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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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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與張方平最相知
序其文 亦相知之深中 種種當理하니라
志大而論高하니
功烈不見於世 然英偉豪傑之氣 自爲一時所宗하니 其論 慨然有烈丈夫之風이라
言乎
으로 相表裏하니 非秦漢以來所能至也
常恨二人之文 不見其全이러니 今吾樂全先生張公安道 其庶幾乎인저
嗚呼
士不以天下之重自任 久矣
言語非不工也 政事文學 非不敏且博也
이나 至於臨大事하야는 鮮不忘其故, 失其守者 其器小也일새라
自少出仕하야 至老而歸 未嘗以言徇物하고 以色假人하야 雖對人主 必審而後言이라
毁譽不動하고 得喪若一하니
世遠道散하야 雖志士仁人이라도 或少貶以求用이어늘 公獨以邁往之氣 行正大之言하야이라하야
上不求合於人主 雖貴而不用하고 用而不盡하며 下不求合於士大夫 悅公者寡하고 不悅公者衆이라
이나 至言天下偉人하야는 則必以公爲首하나니라
盡性知命하야 體乎自然하야 而行乎不得已 非蘄以文字名世者也
이나 所與人主論天下事하야 見于章疏者 多矣
或用, 或不用이나 而皆本於禮義하고 合於人情하며 是非有考於前하고 而成敗有驗於後 及其他詩文하야도 皆淸遠雄麗하야 讀者可以想見其爲人하니 信乎 其有似於孔北海, 諸葛孔明也
한대 公一見 待以 今三十餘年 所以開發成就之者至矣로되 而軾終無所效尺寸於公者
獨求其文集하야 手校而家藏之하고 且論其大略하야 以待後世之君子하노라
嘗爲軾言호되
公在人主前 論大事하면 他人 終日反覆호되 不能盡者 公必數言而決하고
粲(燦)然成文하야 皆可書而誦也
言雖不盡用이나 然慶曆以來 名臣爲人主所敬 莫如公者라하니라
今年八十一이라 杜門却掃하고 終日危坐하야 하야
言且不可得聞이어든 而況其文乎
凡爲文若干卷이요 詩若干首니라


05. 《악전선생문집樂全先生文集》의
장방평張方平과 가장 친한 사이였다.
그러므로 그의 문집에 서문을 쓴 것도 서로 알아줌이 깊은 가운데 문장이 온갖 이치에 합당한 것이다.
공북해孔北海(공융孔融)는 뜻이 크고 의논이 고상하였다.
그의 공렬功烈은 세상에 나타나지 못했으나 영위英偉하고 호걸豪傑스러운 기운은 저절로 한때에 높이는 바가 되었으니, 그가 성효장盛孝章치홍예郗鴻豫를 논한 글에 개연慨然의렬 장부義烈 丈夫의 풍모가 나와 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문장가로 자처하지 않았으나, 사물事物을 열어주고 인사人事를 이룬 자질과 을 널리 종합한 뜻이 저절로 언어言語(문자文字)에 드러났으며, 〈출사표出師表〉에 이르러서는 간결하면서도 곡진하고 정직하면서도 늘어놓지 않았으니, 훌륭하다.
그의 문장이여!
서경書經》의 〈이훈伊訓〉․〈열명說命〉과 서로 표리表裏가 되니, 이래에 ‘임금을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자’가 이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나는 항상 두 분의 문장을 그 온전히 보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는데, 지금 우리 악전선생 장공樂全先生 張公 안도安道가 아마도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아!
선비가 천하의 중책을 자임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언어가 공교하지 않은 것이 아니요, 정사政事문학文學이 민첩하고 또 해박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큰일을 당하게 되면 옛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지킴(지조)을 잃지 않는 자가 적은 것은 기국器局이 작기 때문이다.
포의布衣로 있을 적에 이미 우뚝하게 공보公輔의 명망이 있었다.
젊어서 세상에 나와 벼슬할 때로부터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갈 때까지 일찍이 아첨하는 말로 남의 비위를 따르고 유순한 얼굴빛으로 남을 용서하지 않아서, 비록 인주人主를 상대하더라도 반드시 자세히 살핀 뒤에야 말씀하였다.
은 남의 훼방과 칭찬에 동요되지 않고, 벼슬을 얻고 잃는 것을 똑같이 여겼으니, 참으로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신 ‘로써 인군을 섬기는 대신大臣’이란 것이다.
성인聖人의 세상이 멀어지고 가 이산되어서 비록 지사志士인인仁人이라도 혹 다소 자신의 자세를 낮추어 등용되기를 바라는데, 은 홀로 매진하여 나아가는 기개로 정대正大한 말씀을 행하여, 이르시기를 ‘나를 써주면 나가서 를 행하고 나를 버리면 은둔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인주人主에게 영합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신분이 귀하였으나 말씀이 쓰이지 못하고 쓰여도 다하지 못하였으며, 아래로는 사대부士大夫들에게 영합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을 좋아하는 자가 적고 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천하天下위인偉人을 말하게 되면 반드시 을 으뜸으로 여긴다.
본성本性을 다하고 천명天命을 알아서 자연을 체행體行하여 부득이함을 하였고, 문자文字로써 세상에 이름나기를 바란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경력慶曆 연간으로부터 원풍元豐 연간에 이르기까지 40여 년 동안에 인주人主와 함께 천하天下의 일을 논하여 장소章疏에 나타난 것이 매우 많다.
그 말씀이 혹 쓰여지기도 하고 혹 쓰여지지 못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예의禮義에 근본하고 인정人情에 부합하며, 옳고 그른 것이 예전에 고찰함이 있고 성공과 실패가 뒤에 징험함이 있었으며, 기타 시문詩文에 이르러도 모두 깨끗하고 원대하고 웅장하고 화려하여 읽는 자가 이로써 그 인품을 상상해볼 수 있으니, 진실로 공북해孔北海제갈공명諸葛孔明과 유사하다.
나는 나이 20세 때에 제생諸生의 신분으로 성도成都에서 뵈었는데, 은 한 번 보자 나를 국사國士로 대우해서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나를 개발하여 성취시킨 것이 지극하였으나, 나는 끝내 한 자나 한 치도 에게 바친 바가 없다.
오직 문집文集을 구하여 내가 손수 교정해서 집에 보관하고, 또 그 대략大略을 논하여 후세의 군자君子를 기다릴 뿐이다.
옛날에 증로공曾魯公이 일찍이 나에게 말씀하기를
인주人主의 앞에서 대사大事를 논하게 되면, 타인은 종일토록 반복하여도 다하지 못하는 것을 은 반드시 몇 마디 말씀으로 결단하였고,
말씀한 것이 찬란하게 문장을 이루어서 모두 글로 써서 외울 만하였다.
의 말씀이 비록 다 쓰이지는 못했으나 경력慶曆 이래로 명신名臣 중에 만큼 인주人主의 존경을 받은 분이 없다.”라고 하였다.
은 지금 나이가 81세이니, 문을 닫고 사람을 물리치고는 종일토록 무릎 꿇고 앉아서 거의 조물주와 무하유無何有의 세계에서 노닌다.
그리하여 그 말씀도 얻어들을 수 없는데, 하물며 문장에 있어서이겠는가?
문집文集은 무릇 이 몇 권이고 가 몇 수이다.


역주
역주1 樂全先生文集序 : 이 글은 元祐 2년(1087)에 쓰여졌는바, 樂全先生은 張方平의 자호이다. 張方平(1007~1091)은 字가 安道이며 應天 宋城(지금의 河南省 商丘) 사람이다. 仁宗 景祐 元年(1034)에 進士로 출사하여 神宗 때에 벼슬이 參知政事에 이르렀으며, 哲宗이 즉위한 뒤에 太子太保에 제수되었다.
張方平이 四川에 있을 적에 蘇軾의 부친 蘇洵과 평생의 지기가 되었고 이후 蘇軾을 諫官으로 추천하였으며, 蘇軾이 烏臺詩案으로 하옥되었을 적에도 蘇軾의 사면을 황제에게 간청하는 등 은혜를 베풀어 蘇軾은 평생 은인으로 섬겼다. 張方平은 일찍이 蘇洵을 위해 〈老蘇文安先生墓表〉를 지었다. 烏臺는 御史臺로 烏臺詩案은 御史臺에서 東坡가 지은 詩를 문제 삼아 罪를 얽은 일을 이르는바, 案은 罪案이다.
역주2 孔北海 : 孔融(153~208)을 이른다. 孔融은 지금의 山東省 曲阜인 魯國 사람으로 자는 文擧이며, 孔子의 후손이다. 後漢 獻帝 建安 연간에 학문이 뛰어난 문사들을 일컫는 建安七子 가운데 한 사람으로, 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北海相으로 있으면서 공을 세워 孔北海로 알려지고 고상한 풍류로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曹操가 丞相이 되어 정권을 전횡할 적에 孔融은 太中大夫로 있었는데, 자주 曹操의 결정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평소 孔融의 명망을 질시하던 曹操는 장차 자신의 霸業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孔融에게 죄를 얽어 사형에 처하였다. 建安七子는 後漢 獻帝의 建安(196~220) 연간에 활약한 일곱 명의 文士인 孔融, 阮瑀, 徐幹, 陳琳, 應瑒, 王粲, 劉楨을 이른다.
역주3 盛孝章 郗鴻豫 : 盛孝章은 後漢 때의 명사로 이름이 憲이고 孝章은 그의 字인데 會稽 사람이다. 吳郡太守를 지내다가 病으로 사직하였다. 孫策이 江東 일대를 점거하여 吳侯가 된 뒤에 명사들을 살해하였는데, 盛孝章은 마침 외출하여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孫策의 뒤를 이은 孫權 또한 탄압을 계속하여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평소 절친했던 孔融이 이 사실을 알고 당시 司空 兼 車騎將軍으로 있던 曹操에게 서신을 보내 盛孝章을 천거하며 구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曹操가 盛孝章을 불러 都尉로 삼고자 하였으나, 임명장이 이르기 전에 孫權에게 살해당하였다.
郗鴻豫는 後漢 말기의 문신으로 이름이 慮이고 鴻豫는 그의 字인데 山陽 高平 사람이다. 젊었을 적에 經學家인 鄭玄에게 수학하고 建安 연간에 侍中에 제수되었으며 뒤에 魏나라에서 御史大夫를 지냈다. 獻帝가 孔融에게 郗鴻豫에 대해 묻자, “더불어 道에 나갈 수는 있으나, 더불어 일의 輕重을 저울질하여 事理에 맞게 할 수는 없습니다.[可與適道 未可與權]”라고 아뢴 적이 있다.
‘더불어 道에 나아갈 수는 있으나, 더불어 일의 輕重을 저울질하여 事理에 맞게 할 수는 없다.’라는 말은 본래 孔子의 말씀으로, 사람이 고지식하여 時宜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함을 이른다. 權은 저울질한다는 뜻으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일을 대처할 수 없을 경우 상황과 事理를 헤아려 道理에 위배되지 않고 時宜適切하게 일을 처리함을 이르는바, 이는 聖人만이 가능하다고 한다.
《論語》 〈子罕〉에 “더불어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함께 道에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道에 나아갈 수는 있어도 더불어 설 수는 없으며, 더불어 설 수는 있어도 더불어 일의 輕重을 저울질하여 事理에 맞게 할 수는 없다.[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라고 보인다.
역주4 諸葛孔明……出師表 : 諸葛孔明은 諸葛亮을 가리키며, 出師表는 그가 蜀漢의 승상으로 있으면서 魏나라를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出兵할 적에 後主 劉禪에게 올린 表文인데 前後 2편으로 되어 있다. 전편은 蜀漢 建興 5년(227)에, 후편은 建興 6년에 지어졌다.
이 글은 당시 蜀漢의 상황과 자신이 先主(劉備)에게 出仕하게 된 동기와 魏나라의 曹丕를 정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등을 말하고, 後主에게 賢者를 중용하고 小人을 물리치며 군주 자신이 큰 뜻을 품고 국정에 임해야 함을 누누이 말하여 千古의 名文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先人들은 이 〈出師表〉를 읽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이는 사람의 올바른 마음이 없는 자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역주5 伊訓說命 : 《書經》의 篇名들이다. 〈伊訓〉은 伊尹이 太甲을 경계하기 위해 지은 글이다.
《書經》에는 옛부터 각 편에 대한 序文이 전해 오는데 孔壁에서 여러 古書와 함께 나온 것이다. 이 序文은 각 편이 쓰여지게 된 연유를 간략하게 설명한 것인데, 孔穎達은 《詩經》의 小序처럼 각 편의 앞머리에 서문을 나누어 놓았다 하여 이 역시 小序라고 칭하였다.
《書經》 〈伊訓〉편의 小序에 “成湯이 별세하자 太甲 元年에 伊尹이 〈伊訓〉, 〈肆命〉, 〈徂后〉를 지었다.[成湯旣沒 太甲元年 伊尹作伊訓肆命徂后]”라고 하였는데, 孔穎達의 《正義》에 “成湯이 별세하니 그해가 바로 太甲 元年이다. 伊尹은 太甲이 成湯의 뒤를 이은 뒤에 할아버지의 왕업을 제대로 닦지 못할까 근심하였다. 이에 이 글을 지어 경계하였는데, 史官들이 이 일을 기록하여 〈伊訓〉을 만들었다.[成湯旣沒 其歲卽太甲元年 伊尹以太甲承湯之後 恐其不能纂修祖業 作書以戒之 史敍其事 作伊訓]”라고 하였다.
〈說命〉은 商나라 高宗(武丁)이 傅說에게 명한 말을 기록한 내용으로 모두 上․中․下 세 편이 있는데, 상편은 高宗이 傅說을 얻어 정승으로 임명한 일을 기록하였고, 중편은 傅說이 정승이 되어 경계한 말을 기록하였고, 하편은 傅說이 학문을 논한 말을 기록하였다.
《書經》 〈說命〉편의 小序에 “高宗이 꿈에 傅說을 얻고는 百官들로 하여금 들에서 찾게 하였는데 마침내 傅巖에서 그를 얻었다. 그리하여 〈說命〉 세 편을 지었다.[高宗夢得說 使百工營求諸野 得諸傅巖 作說命三篇]”라고 하였는데, 孔穎達의 《正義》에 “殷나라의 어진 임금에 高宗이란 왕이 있었는데 꿈에 어진 재상을 얻으니, 이름이 說이었다. 여러 신하들 중에는 그런 자가 없었으므로 百官들로 하여금 꿈에 본 모습을 그려 밖의 들에서 찾게 하였는데, 傅氏의 巖에서 얻고는 마침내 명하여 丞相을 삼았는바, 사관이 이 일을 기록하여 〈說命〉 세 편을 지었다.[殷之賢王 有高宗者 夢得賢相 其名曰說 群臣之內 旣無其人 使百官以所夢之形象 經營求之於外野 得之于傅氏之巖 遂命以爲爲相 史敍其事 作說命三篇]”라고 하였다.
역주6 以事君爲悅者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군주의 환심을 사는 것을 위주하는 자로, 이 말은 《孟子》 〈盡心 上〉에 “人君을 섬기는 자가 있으니, 人君을 섬기면 용납되고 기쁘게 하는 자이다. 社稷을 편안히 하려는 신하가 있으니, 社稷을 편안히 함을 기쁨으로 삼는 자이다. 天民인 자가 있으니, 榮達하여 온 천하에 道를 행할 수 있은 뒤에야 행하는 자이다. 大人인 자가 있으니, 자기 몸을 바르게 함에 남이 바루어지는 자이다.[有事君人者 事是君 則爲容悅者也 有安社稷臣者 以安社稷爲悅者也 有天民者 達可行於天下而後 行之者也 有大人者 正己而物正者也]”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朱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군주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자는 아첨하는 간신이니 말할 것이 없고, 社稷을 편안히 하려는 자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국가를 위해 마음을 바치는 臣下이며, 天民은 천하를 편안하게 할 수 있어야 세상에 나와 道를 행하는 자로 伊尹과 傅說 등을 이르며, 大人은 聖者를 이른다.”라고 註하였다.
역주7 公爲布衣 則頎然已有公輔之望 : 布衣는 平民을 이르는데, 벼슬을 하지 않는 평민들은 삼베옷을 입기 때문에 이렇게 칭하는 것이다. 公은 三公을 이르고 輔는 보필하는 신하를 이르는바, 조정의 가장 높은 관직을 일러 흔히 公輔라 칭한다.
역주8 眞孔子所謂大臣以道事君者 : 이 내용은 《論語》 〈先進〉에 “이른바 大臣이란 것은 道로써 군주를 섬기다가 불가하면 그만두는 것이다.[所謂大臣者 以道事君不可則止]”라고 보인다.
역주9 用之則行 舍之則藏 : 군주가 자신을 등용해주면 나가서 道를 행하고 등용해주지 않으면 은둔하는 것이다. 《論語》 〈述而〉에 孔子께서 顔淵에게 이르시기를 “써주면 道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하는 것을 오직 나와 너만이 이것을 가지고 있다.[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10 自慶曆以來訖元豐四十餘年 : 慶曆은 仁宗의 연호로 1041년부터 1048년까지이며 元豐은 神宗의 연호로 1078년부터 1085년까지이다.
역주11 軾年二十 以諸生 見公成都 : 諸生은 공부하는 儒生으로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을 때에 부르는 호칭이다. 蘇軾은 21세 때인 嘉祐 元年(1056)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蘇軾의 나이 20세는 至和 2년으로 이때 張方平이 知益州事로 成都에 있었다.
역주12 國士 : 온 나라에서 재능과 학식이 뛰어난 선비를 이른다.
역주13 曾魯公 : 曾公亮(998~1078)을 가리킨 것으로, 魯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魯公이라 한 것이다. 宋나라의 이름난 문신인데, 字가 明仲이고 호가 樂正이며 泉州 晉江(지금의 福建省 泉州市) 사람이다. 仁宗 天聖 2년(1024) 진사로 출사하여 仁宗․英宗․神宗의 三朝에 걸쳐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벼슬이 參知政事,樞密使,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역주14 將與造物者 游於無何有之鄕 : 造物은 造物主로 우주의 삼라만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天(上帝)을 이른다.
無何有之鄕은 아무것도 없는 마을이란 뜻으로 莊子가 말하는 無爲自然의 理想鄕을 이른다. 《莊子》 〈逍遙遊〉에 “지금 그대에게 큰 나무가 있는데 쓸모가 없어 걱정하니, 어찌 아무 것도 없는 마을의 드넓은 들판에 심어놓지 않는가?[今子有大樹 患其無用 何不樹之於無何有之鄕廣莫之野]”라고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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