居喪하는 기간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2 訪落求助 已啓成王之心 : 〈訪落〉은 《詩經》 〈周頌〉의 편명으로 여기에 “내 처음 시작할 때에 신하들에게 물어서 이 昭考를 따르려 한다.[訪予落止 率時昭考]”라고 하였는데, 昭考는 周나라 成王의 아버지인 武王을 가리킨 것이다. 이 詩는 成王이 처음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좋은 계책을 자문하기 위해 지은 詩라 한다.
역주13 內相 : 외면은 정승이 아니지만 내면은 정승이라는 뜻으로 翰林學士를 이른다. 唐나라 德宗 때 翰林學士 陸贄가 임금의 측근에서 제반 정사에 참여하자, 당시 사람들이 그를 內相이라 불렀는데, 이후 翰林學士를 가리키게 되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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