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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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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氣之一字 極中兵情이요 而通篇行文虬龍之駕風雲而撼山谷하야 而杳不可測이니라
以勇爲主하고 以氣爲決이니이다
天子 無皆勇之將이요 而將軍 無皆勇之士
是故 致勇有術하니 致勇 莫先乎倡이요 하니
此二者 兵之微權이라 英雄豪傑之士 所以陰用而不言於人하야 而人亦莫之識也니이다
臣請得以備言之호리이다
夫倡者 何也 氣之先也
有人人之勇怯하고 有三軍之勇怯하니 人人而較之 則勇怯之相去 若莛與楹이로되 至於三軍之勇怯하야는 則一也
出於反覆之間하고 而差於毫釐之際
其權 在將與君이니이다
人固有暴猛獸而不操兵하고 出入於白刃之中而色不變者하며 有見虺蜴而却走하고 聞鍾鼓之聲而戰慄者하니 是勇怯之不齊 至於如此하니이다
彼閭閻之小民 爭鬪戱笑라가 卒然之間 而或至於殺人하나니
當其發也 其心飜然하고 其色勃然하야 若不可以已者하니 雖天下之勇夫라도 無以過之라가
及其退而思其身하고 顧其妻子하야는 未始不惻然悔也하니 非必勇者也 氣之所乘 則奪其性而忘其(故)[身]이라
古之善用兵者 用其飜然勃然於未悔之間하고 而其不善者 沮其飜然勃然之心하야 而開其自悔之意하니 則是不戰而先自敗也
曰 致勇有術하니 致勇 莫先乎倡이라하노이다
均是人也 皆食其食하고 皆任其事로되 天下有急 而有一人焉 奮而爭先하야 而致其死하면 則飜然者衆矣 弓矢相及하고 劍楯相交하야 勝負之勢 未有所決이라가 而三軍之士 屬目於一夫之先登이면 則勃然者相繼矣니이다
天下之大 可以名劫也 三軍之衆 可以氣使也
이라하니 苟有以發之하야 及其飜然勃然之間하야 而用其鋒이니 是之謂倡이니이다
莫善乎私하니이다
天下之人 怯者居其百하고 勇者居其一하니 勇者難得也
捐其妻子하고 棄其身以蹈白刃하니 勇者難能也
以難得之人으로 行難(得)[能]之事인댄 此必有難報之恩者矣니이다
天子 必有所私之將하고 將軍 必有所私之士하야
視其勇者而陰厚之니이다
人之有異材者 雖未有功이나 而其心 莫不自異하나니 自異而上不異之 則緩急 不可以望其爲倡이라
凡緩急而肯爲倡者 必其上之所異也니이다
漢武帝欲觀兵於四夷하야 以逞其無厭之求하야
不愛하야 以招勇士하고 風告天下하야 以求奮擊之人하니이다이나 卒無有應者
於是 嚴刑峻法하야 致之死地하고 而聽其以深入贖罪하야 使勉强不得已之人으로 馳驟於死亡之地
何者
先無所異之人이요 而望其爲倡이면 不已難乎잇가
私者 天下之所惡也
然而爲己而私之인댄 則私不可用이요 爲其賢於人而私之인댄 則非私 無以濟니이다
蓋有無功而可賞하고 有罪而可赦者하니 凡所以媿(愧)其心而責其爲倡也
天下之禍 莫大於上作而下不應하니 上作而下不應이면 則上亦將窮而自止니이다
天子非不欲赫然誅之로되 而將帥之臣 謹守封略하야 外視內顧하야 莫有一人先奮而致命하니 而士卒亦循循焉莫肯盡力하야 不得已而出이라가 爭先而歸
西戎 得以肆其猖狂이로되 而吾無以應하니 則其勢不得不重賂而求和니이다
其患 起於天子無同憂患之臣이요 而將軍無腹心之士니이다
十有餘年矣
用法益密하고 而進人益難하야
賢者不見異하고 勇者不見私하야 天下務爲奉法循令하야 要以如式而止하니 臣不知其緩急 將誰爲之倡哉잇가
唐荊川曰
此篇 體方而意圓이니라


01. 용감함을 창도해야 한다
’ 한 글자는 군대의 실정에 매우 알맞고, 전편全篇에 글을 써내려간 것이 규룡이 풍운을 타고 산골짝을 흔드는 것과 같아서 아득하여 측량할 수가 없다.
전투는 용맹을 위주로 하고 기세로 승부를 결단합니다.
천자天子의 장수가 모두 용맹할 수는 없고 장군의 군사가 모두 용맹할 수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장병將兵을 용맹하게 만드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용맹하게 만드는 것은 창도唱導보다 더한 것이 없고, 창도唱導는 사사로이 총애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창도唱導와 사사로이 총애함 이 두 가지는 군대의 미묘한 권도權道로서 영웅호걸들이 은밀히 쓰고 남에게 말하지 않아서, 사람들 또한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 청컨대 이것을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창도唱導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기세를 먼저(앞장서서)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용맹과 겁이 있고 삼군三軍의 용맹과 겁이 있으니, 개인을 하나하나 비교하면 용맹한 자와 겁 많은 자의 거리가 풀줄기와 나무기둥처럼 큰 차이가 나지만, 삼군三軍의 용맹과 겁에 이르러서는 똑같습니다.
이 용맹과 겁은 손을 뒤집는 잠깐 사이에서 나오고 털끝만 한 즈음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그 권도權道가 장수와 군주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람 중에는 진실로 병기를 잡지 않고 맨손으로 맹수에게 달려들고, 시퍼런 칼날 속을 출입하면서도 얼굴색이 변치 않는 자가 있으며, 구렁이와 도마뱀을 보고도 뒤돌아 달아나고 종소리와 북소리를 듣고도 벌벌 떠는 자가 있으니, 용맹과 겁이 똑같지 않은 것이 이와 같습니다.
저 여염집의 백성들이 서로 다투고 싸우고 놀리고 비웃다가 갑자기 혹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사람이 성날 적에는 마음이 갑작스레 변하고 얼굴빛이 발끈하여 아무도 말릴 수 없을 것 같으니, 비록 천하天下의 용맹한 지아비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물러가서 자기 몸을 생각하고 처자식을 돌아보게 되면 자신이 지난번에 한 행위가 갑자기 서글퍼져서 일찍이 후회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이런 사람은 반드시 용맹한 자가 아니라 가 격앙됨에 본성을 빼앗겨서 자기 몸을 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용병을 잘하는 자들은 마음이 갑작스레 변하고 얼굴빛이 발끈하는 용기를 후회하기 전에 쓰고, 용병을 잘하지 못하는 자들은 마음이 갑작스레 변하고 얼굴빛이 발끈하는 용기를 막아서 스스로 후회하는 마음을 열어주니, 이렇게 하면 싸우지 않고서도 먼저 스스로 패합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장병將兵을 용맹하게 만드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용맹하게 만드는 것은 창도唱導보다 더한 것이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사람이어서 모두 밥을 먹고 모두 일을 맡고 있으나, 천하天下에 위급한 상황이 전개되었을 적에 한 사람이 분발하여 앞을 다투어서 목숨을 바치면 이것을 보고 갑작스레 마음이 변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활과 화살이 서로 미치고 검과 방패가 서로 부딪혀서 승패의 형세가 아직 결판나지 않다가 한 군사가 먼저(앞장서서) 에 올라가는 것을 삼군三軍의 군사들이 보게 되면 발연히 분발하는 자들이 서로 이어지게 됩니다.
천하天下를 명예로써 충동시킬 수 있고 많은 삼군三軍을 기세로써 부릴 수 있습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활을 잘 쏘면 백 명이 활깍지와 활팔찌를 낀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용기를 유발시켜서 갑작스레 변하고 발끈할 때에 이르러 예봉을 써야 하니, 이것을 창도唱導라 이릅니다.
창도唱導는 사사로이 총애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천하天下의 사람 중에 겁쟁이가 백 명이면 용맹한 자는 백 명 가운데 한 명뿐이니, 용감한 자를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처자식을 버리고 자기 몸을 버려서 시퍼런 칼날을 밟는 것은 용맹한 자도 잘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얻기 어려운 사람을 가지고 하기 어려운 일을 행하려고 한다면 여기에는 반드시 보답하기 어려운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천자天子는 반드시 사사로이 총애하는 장수가 있어야 하고, 장수는 반드시 사사로이 총애하는 군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용맹한 자를 살펴보아 은밀히 후대厚待해야 합니다.
사람 중에 특이한 재질을 가지고 있는 자는 비록 을 세우지 못했더라도 마음속으로 스스로 남다르다고 여기지 않는 자가 없으니, 자신이 스스로 남다르다고 생각하는데도 윗사람이 특별히 대우해주지 않는다면 위급할 적에 그가 앞장서서 창도唱導해주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위급할 적에 기꺼이 앞장서서 창도唱導가 되는 자는 반드시 윗사람이 특별히 대우한 사람입니다.
옛날 한 무제漢 武帝는 사방 오랑캐에게 무력을 과시하여 만족함이 없는 욕망을 펴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통후通侯을 아끼지 아니하여 용맹한 군사들을 초치하고, 이것을 천하天下에 소문내어 용감하게 떨쳐 일어나 공격하는 사람들을 구했으나 끝내 여기에 응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에 형벌을 엄하게 하고 법을 준엄하게 적용해서 중죄인重罪人을 만들어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이들에게 적과 싸워 적지에 깊이 쳐들어가면 이로써 속죄하게 해서, 부득이하여 억지로 전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고 망할 곳으로 달려가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장수들이 항복하고 군사들이 패망하여 천하天下가 거의 측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먼저 특별히 대우해준 사람이 없으면서 그들이 창도唱導해주기를 바란다면 너무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사로이 함은 천하天下가 미워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하여 사사롭게 하는 경우라면 사사로움을 써서는 안 되지만, 남보다 어진 사람을 위하여 사사로이 대우한다면 사사로움이 아니고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군주가 때로는〉 이 없는데도 을 주고 죄가 있는데도 용서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는 모두 그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여 그가 창도唱導해주기를 바라서입니다.
천하天下는 윗사람이 일을 하는데도 아랫사람들이 호응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윗사람이 일을 하는데도 아랫사람들이 호응하지 않으면 윗사람도 장차 곤궁하여 스스로 그만두게 됩니다.
지난번 서융西戎(서하西夏)이 배반했을 적에 천자天子가 크게 노하여 토벌하고자 하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장수의 신하들이 삼가 국경만 지키면서 밖으로 바라보고 안으로 돌아보아 한 사람도 앞장서서 분발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가 없으니, 병졸들도 머뭇거리면서 기꺼이 힘을 다하는 자들이 없어서 마지못해 출동하였다가 앞을 다투어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서융西戎이 거리낌 없이 멋대로 행동하였으나 우리가 대응할 수 없었으니, 형세상 많은 뇌물을 주어서 화친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병통은 천자天子에게는 우환을 함께 하는 신하가 없고 장수에게는 심복의 군사가 없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서쪽 지방으로 출동했던 군대를 쉬게 한 지가 지금 십여 년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 법을 적용하는 것이 더욱 치밀하고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그리하여 어진 자가 남다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용맹한 자가 사사로이 총애를 받지 못해서 천하天下 사람들이 되도록 법령을 받들어 따르려고 하여 요컨대 법식과 같이 할 뿐이니, 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위급할 적에 장차 누가 앞장서서 창도唱導하겠습니까?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이 편은 체제가 방정方正하면서도 뜻이 원만하다.”


역주
역주1 倡勇敢 : 이 글은 〈策別 訓兵旅〉의 3편 가운데 세 번째 편으로 본래의 제목은 〈策別 訓兵旅 三〉이다. 本集에는 편 머리에 ‘其三曰倡勇敢臣聞’의 8字가 있다.
蘇軾의 〈策別〉은 모두 네 종류인데 첫 번째가 〈課百官〉, 두 번째가 〈安萬民〉, 세 번째가 〈厚貨財〉, 네 번째가 〈訓兵旅〉로 총 17편이다. 仁宗 嘉祐 6년(1061)에 蘇軾은 制科에 응시하여 당시에 만연되어 있는 사회 병폐를 해결하기 위한 策 25편(〈策略〉 5편, 〈策別〉 17편, 〈策斷〉 3편)을 지어 仁宗에게 올렸었다.
역주2 莫善乎私 : 私는 훌륭한 사람을 특별히 총애함을 이른다.
역주3 諺曰 一人善射 百夫決拾 : 決은 짐승의 뼈로 만든 것으로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끼워서 활줄을 당기는 활깍지(角指)를 이르고, 拾은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왼팔에 차서 활줄이 옷에 닿는 것을 막는 활팔찌(臂匣)를 이른다. 이 내용은 《國語》 〈吳語〉에 보이는데, 한 사람이 활을 잘 쏘면 모든 사람들이 따라서 활쏘기를 배운다는 뜻이다.
역주4 通侯之賞 : 通侯는 본래 徹侯로 秦․漢 때의 작위 명칭인데, 20등급의 작위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이다. 漢 武帝의 이름인 徹을 휘하여 通侯로 개칭하였는바, 賞으로 通侯의 작위를 내림을 이른다.
역주5 其將降而兵破敗 而天下幾至於不測 : 漢 武帝 太初 원년(B.C. 104) 가을에 名馬인 汗血馬를 얻기 위해 貳師將軍 李廣利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西域의 大宛國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지나치게 먼 원정에 지쳐 실패하였다. 그러나 太初 4년(B.C. 101)에 다시 李廣利로 하여금 大宛國을 공격하게 하여 함락시켰다.
武帝는 승세를 타고 天漢 2년(B.C. 99)에 李廣利를 시켜 북방의 흉노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李廣利가 승기를 잡지 못하고 싸움이 지지부진해지자, 李陵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李廣利를 지원하게 하였는데, 李陵이 흉노에 패하고 항복하였다.
武帝는 전열을 재정비하여 天漢 4년(B.C. 97)에 다시 흉노를 공격하였으나 별다른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征和 2년(B.C. 91)에 다시 李廣利를 보내어 五原에 있는 흉노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李廣利는 다음 해에 흉노에 대패하고 항복하였다.《漢書 武帝紀》
역주6 方西戎之叛也 : 西戎은 西夏를 가리킨다. 宋 仁宗 寶元 원년(1038)에 元昊가 宋나라를 배반하여 皇帝를 칭하고 국호를 西夏라 일컬었다. 元昊는 그 후 여러 번 서쪽 변경을 침략하여 전쟁이 계속되었다.
역주7 西師之休 : 西夏와의 전쟁이 끝난 것을 이른다. 仁宗 慶曆 4년(1044) 宋나라는 매년 歲幣를 보내는 조건으로 西夏와 강화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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