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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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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公之詩不入詩家品題로되 而其論詩處 興味自遠하니라
予嘗論書하야 以謂 蕭散簡遠하야 妙在筆畫왕희지러니
하야 始集古今筆法而盡發之하야 極書之變하니
天下翕然以爲宗師종요, 왕희지왕희지 益微라호라
至于詩하야도 亦然하니 蓋亦至矣러니 以英瑋絶世之姿 凌跨百代하니 古今詩人盡廢
이나 , 晉以來 高風絶塵 亦少衰矣
이태백, 두자미之後 詩人繼作하니 雖間有遠韻이나 而才不逮意 發纖穠於簡古하고 寄至味於澹泊하야 非餘두자미所及也니라
이로되 而詩文高雅하야 猶有承平之遺風이라
其論詩曰 梅止於酸하고 鹽止於鹹하니 飮食 不可無鹽梅 而其美 常在鹹酸之外라하니라
蓋自列其詩之有得於文字之表者하고 恨當時不識其妙하니 予三復其言而悲之하노라
민중황자사黃子思 號能文者
予嘗聞前輩誦其詩하고 每得佳句妙語하면 反覆數四라야 乃識其所謂하니 信乎표성表聖之言이여
美在鹹酸之外하야 可以
하야 得窺其家集이라황자사子思篤行高志하고 爲吏有異材 見於墓誌詳矣일새 予不復論하고 獨評其詩如此하노라


14. 황자사黃子思시집詩集 뒤에 쓰다
(동파東坡)의 시가詩家품제品題에 들지 못하였으나, 를 논한 곳은 흥미興味가 절로 원대하다.
내 일찍이 서법書法을 논하여 이르기를 “종요鍾繇왕희지王羲之의 필적은 자연스럽고 간고簡古하고 유원幽遠하여 묘함이 필획筆畫의 밖에 있었는데,
나라의 안진경顔眞卿유공권柳公權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금의 필법筆法을 집대성하여 모두 발휘해서 서법의 변화를 지극히 하니,
천하天下 사람들이 모두 종사宗師로 여겼으나, 종요鍾繇왕희지王羲之은 더욱 쇠미해졌다.”라고 하였다.
에 이르러도 또한 그러하니, 소무蘇武이릉李陵의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과 조식曹植유정劉楨의 자득함과 도연명陶淵明사영운謝靈運의 초연함이 지극하였는데, 이태백李太白(이백李白)과 두자미杜子美(두보杜甫)가 영특하고 아름다워 세상에 뛰어난 자질로 백대百代를 능가하니, 고금의 시인詩人들이 모두 빛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진시대晉時代 이래로 세속을 뛰어넘는 높은 풍조도 조금씩 쇠퇴하였다.
이태백李太白두자미杜子美 이후에 시인들이 뒤이어 나오니, 비록 간혹 원대한 음운音韻이 있었으나 재주가 뜻에 미치지 못하였고, 오직 위응물韋應物유종원柳宗元이 섬세함과 농후함을 간고簡古함에서 드러내고 지극한 맛을 담박함에 부쳐서 다른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나라 말기에 사공도司空圖가 병란의 사이에 기구하였으나, 시문詩文이 고아하여 여전히 태평성대의 유풍이 있었다.
그가 를 논하여 말하기를 “매실은 맛이 실 뿐이고 소금은 맛이 짤 뿐이니, 음식에는 소금과 매실이 없을 수 없으나 그 진정한 맛은 항상 짠맛과 신맛 밖에 있다.”라고 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가운데 문자의 밖에서 얻은 것이 있는 24사운四韻를 나열하고 당시 사람들이 그 묘미를 알지 못하는 것을 한하였으니, 나는 그의 를 세 번 반복하여 읽으면서 슬퍼하노라.
민중閩中 사람 황자사黃子思(황효선黃孝先)는 경력慶曆황우皇祐 연간에 문장에 능한 자라고 이름났다.
내 일찍이 선배들이 그의 를 외는 소리를 듣고, 매양 아름다운 시구詩句와 묘한 시어詩語를 얻으면 서너 번 반복하고서야 비로소 시의 내용을 알았으니, 표성表聖(사공도司空圖)의 말이 진실로 옳다.
진정한 맛이 짠맛과 신맛 밖에 있어서 한 사람이 선창先唱하면 세 사람이 감탄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이미 그의 아들 기도幾道(황호겸黃好謙)와 손자 사시師是(황식黃寔)와 교유하여 그 집안의 문집을 얻어 보았는데, 황자사黃子思가 행실이 돈독하고 뜻이 높았으며 관리가 되어서 특이한 재주가 있었던 것은 그의 묘지명墓誌銘에 자세히 보이므로 다시 논하지 않고, 나는 오직 그의 를 평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역주
역주1 書黃子思詩集後 : 黃子思는 黃孝先으로 子思는 그의 字이며 浦城 사람이다.
역주2 鍾王之迹 : 鍾繇와 王羲之의 필적을 이른다. 鍾繇(151~230)는 삼국시대 魏나라의 대신이자 대서예가로 字가 元常이고 潁川 長社(지금의 河南省 長葛縣) 사람이다. 曹操가 정권을 장악했을 적에 關中 지방을 수비하고 큰 공을 세웠으며 이후 廷尉, 相國, 太傅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서예에 뛰어나 후인들이 王羲之와 함께 鍾․王으로 병칭하였다.
王羲之(307~365)는 晉나라의 저명한 서예가로 字가 逸少이고 瑯邪 臨沂(지금의 山東省 臨沂縣) 사람이다. 右軍將軍을 지내 王右軍으로 칭해지며 楷書․行書․草書의 書體를 예술적인 경지로 승화시켜 書聖으로 불린다. 그가 쓴 蘭亭帖은 千古의 名筆로 알려져 있다.
역주3 至唐顔柳 : 顔․柳는 顔眞卿과 柳公權으로 모두 唐나라의 명필가이다. 顔眞卿(709~785)은 字가 淸臣으로 臨沂 사람이며 벼슬이 太子太師에 이르고 魯郡公에 봉해져 세상에서 顔魯公이라 칭하였는데, 楷書와 草書를 잘 썼으며 필세가 침착하고 웅혼하였다.
柳公權(778~865)은 字가 誠懸이고 京兆 華原(지금의 陝西省 耀縣) 사람이다. 벼슬이 太子太師에 이르렀는데 특히 楷書에 뛰어나 결구가 굳세고 필법이 근엄하였다.
역주4 蘇李之天成 : 蘇․李는 前漢의 蘇武와 李陵, 혹은 唐나라의 蘇味道와 李嶠를 이르는데, 여기서는 詩를 말하였으므로 蘇武와 李陵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天成은 천연적으로 이루어져 인위적으로 조탁하지 않음을 이른다.
蘇武(B.C. 140~B.C. 60)는 字가 子卿이고 杜陵 사람이며, 李陵(?~ B.C. 74)은 字가 少卿이고 隴西 成紀 사람인데, 이들은 특히 五言詩를 잘하였다. 두 사람의 시가 《文選》에 일곱 수가 등재되어 있고, 《古文苑》에 열 수가 등재되었으며, 이외에도 다른 책에 인용된 것이 더러 보이는데, 지금 모두 丁福保가 편찬한 《前漢詩》에 수록되어 있다.
東坡는 자신이 지은 《東坡題跋》 〈題文選〉에서 “蘇武와 李陵의 五言詩는 모두 위작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詩 자체는 渾然天成이라고 평하여 예술적 가치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역주5 曹劉之自得 : 曹․劉는 曹植과 劉楨을 가리킨 것으로 이들은 모두 建安七子에 든 인물이며, 自得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져 굳이 법도를 운용하지 않음을 이른다.
曹植(192~232)은 字가 子建으로 曹操의 셋째 아들인데 詩文을 잘하였다. 東晉의 謝靈運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하늘이 인간에게 내려준 文才가 모두 한 섬인데, 曹子建이 8斗를 얻었고 자신이 1斗를 얻었고 그 나머지를 여러 문인들이 나누어 가졌다.”고 말하였다. 劉楨(?~217)은 字가 公幹으로 역시 五言詩를 잘하여 명성이 높다.
역주6 陶謝之超然 : 陶․謝는 陶淵明과 謝靈運을 가리키며, 超然은 자연스럽고 초탈함을 이른다.
陶淵明(365~427)은 晉나라 때의 저명한 시인으로 潯陽 사람인데, 이름은 潛이고 字는 元亮이며 淵明은 그의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字라 하기도 하는바, 호는 五柳先生이다. 謝靈運(385~433)은 남북조시대 宋나라의 저명한 시인으로 字가 宣明이고 陽夏 사람이다.
역주7 李太白杜子美 : 李白과 杜甫로 盛唐의 詩人들인데 역대 文人들 중에 가장 시가 뛰어나 李白은 詩仙, 杜甫는 詩聖으로 알려져 있다.
역주8 韋應物柳宗元 : 모두 唐나라의 문인들이다. 韋應物(737~789)은 京兆 사람으로 德宗 貞元 연간에 蘇州刺史를 역임하고 蘇州라고 호하여 韋蘇州로 칭해졌으며 또한 韋江州라고도 불렸다.
柳宗元(773~819)은 字가 子厚이며 長安 출생인데, 조상의 본적이 河東이기 때문에 柳河東이라고도 불리며 마지막 벼슬이 柳州刺史였으므로 柳柳州라고도 불린다. 韓愈와 함께 고문운동을 제창하여 韓․柳로 칭해졌으며 詩 역시 枯淡하였다.
東坡는 《東坡題跋》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여 “柳子厚의 詩는 陶淵明의 아래, 韋蘇州(韋應物)의 위에 있다. 枯淡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밖은 枯槁하나 안은 기름지고 겉은 淡泊한 것 같으나 실제는 아름다운 것이니, 陶淵明과 柳子厚의 부류가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9 司空圖 : 837~907. 晩唐의 시인으로 자가 表聖이며 虞鄕 사람이다. 知非子라고 호하고 또 耐辱居士라고도 호하였으며 벼슬이 知制誥와 中書舍人에 이르렀는데, 唐나라가 망하자 음식을 끊어 굶어 죽었다. 일찍이 《二十四詩品》을 지어 역대의 詩를 평가하였다.
역주10 崎嶇兵亂之間 : 당시 黃巢의 난을 위시하여 각종 兵亂이 일어났으므로 말한 것이다.
역주11 二十四韻 : 바로 司空圖가 지은 《二十四詩品》을 가리킨 것이다.
역주12 慶曆皇祐 : 모두 北宋 仁宗의 연호로 慶曆은 1041년부터 1048년까지이고, 皇祐는 1049년부터 1054년까지이다
역주13 一唱而三歎 : 음조가 느리고 둔탁하여 한 사람이 선창하면 겨우 세 사람이 감탄하는 것으로 古樂의 無味乾燥함을 이른다. 그러나 이것은 天眞의 음운으로 깊은 맛이 있다고 한다.
《呂覽》 〈古樂〉에 “〈清廟〉를 연주하는 비파는 붉은 줄에 구멍이 드물어 한 사람이 선창하면 세 사람이 감탄하니, 보통의 음악보다 더 나아간 것이다.[清廟之瑟 朱弦而疏越 一倡而三歎 有進乎音者矣]”라고 보이며, 《禮記》 〈樂記〉에는 “〈清廟〉를 연주하는 비파는 朱弦에 구멍이 드물어 한 사람이 선창하면 세 사람이 감탄하니, 餘音(餘韻)이 있다.[清廟之瑟 朱弦而疏越 壹倡(唱)而三歎 有遺音者矣]”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鄭玄의 註에 “朱弦은 마전하여 붉게 물들인 줄이니 실을 마전하면 비파 소리가 둔탁하고, 越은 비파의 밑에 있는 구멍이니, 구멍을 드물게 내어 소리가 느리게 한 것이다. 倡은 노래를 먼저 부르는 것이고 三歎은 세 사람이 따라서 감탄하는 것이다.[朱弦 練朱弦 練則聲濁 越 瑟底孔也 疏之 使聲遲也 倡 發歌句也 三歎 三人從嘆之耳]”라고 하였다.
清廟는 원래 깨끗하고 고요한 사당으로 周 文王의 사당인데, 여기에서 인용한 것은 《詩經》 〈周頌 淸廟〉로, 文王을 제사할 적에 연주하는 樂章이다.
역주14 予旣與其子幾道 其孫師是游 : 幾道는 黃好謙의 字인데, 孝先의 아들로 嘉祐 2년(1057) 진사시에 東坡와 同榜及第하였으며, 師是는 黃寔의 字로 好謙의 아들이고 孝先의 손자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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