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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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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通篇 將無作有하야 轉輾不窮하야 大略從戰國辯口中來하니 此是東坡議論文中滑稽也니라
蘇子曰
武王 非聖人也
昔者 孔子蓋罪湯武로되 不敢이나
然數致意焉하시니 曰 大哉
라하시고 又曰 三分天下 有其二하야 以服事殷하시니 周之德 其可謂至德也已矣라하시니라
하시니 其罪武王也甚矣시니 孔氏之家法也니라
世之君子 苟自孔氏 必守此法이런들 國之存亡 民之死生 將於是乎在하리니 其孰敢不嚴이리오
自是 學者以湯武爲聖人之正하야 若當然者하니 皆孔氏之罪人也니라
이라하사 上不及湯하고 下不及武王하니 亦以是哉인저
是以 受命稱王하야 行天子之事하니 周之王不王 不計紂之存亡也
使文王在런들 必不伐紂하시리니 紂不見伐하야 而以考終하고 或死於亂이면 殷人 立君以事周하리니 命爲二王後하야 以祀殷이면 君臣之道 豈不兩全也哉리오
호되 紂若不改過하면 則殷人改立君하리니 武王之待殷 亦若是而已矣
天下無主하야 有聖人者出하야 而天下歸之 聖人所不得辭也어늘
而以兵取之하고 而放之而殺之 可乎
漢末大亂하야 豪傑竝起하니 荀文若 聖人之徒也
以爲非曹操 莫與定海內
起而佐之하니
所以與操謀者 皆王者之事 文若 豈敎操反者哉리오
以仁義救天下하야 天下旣平 神器自至 將不得已而受之 不至 不取也 文王之道 文若之心也
吾嘗以文若爲聖人之徒者 以其才似而道似伯夷也일새니라
殺其父하고 封其子하니 其子非人也 則可커니와 使其子而果人也 則必死之하리라
王泣而告之하고 旣而殺子南한대
其徒曰 行乎 曰 吾與殺吾父하니 行將焉入이리오
然則臣王乎 曰 棄父事讐 吾弗忍也라하고 遂縊而死하니라
武王 親以黃鉞斬紂어늘 使武庚受封而不叛이면 豈復人也哉
武庚之必叛 不待智者而後知也니라
武王之封武庚 蓋亦不得已焉耳
하니 紂雖無道 其故家遺俗 未盡滅也
三分天下 有其二로되 殷不伐周어늘 而周伐之하야 誅其君하고 夷其社稷하니 諸侯必有不悅者
封武庚以慰之하니 此豈武王之意哉리오
曰 武王 非聖人也라하노라
子瞻之論武王 雖非天下萬世之公이나 而其援孔子之所與하야 以見其所欲罪하고 援書之所及하야 以見其所不及하며 又以春秋所書趙盾者 以案武王하니 亦成一家縱橫之言이라
獨其所稱荀文若一節 似迂且僻矣
文若佐操 只是挾天子以令諸侯 何得稱王者之事리오
操之簒漢 固其始事本謀 何得直遲之以謀九錫이리오


01. 무왕武王에 대한
전편全篇이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만들어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여 무궁무진해서 대략 전국시대 변설가戰國時代 辯舌家에게서 유래하였으니, 이것은 동파東坡가 의논한 글 가운데에 골계滑稽에 해당한다.
무왕武王나라를 정벌한 다음 나라의 유민들을 가지고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 녹보武庚 祿父에게 봉해주고, 아우인 관숙 선管叔 鮮채숙 도蔡叔 度로 하여금 녹보祿父를 도와 나라를 다스리게 했었는데, 무왕武王이 붕어함에 녹보祿父관숙管叔채숙蔡叔과 함께 난을 일으키자 성왕成王주공周公에게 명하여 이들을 주벌하게 하고 미자微子나라에 세웠다.
이에 대하여 소자蘇子는 논한다.
무왕武王성인聖人이 아니다.
옛날에 공자孔子무왕武王탕왕湯王을 비판하였으나, 다만 스스로 당신이 나라의 후손이고 나라 사람이라고 여기셨기 때문에 감히 드러내놓고 비판하지 못하신 것이다.
그러나 공자孔子는 여기에 대해서 여러 번 뜻을 다하셨으니, 말씀하시기를 “위대하다.
높고 높은 임금과 임금이여.”라고 하셨고, “임금은 내가 흠잡을 데가 없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탕왕湯王무왕武王에 대해서 부족하게 여기신 것이 또한 분명하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무왕武王의 음악은 극진히 아름다우나 극진히 하지는 못하다.”라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문왕文王은 천하를 셋으로 나눔에 3분의 2를 소유하고도 나라를 섬기셨으니, 나라의 덕은 지극한 덕이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셨다.
백이伯夷숙제叔齊무왕武王에 대하여 군주를 시해했다고 여겨서 이를 부끄러워하여 그 녹봉을 먹지 않기까지 하였는데, 공자孔子께서 백이伯夷숙제叔齊를 인정해주셨으니, 그렇다면 무왕武王을 비판함이 심한 것이니, 이것이 공씨孔氏가법家法인 것이다.
세상의 군자들이 만일 공씨孔氏 이래로 반드시 이 법을 지켰더라면 국가의 존망存亡과 백성의 사생死生이 장차 여기에 달려 있을 것이니, 그 누가 감히 엄격히 지키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맹가孟軻가 처음으로 이것을 어지럽혀서 말씀하기를 “나는 무왕武王독부獨夫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고 군주를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배우는 자들이 탕왕湯王무왕武王혁명革命한 것을 성인聖人정도正道라고 여겨서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공씨孔氏의 죄인이다.
만일 당시에 동호董狐와 같은 훌륭한 사관史官이 있었더라면, 탕왕湯王남소南巢에서 걸왕桀王을 정벌한 일을 반드시 반역이라고 썼을 것이요, 무왕武王목야牧野에서 주왕紂王을 정벌한 일을 반드시 시군弑君이라고 썼을 것이며, 만일 탕왕湯王무왕武王인인仁人이라면 반드시 장차 법을 위해서 오명惡名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주공周公이 〈무일無逸을 지어 말씀하기를 “은왕 중종殷王 中宗고종高宗조갑祖甲과 우리 주 문왕周 文王 네 분이 명철함을 실천했다.”라고 하여 위로는 탕왕湯王에게 미치지 않고 아래로는 무왕武王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이는 또한 이 때문일 것이다.
문왕文王 때에 구하지 않았는데도 제후諸侯들이 스스로 찾아왔으므로 문왕文王천명天命을 받고 을 칭해서 천자天子의 일을 행하였으니, 나라가 왕 노릇하고 왕 노릇하지 않는 것은 주왕紂王이 존재하느냐 망하느냐에 관계가 없는 것이다.
만약 문왕文王이 살아 계셨더라면 반드시 주왕紂王을 정벌하지 않았을 것이니, 주왕紂王이 정벌을 당하지 않아서 천수를 누렸거나 혹은 내란에 죽었다면 나라 사람들이 새로 군주를 세워서 나라를 섬겼을 것이니, 두 분 (문왕文王주왕紂王)의 후손에게 명하여 나라를 제사 지내게 했다면 군신君臣의 도리가 어찌 두 가지 모두 온전하지 않았겠는가?
무왕武王맹진孟津에서 관병觀兵을 하고 돌아왔는데도, 주왕紂王이 만약 잘못을 고치지 않았다면 나라 사람들이 군주를 바꿔 세웠을 것이니, 무왕武王나라를 대함은 또한 이와 같이 하여야 했을 뿐이다.
천하에 훌륭한 군주가 없어서 성인聖人이 나와 천하가 그에게 돌아가는 것은 성인聖人이 사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군대를 동원해서 점령을 하고 군주를 추방하여 죽이는 것이 옳겠는가?
후한後漢 말기에 천하가 크게 혼란해서 호걸들이 일제히 일어났는데, 순문약荀文若(순욱荀彧)은 성인聖人의 무리였다.
그는 생각하기를 ‘조조曹操가 아니면 함께 해내海內를 안정시킬 사람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몸을 일으켜 조조曹操를 보좌하였다.
그가 조조曹操와 함께 도모한 것은 모두 왕자王者의 일이었으니, 순문약荀文若이 어찌 조조曹操에게 배반을 가르쳤겠는가?
인의仁義로써 천하를 구제해서 천하가 평정된 다음 신기神器가 저절로 이르면 장차 마지못해 받았을 것이요, 신기神器가 이르지 않으면 취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이 문왕文王이고 순문약荀文若의 마음이었다.
그러다가 조조曹操구석九錫을 도모하자 순문약荀文若이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순문약荀文若은 성인의 무리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 재주가 장자방張子房과 같고 백이伯夷와 같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식을 봉해주었으니, 그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면 괜찮지만 만약 그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다가 죽을 것이다.
나라 사람들이 장차 영윤 자남令尹 子南을 죽이려 하였는데, 이때 자남子南의 아들 기질棄疾이 왕의 어사馭士로 있었다.
초왕楚王이 울면서 그의 아버지를 죽이는 일을 그에게 말하고 얼마 후에 자남子南을 살해하였다.
기질棄疾의 무리가 기질棄疾에게 “나라를 떠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기질棄疾이 대답하기를 “내가 아버지를 시해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니 가면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왕의 신하 노릇을 계속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아버지를 버리고 원수를 섬기는 일을 내가 차마 할 수 없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목을 매어 죽었다.
무왕武王이 친히 황월黃鉞을 가지고 주왕紂王을 목 베었는데, 만일 무경武庚무왕武王의 봉함을 받고 배반하지 않았다면 어찌 다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무경武庚이 반드시 배반하리라는 것은 지혜로운 자를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무왕武王무경武庚을 봉해준 것 또한 아마도 마지못해서였을 것이다.
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지 6백 년에 어질고 스러운 군주가 6, 7명이 나왔으니, 주왕紂王이 비록 무도하였으나, 전통이 오래된 대신의 집안과 남은 풍속이 다 없어지지 않았다.
천하를 셋으로 나눔에 3분의 2를 나라 문왕文王이 소유하였는데도 나라가 나라를 정벌하지 않았는데, 나라가 도리어 정벌하여 그 군주를 죽이고 그 사직을 멸망시켰으니, 제후諸侯들 중에 반드시 이것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왕武王무경武庚을 봉하여 이로써 제후諸侯들을 위안시킨 것이니, 이것이 어찌 무왕武王의 본뜻이었겠는가?
나는 그러므로 “무왕武王성인聖人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소자첨蘇子瞻무왕武王을 논한 것은 비록 천하 만세의 공론公論은 아니나, 공자孔子가 허여한 바를 원용하여 비판하고자 한 대상對象을 나타내었고, 《서경書經》에서 언급한 말을 원용하여 언급하지 않은 말을 나타내었으며, 또 《춘추春秋》에서 조돈趙盾에 대해 쓴 말을 가지고 무왕武王죄안罪案으로 삼았으니, 또한 종횡가縱橫家의 말로써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다만 순문약荀文若을 칭찬한 한 우활迂闊하고 편벽된 듯하다.
순문약荀文若조조曹操를 보좌한 것은 다만 천자天子를 끼고서 제후諸侯들을 명령했을 뿐이니, 어찌 왕자王者의 일이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
조조曹操나라를 찬탈하려던 것은 진실로 일을 처음 시작할 때에 본래의 계책이었으니, 어찌 곧바로 구석九錫을 도모함을 지체할 수 있었겠는가?


역주
역주1 武王論 : 本集에는 이 글의 제목이 〈論武王〉으로 되어 있다. 이 글의 작성 연도는 미상이다. 《總案》은 이 글이 “蘇軾의 젊었을 적의 작품인 듯하다.”라고 하였으나, 茅坤이 이르기를 “내가 《志林》 〈論古〉의 13首를 보고 연보를 살펴보건대, 이 글은 子瞻이 남해(해남도)에 간 이후의 작품인 듯하다.”라고 하였으니, 蘇軾이 해남도에 유배되어 있을 적인 紹聖 4년(1097) 7월부터 元符 3년(1100) 5월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세한 저작 시기는 알 수 없다.
역주2 武王克殷……相祿父治殷 : 武王은 周나라 文王의 아들로 성이 姬이고 이름이 發이다. 武王은 殷나라 紂王의 학정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려고 여러 제후국의 군사를 이끌고 武王 11년(B.C. 1066)에 殷을 정벌하였다. 武王 12년에는 紂王의 아들 武庚 祿父를 봉하여 殷의 유민을 다스리게 하면서 아우인 管叔 鮮, 蔡叔 度, 霍叔 處로 하여금 武庚 祿父를 도와 殷나라를 다스리게 하였다. 祿父는 武庚의 이름이라 한다. 《書經》 〈周書 泰書〉에는 “13년 봄(정월)에 孟津에서 제후의 군대를 크게 모았다.[惟十有三年春 大會于孟津]”라고 보인다. 이로써 연도를 헤아려보면 武王이 殷을 정벌한 것은 다음 해인 武王 14년이 되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분명하지 않다.
역주3 成王命周公誅之 而立微子於宋 : 武王 13년(B.C. 1064)에 武王이 죽자 아들 誦이 즉위하니 바로 成王이다. 그러나 성왕이 어렸기 때문에 武王의 아우 周公 旦이 成王을 도와 攝政하였는데, 管叔 鮮과 蔡叔 度 등은 周公이 王位를 차지할까 의심하여, ‘周公이 成王을 해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武庚 祿父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周公이 成王의 명을 받아 이들을 정벌하여 武庚 祿父와 管叔을 죽이고 蔡叔을 유배 보낸 다음, 微子를 宋나라에 봉하여 殷나라의 선조를 받들게 하였다.
역주4 自以爲殷之子孫而周人也 : 《史記》 〈孔子世家〉에 “孔子의 선조는 宋나라 사람이다.”라고 하였는데, 宋은 바로 殷을 계승한 나라이므로 蘇軾이 孔子를 殷나라의 후손이라고 한 것이다. 또 孔子 당시의 천자국은 周나라이며 周公이 魯나라에 봉해졌으므로 魯나라 사람인 孔子를 周나라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역주5 大哉…… 其不足於湯武也亦明矣 : 巍巍는 높고 큰 모양이며, 間然은 남의 하자를 지적하여 흠을 잡음을 이른다. 《論語》 〈泰伯〉에서 공자는 “높고도 높다. 舜임금과 禹임금은 천하를 소유하고도 관여하지 않으셨다.[巍嵬乎舜禹之有天下也而不與焉]”라고 하셨고, 뒤이어 “위대하시다. 堯의 임금 노릇 하심이여! 높고 크다. 오직 하늘이 위대하시거늘 오직 堯임금만이 하늘과 같으셨으니, 그 功德이 넓고 넓어 백성들이 형용하지 못하였다.[大哉 堯之爲君也 巍巍乎 唯天爲大 唯堯則之 蕩蕩乎民無能名焉]”라고 하셨다. 그리고 또 뒤이어 “禹임금은 내 흠잡을 데가 없다. 평소의 음식은 간략하게 하시면서도 선조에 대한 제사는 효성을 지극히 하셨고, 평소의 의복은 검소하게 하시면서도 祭服인 슬갑과 면류관은 지극히 아름답게 하셨으며, 당신이 거처하는 宮室은 낮게 하시면서도 백성들을 위한 치수사업에는 힘을 다하셨으니, 禹임금은 내 흠잡을 데가 없다.[禹吾無間然矣 菲飮食而致孝乎鬼神 惡衣服而致美乎黻冕 卑宮室而盡力乎溝洫 禹吾無間然矣]”라고 하셨다. 반면 湯王과 武王을 찬양한 내용은 《論語》 등 여러 책에 보이지 않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6 武盡美矣 未盡善也 : 武는 武王의 음악인 大武를 이른다. 《論語》 〈八佾〉에 孔子께서 “舜임금의 음악인 韶는 극진히 아름답고 또 극진히 선하며, 武王의 음악인 大武는 극진히 아름다우나 극진히 선하지는 못하다.[謂韶 盡美矣 又盡善也 謂武 盡美矣 未盡善也]”라고 평하신 내용이 보인다.
역주7 伯夷叔齊之於武王也……而孔子予之 : 伯夷와 叔齊는 孤竹君의 두 아들이다. 孤竹君이 생전에 아우인 叔齊를 후사로 삼고자 하였는데, 孤竹君이 죽자 叔齊가 형인 伯夷에게 군주의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伯夷가 아버지의 명을 거스를 수 없다고 하여 달아나자, 叔齊 또한 즉위하지 않고 달아나, 결국 孤竹國은 둘째아들을 군주로 세웠다. 그 후 伯夷와 叔齊는 周나라 文王에게 귀의하였는데, 文王이 죽고 武王이 즉위하여 8백여 제후들과 함께 殷나라를 정벌하러 가자, 伯夷와 叔齊는 “제후국인 周나라로서 천자국인 殷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의롭지 못한 일이다.”라고 하여 말고삐를 붙잡고 만류하였으며, 周나라가 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천자국이 되자 周나라의 녹봉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首陽山에 들어가 은둔하며 고사리를 뜯어 먹다가 굶주려 죽었다. 《史記 伯夷列傳》 그리고 《論語》 〈述而〉에 子貢이 伯夷와 叔齊가 어떤 사람인가를 묻자, 孔子께서 “옛날의 현인이다.[古之賢人也]”라고 대답하셨고, 子貢이 “그들은 후회했습니까?[怨乎]”라고 묻자, “仁을 구하여 仁을 얻었으니 어찌 후회하였겠는가?[求仁而得仁 又何怨]”라고 대답하셨다. 또 〈季氏〉에 이르시기를 “伯夷와 叔齊는 首陽山 아래에서 굶주렸으나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伯夷叔齊 餓于首陽之下 民到于今稱之]”라고 하셨으며, 〈微子〉에 또 이르시기를 “그 뜻을 굽히지 않고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것은 伯夷와 叔齊일 것이다.[不辱其志 不辱其身 伯夷叔齊與]”라고 하셨다. 이 때문에 공자께서 伯夷와 叔齊를 깊이 허여하셨다고 말한 것이다.
역주8 孟軻始亂之……未聞弑君也 : 獨夫는 一夫와 같은 말로 군주가 포악한 짓을 자행해서 친척이 떠나가고 백성들이 배반하여 다시는 군주로 받들지 않는 자를 이른다. 《孟子》 〈梁惠王 下〉에 “齊 宣王이 묻기를 ‘殷의 湯王이 夏의 桀王을 유치하고 周의 武王이 殷의 紂王을 정벌하였다 하니, 그러한 일이 있습니까?’라고 하니, 孟子께서 대답하시기를 ‘옛 책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王이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함이 可합니까?’라고 물으니, 孟子께서 대답하시기를 ‘仁을 해치는 자를 賊이라 이르고 義를 해치는 자를 殘이라 이르고 殘賊한 사람을 一夫라 이르니, 一夫인 紂王을 주벌하였다는 말은 들었고 君主를 시해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齊宣王問曰 湯放桀 武王伐紂 有諸 孟子對曰 於傳有之 曰 臣弑其君이 可乎 曰 賊仁者謂之賊 賊義者謂之殘 殘賊之人謂之一夫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라고 보인다.
역주9 使當時……必將爲法受惡 : 董狐는 春秋時代 晉나라의 유명한 사관이다. 晉나라 靈公이 무도한 짓을 자행하고 직간하는 趙宣子를 살해하려 하자 趙宣子가 망명하였다. 이때 趙宣子의 일족인 趙穿이 靈公을 桃園에서 시해하자, 趙宣子가 국경을 벗어나지 않고 돌아오니, 太史 董狐가 ‘趙盾이 임금을 弑害하였다.’라고 써서 조정의 신하들에게 보였다. 이에 趙宣子가 자신이 弑害하지 않았음을 항변하자, 董狐가 이르기를 “그대가 正卿으로서 도망을 갔으나 국경을 넘어가지 않았고 돌아와서는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그대가 弑害한 것이 아니라면 누가 했다는 것인가?”라고 꾸짖었다. 이에 趙宣子가 “아! 《詩經》에 ‘나의 그리움이여, 스스로 이런 우환을 끼치는구나.’라는 말은 나를 두고 한 말이로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孔子가 말씀하시기를 “董狐는 옛날의 어진 사관이었기에 법에 의거해 곧바로 쓰고 숨기지 않았으며, 趙宣子는 옛날의 어진 大夫였기에 史官의 書法을 세우기 위해 임금을 弑害했다는 惡名을 받아들였다. 애석하다. 만약 국경을 넘어갔더라면 이런 惡名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宣公 2년》 南巢는 成湯이 夏나라의 桀王을 정벌하고 유배 보낸 곳으로 지금의 安徽省 巢縣이다. 牧野는 周나라 武王이 殷나라를 공격하여 紂王을 정벌한 곳으로 지금의 河南 淇縣 남쪽이다. 宣子는 趙盾의 시호이며, 書法은 사관이 역사책을 쓸 적에 사실을 숨기지 않고 곧바로 쓰는 것을 이른다.
역주10 周公作無逸……玆四人迪哲 : 〈無逸〉은 周公이 成王을 경계하기 위하여 지은 글로 현재 《書經》 〈周書〉에 기재되어 있는데, 군주가 안일하여서는 안 됨을 말하였다. 中宗은 殷王 太戊의 廟號이고, 高宗은 武丁의 廟號이다.
역주11 文王之時 諸侯不求而自至 : 文王 때에 周나라의 인접국인 虞나라와 芮나라가 토지 문제로 분쟁이 발생하여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하였다. 두 나라 군주는 서로 말하기를 “周나라 西伯은 어진 사람이라 하니, 西伯에게 가서 분쟁을 해결하자.”라고 하고, 周나라에 들어가니, 밭 가는 자들은 밭두둑을 사양하고 길 가는 자들은 길을 양보하였으며, 도읍에 들어가니 남녀가 서로 길을 달리하고 머리가 반백이 된 자가 짐을 들고 다니지 않았으며, 朝廷에 들어가니 士는 大夫가 되기를 사양하고 大夫는 卿이 되기를 사양하였다. 두 나라 군주는 이 광경을 보고 부끄러워하여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小人이니, 君子의 조정을 밟을 수 없다.”라고 하고 분쟁하던 토지를 서로 사양하여 묵밭이 되게 하였다. 제후들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문왕에게 귀의하니, 모두 50개국에 이르렀다. 文王은 당시 서쪽 제후의 우두머리인 西伯이었는데, 뒤에 武王이 천하를 통일하고 文王으로 추존하였다. 《史記 周本紀》
역주12 武王觀兵於孟津而歸 : 觀兵은 열병을 가리키며, 孟津은 지금의 河南 孟縣 남쪽에 있는 나루터로 옛날 武王이 이곳에서 군사들에게 맹세했다 하여 盟津으로도 쓴다. 武王 9년(B.C. 1064)에 제후 8백 명이 孟津에 모여 紂王을 정벌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武王이 “천명을 아직 알지 못하니, 정벌할 수 없다.”라고 하고, 군대를 열병한 다음 돌아갔다 한다. 《史記 周本紀》
역주13 荀文若……則文若死之 : 荀文若은 荀彧으로 文若은 그의 字이며 潁川 潁陰 사람이다. 일찍부터 孝廉으로 천거되고 젊은 시절부터 큰 뜻을 품고 있어 사람들이 王者를 보좌할 재목이라고 말하였다. 천하가 혼란해지자 曹操에게 귀의하여 軍國의 大事를 함께 의논하여 曹操로부터 자신의 張子房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建安 17년(212) 曹操가 獻帝에게 九錫을 받으려 하자 荀彧은 이를 만류하며 “주군께서 본래 조정과 나라를 편안하게 하려고 군사를 일으키셨으니, 충절의 뜻을 갖고 겸양의 미덕을 지켜야 합니다. 군자는 사람을 사랑하기를 덕으로써 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曹操가 그를 불편해하였고 荀彧은 근심 끝에 자살하였다. 《三國志 荀彧傳》 神器는 제왕의 자리를 가리킨다. 九錫은 천자가 大臣을 예우하여 내리는 아홉 가지 기물로, 첫째는 車馬로 黑馬 두 마리와 黃馬 두 마리가 끄는 황금으로 아로새긴 큰 수레인 大輅와 무장한 兵車인 小輅이고, 둘째는 衣服으로 천자의 예복인 곤룡포와 면류관, 그리고 붉은 신이고, 셋째는 樂懸으로 의복에 달면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玉으로 만든 장식품이고, 넷째는 朱戶로 붉은색으로 칠한 대문이 있는 붉은색의 저택이고, 다섯째는 納陛로 천자가 거처하는 궁중의 섬돌에 신을 신고 마음대로 오를 수 있는 권한이고, 여섯째는 虎賁으로 주변에서 신변을 보호하는 虎賁軍이라 부르는 3백 명의 호위군사이고, 일곱째는 弓矢로 붉은색의 활 한 벌과 화살 백 개와 검은색의 활 열 벌과 화살 천 개이고, 여덟째는 鈇鉞로 천자만이 사용하는 의장대용 金鈇와 銀鉞이고, 아홉째는 秬鬯으로 천자가 종묘제례를 행할 때 사용하는 검은 수수로 빚은 향기로운 술과 옥으로 만든 祭器를 이른다.
역주14 張子房 : 子房은 漢나라 高祖 劉邦의 모신인 張良의 자이다.
역주15 楚人將殺令尹子南……遂縊而死 : 令尹은 楚나라의 上卿으로 國政을 담당한 자이며, 馭士는 御士로도 쓰는데, 馭士는 임금의 말을 모는 신하이나, 御士로 보아 侍御하는 신하로 보기도 한다. 楚나라 康王 때 子南이 令尹이 되어 부정을 자행하였고, 또 觀起가 令尹에게 총애를 받아 지나치게 부유해지자, 康王이 이들을 토죄하려 하였다. 이때 子南의 아들 棄疾이 康王의 御士로 있었는데, 康王이 그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棄疾이 그 이유를 묻자, 康王이 “현재 令尹이 정사를 잘못하고 있는 것은 너도 알 것이다. 이제 국가에서 그를 토벌하려 하니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니, 棄疾이 이르기를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데 아들이 그대로 있는다면, 군주께서는 그런 자를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또 왕명을 누설하면 형벌이 무거울 것이니 臣은 그렇게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康王이 마침내 子南을 조정에서 죽이고 觀起를 車裂刑에 처하였다. 얼마 후 棄疾이 아버지의 시신을 내갈 것을 청하자 康王이 허락하였다. 棄疾은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나라를 떠날 것인가를 묻는 가신들에게 “내가 아버지를 죽이는 일에 참여하였으니 어디로 가겠는가? 그렇다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차마 섬기지는 못하겠다.”라고 하며 마침내 목을 매고 죽었다. 《春秋左氏傳 襄公 22년》
역주16 殷有天下六百年 賢聖之君六七作 : 殷나라는 湯王(成湯)이 천자가 된 이래 31대, 644년 만에 망하였다. 《孟子》 〈公孫丑 上〉에 “湯王으로부터 武丁에 이르기까지 어질고 聖스러운 군주가 6, 7명이 나왔다.[由湯至於武丁 賢聖之君 六七作]”라고 하였는데, 朱子의 注에 “商나라는 成湯으로부터 武丁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太甲․太戊․祖乙․盤庚이 모두 어질고 聖스러운 군주였다.”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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