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범례 |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中多名言이라
賢者不必貴 仁者不必壽니라
天不可必乎
仁者必有後니라
二者 將安取衷哉
世之論天者 皆不待其定而求之
以天爲茫茫하야 善者以怠하고 惡者以肆하나니 此皆天之未定者也
松柏 生於山林하야 其始也 困於蓬蒿하고 厄於牛羊이라가 而其終也 貫四時, 閱千歲而不改者 其天 定也
善惡之報 至於子孫이면 則其定也久矣
吾以所見所聞所傳聞而考之컨대 其可必也審矣로다
國之將興 必有世德之臣 厚施而不食其報하나니 然後 其子孫 能與守文太平之主 共天下之福하나니라
蓋聞嘗手植三槐於庭하고 曰 吾子孫 必有爲三公者라하더니
已而 其子진종황제眞宗皇帝之間하야 朝廷淸明하고 天下無事之時 享其福祿榮名者 十有八年이라
今夫寓物於人하야 明日而取之라도 有得有否어늘진공晉公 修德於身하야 責報於天하야 取必於數十年之後호되 하니 吾是以 知天之果可必也로라
吾不及見위공魏公이요 而見其子호니 以直諫으로인종황제仁宗皇帝하야 出入시종관侍從將帥三十餘年이로되 位不滿其德하니 天將復興王氏也歟
何其子孫之多賢也
世有以진국공진국공으로하니 其雄才直氣 不相上下 功名富貴 略與王氏等이나 而忠信仁厚 不及위공魏公父子하니 由此觀之컨대 王氏之福 蓋未艾也
與吾遊하니 好德而文하야 以世其家일새 吾是以錄之하노라
銘曰
嗚呼休哉
위공魏公之業 與槐俱萌이로다
封植之勤 必世乃成이라
旣相진종眞宗하니 四方砥平이요 歸視其家호니 槐陰滿庭이로다
吾儕小人이라 朝不(及)[謀]夕하야
相時射利하니 皇(遑)卹厥德이리오
庶幾僥倖하야 이라
不有君子 其何能國이리오
王城之東 진공晉公所廬
鬱鬱三槐
惟德之符로다
嗚呼休哉


01. 삼괴당三槐堂에 대한
글 가운데 명언名言이 많다.
천도天道를 기필할 수 있는가?
현자賢者가 반드시 귀하지는 못하고, 인자仁者가 반드시 장수하지는 못한다.
천도天道를 기필할 수 없는가?
인자仁者는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다.
상반된 이 두 가지 중에 장차 어느 것을 가지고 절충하여야 하는가?
내가 들으니, 신포서申包胥가 말하기를 “사람이 많으면 천도天道를 이기고, 천도天道가 정해지면 또한 사람을 이긴다.”라고 하였다.
세상에 천도天道를 논하는 자들이 모두 천도天道가 정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찾는다.
그러므로 천도天道를 아득하다고 여겨서 한 자가 태만해지고 한 자가 방자해지니, 도척盜跖의 장수와 공자孔子안자顔子의 곤액은 모두 천도天道가 아직 정해지지 못한 것이다.
송백松柏이 산림에서 나서 처음엔 쑥대에게 곤궁을 당하고 소와 양에게 곤액을 당하다가, 종말에는 사시四時를 꿰뚫어 푸르고 천 년이 지나도록 변치 않으니, 이는 천도天道가 정해진 것이다.
의 보답이 자손에게 이른다면 그 정함이 오래된 것이다.
내가 본 바와 들은 바와 전해 들은 바를 가지고 상고하건대, 천도天道를 기필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나라가 흥하려면 반드시 대대로 덕을 쌓은 신하로서 후하게 베풀고 그 보답을 먹지 않은 자가 있었으니, 그런 뒤에야 그 자손들이 문덕文德을 지키는 태평성세의 군주와 천하의 복을 함께 누리는 것이다.
고 병부시랑故 兵部侍郞 진국 왕공晉國 王公(왕호王祜)은 후한後漢후주後周의 즈음에 현달하고 태조太祖태종太宗을 차례로 섬겨 를 겸비하니, 천하에서는 이 재상이 되기를 바랐으나 은 끝내 정직한 로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였다.
내 들으니, 은 일찍이 손수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뜰에 심고 말씀하기를 “내 자손 중에 반드시 삼공三公이 될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그의 아들 위국 문정공魏國 文正公(왕단王旦)이 경덕景德상부祥符 연간에 진종황제眞宗皇帝를 도와서 조정이 깨끗하고 천하가 무사하던 때에 복록과 영화로운 이름을 누린 것이 18년이나 되었다.
지금 남에게 물건을 맡기고서 다음날 취하더라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는데, 진공晉公은 몸에 덕을 닦아 하늘의 보답을 바라서 수십 년 뒤에 기필코 취하기를, 마치 좌계左契를 잡고서 손을 사귀어 서로 받듯이 하였으니, 내 이 때문에 과연 천도天道를 기필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나는 미처 위공魏公을 뵙지 못하였고 그 아들 의민공懿敏公(왕소王素)을 뵈었는데, 직간直諫으로 인종황제仁宗皇帝를 섬겨 출입하면서 시종관侍從官이 되고 장수가 된 지 30여 년이었으나 지위가 그 덕에 차지 못하였으니, 하늘은 장차 다시 왕씨王氏를 일으키려는가 보다.
어쩌면 그리도 자손들 중에 어진 이가 많은가?
세상에는 진국공晉國公나라의 이서균李棲筠에 비하는 자가 있으니, 그 뛰어난 재주와 정직한 기개가 참으로 서로 막상막하이며, 이서균李棲筠의 아들 길보吉甫와 손자 덕유德裕공명功名부귀富貴가 대략 왕씨王氏와 비등하나, 충신忠信인후仁厚함은 위공魏公의 부자에게 미치지 못하니,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면 왕씨王氏의 복이 아직 다하지 않은 것이다.
의민공懿敏公의 아들 이 나와 교유하였는데, 을 좋아하고 문장이 있어 집안을 대대로 이어가므로 내 이 때문에 기록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한다.
아! 아름답도다.
위공魏公공업功業이 회화나무와 함께 싹텄도다.
흙을 쌓아 나무를 심은 노력의 결실은 반드시 대가 지나서야 이루어지는 법,
진종眞宗을 도우니 사방이 숫돌처럼 평평하였고, 돌아와 집안을 보니 회화나무 그늘이 뜰에 가득하도다.
우리들은 소인小人이라 아침에도 저녁을 도모하지 못하여
때를 보아 이익을 맞추려 하니, 어느 겨를에 그 덕을 생각하겠는가?
행여 요행을 바라 심지 않고 수확하려 하니
군자君子가 있지 않다면 어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왕성王城의 동쪽은 진공晉公의 집이 있는 곳이니
울창한 세 그루 회화나무여!
덕의 상징이로다.
아! 아름답도다.


역주
역주1 三槐堂銘 :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 13권에 “이 글을 지은 정확한 시기는 상고할 수 없다.”라 하고, 덧붙여 “熙寧 8년(1075) 이후에 지어졌다.”고 기재되어 있다. 周나라 때에 궁정 밖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가 심어져 있었는데, 天子를 朝見할 적에 三公이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마주 대하여 서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周禮》 〈秋官 朝士〉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마주 대하는 곳이 三公의 자리이다.[面三槐 三公位焉]”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후세에는 이 세 그루의 회화나무로써 三公과 같은 높은 지위를 비유하게 되었다. 王祜가 일찍이 손수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뜰에 심고, “내 자손 중에 三公이 될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역주2 天可必乎……仁者必有後 : 天은 天道로 善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惡한 자에게 화를 내리는 하늘의 道를 이른다. 본문은 “福善禍淫의 천도가 참으로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賢者가 반드시 귀하지는 못하고, 仁者가 반드시 장수하지는 못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천도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인자에게는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지 않은가?”라는 뜻이다.
그러나 郎曄의 《經進東坡文集事略》에는 ‘賢者不必貴 仁者不必壽’가 ‘賢者不必壽’로 축약되어 아래 句의 ‘仁者必有後’와 對가 되도록 수정되어 있다. ‘仁者不必壽’는 《論語》 〈雍也〉에 “智者는 樂天的이고 仁者는 長壽한다.[知者樂 仁者壽]”라는 孔子의 말씀을 인용하여 뒤집어 쓴 것이다.
역주3 吾聞之……天定亦能勝人 : 申包胥는 춘추시대 楚나라 대부로 姓이 公孫인데 申邑에 봉해졌기 때문에 申包胥로 불렸다. 伍員(伍子胥)과 친하였는데, 伍員이 형과 아버지가 무고하게 平王에게 살해당하고 吳나라로 도망갈 적에 申包胥를 만나 반드시 楚나라에 복수하여 멸망시킬 것을 맹세하자, 申包胥가 “그대는 반드시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楚나라를 부흥시키겠다.”라고 하였다.
뒤에 伍員이 吳나라 軍隊를 이끌고 楚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郢을 함락시키자, 申包胥는 秦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면서 秦나라 조정에서 일곱 밤낮을 통곡하니, 마침내 秦 哀公이 그의 정성에 감동하여 秦나라의 대군을 보내 楚나라를 구원해주었다.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定公 4․5년 및 《戰國策》, 《史記》 등에 보인다.
본문의 申包胥의 말은 伍員이 楚나라의 수도 郢에 들어가 平王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의 시신에 3백 대의 채찍질을 가하자, 申包胥가 伍員에게 사람을 보내어 전한 말로, 《史記》 〈伍子胥傳〉에 “그대의 복수는 너무 심하지 않은가. 내가 들으니 ‘사람이 많으면 天道를 이길 수 있으나 天道가 정해지면 또한 능히 사람을 패망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지금 그대는 平王의 옛 신하로서 직접 北面하여 그를 섬겼는데, 이제 죽은 임금을 이렇게 욕보이니, 이 어찌 天道를 무시하는 지극함이 아니겠는가?[子之報讐 其以甚乎 吾聞之 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 今子故平王之臣 親北面而事之 今至于僇死人 此豈其無天道之極乎]”라고 보인다.
역주4 盜跖之壽 孔顔之厄 : 盜跖은 춘추시대의 유명한 큰 도적으로 이름이 跖인데 魯나라의 어진 대부인 柳下惠의 아우로 평생 도적 떼를 이끌고 온갖 흉악한 짓을 자행하였으나 장수하였다.
孔․顔은 孔子와 顔回이다. 孔子는 세상을 구제하기 위하여 천하를 周流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여, 陳나라와 蔡나라 사이에서는 양식이 떨어지고 匡 땅에서는 포위당했으며, 宋나라에서는 桓魋가 살해하려 하므로 미복 차림으로 도피하는 등 많은 곤액을 겪었다. 顔回는 字가 子淵으로 통상 顔淵이라 칭하였는바, 孔子의 高弟로 학문을 좋아하여 陋巷에서 安貧樂道하였으나, 33세에 일찍 요절하였으므로 그 또한 곤액을 당했다고 한 것이다.
《史記》 〈伯夷列傳〉에 “혹자가 말하기를 ‘天道는 일정하게 친애하는 사람이 없어서 항상 善人을 돕는다.’고 하였는데, 伯夷와 叔齊로 말하면 이른바 善人이 아니겠는가? 仁을 쌓고 행실을 깨끗이 함이 이와 같았는데도 굶어 죽었다.
또 70명의 유명한 제자 가운데 仲尼께서 홀로 顔淵이 학문을 좋아하였다고 천거하였으나, 顔淵은 집이 가난하여 자주 굶어 겨와 술지게미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일찍 요절하였으니, 하늘이 善人에게 보답함이 어떠한가?
그런데 盜跖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여서 사람의 肝을 먹고 흉악한 행실을 자행하여 수천 명의 도적 떼를 거느리고 천하에 횡행하였는데도 끝내 長壽하다가 죽었으니, 이 盜跖은 무슨 덕을 따른 것인가? 〈이는 天道가 맞지 않는 것 가운데〉 더욱 분명하고 밖에 드러난 것이다.……참으로 이른바 天道란 것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或曰 天道無親 常與善人 若伯夷叔齊 可謂善人者非耶 積仁絜行如此 而餓死 且七十子之徒仲尼 獨薦顔淵爲好學 然回也屢空 糟糠不厭 而卒蚤夭 天之報施善人 其何如哉 盜跖日殺不辜 肝人之肉 暴戾恣睢 聚黨數千人 橫行天下 竟以壽終 是遵何德哉 此其尤大彰明較著者也……儻所謂天道 是耶非耶]”라고 보이는데, 東坡는 여기에 입각하여 글을 쓴 것이다.
역주5 故兵部侍郞晉國王公……不容於時 : 王公은 王祜로 자가 景叔이고 大名 莘縣 사람이다. 後漢과 後周에서 벼슬하다가 宋 太祖에게 등용되어 知制誥, 戶部員外郞 등을 역임하였는데, 직언을 하다가 太祖의 노여움을 사서 華州에 安置되었으며, 太宗이 즉위한 뒤에 兵部侍郞에 제수되었다.
본문의 내용은 北宋의 학자 邵伯溫이 지은 《邵氏聞見錄》에 “晉公 王祜가 太祖를 섬겨 知制誥가 되었는데, 太祖가 그를 魏州로 사신 보내면서 일을 임의대로 처리하도록 맡기고, 말하기를 ‘卿이 조정으로 돌아오면 지금 王溥가 맡고 있는 관직을 卿에게 제수하겠다.’고 하였다. 이때 王溥는 재상을 맡고 있었다.
魏州節度使 符彦卿은 太宗의 장인이었는데, 皇上에게 그가 반역을 꾀한다는 유언비어가 보고되었다. 王祜가 晉邸에 가서 太宗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는데, 太宗이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그에게 청탁하기 위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으나, 王祜는 듣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달려나갔다. 王祜는 魏州에 도착하여 세력을 믿고 방자하게 굴어온 符彦卿의 家僮 한 사람을 잡아서 유배보낼 뿐이었다.
王祜가 조정으로 돌아오자, 太祖가 ‘그대는 감히 符彦卿이 다른 뜻이 없음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으니, 王祜가 대답하기를 ‘臣과 符彦卿의 집안 식구가 각각 백 명이니, 臣의 집안 식구로 符彦卿의 집안 식구를 보장하겠습니다.’라 하고, 또 간하기를 ‘五代時代의 君主들은 시기심 때문에 無辜한 자들을 죽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나라를 오래 享有하지 못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이를 경계로 삼으소서.’라고 하였다. 太祖가 그의 直言에 노하여 王祜를 護國軍 行軍司馬로 좌천시켜 華州에 安置시키고 7년 동안 부르지 않았다. 太祖가 죽고 太宗이 卽位하자 兵部侍郞을 제수하고 王祜를 불렀으나 王祜는 미처 황제를 알현하지 못하고 죽었다.
지난날 王祜가 좌천될 적에 친구들이 도성문 밖에서 전송하면서 王祜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王溥처럼 재상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니, 王祜가 웃으면서 ‘나는 재상이 되지 못했으나 나의 아들 二郞은 반드시 재상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二郞은 바로 文正公 旦이다.
王祜가 평소 그가 귀하게 될 것을 알고 손수 뜨락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으면서 말하기를 ‘나의 자손 중에 반드시 三公이 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러하니, 천하 사람들이 三槐 王氏라고 말하곤 하였다.[王晉公祜 事太祖爲知制誥 太祖遣使魏州 以便宜付之 告曰 使還 與卿王溥官職 時溥爲相也 蓋魏州節度使符彦卿 太宗夫人之父 有飛語聞于上 祜往別太宗於晉邸 太宗却左右 欲與之言 祜徑趨出 祜至魏 得彦卿家僮一人 挾勢恣橫 以便宜決配而已 及還朝 太祖問曰 汝敢保符彦卿無異意乎 祜曰 臣與符彦卿家各百口 願以臣之家保符彦卿家 又曰 五代之君 多因猜忌 殺無辜 故享國不長 願陛下以爲戒 帝怒其語直 貶護國軍行軍司馬 華州安置 七年不召 太宗卽位 以兵部侍郞召 不及見而薨 初 祜赴貶時 親朋送於都門外 謂祜曰 意公作王溥官職矣 祜笑曰 某不做 兒子二郞者須做 二郞乃文正公旦也 祜素知其必貴 手植三槐于庭 曰 吾子孫必有爲三公者 已而果然 天下謂之三槐王氏云]”라고 보인다.
역주6 魏國文正公 : 王祜의 둘째 아들 王旦으로 字가 子明이다. 太宗 太平興國 5년(980)에 진사로 출사하여 眞宗 景德 2년(1005)에 尙書左丞에 제수되고, 3년에 工部尙書 中書門下平章事가 되어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며, 集賢殿 太學士가 되어 國史 편찬을 감수하였다. 魏國公에 봉해졌으며 文正은 그의 시호로 《宋史》에 傳이 있다.
역주7 景德祥符 : 모두 眞宗의 연호로 景德은 1004년부터 1007년까지이고 祥符는 大中祥符의 줄임말로 1008년부터 1016년까지이다.
역주8 如持左契 交手相付 : 左契는 左券으로 債券을 증빙하는 信標이다. 고대에 계약을 맺을 적에 계약의 내용을 적은 信標를 左와 右로 나누어 당사자끼리 하나씩 갖고 뒤에 債券의 증빙으로 삼았는데, 이때 좌측 符信을 채권자가 소유하고 이를 左券이라 하였다. 交手相付는 交付와 같은 말로, 채무자는 자신의 채무를 갚고 채권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左券을 채무자에게 넘겨주는 것을 이른다.
역주9 懿敏公 : 王旦의 아들 王素로 자가 仲儀이며, 仁宗 天聖 5년(1027)에 學士院에 응시하여 進士에 급제하고 출사하여 仁宗을 시종하였으며, 외직에 있으면서 善政을 베풀어 명성이 있었고 直諫을 잘하였다. 뒤에 懿敏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벼슬이 工部尙書에 이르렀다. 《宋史》에 傳이 있다.
역주10 李栖筠 : 719~776. 唐나라 肅宗과 代宗 때의 문신으로 字가 貞一이다. 玄宗 天寶 7년(748)에 進士로 출사하여 肅宗 때에 給事中에 이르렀으며, 代宗이 재상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당시의 재상 元載가 시기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시호는 文獻이다.
역주11 栖筠之子吉甫 其孫德裕 : 李吉甫(758~814)는 字가 弘憲으로 唐나라 德宗과 憲宗 두 조정에서 벼슬하였는데, 憲宗 元和 2년(807)과 6년 두 번에 걸쳐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李德裕(787~849)는 李吉甫의 아들로 字가 文饒이다. 文宗과 武宗 때에 재상을 지냈으며 衛國公에 봉해졌다. 開成 5년(840)에 武宗이 즉위하자 재상이 되어 藩鎭을 억누르고 위구르를 물리치는 등 공적을 세웠으나, 李宗閔을 축출하고 牛僧孺 일파를 지나치게 탄압하여 당쟁을 격화시켰다. 武宗이 죽고 宣宗이 즉위하여 牛僧孺 일파가 다시 집권하게 되자, 崖州司戶參軍事로 좌천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역주12 懿敏公之子鞏 : 王鞏은 懿敏公 王素의 아들로 자가 定國이며 張方平의 사위이다. 詩에 뛰어났으며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東坡와 절친한 사이로 東坡가 烏臺詩案으로 죄를 얻었을 적에 연좌되어 賓州로 좌천되었는바, 이때의 일이 본서 23권에 있는 〈王定國詩集序〉에 보인다. 벼슬이 宗正丞을 지냈으나 성품이 호탕하고 세상을 가볍게 여겨 자주 남의 비난을 받아 크게 현달하지는 못하였다.
역주13 不種而獲(穫) : 보통 사람들은 陰德을 쌓지도 않고 후대의 發福을 바란다는 뜻으로, 王氏 집안의 번창함이 先祖의 陰德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