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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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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澹宕不收之音이라
問世之治亂인댄 必觀其人이요 問人之賢不肖인댄 必以世考之
是以 論其世也라하시니라
合抱之木 不生於步仞之丘하고 千金之子 不出於三家之市하나니라
臣嘗逮事인종황제仁宗皇帝하니 其愚하야 不足以測知聖德之所至 獨私竊覽觀호니 四十餘年之間 左右前後之人 其大者 固已光明儁(俊)偉하고 深厚雄傑하야 不可窺較 而其小者 猶能敦朴愷悌하고 靖恭持重하야 號稱長者
當是之時하야 天人和同하고 上下懽心하야 才智不用而道德有餘하고 功業難(明)[名]而福祿無窮하니라
若臣若子 罔有內外하고 下至深山窮谷 老婦稚子하고 外薄四海 裔夷君長하야 見當時之人하고 聞當時之事하면 未有不流涕稽首者也하니 此豈獨上之澤歟
凡在廷者 與有力焉이니라
臣不及見其人矣 而識其爲人호니 其流風遺俗 可得而稱者 以世考之也일새라
희령熙寧六年冬 以事至고소姑蘇러니 其子中所賜公端敏字二 飛白筆一하야 以示臣하고 且謂臣記之하라 將刻石而傳諸世라하니라
且以爲抱 不若藏此筆이요 不若傳此書 不若推點畫以究觀其所用之意 不若因褒貶以想見其所與之人이라
或藏於名山하고 或流於四方 凡所見者 皆當聳然而作하야 如望하야 相與勉爲忠厚而恥爲浮薄 或由此也夫인저
당형천唐荊川
小題從大處起議論하니라


01. 인종황제仁宗皇帝께서 직접 비백체飛白體로 쓰신 어서御書에 대한 기문記文
담박澹泊하고 호탕하여 구속받지 않은 글이다.
세상이 다스려지는가 혼란한가를 물으려면(알려면) 반드시 그 사람을 관찰해야 하고, 사람이 어진가 불초한가를 물으려면 반드시 그 세대를 고찰해야 한다.
맹자孟子가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의 를 외우고 그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사람의 인품을 알지 못하는 것이 되겠는가?
이 때문에 그 사람이 살았던 세대를 논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한 아름이 되는 나무는 몇 걸음이나 한 길쯤 되는 언덕에서는 자라지 않고, 천금千金을 소유한 부귀한 집안의 자식은 세 가호 정도 있는 궁벽한 시장에서는 나오지 않는 법이다.
내 일찍이 인종황제仁宗皇帝를 섬겼는데, 나는 어리석어 성덕聖德의 지극한 바를 측량하여 알 수 없었으나 홀로 은밀히 살펴보니, 40여 년 동안 좌우와 전후에서 보좌하는 사람들 중에서 큰 자들은 진실로 이미 광명하고 위대하고 심후深厚하고 걸출해서 엿보아 비교할 수가 없었으며, 작은 자들도 모두 돈후敦厚하고 질박하고 화락하고 안정되고 공손하고 근신하여 장자長者라고 일컬어졌다.
이때를 당하여 하늘과 사람이 화합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기뻐하는 마음을 품어서, 재주와 지혜를 쓰지 않고도 도덕道德이 유여하였으며, 공업功業을 다 형용하기 어려워 복록이 무궁하였다.
인종황제仁宗皇帝께서 승하하신 이래로 12년 동안 신자臣子들이 안과 바깥을 가릴 것 없이, 아래로는 깊은 산과 궁벽한 골짝의 늙은 부인과 어린아이에까지 이르고, 밖으로는 사해四海의 변방 오랑캐 군장君長에 이르기까지 그 당시의 사람을 보고 그 당시의 일을 들어보면 인종황제仁宗皇帝를 그리워해서 눈물을 흘리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이 어찌 다만 인종황제仁宗皇帝의 은택일 뿐이겠는가?
무릇 조정에 있는 자들도 참여하여 공력功力이 있었던 것이다.
태자소부太子少傅안간 왕공安簡 王公거정擧正이다.
나는 미처 그 인물을 보지 못했으나 그 사람됨을 아니, 그의 유풍流風유속遺俗을 지금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분이 살았던 세대(인종仁宗의 시대)를 가지고 고찰하기 때문이다.
희령熙寧 6년 겨울에 내가 공무公務 때문에 고소姑蘇에 이르자, 의 아들 경력慶曆 연간에 인종仁宗께서 에게 하사한 ‘단민端敏’이라는 두 글자와 비백체飛白體로 쓴 글씨 하나를 꺼내어 나에게 보여주고, 또 나에게 이르기를 “이에 대한 기문記文을 지어달라. 내 장차 비석碑石에 새겨서 후세에 전하겠다.”라고 하였다.
나는 벼슬이 태상太常의 지위에 있고 직책이 태사太史를 맡고 있으니, 에 따라 당연히 이 글(어서御書)을 써야 한다.
또 생각하건대 오호烏號라는 활을 안고 있는 것이 이 필적을 보관하는 것만 못하고, 곡부曲阜의 신발을 보존하는 것이 이 글을 전하는 것만 못하고, 퇴려追蠡를 고찰하여 음악을 논하는 것이 한 점 한 획을 미루어서 그 쓰신 바의 뜻을 자세히 연구해보는 것만 못하고, 창포김치를 보존하여 선왕의 기호嗜好를 추념하는 것이 포폄하신 일을 인하여 그 친애하신 사람을 상상해보는 것만 못할 것이다.
혹 이것을 명산名山에 보관하고 혹 사방에 유전하면, 누구나 이것을 보는 자들이 모두 마치 모두旄頭의 먼지를 바라보고 뒤따르는 수레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마땅히 벌떡 일어나서, 서로 힘써 충후忠厚한 행실을 하고 부박浮薄한 짓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혹 이로 말미암아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당형천唐荊川(당순지唐順之)이 말하였다.
“작은 제목인데도 큰 곳으로부터 의논을 시작하였다.”


역주
역주1 仁宗皇帝飛白御書記 :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에 따르면, “東坡가 熙寧 6년(1073) 11월에 金閶(蘇州)을 지날 적에 王誨를 만났는데, 仁宗皇帝가 하사한 飛白體의 ‘端敏’ 두 글자와 飛白筆 하나를 보여주자 이 글을 지었다.”고 한다. 仁宗皇帝(1010~1063)는 宋나라 제4대 황제(재위 1022~1063)로 휘는 禎이며 眞宗의 여섯째 아들이다. 飛白은 書體 가운데 하나로 筆勢가 나는 듯 빠르고, 필획에 비로 쓴 흔적처럼 흰 여백이 보이는 서체인데, 後漢의 蔡邕이 창안하였다고 전해진다.
역주2 孟子曰……論其世也 : 이 내용은 《孟子》 〈萬章 下〉에 “天下의 善士와 벗하는 것을 만족스럽지 못하게 여겨 또다시 위로 올라가서 옛사람을 논하니, 그의 詩를 외우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의 인품을 알지 못한다면 되겠는가. 이 때문에 그 當世에 行事(행실과 일)의 자취를 논하는 것이니, 이는 위로 올라가서 벗하는 것이다.[以友天下之善士 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朱子의 《孟子集註》에 “當世를 논한다는 것은 그 당시 行事의 자취를 논하는 것이다. 이미 그의 글을 관찰하였으면 그 사람됨의 실제를 알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또다시 그 행실을 상고함을 말한 것이다. 능히 天下의 善士와 벗한다면 벗 삼은 것이 많은데도 오히려 만족스럽지 못하게 여겨서 또 나아가 古人에게 취하니, 이는 그 벗을 취하는 道를 진전하여 다만 一世의 선비를 벗할 뿐만이 아닌 것이다.”라고 注하였다.
역주3 升遐以來十有二年 : 升遐는 昇遐로도 쓰는데, 帝王의 죽음을 이른다. 仁宗은 嘉祐 8년(1063) 4월에 升遐하였다.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에 “東坡가 熙寧 6년(1073) 11월에 王誨를 만났다.”고 하였으니, 글이 완성된 것은 그 다음 해인 熙寧 7년인 듯하다.
역주4 太子少傅安簡王公 諱擧正 : 進士로 출사하여 知制誥를 역임했으며, 仁宗의 신임을 받아 諫議大夫와 參知政事를 지냈고, 太子少傅로 치사하였다. 太子少傅는 관직명으로 태자를 가르치는 종1품의 직책이며, 安簡은 그의 시호이다.
역주5 慶曆 : 仁宗의 연호로 1041년부터 1048년까지 총 8년간이다.
역주6 臣官在太常 職在太史 : 太常은 太常寺로 禮樂과 郊廟와 社稷의 일을 관장하였다. 太史는 史官을 이른다. 熙寧 4년(1071)에 東坡는 太常博士 겸 直史官에 제수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7 烏號之弓 : 烏號는 전설상의 黃帝가 남긴 활의 이름으로 여기서는 先皇(仁宗)의 遺品을 가리킨 것이다.
《史記》 〈封禪書〉에 “黃帝가 首山에 있는 구리를 채취하여 荊山 밑에서 鼎을 만들었는데, 鼎이 완성되자, 龍 한 마리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땅으로 내려와 黃帝를 맞이하였다. 黃帝가 龍에 올라타자, 여러 신하들과 後宮 70여 명이 따라 올라탔다. 龍이 하늘로 올라가자, 나머지 신하들이 龍에 타지 못하고 모두 龍의 수염을 붙잡으니, 龍의 수염과 黃帝가 지니고 있던 활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우러러 바라보니, 黃帝가 이미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백성들이 그 활과 수염을 안고 통곡하였다. 이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그곳을 鼎湖라고 이름하고, 그 활을 烏號라고 이름하였다.[黃帝采首山銅 鑄鼎於荊山下 鼎旣成 有龍垂胡髥 下迎黃帝 黃帝上騎 群臣後宮從上龍七十餘人 龍乃上去 餘小臣不得上 乃悉持龍髥 龍髥拔 墮黃帝之弓 百姓仰望 黃帝旣上天 乃抱其弓與胡髥號 故後世因名其處曰鼎湖 其弓曰烏號]”라고 보인다.
역주8 曲阜之履 : 曲阜는 춘추시대 魯나라의 수도로 지금의 山東省에 있었다. 孔子의 고향으로 이곳에 孔府와 孔廟가 있는데, 孔子의 衣冠과 琴書가 보관되어 있는바, 이 역시 先皇의 遺品을 비유한 것이다.
《後漢書》 〈東平王傳〉에 “魯나라 孔氏들이 아직까지 仲尼의 수레와 관복과 신발을 보관하고 있으니, 德이 성대한 분은 光靈이 멀리 전함을 밝힌 것이다.[今魯國孔氏 尙有仲尼車輿冠履 眀德盛者 光靈遠也]”라고 보인다.
역주9 追蠡(퇴려)以論音聲 : 追蠡는 鐘을 매달고 있는 끈이 벌레 먹은 상태를 이른다. 《孟子》 〈盡心 下〉에 “高子가 ‘禹王의 음악이 文王의 음악보다 낫습니다.’라고 하자, 孟子께서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가?’라고 물으니, 高子가 대답하기를 ‘追蠡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高子曰 禹之聲 尙文王之聲 孟子曰 何以言之 曰 以追蠡]”라고 보인다.
豐稷이 이에 대해 “追는 鐘의 끈이니, 《周禮》에 이른바 ‘旋蟲’이란 것이 이것이다. 蠡는 나무를 좀먹는 벌레이다. 禹王 당시의 鐘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鐘의 끈이 벌레가 파먹은 것과 같아서 끊어지려고 하니 이는 음악을 사용한 자가 많기 때문이요, 文王의 鐘은 그렇지 않으니, 이 때문에 禹王의 음악이 文王의 음악보다 나음을 안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注하였는데, 이 역시 先皇이 쓰던 樂器를 비유한 것이다. 《孟子集註 盡心 下》
역주10 昌歜以追嗜好 : 昌歜은 창포로 담근 김치이다. 周 文王이 이를 좋아하였는데, 孔子가 文王을 사모하여 昌歜을 먹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僖公 30년에 “겨울에 王이 周公 閱로 하여금 魯나라에 와서 빙문하게 하였는데, 그를 접대하는 상에 昌歜과 흰쌀과 검은 기장과 形鹽이 올랐다.[冬 王使周公閱來聘 饗有昌歜白黑形鹽]”라고 보이는데, 杜預의 《春秋左氏經傳集解》에 “昌歜은 창포로 담근 김치이다.”라고 注하였다.
역주11 旄頭之塵而聽屬車之音 : 旄頭는 황제의 의장행렬 중 선두에 서는 騎兵을 이르며, 屬車는 황제를 隨從하는 수레들을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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