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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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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孔子之所以聖 不盡於用魯하니 而子瞻於孔子之用魯 已見得 分明하니라
季氏將墮費러니 이어늘 公與 入于季氏之宮이라
孔子命하야 下伐之한대
費人北하야 二子奔齊하니 遂墮費하다
將墮成이러니 이어늘 公圍成弗克하니라
或曰
殆哉
孔子之爲政也
亦危而難成矣로다
라하니 曹操疑其論建漸廣하야 遂殺融하니
特言之耳 安能爲哉리오마는
操以爲天子有千里之畿 將不利己
殺之不旋踵하니라
하고 從公者皆不敢入하야라도 亦亡하니
季氏之忌克忮害如此하니 雖地勢不及曹氏 然君臣相猜 蓋不減操也
孔子安能以是時 墮其名都하고 而出其藏甲也哉
考於春秋하면 方是時하야 三桓雖若不悅이나 然莫能違孔子也
以爲孔子用事於魯하야 得政與民하야 而三桓畏之歟인댄
孔子畏季氏 季氏不畏孔子也
夫孔子盍姑修其政刑하야 以俟三桓之隙也哉
蘇子曰
此孔子所以聖也시니라
三桓不臣이면 則魯無可治之理 孔子之用於世 其政 無急于此者矣
吾今而後 知禮之可以爲國也라하니라
嬰能知之로되 而莫能爲之하니 嬰非不賢也 不及孔子也
孔子以으로 得政期月 而能擧治世之禮하야 以律亡國之臣하시고 墮名都하고 出藏甲이로되 而三桓不疑其害己하니 此必有不言而信하고 不怒而威者矣시니라
孔子之聖 見於行事 至此 爲無疑也
嬰之用於齊也 久於孔子하고 景公之信其臣也 愈於定公이로되 而田氏之禍 不少衰하니 吾是以 知孔子之難也로라
孔子以十六年卒이어시늘 十四年 하시니
吾是以 知孔子之欲治列國之君臣하야 使如春秋之法者 至於老且死而不忘也로라
或曰 孔子知哀公與三子之必不從이로되 而以禮告也歟인저 曰 否
孔子實欲伐齊하시니라
孔子旣告公한대 公曰 魯爲齊弱 久矣 子之伐之 將若之何
對曰 陳恒弑其君 民之不予者半이니 以魯之衆으로 加齊之半이면 可克也라하시니 此豈禮告而已哉리오
豈若從孔子而伐齊乎
若從孔子而伐齊 則凡所以勝齊之道 孔子任之有餘矣시리라
旣克田氏하면 則魯之公室 自張이요 三桓 不治而自服也리니 此孔子之志也시니라


01. 공자孔子에 대한
공자孔子스러운 이유는 나라에서 쓰기를 다하지 않은 데에 있었으니, 자첨子瞻공자孔子나라에서 쓰여짐에 대해 이미 분명히 알고 있었다.
노 정공魯 定公 12년(B.C. 498)에 공자孔子께서 정공定公에게 말씀하시기를 “신하는 사병을 거느릴 수 없고, 대부大夫는 100의 높은 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시고, 중유仲由로 하여금 계씨季氏가 되게 하여 장차 삼가三家의 도성을 허물려 하시자, 이에 호응하여 숙손씨叔孫氏가 맨 먼저 자기 식읍인 후읍郈邑의 성을 허물었다.
계손씨季孫氏가 장차 자신의 식읍인 비읍費邑의 성을 허물려고 하였는데, 공산불뉴公山弗狃숙손첩叔孫輒비읍費邑 백성들을 거느리고 정공定公을 습격하자, 삼자三子와 함께 계손씨季孫氏의 집으로 들어가 피하였다.
공자孔子신구수申句須악기樂頎에게 명하여 내려가서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비읍費邑 사람들이 패하여 공산불뉴公山弗狃숙손첩叔孫輒 두 사람이 나라로 도망하니, 마침내 비읍費邑을 허물었다.
장차 맹손씨孟孫氏의 식읍인 성읍成邑의 성을 허물려 했는데, 공렴처보公斂處父성읍成邑을 들어 배반하므로 정공定公성읍成邑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혹자가 말하였다.
“위태롭구나!
공자孔子께서 정사政事하심이여.
또한 위태로워 이루기가 어려웠다.
공융孔融이 말하기를 ‘옛날에 왕기王畿는 1천 리였는데, 왕기王畿 안에는 제후를 봉건封建하지 않았다.’라고 하자, 조조曹操공융孔融봉건封建을 논한 것이 점점 확대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공융孔融을 죽였다.
공융孔融은 다만 입으로 말했을 뿐이니, 어찌 이것을 시행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조조曹操천자天子가 1천 리의 기내畿內를 보유하면 장차 자기에게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당장에 공융孔融을 죽인 것이다.
계손씨季孫氏는 직접 소공昭公을 축출하여 소공昭公이 국외에서 죽었고, 을 따르던 자들이 모두 감히 입국하지 못해서 자가기子家羈조차 망명하였다.
계손씨季孫氏가 남을 시기하고 이기려 하고 해치려 함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지위와 형세는 조씨曹氏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군신간에 서로 시기한 것은 조조曹操보다 덜하지 않았다.
공자孔子가 어찌 이때에 그 유명한 도성都城을 허물고 그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를 내놓게 할 수 있었겠는가?
춘추春秋》를 살펴보면, 이때 삼환三桓공자孔子의 주장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공자孔子의 뜻을 어기지 못한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공자孔子께서 이때 나라의 국정國政을 집행하면서 정권과 민심을 장악하여 삼환三桓이 두려워하였다면,
계환자季桓子가 여자 악사樂士들을 받았을 적에 공자孔子께서 이를 물리치지 못하시고 탄식하며 노래하시기를 ‘저 여인의 입이 군주를 도망가게 할 수 있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공자孔子께서 계손씨季孫氏를 두려워한 것이고 계손씨季孫氏공자孔子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다.
공자孔子께서는 어찌 우선 정사政事와 형벌을 닦으면서 삼환三桓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를 기다리지 않으셨는가?”
소자蘇子는 이에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이것이 공자孔子께서 성인聖人이 되신 이유이다.
나라의 전씨田氏나라의 육경六卿이 복종하지 않으면 나라와 나라는 망하지 않을 방도가 없고, 나라의 삼환三桓이 신하 노릇하지 않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이치가 없으니, 공자孔子께서 이때에 등용되심에 정사政事 중에 이보다 더 시급한 것이 없었다.
안영晏嬰이란 자도 이것을 알아서 말하기를 “오직 만이 전씨田氏의 참람함을 그치게 할 수 있으니, 정사政事에 맞게 하면 대부大夫의 집에서 베푸는 것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고 대부大夫가 나라의 이익을 취하지 않게 됩니다.”라고 하자, 제 경공齊 景公이 “훌륭한 말이다!
나는 지금에야 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음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안영晏嬰은 이것을 알았으나 능히 시행하지는 못하였으니, 그가 어질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정직함으로써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고 해치지 않아서 천지의 사이에 꽉 차게 함에 있어서는 공자孔子에게 미치지 못한 것이다.
공자孔子기려羈旅의 신하로 1년 동안 정권을 잡자, 능히 치세治世를 들어서 나라를 망치는 간신들을 다스리셨으며 삼환三桓의 유명한 도성을 허물고 사사로이 거느리고 있는 군대를 내놓게 하셨으나, 삼환三桓들이 자신들을 해치는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말씀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믿고 노여워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두려워함이 있었던 것이다.
공자孔子스러움이 행하신 일에 나타남이 이에 이르러서 의심할 것이 없는 것이다.
안영晏嬰나라에 등용된 것은 공자孔子보다 훨씬 오랫동안이었고 경공景公안영晏嬰을 믿은 것은 정공定公보다 더하였는데, 전씨田氏의 화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니, 나는 이 때문에 공자孔子께서 하신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공자孔子께서는 애공哀公 16년에 별세하셨는데, 14년에 진항陳恒이 그 군주를 시해하자, 공자孔子께서 목욕하고 조회하여 애공哀公에게 아뢰어서 진항陳恒을 토벌할 것을 청하셨으니,
나는 이로써 ‘공자孔子께서 열국列國의 군신들을 다스려 장차 춘추春秋의 법과 같이 하려고 하신 것이 늙어서 장차 죽음에 이르도록 잊지 못하셨음’을 아는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공자孔子께서 애공哀公삼자三子(삼환三桓)가 반드시 따르지 않을 줄을 아시면서 단지 로써 고하신 것이다.”라고 하는데, 나는 “아니다.
공자孔子께서 실로 나라를 정벌하고자 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공자孔子께서 애공哀公에게 진항陳恒을 토벌할 것을 청하자, 애공哀公이 묻기를 “나라가 나라보다 약한 것이 오래인데, 선생께서 제나라를 치려는 것은 장차 어찌하려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孔子께서 대답하시기를 “진항陳恒이 군주를 시해함에 나라 백성 중에 찬성하지 않는 자가 절반이니, 나라의 병력에다가 나라의 절반의 백성을 더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그냥 로써 하신 것일 뿐이겠는가?
애공哀公삼환三桓의 핍박을 근심하여 일찍이 나라의 힘을 빌려 나라를 쳐서 이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오랑캐 나라의 힘을 빌려 자기 나라를 정벌하면 백성들이 찬성하지 않으니, 이것은 나라 고여皐如출공出公의 일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공자孔子의 말씀을 따라서 나라를 정벌하는 것만 하였겠는가?
만약 공자孔子의 말씀을 따라서 나라를 정벌했다면 나라를 이길 수 있는 모든 방도를 공자孔子께서 책임지시고도 남았을 것이다.
전씨田氏를 이기고 나면 나라의 공실公室이 저절로 강성해지고 삼환三桓이 죄를 다스리지 않아도 스스로 복종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공자孔子의 본뜻인 것이다.


역주
역주1 孔子論 : 이 글은 저작 연도가 분명하지 않으나 東坡의 젊은 시절 작품인 듯하다. 本集에는 이 논의 제목이 〈論孔子〉로 되어 있고, 趙刻本 《志林》에는 〈論魯三桓〉으로 되어 있다. 孔子(B.C. 551~B.C. 479)는 춘추시대 魯나라의 사상가, 교육가로 儒學을 집대성하여 동양 최고의 聖人으로 알려져 있는바, 이름은 丘이고 字는 仲尼이다. 그의 철학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역주2 魯定公十二年 : 定公은 이름이 宋으로 魯나라 25대 군주인데, 昭公의 庶弟로 뒤를 이어 군주의 지위에 올랐는바, 定公은 그의 시호이다. 저본에는 13년으로 되어 있으나, 郎曄本에 의거하여 12년으로 고쳤다.
역주3 臣無藏甲 大夫無百雉之城 : 藏甲은 집에 甲兵(갑옷과 병기)을 보관해둔다는 뜻으로 사사로이 거느리는 私兵을 이르며, 雉는 성벽의 면적을 계산하는 단위로 길이가 3丈, 높이가 1丈인 것을 이른다. 《春秋左氏傳》 隱公 원년에 “國都 이외의 都城이 100雉를 넘는 것은 국가의 해가 된다.”라고 보인다.
역주4 使仲由 爲季氏宰 : 仲由(B.C. 542~B.C. 480)는 字가 子路이며 魯나라 卞 땅 사람인데 孔子의 문인으로 10哲 중의 한 사람이다. 季氏는 魯나라의 대부인 季孫氏를 이르는데, 魯 桓公의 후손이기 때문에 孟孫氏․叔孫氏와 함께 三桓으로 불리고 또 三家라고도 칭하였다. 孟孫氏는 仲孫氏라고도 칭하는데, 이들은 세력이 강성하여 魯나라 公室을 위협하였으므로, 이때 孔子는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공실의 권위를 되찾고자 하였다. 宰는 대부의 집안일을 총괄하는 家臣을 이른다.
역주5 墮三都 : 三都는 魯나라 대부들인 孟孫氏와 叔孫氏․季孫氏가 자신들의 식읍에 세운 都城으로 그 규모가 거의 國都의 城과 비슷하였다고 한다. 孟孫氏의 都城인 成邑은 지금의 山東省 寧陽縣 북쪽에 있었고, 叔孫氏의 都城인 郈邑은 지금의 山東省 東平縣 동남쪽에 있었고, 季孫氏의 都城인 費邑은 지금의 山東省 費縣 서북쪽에 있었다.
역주6 叔孫氏先墮郈 : 叔孫氏는 이전에 家臣 侯犯이 郈邑을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적에, 두 차례에 걸쳐 城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子路의 설득에 제일 먼저 호응하였다.
역주7 公山弗狃叔孫輒 率費人襲公 : 公山弗狃는 公山弗擾로도 쓰는데, 姬姓으로 費邑의 邑宰로 있었으나 季桓子(季孫斯)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였다. 叔孫輒은 叔孫氏의 庶子로 또한 집안의 총애를 입지 못하여 평소 불만이 많았는데, 子路가 군대를 이끌고 費邑의 都城을 허물기 위해 國都를 비우자, 公山弗狃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費邑의 백성들을 이끌고 國都로 쳐들어왔다.
역주8 三子 : 당시 三桓의 家主들이자 魯나라의 大臣들인 仲孫何忌(孟孫何忌), 叔孫州仇, 季孫斯 세 사람을 이른다.
역주9 申句須樂頎 : 申句須와 樂頎는 당시 魯나라 대부들로 武將들이었다.
역주10 公斂處父 以成叛 : 公斂處父는 孟孫氏의 家臣으로 당시 成邑의 邑宰로 있었는데, 成邑의 도성을 허물려 하자, 公斂處父가 孟孫氏에게 이르기를 “都城을 허물면 齊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北門으로 쳐들어올 것입니다. 또 成邑은 孟孫氏의 堡障(본거지)이니, 成邑이 없으면 孟孫氏도 없게 됩니다. 모른 척하시면 제가 都城이 허물어지지 않게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春秋左氏傳 定公 12년》
역주11 孔融曰……不以封建諸侯 : 孔融은 지금의 山東省 曲阜인 魯國 사람으로 자는 文擧이며, 孔子의 후손이다. 後漢 獻帝 建安 연간에 뛰어난 문사들을 일컫는 建安七子 가운데 한 명으로 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北海相이 되고 공을 세워 孔北海로 알려졌으며, 詩 짓기와 飮酒를 잘하여 고상한 풍류로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曹操가 丞相이 되어 정권을 전횡할 적에, 孔融은 太中大夫였다. 王畿는 王이 사는 國都 주변 사방의 땅을 이른다.
역주12 季氏親逐昭公 公死于外 : 昭公(B.C. 560~B.C. 509)은 魯 襄公의 아들로 이름은 裯인데 혹 稠로도 쓴다. 周 景王 4년(B.C. 541)에 즉위하여 25년간 재위하였다. 季孫氏를 제거하려고 공격하다가 도리어 季孫氏에게 축출되어 齊나라와 晉나라 등을 8년간 전전하다가 52세의 나이로 晉나라 乾侯(지금의 河北省 成縣 동남쪽)에서 죽었다.
역주13 子家羈 : 魯나라 대부로 子家文伯으로도 불렸다. 魯 莊公의 손자로 昭公의 重臣이었는데, 사람됨이 진실하고 식견이 있었다. 昭公을 따라 망명하였으며 망명 중에도 계속 시종하면서 충성을 다하였고, 昭公에게 누차 귀국을 권하였으나 昭公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昭公이 죽고 나서 季孫氏가 子家羈를 魯나라로 불러 정사에 참여시키고자 하였으나, 子家羈는 昭公의 명이 없으므로 따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역주14 季桓子之受女樂也……可以出走 : 魯 定公 14년(B.C 496)에 孔子가 大司寇에 제수되어 國政을 맡았는데 國政을 맡은 지 3개월에 魯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齊나라 군주가 이 말을 듣고 魯나라가 강성해져서 齊나라를 위협하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나라 안의 미녀 80명을 뽑아 아름다운 옷을 입힌 다음 康樂舞를 가르치고 무늬가 있는 말 120필이 끄는 30대의 수레에 태워 魯나라에 보냈다.
齊나라 사자가 이들 舞姬와 아름다운 말들을 曲阜城 남문의 높은 곳에 진열하였는데, 季桓子가 미복 차림으로 몰래 세 번이나 구경하고는, 마침내 지방을 순시한다는 핑계를 대고는 定公을 모시고 남문으로 가서 하루 종일 舞姬들의 가무를 구경하였으며 끝내 이들을 궁으로 받아들였다. 季桓子는 定公과 함께 무희들의 춤을 구경하느라 3일 동안 政事를 돌보지 않았으며 郊祭를 지내고도 제사 음식을 대부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았다. 이에 孔子께서 魯나라를 떠나가셨다.
太師 己가 孔子를 전송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어찌하여 떠나십니까?”라고 묻자, 孔子께서는 대답 대신 노래를 부르기를 “저 여인(舞姬)의 입이여! 사람을 쫓아낼 수 있구나. 저 여인의 청탁함이여!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구나. 내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보내리라.[彼婦之口 可以出走 彼婦之謁 可以死敗 蓋優哉游哉 維以卒世]”라고 하였다. 《史記 孔子世家》 太師는 당시 魯나라의 樂官의 우두머리였다.
역주15 蓋田氏六卿不服 則齊晉無不亡之道 : 田氏는 齊나라의 유력한 대부 집안인 田氏를 이른다. 이들은 陳나라 陳完의 후손들로 陳完이 齊나라로 망명하면서 성을 田氏로 바꾸었는데, 田氏는 대대로 齊나라의 대부가 되어 국정을 전횡하였다. 나중에 田恒(陳恒)은 簡公을 시해하였으며, 康公 19년(B.C. 386)에 田和가 康公을 폐위하고 齊나라를 찬탈하였다.
六卿은 晉나라의 世卿들로 趙, 范, 知, 中行, 韓, 魏의 여섯 가문을 이른다. 이들은 부침을 거듭한 끝에 韓, 魏, 趙 3家만이 남았는데, 周 威烈王 23년(B.C. 403)에 晉나라의 영토를 나누어 차지하고 威烈王에게 청하여 韓虔과 魏斯, 趙籍이 제후로 봉해지니, 마침내 晉나라는 멸망하였다.
역주16 彼晏嬰者亦知之……知禮之可以爲國也 : 晏嬰(?~B.C. 500)은 字가 平仲인데 춘추시대 齊나라의 卿으로 夷維(지금의 山東省 高密縣) 사람이다. 晏氏 집안은 齊나라의 世卿으로 靈公․莊公․景公 3대에 걸쳐 執政大臣이 되어 올바른 정사를 펴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景公은 이름이 杵臼로 靈公의 아들이며 莊公의 아우인데, B.C. 598년에 즉위하여 B.C. 582년에 죽었다.
한번은 景公이 晏嬰과 함께 路寢(正寢)에 앉아 있었는데, 景公이 “아름다운 이 방을 장차 누가 차지하게 될까?”라고 탄식하자, 晏嬰이 그 말씀의 뜻을 물었다. 이에 景公이 “덕이 있는 자가 이 방을 차지하리라는 의미이다.”라고 대답하자, 晏嬰이 “임금님의 말씀대로라면 아마도 이 방은 陳氏가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陳氏가 비록 큰 덕은 없으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곡식을 받아들일 적에는 작은 용기를 쓰고 백성들에게 베풀 적에는 큰 용기를 써서 민심을 얻는 반면, 임금님께서는 세금을 무겁게 거두시니, 백성들의 마음이 그에게 돌아가 있습니다. 임금님의 후손이 조금만 태만해지고 陳氏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齊나라는 陳氏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景公이 대책을 물으니, 晏嬰이 “오직 禮만이 이를 막을 수 있습니다. 政事를 禮에 맞게 하면 大夫의 집에서 베푸는 것이 國人에 미치지 않고 백성과 농부들이 고장을 떠나지 않고 工人과 商人이 직업을 바꾸지 않으며, 士가 職務를 잃지 않고 大夫가 나라의 이익을 취하지 않게 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景公은 “훌륭한 말이다! 내가 禮를 행할 수는 없으나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禮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음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昭公 26년》
역주17 其浩然之氣……塞乎天地之間者 : 浩然之氣는 義로운 일을 많이 축적하여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용기를 이른다. 《孟子》 〈公孫丑 上〉에 “公孫丑가 ‘감히 묻겠습니다. 무엇을 浩然之氣라 합니까?’ 하자, 孟子께서 ‘말하기 어렵다. 이 浩然之氣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 정직함으로써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 이 浩然之氣가 天地의 사이에 꽉 차게 된다.’라고 대답하셨다.[敢問 何謂浩然之氣 曰 難言也 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라고 보인다.
역주18 羈旅之臣 : 원래 타국에서 떠돌던 신하를 이른다. 孔子는 魯나라에서 벼슬하시기 전인 昭公 25년(B.C. 517)에 季孫氏가 昭公을 축출하는 내란이 일어나자, 魯나라를 떠나 여러 나라를 주유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다시 魯나라로 돌아오신 일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9 哀公 : 魯 定公의 아들로 이름은 蔣인데, 周 敬王 26년(B.C. 494)에 즉위하여 27년간 재위하였고, 周나라 貞定王 원년(B.C. 468)에 三桓에게 축출되었는바, 哀公은 그의 시호이다.
역주20 陳恒弑其君……請討之 : 陳恒은 시호가 成子인데 뒤에 姓을 田氏로 바꿨으며, 후대에는 漢 文帝의 이름을 諱하여 常으로 바꿔 田常이라고도 불렀다. 齊나라의 대부로 민심을 얻자 簡公을 시해하고 平公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論語》 〈憲問〉에 “陳成子가 簡公을 시해하자, 孔子께서 목욕하고 조회하시어 哀公에게 ‘陳恒이 君主를 시해하였으니, 토벌할 것을 청합니다.’ 하셨다.[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恒弑其君 請討之]”라고 보인다.
역주21 哀公患三桓之偪 常欲以越伐魯而去之 : 당시 越나라는 국력이 강성하여 吳나라를 멸망시켰으므로 魯 哀公은 越나라의 힘을 빌어 三桓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哀公 25년(B.C. 468) 閏 10월에 越나라에 가서 越나라의 태자인 適郢과 환담을 나누니, 越나라에서는 장차 哀公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땅을 많이 떼어주려 하였다. 公孫有山이 사람을 시켜 이러한 사실을 季孫氏에게 알리니, 季孫氏는 두려워하고 越나라의 太宰인 伯嚭를 통하여 越王에게 뇌물을 써서 중지시켰다. 그리하여 哀公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해에 돌아왔다. 《春秋左氏傳 哀公 25년》
역주22 以蠻夷伐國……斷可見矣 : 皐如는 越나라의 대부이고, 出公은 衛나라 군주인 輒으로 蒯聵의 아들이다. 蒯聵는 衛 靈公의 太子였는데, 계모인 南子가 음란한 짓을 자행하자, 그녀를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靈公의 노여움을 사서 망명하였다.
靈公이 죽자, 衛나라에서는 輒이 嫡孫이라 하여 그를 군주로 세웠으나, 蒯聵가 晉나라의 도움을 받아 孔悝와 모의하고 出公을 몰아냈다. 出公이 越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越나라는 皐如에게 군대를 주어 出公을 호위하여 衛나라에 들여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衛나라 사람들이 出公이 오랑캐의 힘을 빌려 자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미워하고 계책을 써서 받아들이지 않으니, 결국 出公은 越나라에서 죽었다. 《春秋左氏傳 哀公 25․26년》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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