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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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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0. 왕원지王元之화상畫像에 대한
感慨激烈 過多
감개하고 격렬한 것이 매우 많다.
아하니 余嘗三復斯言하야 未嘗不流涕太息也로라
에 이르기를 “군자君子가 있지 않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내 일찍이 이 말을 세 번 반복하고서 눈물을 흘리고 크게 한숨 쉬지 않은 적이 없었다.
皆以身徇義하야 招之不來하고 麾之不去하야 하면 則豺狼狐狸 自相呑噬
나라의 급암汲黯소망지蕭望之이고李固나라의 장소張昭나라의 위정공魏鄭公(위징魏徵)․적인걸狄仁傑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 몸으로 의리를 지켜서 남들이 불러도 오지 않고 손을 저어도 떠나가지 아니하여, 얼굴빛을 엄숙히 하고 조정에 서면 시랑豺狼과 여우와 살쾡이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물어 죽였다.
能消禍於未形하고 救危于將亡하니 使皆如이면 雖累千百이라도 緩急 豈可望哉리오
그러므로 가 나타나지 않았을 적에 를 사라지게 하고, 장차 망하려 할 적에 위태로운 나라를 구원하였으니, 그 당시 대신들이 모두 공손승상公孫丞相(공손홍公孫弘)과 장우張禹호광胡廣과 같았다면, 비록 몇천 명과 몇백 명이 있더라도 위급할 적에 어찌 도움을 바랄 수 있겠는가?
以雄文直道 獨立當世하야 足以追配此
고 한림故 翰林 왕공 원지王公 元之(왕우칭王禹偁)는 웅장한 문장과 정직한 로 당세에 홀로 우뚝 서서, 충분히 이 여섯 명의 군자君子에게 추배追配할 수 있었다.
方是時하야 朝廷淸明하야 無大姦慝이라이나 하야 耿然如秋霜夏日하야
이때를 당하여 조정이 깨끗해서 크게 간악한 자가 없었는데도, 은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꼿꼿한 모습이 가을의 서리와 여름의 태양과 같았다.
不可狎玩하야 至於三黜以死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친압할 수 없어서 세 번 쫓겨났다가 죽음을 맞았다.
有如不幸而處於衆邪之間 安危之際런들 則公之所爲 必將驚世絶俗하야 使之流 心破膽裂하리니 豈特如此而已乎
만일 불행하게도 여러 간사한 신하의 사이와 국가가 위태로운 즈음에 처했더라면, 이 행하신 바는 반드시 장차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세속보다 크게 뛰어나서 두소斗筲천유穿窬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심담心膽이 파열되게 하였을 것이니, 어찌 다만 이와 같을 뿐이었겠는가?
始予過라가 見公之畫像하고 想其遺風餘烈하야 이나 而不可得이러니 其後爲徐州 而公之 爲兖州하야 以公墓碑示余어늘 乃追爲之贊하야 以附其家傳云이라
처음 내가 소주蘇州호구사虎丘寺를 지나다가 화상畫像을 보고 유풍遺風여열餘烈을 사모하여 을 위해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경의를 표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하였는데, 그 후 서주徐州를 맡음에 의 증손 연주兖州지사知事가 되어 묘비문墓碑文을 나에게 보여주므로, 이에 뒤따라 을 지어서 그의 가전家傳에 부친다.
維昔聖賢 患莫己知어늘 公遇太宗하니 允也其時
옛날 성현聖賢들은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까 근심하였는데, 태종太宗을 만났으니 진실로 좋은 시기였네.
帝欲用公이나 公不少貶이라
황제가 을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은 조금도 스스로를 굽히지 않았네.
三黜窮山하야 之死靡憾하니 以來 獨爲名臣이라
세 번 궁벽한 으로 쫓겨나서 죽음에 이르렀으나 유감이 없었으니, 함평咸平 연간 이래로 홀로 명신名臣이 되었네.
一時之屈이요 萬世之信(伸)이니 紛紛鄙夫 亦拜公像이라
한때에 굽혔고 만세萬世에 펼쳤으니, 분분紛紛비부鄙夫들도 화상畫像에 절한다네.
何以占之
무엇으로 이것을 점치는가?
有泚其顙이니 公能泚之하야 不能已之
비부鄙夫들의 이마에 땀이 나니, 비부鄙夫들을 땀나게 하여 그치지 못하게 하네.
아득한 구원九原이여!
愛莫起之로다
을 사랑해도 다시 세상에 나오게 할 수 없네.
역주
역주1 王元之畫像贊 :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 16권에 의하면, 東坡가 元豐 원년(1078) 6월에 知兖州事 王汾을 위하여 이 贊을 지었다고 한다.
역주2 傳曰 不有君子其能國乎 : 傳은 《春秋左氏傳》으로 이 내용은 文公 12년에 그대로 보인다.
역주3 漢汲黯……狄仁傑 : 汲黯(?~B.C. 112)은 漢 武帝 때의 명신으로 字가 長孺이며 濮陽 사람이다. 武帝에게 직간을 잘하여 武帝가 社稷의 신하라고 칭찬하며 예우하였다.
蕭望之(?~B.C. 47)는 宣帝와 元帝 때의 문신으로 字가 長倩이고 東海 蘭陵 사람이다. 어질고 강직하여 諫議大夫, 御史大夫로 중용되었으며, 11명의 현신에 뽑혀 麒麟閣에 像이 그려졌다. 宣帝가 승하할 적에 遺詔를 받아 元帝에게 師傅로 존중받았으나 중용되지는 못하였다.
李固(93~147)는 字가 子堅이고 漢中 南鄭 사람이다. 後漢 沖帝 때에 太尉로 있었는데, 어질고 강직하여 명망이 높았다. 沖帝가 죽고 質帝가 시해되자, 杜喬와 함께 淸河王 劉蒜을 옹립하려고 노력하였으나, 權臣 梁冀가 桓帝를 옹립하고 誣陷하여 杜喬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張昭(156~236)는 삼국시대 吳나라의 문신으로 字가 子布이고 徐州 彭城 사람이다. 孫策이 江東에서 왕업을 일으키자 長史가 되어 보필하였는데, 孫策이 죽을 적에 뒤를 이은 孫權이 나라를 맡을 만하지 못하거든 대신 나라를 취하라는 遺命을 받을 정도로 깊은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한결같은 忠心과 강직한 간언으로 孫權을 보좌하여 輔吳將軍이 되고 婁侯에 책봉되었다. 시호는 文侯이다.
魏鄭公은 魏徵(580~643)으로 唐 太宗 때의 名臣인데 鄭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字가 玄成이고 鉅鹿郡 曲陽(지금의 河北省 晉陽) 사람으로 諡號는 文貞이다. 諫議大夫 등의 요직을 역임하며 강직한 성품으로 太宗의 잘못에 대해 준엄하게 간쟁하였으며, ‘貞觀의 治’라는 태평시대를 여는데 크게 공헌하여 역사상 가장 뛰어난 諫官 중의 한 명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狄仁傑(607~700)은 唐나라 則天武后, 中宗 때의 명재상으로 字가 懷英이고 號가 德英이며 幷州 太原 사람이다. 강직한 성품으로 直諫을 서슴지 않았으며 청렴결백하여 명성이 높았다. 則天武后가 周나라를 세웠으나 狄仁傑이 말년에 武后를 설득하여 폐위되었던 中宗을 다시 황제로 추대하여 唐나라를 회복시켰다.
역주4 正色而立于朝 : 正色은 단정하고 엄숙한 표정을 이른다. 이 말은 《書經》 〈周書 畢命〉에 “성대한 德으로 능히 작은 행실에 부지런히 힘써 4代를 보필하고 밝혀서 얼굴빛을 엄숙히 하고 아랫사람들을 거느리자, 太師의 말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어 아름다운 공적이 先王의 세대보다 많았다.[懋德 克勤小物 弼亮四世 正色率下 罔不祗師言 嘉績多于先王]”라고 보인다.
역주5 公孫丞相張禹胡廣 : 公孫丞相은 公孫弘(B.C. 200~B.C. 121)으로 漢 武帝 때의 문신인데, 字가 季이고 菑川 사람이다. 처세와 임기응변에 능하여 賢良으로 추천되고 御史大夫와 丞相에 올랐으나, 함께 등용된 轅固生에게 曲學阿世한다는 평을 받았으며, 반역을 도모하던 淮南王에게 “승상 公孫弘을 설득하는 것은 마치 뒤집어쓰고 있는 것을 벗겨내고 떨어지려는 것을 흔드는 것과 같을 뿐이다.”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張禹(?~B.C. 5)는 前漢 元帝, 成帝 때의 문신으로 字가 子文이고 河內 사람이다. 유학의 경전에 밝아 宣帝 甘露 연간에 博士로 출사하여 光祿大夫, 東平內史를 역임하였으며, 成帝 즉위 후에 給事中을 거쳐 丞相이 되고 安昌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성격이 강직하지 못하고 부귀에 연연하여 外戚 王氏가 專橫하였으나 감히 곧은 말을 하지 못하고 아첨하는 말을 하다가, 朱雲에게 간신으로 탄핵당하였다.
胡廣(91~172)은 後漢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자가 伯始이고 華容 사람이다. 孝廉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太傅에 이르렀으며 安帝, 順帝, 沖帝, 質帝, 桓帝, 靈帝의 여섯 조정에서 벼슬하여 후한 예우를 받았으나 직언을 하지 않고 당시 발호하던 외척과 환관들과 어울려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의 中庸을 지녔다.’는 조롱을 받았다.
역주6 故翰林王公元之 : 王禹偁을 가리킨 것으로 元之는 그의 字인데, 翰林院에 들어가 知制誥가 되었으므로 翰林이라 한 것이다.
역주7 六君子 : 여섯 명의 君子로 위에서 든 汲黯, 蕭望之, 李固, 張昭, 魏徵, 狄仁傑을 가리킨 것이다.
역주8 公猶不容於中 : 中은 中央의 내직으로, 王禹偁은 太宗 至道 연간에 知制誥가 되었다가 남의 비방을 받아 工部郎中으로 좌천되고 知滁州事로 나갔다가 知揚州事로 옮겼다. 眞宗이 즉위한 다음 소환되어 다시 知制誥가 되었다가 咸平 초기에 知黃州事로 좌천되었으며, 1년여 만에 蘄州로 옮겼으나 이때 병이 위독하여 귀환해서 곧바로 별세하니, 당시 나이가 48세였다.
그가 咸平 2년(999)에 지은 〈黃州竹樓記〉를 보면 “내가 至道 乙未年(995) 翰林院에서 滁州로 나왔고, 다음 해인 丙申年 揚州의 光陵으로 옮겼으며, 다음 해인 丁酉年 또다시 西掖(翰林院)에 들어갔다가, 다음 해 섣달 그믐날 黃州의 齊安으로 좌천한다는 명령이 있어 다음 해인 己亥年 3월에 郡에 부임하니, 4년 사이에 분주하여 겨를이 없었다. 명년에는 또다시 어느 곳에 있을지 모른다.”고 하였다.
이 〈黃州竹樓記〉는 《古文眞寶後集》에도 실려 있는데, 名文으로 알려져 있다.
역주9 斗筲穿窬 : 斗는 한 말이고 筲는 한 말 두 되들이로 斗筲는 지식이 짧고 기국이 좁은 사람을 비유하며, 穿은 남의 집 담을 뚫는 것이고 窬는 담을 넘어가는 것으로 모두 좀도둑을 가리킨다.
역주10 蘇州虎丘寺 : 江蘇省 蘇州의 虎丘山에 있는 절로 경관이 아름답다. 春秋時代 吳王 闔廬를 이곳에 장례하였는데 수많은 부장품을 묻었다. 장례 지낸 뒤 3일 만에 金의 精氣가 위로 올라와 호랑이가 되어 무덤에 웅크리고 앉았으므로 虎丘라고 이름했다 한다.
역주11 願爲執鞭 : 상대방을 존경하여 그를 위해 馬夫가 되기를 원함을 이른다.
역주12 曾孫汾 : 王汾은 字가 彦祖로 進士에 甲科로 급제하여 벼슬이 工部郎中에 이르렀는데, 그 이름이 ‘元祐黨籍碑’에 들어 있다. ‘元祐黨籍碑’는 曾布와 蔡京 등의 小人들이 徽宗이 등극하자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建中靖國 원년(1101) 9월에, 哲宗 元祐 연간에 등용된 司馬光, 呂公著, 文彦博, 蘇軾, 程頤 등 名臣들을 舊法黨이라 몰아 姦黨으로 지목하고, 그 이름과 사실을 기록한 碑를 端禮門에 세우고 이것을 ‘元祐姦黨碑’라 하였으며, 崇寧 3년(1104)에 司馬光 이하 3백 명을 다시 姦黨으로 정하여 황제가 친히 그 이름과 행적을 써서 이를 비석에 새겨 文德殿의 東壁 밑에 세웠는데, 이를 ‘元祐黨籍碑’라고 하였다.
역주13 咸平 : 眞宗의 연호로 998년부터 1003년까지이다.
역주14 茫茫九原 愛莫起之 : 九原은 九泉과 같은바, 東坡가 王禹偁을 사랑하나 이미 죽어 九泉에 묻혀서 그를 다시 이 세상에 나오게 하려 해도 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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