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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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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中妙手 其體格 與今無相遠하니라
君子之欲有爲於天下인댄 莫重乎其始進也
始進以正이라도 猶且以不正繼之어든 況以不正進者乎
古之人 有欲以其君王者也하고 有欲以其君霸者也하고 有欲彊其國者也하니 是三者 其志不同이라
其術有淺深하고 而其成功有巨細하니 雖其終身之所爲 不可逆知 而其大節 必見於其始進之日하나니라
何者
其中素定也일새니 未有進以彊國而能霸者也 未有進以霸而能王者也니라
其心固曰 使吾君爲堯, 舜之君하고 而吾民爲堯, 舜之民也라하니
其所言者 固欲合諸侯, 攘戎狄也
管仲 度桓公足以霸하고 度其身足以爲霸者之佐
是故 上無侈說하고 下無卑論하니 古之人 其自知明也如此하니라
鞅之懷詐挾術以欺其君也
彼豈不自知其不足以帝且王哉리오마는 顧其 恐孝公之不能從이라
是故 設爲高論以眩之하고 君旣不能是矣 則擧其國하야 惟吾之所欲爲하니
不然이면 豈其負帝王之略하고 而每見 輒變以徇人乎
商鞅之不終於秦也 是其進之不正也일새니라
聖人則不然하야 其志愈大故 其道愈高하고 其道愈高故 其合愈難이라
聖人 視天下之不治 如赤子之在水火也하니 其欲得君以行道 可謂急矣
이나 未嘗以難合之故而少貶焉者 知其始於少貶이면 而其漸必至陵遲而大壞也
孔子之世 其諸侯卿大夫 視先王之禮樂 猶方圓氷炭之不相入也하니 進而先之以禮樂이면 其不合 必矣
是人也 以道言之하면 則聖人이요 以世言之하면 則野人也
若夫君子之急於有功者 則不然하야 其未合也 先之以世俗之所好하고 而其旣合也 則繼以先王之禮樂하니 其心則然이나 然其進不正하야 未有能繼以正者也
君子之得其君也 旣度其君하고 又度其身하야 君能之而我不能이면 不敢進也하고 我能之而君不能이면 不可爲也하니
不敢進而進이면 是易其君이요 不可爲而爲 是輕其身이니 是二人者 皆有罪焉이니라
君子之始進也 曰 君苟用我矣 我且爲是라하야
君曰 能之라하면 則安受而不辭하고 君曰 不能이라하면 天下其獨無人乎아하며
至於人君하야도 亦然하야 將用是人也 則告之以己所欲爲하야 要其能否而責成焉하나니
其曰 姑用之而試觀之者 皆過也니라
後之君子 其進也 無所不至하야 惟恐其不合也하야 曰 我將權以濟道라하고 旣而 道卒不行焉이어든 則曰 吾君不足以盡我也라하야
始不正其身하고 終以謗其君하니 是人也 自以爲君子니라


03. 공자孔子선진先進을 따르셨다는
시론時論 가운데 매우 묘한 솜씨이니, 그 문체文體격식格式이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
군자君子천하天下에 훌륭한 일을 하고자 하면, 처음 나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처음에 바름으로써 나아가더라도 바르지 못함으로 뒤를 잇는데, 하물며 바르지 못함으로써 나아가는 자에 있어서이랴?
옛날 사람 중에 자신의 군주를 왕자王者로 만들고자 한 자가 있었고, 자신의 군주를 패자霸者로 만들고자 한 자가 있었고, 나라를 부강富强하게 만들고자 한 자가 있었으니, 이 세 부류의 사람은 그 뜻이 똑같지 않았다.
그러므로 방법에 깊고 얕음이 있었고 공을 세움에 크고 작음이 있었으니, 비록 종신終身토록 할 바를 미리 알 수는 없었으나, 대절大節은 반드시 처음 나아가는 때에 알 수 있었다.
어째서인가?
평소 그 마음속에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니,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을 가지고 나아가서 능히 패자霸者가 된 자는 있지 않았고, 패도霸道를 가지고 나아가서 능히 왕자王者가 된 자는 있지 않았다.
이윤伊尹유신국有莘國에서 농사지을 적에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우리 임금을 과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우리 백성을 의 백성과 같은 한 백성으로 만들겠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윤伊尹이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임금을 설득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국시대의 책사策士들이 자신의 얕은 도량으로 이윤伊尹을 헤아린 것이니, 군자君子들이 이를 미워하였다.
관중管仲이 죄수로서 포승줄에 묶여 있는 가운데에 환공桓公을 만나보았는데, 그가 말한 것은 진실로 제후諸侯를 규합하고 오랑캐들을 물리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관중管仲환공桓公이 충분히 패자霸者가 될 수 있음을 헤아렸고, 자신이 충분히 패자霸者보좌輔佐가 될 수 있음을 헤아렸다.
이 때문에 위로는 과장된 말이 없었고 아래로는 비굴한 의논이 없었으니, 옛사람은 그 스스로를 분명하게 앎이 이와 같았다.
상앙商鞅효공孝公을 알현할 적에 세 번 설득한 뒤에 뜻이 부합하였으니, 심하구나!
상앙商鞅이 속임수를 품고 권모술수를 끼고서 군주를 속임이여.
상앙商鞅효공孝公오제五帝삼왕三王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어찌 스스로 알지 못했겠는가마는, 다만 자신의 참혹하고 각박한 형명학刑名學효공孝公이 제대로 따르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이 때문에 매우 고상한 삼황三皇오제五帝의 의논을 가설하여 군주를 현혹시켰고, 군주가 이것을 할 수 없다고 하자 온 나라를 오직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제왕의 경략을 지니고서 매번 군주를 볼 때마다 번번이 자신의 주장을 바꿔서 군주의 비위를 따랐겠는가?
상앙商鞅나라에서 끝을 잘 맺지 못한 것은 나아갈 적에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인聖人은 그렇지 않아서, 그 뜻이 더욱 크기 때문에 가 더욱 높고, 그 가 더욱 높기 때문에 군주와 부합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성인聖人천하天下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보기를 어린아이가 물속과 불속에 있는 것처럼 안타깝게 여겼으니, 군주를 얻어서 를 행하고자 하는 것이 급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부합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조금도 자신을 굽히지 않았던 것은 조금 굽혀서 시작하면 반드시 점차 침체하여 크게 파괴됨에 이를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먼저 예악禮樂을 올림은 야인野人이요, 나중에 예악禮樂을 올림은 군자君子라 하는데, 만일 내가 쓴다면 나는 먼저 예악禮樂을 올림을 따르겠다.”라고 하신 것이다.
공자孔子 때에 제후諸侯대부大夫들은 선왕先王예악禮樂을 보기를 네모진 것과 둥근 것이 서로 맞지 않고 얼음과 숯불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처럼 여겼으니, 나아가면서 예악禮樂으로써 먼저 한다면 부합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이런 사람은 를 가지고 말하면 성인聖人이요, 당시 세상 사람들의 견해를 가지고 말하면 야인野人이다.
군자君子 중에 을 세우는 것을 급급히 여기는 자들은 그렇지 않아서 부합하기 전에는 세속의 좋아하는 바로써 먼저 설득하고, 부합한 뒤에는 선왕의 예악禮樂으로써 뒤를 이었으니, 그 마음은 옳으나 그 나아감은 바르지 못하여 바름으로써 계속할 수 있는 자가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따르지 않으셨고, 맹자孟子 또한 말씀하시기를 “한 자를 굽혀서 한 길을 펴는 것은 이익을 가지고 말한 것이니, 만약 이익을 가지고 말한다면 한 길을 굽혀서 한 자를 펴 이롭더라도 또한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신 것이다.
군자君子가 군주의 신임을 얻었을 적에는 군주를 헤아리고 또 자기 자신을 헤아려서, 군주가 능히 이것을 할 수 있는데도 자신이 능하지 못하면 감히 나아가지 않고, 자신이 능히 이것을 할 수 있는데도 군주가 능하지 못하면 이것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능하지 못하여 감히 나아갈 수 없는데 나아간다면 이는 군주를 깔보는 것이요, 군주가 할 수 없는데 한다면 이는 자기 몸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니, 이 두 사람은 모두 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처음 나아갈 적에 생각하기를 ‘임금이 진실로 나를 등용할 수 있다면 내 장차 이것을 하겠다.’라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군주가 만일 ‘내 이것을 잘할 수 있겠다.’라고 말하면 임무를 편안히 받아서 사양하지 않고, 군주가 ‘내 잘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 임금에게 아뢰기를 ‘천하에 저 말고 어찌 딴 사람이 없겠습니까?’라고 사양하였다.
그리고 군주에 이르러도 또한 그러하여, 장차 이 사람을 등용하려고 하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그에게 말해주어서 그의 능하고 능하지 못한 바를 살펴 성공을 책임지웠다.
그러니 “우선 등용해보고 한번 살펴보겠다.”라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잘못인 것이다.
후세의 군자君子들은 나아갈 적에는 못하는 짓이 없어서 행여 뜻이 부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내 장차 권도權道로써 를 이루겠다.”라고 하고, 이윽고 가 끝내 행해지지 못하면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내 재주를 다 쓰지 못했다.”라고 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자기 몸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종말에는 군주를 비방하니,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를 군자君子라고 생각하나 맹자孟子의 이른바 ‘군주를 해치는 자’인 것이다.


역주
역주1 孔子從先進 : 이 글은 文集에는 제목이 〈學士院試孔子從先進論〉으로 되어 있고, 郎曄의 《經進東坡文集史略》에는 〈孔子從先進〉으로 되어 있다. 이 말은 《論語》 〈先進〉의 “先進於禮樂 野人也 後進於禮樂 君子也 如用之 則吾從先進”에서 나왔다.
蘇軾이 治平 2년(1065)에 鳳翔府判官에서 判登聞鼓院으로 영전하였는데, 英宗은 藩邸에 있을 때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唐나라의 故事를 따라 翰林院에 들여 知制誥로 삼고자 하였다.
이때 宰相 韓琦가 아뢰기를 “蘇軾은 遠大한 器局입니다. 후일에 마땅히 천하를 위해 쓰여야 하니, 조정에서는 그를 잘 배양하여야 합니다. 지금 대번에 그를 등용한다면 天下의 선비들이 반드시 옳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다만 그에게 누가 될 뿐입니다. 우선 불러서 시험해보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두 편의 論으로 다시 시험하여 3등에 들자 直史館으로 임명하였는데, 두 편의 論은 바로 이 글과 다음에 있는 〈春秋定天下之邪正論〉이다.
역주2 伊尹之耕於有莘之野也 : 伊尹은 商나라를 개국한 成湯의 재상이다. 尹은 관명인 尹正의 尹이고 이름은 摯이다. 후세의 冢宰와 같은 阿衡을 맡고 成湯을 도와 夏나라 桀王을 정벌하고 商나라를 개국하였으며, 周나라의 周公과 함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재상으로 알려졌다. 有莘은 나라 이름으로 지금의 河南省 陳留縣 동북쪽에 있었다.
伊尹은 有莘에서 농사를 지으며 安貧樂道하였는데, 湯王이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 극진한 禮로 초빙하자, 이에 응해 재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옛날에는 國名 앞에 대부분 有자를 붙여 有虞․有夏․有窮․有明이라 하였는바, 有를 大의 뜻으로 보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有莘 또한 莘나라인데 有자를 앞에 붙인 것이다.
역주3 以伊尹……以己度伊尹也 : 《孟子》 〈萬章 上〉에 “萬章이 묻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伊尹이 고기를 베어 요리함으로써 湯王에게 등용되기를 요구하였다.」라고 하니,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하자, 孟子께서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셨다.[萬章問曰 人有言 伊尹以割烹要湯 有諸 孟子曰 否不然]”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朱子의 集註에 “《史記》 〈殷本紀〉를 상고해보면 ‘伊尹이 道를 행하여 훌륭한 人君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방법이 없자, 마침내 有莘氏의 媵臣이 되어 솥과 도마를 지고 맛있는 음식으로 湯王을 설득하여 王道에 이르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전국시대에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按史記 伊尹欲行道以致君而無由 乃爲有莘氏之媵臣 負鼎俎 以滋味說湯 致於王道 蓋戰國時有爲此說者]”라고 보인다. 媵臣은 公主가 제후에게 시집갈 적에 함께 따라가는 신하를 이른다.
역주4 管仲見桓公于纍囚之中 : 管仲은 춘추시대 齊나라의 名相으로 이름이 夷吾이며, 仲은 그의 字이다. 潁上 사람으로 젊었을 때부터 鮑叔牙와 친하여 管鮑之交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齊 襄公이 무도하자 鮑叔牙는 공자 小白을 받들고 莒나라로 피난하였고, 管仲은 公子 糾를 모시고 魯나라로 피난하였는데, 뒤에 無知가 襄公을 시해하자, 小白과 糾가 각각 莒나라와 魯나라의 군대를 거느리고 齊나라로 들어오다가 싸움을 벌여, 小白이 승리하고 입국하여 즉위하니, 이가 바로 桓公이다.
糾의 군대가 패하자 魯나라에서는 부득이 糾를 죽이고 管仲을 가두었다. 鮑叔牙가 桓公에게 魯나라에 잡혀 있는 管仲을 데려와 재상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桓公이 魯나라에 管仲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魯 莊公은 管仲을 죄인의 신분으로 돌려보내니, 桓公이 管仲을 만나보고 재상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纍囚之中’이라고 말한 것이다.
역주5 商鞅之見孝公也 三說而後合 : 商鞅(B.C. 390~B.C. 338)은 춘추시대 秦 孝公을 보좌한 재상으로 원래는 衛鞅 또는 公孫鞅으로 불렸는데, 뒤에 商於라는 땅에 봉해져 商君 또는 商鞅이라고 칭하였다.
孝公은 獻公의 아들로 B.C. 361년부터 B.C. 338년까지 재위하였다. 즉위 이래 여러 제후들이 秦나라를 업신여기는 것에 분개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여러 賢者들을 적극적으로 초빙하였다.
母國인 衛나라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商鞅은 秦나라에 와서 孝公의 총신 景監을 통해 孝公을 알현하고 설득하였는데, 처음에 堯․舜의 道를 말하자 孝公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두 번째로 만나 三王의 王道를 말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했으며, 세 번째로 霸道에 대해 말하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마침내 孝公은 商鞅을 등용하고 刑名學(法家)으로 나라를 다스려 부국강병을 이룩하였는데, 본문의 ‘三說而後合’은 이를 말한 것이다.
역주6 刑名慘刻之學 : 刑名은 刑名學으로 전국시대 申不害가 창시한 法家 중의 한 학파인데 循名責實, 信賞必罰을 내세우며 매우 엄격하고 가혹한 법에 의한 정치를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慘刻之學이라고 한 것이다.
역주7 先進于禮樂……則吾從先進 : 이 글은 《論語》 〈先進〉에 보이는데 해석에 있어서는 이견이 많다.
楊伯峻의 《論語譯注》에는 “먼저 禮樂을 배운 뒤에 관리가 되는 사람은 爵祿을 받은 적이 없는 野人(일반 사람)이고, 먼저 관직을 차지하고 뒤에 禮樂을 배우는 사람은 君子(卿․大夫의 자제)이다. 만일 내가 인재를 등용한다면 나는 먼저 禮樂을 배운 사람을 選用하겠다.”라고 하였다.
또 蘇軾은 “먼저 禮樂을 가지고 나아감은 野人이고 뒤에 禮樂을 가지고 나아감은 君子라 하는데, 만일 내가 쓴다면 나는 먼저 禮樂으로 나아감을 따르겠다.”라고 보았다.
그러나 朱子는 《論語集註》에서 “先進․後進은 前輩․後輩라는 말과 같다. 野人은 郊外의 백성을 이르고, 君子는 어진 士大夫를 이른다.[先進後進 猶言前輩後輩 野人 謂郊外之民 君子 謂賢士大夫也]”라고 해석하고, 程子(伊川)의 “先進은 禮樂에 있어 文과 質이 마땅함을 얻었는데 이제 도리어 그것을 질박하다고 말하여 野人이라 하고, 後進은 禮樂에 있어 文이 그 質을 넘는데 이제 도리어 彬彬(적절히 배합됨)하다고 말하여 君子라고 한다. 이는 周나라 말기에 文에 치우쳤으므로 당시 사람들의 말이 이와 같아서 文에 지나침을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이다.[先進 於禮樂 文質得宜 今反謂之質朴 而以爲野人 後進之於禮樂 文過其質 今反謂之彬彬 而以爲君子 蓋周末文勝 故時人之言如此 不自知其過於文也]”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그리하여 본문을 “〈지금 사람들이 이르기를〉 선배들은 禮樂에 대하여 野人(촌스러운 사람)이고, 후배들은 禮樂에 대하여 君子라고 한다. 〈내가〉 만일 禮樂을 쓴다면 나는 선배들을 따르겠다.”라고 풀이하였다.
역주8 孟子亦曰……亦可爲歟 : 尺은 한 자를 이르고 尋은 8자를 이른다.
이 말은 《孟子》 〈滕文公 下〉에 “제자인 陳代가 ‘선생님께서 諸侯를 만나보지 않으시는 것은 작은 일인 것 같습니다. 이제 한번 만나보시면, 크게는 王者를 이루고 작게는 霸者를 이룰 것입니다. 또 옛 기록에 「한 자를 굽혀 한 길을 편다.」라고 하였으니, 의심컨대 한번 만나볼 만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孟子께서 ‘옛날에 齊 景公이 사냥할 적에 虞人을 旌(깃발)으로 불렀는데 오지 않으니, 장차 그를 죽이려 했었다. 〈孔子께서 虞人을 칭찬하시기를〉 「志士는 죽어서 시신이 도랑에 버려짐을 잊지 않고, 勇士는 자기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 하셨으니, 孔子께서 어찌하여 그를 취하셨는가? 자기의 〈신분에 맞는〉 부름이 아니면 가지 않음을 취하신 것이니, 만일 부름을 기다리지 않고 간다면 어떠하겠는가?
또 한 자를 굽혀서 한 길을 편다는 것은 利로써 말한 것이니, 만일 利로 말한다면 한 길을 굽혀 한 자를 펴서 利가 있더라도 또한 하겠는가?’라고 대답하셨다.[陳代曰 不見諸侯 宜若小然 今一見之 大則以王 小則以霸 且志曰 枉尺而直尋 宜若可爲也 孟子曰 昔齊景公田 招虞人以旌 不至 將殺之 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 孔子奚取焉 取非其招不往也 如不待其招而往 何哉 且夫枉尺而直尋者 以利言也 如以利 則枉尋直尺而利 亦可爲與]”라고 보인다.
이는 처음에 ‘正道에 맞지 않는 방법이라도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해도 된다.’라고 하여 이를 행한다면, 결국 목적을 위해서 못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계한 것이다.
역주9 孟子之所謂賊其君者 : 《孟子》 〈公孫丑 上〉에 “사람이 이 四端을 가지고 있음은 四體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으니, 이 四端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仁義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요, 자기 군주가 仁義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 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라고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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