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범례 |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蕭瑟이라
하니 霜露旣降하고 木葉盡脫이라
人影在地어늘 仰見明月이라
顧而樂之하야 行歌相答이러니 已而 歎曰 有客이면 無酒 有酒 無肴로다
月白風淸하니 如此良夜何 客曰 今者薄暮 擧網得魚하니 巨口細鱗
顧安所得酒乎
歸而謀諸婦하니 婦曰 我有斗酒하야 藏之久矣
以待子不時之需로라
於是 携酒與魚하고 復遊於적벽강赤壁之下하니 이라
山高月小하고 水落石出하니 曾日月之幾何완대 而江山 不可復識矣
予乃攝衣而上하여 履巉巖하고 하야 하고 하야 攀棲鶻之危巢하고之幽宮하니 蓋二客不能從焉이라
劃然長嘯하니 草木震動이라 山鳴谷應하고 風起水涌하니
予亦悄然而悲하고 肅然而恐하야 凜乎其不可留也
反而登舟하야 放乎中流하야 聽其所止而休焉하니라
時夜將半 四顧寂寥러니 適有孤鶴 橫江東來하니翅如車輪하고 하야 掠予舟而西也러라
須臾 客去하고 予亦就睡러니 一道士羽衣翩躚하야임고정臨皐之下라가 揖予而言曰 적벽강赤壁之遊樂乎
問其姓名하니 俛(俯)而不答이라
嗚呼噫嘻
我知之矣로라
疇昔之夜 飛鳴而過我者 非子也耶
道士顧笑하고 予亦驚悟하야
開戶視之하니 不見其處러라


04. 후적벽부
쓸쓸하다.
이해(임술년壬戌年) 10월 보름에 설당雪堂으로부터 걸어서 임고정臨皐亭으로 돌아가려 할 적에 두 이 나를 따라왔다.
황니판黃泥坂을 지나니, 서리가 이미 내리고 나뭇잎이 다 떨어져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가 땅에 있으므로 우러러 밝은 달을 보았다.
돌아보고 즐거워서 길을 걸으며 노래하여 서로 화답하였는데, 이윽고 탄식하기를 “손님이 있으면 술이 없고, 술이 있으면 안주가 없도다.
달이 밝고 바람이 시원하니, 이처럼 좋은 달밤에 어찌한단 말인가?”라고 하자, 객이 말하기를 “오늘 저녁 무렵에 그물을 들어 물고기를 잡았는데, 입이 크고 비늘이 가늘어 모양이 송강松江노어鱸魚와 같습니다.
다만 어느 곳에서 술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집에 돌아가서 아내와 상의하니, 아내가 말하기를 “내가 한 말 술을 보관해둔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대의 갑작스런 쓰임에 대비해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술과 물고기를 가지고 다시 적벽강赤壁江 아래에서 노니, 흐르는 강물 소리가 들려오고 끊긴 강안江岸은 천 이나 되었다.
산이 높고 달이 작으며 수위水位가 낮아져 돌이 드러나니, 일찍이 세월이 얼마나 지났기에 강산江山을 다시 기억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마침내 옷자락을 잡고 올라가서 높은 바위를 밟고 우거진 풀숲을 헤치고서 호랑이 모양의 바위에 걸터앉고, 규룡虯龍처럼 구불구불한 나뭇가지에 올라가서 새매가 살고 있는 높은 둥지에 오르고 풍이馮夷의 그윽한 집을 굽어보니, 두 객은 따라오지 못하였다.
휘익하고 길게 휘파람을 부니 초목이 진동하고, 산이 울림에 골짜기가 메아리치며 바람이 일고 물이 솟는 듯하였다.
나 또한 초연悄然히 슬퍼지고 숙연肅然히 두려워져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돌아와 배에 올라 중류中流에 이르러 배가 멈추는 대로 내버려두고 쉬었다.
한밤중이 될 무렵 사방을 돌아보아도 조용하기만 하였는데, 마침 외로운 한 마리가 강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오니, 나래가 수레바퀴처럼 크고 검은 치마에 흰 옷을 입고는 아련히 길게 울면서 내 배를 스쳐 서쪽으로 지나갔다.
잠시 후에 객이 떠나고 나는 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한 도사道士가 깃으로 만든 옷을 펄럭이면서 임고정臨皐亭 아래를 지나다가 나에게 읍하며 말하기를 “적벽강赤壁江의 뱃놀이가 즐거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그의 성명을 물었으나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아! 슬프다.
내 그대를 알겠노라.
어젯밤에 울며 내 배를 스쳐 날아간 것()이 그대가 아닌가?”
도사道士는 돌아보며 웃었고, 나는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문을 열고 보니, 그는 이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역주
역주1 後赤壁賦 : 이 글은 元豐 5년(1082) 겨울 10월에 쓰였다. 東坡는 黃州에 있을 적에 知人들과 赤壁을 유람하면서 두 편의 賦를 지었는데, 이 글은 두 번째 글로 〈前赤壁賦〉보다 3개월 뒤에 지어졌다.
이 두 賦는 앞에 〈赤壁賦〉가 있는데, 뒤에 東坡가 다시 赤壁江에서 뱃놀이하면서 지었으므로 後자를 붙여 앞의 〈赤壁賦〉와 구별한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는 앞에도 前자를 붙여 〈前赤壁賦〉라 칭한 것이다. 그러므로 〈赤壁賦〉 하면 〈前赤壁賦〉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다. 이는 諸葛亮의 〈出師表〉와 같은 경우로 〈出師表〉 하면 일반적으로 〈前出師表〉를 가리키는 것과 같다.
역주2 是歲十月之望 : 是歲는 壬戌年을 가리킨다. 〈前赤壁賦〉와 같은 해에 쓰였기 때문에 是歲라고 말한 것이다. 望은 보름이다.
역주3 步自雪堂 將歸于臨皐 : 雪堂은 東坡가 黃州에서 住居하던 집이다. 사방의 벽에 雪景을 그렸고 큰 눈이 내릴 적에 집이 완성되었으므로 雪堂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臨皐는 臨皐亭으로 지금의 黃岡市 남쪽 長江 가에 있었다. 東坡는 黃州에 안치되자 처음에 定惠院에 머물다가 이곳으로 옮겨와서 거처하였는데, 이곳에 오가며 雪堂을 지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4 黃泥之坂 : 黃州 동쪽 東坡 부근에 있는 언덕을 이른다.
역주5 狀似松江之鱸 : 松江은 지금의 上海市를 흐르는 江으로 太湖로부터 上海를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鱸는 농어로 松江의 농어는 珍味로 명성이 높다.
역주6 江流有聲 斷岸千尺 : 초겨울이 되어 강물이 줄어들었으므로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오고, 江岸이 높게 드러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7 披蒙茸 : 무성히 자란 잡초를 헤치고 나간다는 말이다. 蒙茸는 잡초가 자라 무성한 모양을 이른다.
역주8 踞虎豹 : 호랑이와 표범의 모양을 한 바위에 걸터앉음을 이른다.
역주9 登虯龍 : 구불구불한 모양의 나뭇가지를 잡고 올라감을 이른다. 虯龍은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인 용의 새끼로 빛이 붉고 양쪽에 뿔이 있다고 한다.
역주10 馮夷 : 신화 속 河水의 神인 河伯의 이름이다. 屈原이 지은 〈遠遊〉에 “湘江의 神에게 거문고를 타게 함이여. 海若에게 명하여 馮夷를 춤추게 하도다.[使湘靈鼓瑟兮 令海若舞馮夷]”라고 보이는데, 南宋의 洪興祖가 지은 《楚辭補注》에 “海若은 海神의 이름이요, 馮夷는 河水의 仙人이다.[海若海神名也 馮夷水仙人]”라고 하였다.
역주11 玄裳縞衣 戞然長鳴 : ‘玄裳縞衣’는 검은 치마와 흰 저고리라는 의미로 鶴의 몸이 희고 날개깃의 끝이 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戞然은 길고 은은한 仙鶴의 울음소리를 형용한 말이다.
역주12 <주석명/> : 1) 陳靜觀의 비평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두 賦(〈前赤壁賦〉, 〈後赤壁賦〉)는 蘇東坡가 黃州로 귀양 갔을 적에 지은 것이다. 이때 東坡는 일 밖에 마음을 버려두고 바람과 달에 興을 붙여 장차 인간 세상에 뜻이 없으려 하였다. 이 때문에 모두 神仙에 가탁하여 말하였으니, 前篇은 바람과 달이 항상 새로움을 내 즐거워하니 굳이 神仙을 부러워할 것이 없음을 말하였고, 後篇은 강산이 갑자기 달라짐에 두려워 오래 즐길 수가 없었으니, 또다시 神仙을 부러워한 것이다.
두 편의 큰 뜻은 모두 莊子(莊周)의 〈寓言〉, 屈原의 〈遠遊賦〉, 賈誼의 〈鵩鳥賦〉를 모방한 것으로 正論이 될 수 없고, 다만 凌厲하고 飄逸한 말은 한 句도 곡식을 먹는 사람과 유사한 말이 없으니, 읽어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신선이 사는 閬風山에 오르고 蓬萊山을 건너가는 기상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는 참으로 조물주와 노니는 자이니, 이와 같은 글은 붓을 잡고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陳靜觀批 二賦皆東坡謫黃州時作 是時放情事外 寄興風月 直將無意於人世 是故皆托仙以爲言 前篇謂風月之常新 吾亦樂之 亦不必羨於仙 後篇驚江山之忽異 凜不可以久樂 又復有羨於仙矣 二篇大意 皆倣寓言之莊 遠遊之屈 賦鵬之賈 未爲正論 但其凌厲飄逸之言 無一句類食烟火人語 讀之 令人亦覺有登閬風涉蓬萊氣象 蓋眞可與造物遊者 非可執筆學爲如此也]
東坡는 이 賦의 뒤에 스스로 쓰기를 “黃州의 약간 서쪽에 있는 산기슭이 강 가운데로 쑥 들어가 있는데 돌빛이 丹砂와 같다. 傳說에 이르기를 曹公(曹操)이 패전한 곳으로, 이른바 赤壁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曹公이 패하고 돌아갈 적에 華容路로 갔었는데, 지금 赤壁의 약간 서쪽 對岸이 바로 華容鎭이니, 아마도 이곳인 듯하다. 그러나 岳州에도 華容縣이 있으니, 마침내 어느 곳이 옳은지 알 수 없다.[坡自書此賦後云 黃州少西山麓 斗入江中 石色如丹 傳云曹公敗處所謂赤壁者 或曰非也 曹公敗歸 由華容路 今赤壁少西對岸 卽華容鎭 庶幾是也 然岳州 復有華容縣 竟不知孰是]” 하였다.
《江夏辨疑》에 이르기를 “長江과 漢水 사이에 赤壁이라고 칭하는 곳이 셋인데, 하나는 漢水의 곁, 竟陵의 동쪽에 있으니 바로 지금의 復州이고, 하나는 齊安郡의 步下縣에 있으니 바로 지금의 黃州이며, 하나는 江夏의 서남쪽 2백 리 지점에 있으니 지금 漢陽縣에 속해 있다.” 하였다. 내 생각하건대 江夏의 서남쪽은 바로 曹公이 패전한 곳이다.
《三國志》에 “劉琮이 항복하자 劉備가 夏口로 도망하니, 曹操는 江陵에서 劉備를 정벌하기 위하여 赤壁에 이르러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하였고, 또 《三國志》 〈周瑜傳〉에 “劉備가 夏口에 進住하자 孫權은 周瑜를 보내어 힘을 합해 曹操를 맞아 싸우게 하여 赤壁에서 조우했다.” 하였으니, 曹操가 江陵에서부터 내려왔고 周瑜가 夏口로부터 가서 맞아 싸웠다면 赤壁은 竟陵의 동쪽과 齊安의 步下에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江夏辨疑云 江漢之間 指赤壁者三 一在漢水之側 竟陵之東 卽今復州 一在齊安郡之步下 卽今黃州 一在江夏西南二百里許 今屬漢陽縣 予謂江夏西南者 正曹公所敗之地也 按三國志 劉琮降 備走夏口 操自江陵征備 至赤壁 戰不利 又周瑜傳 備進住夏口 權遺瑜 幷力迎操 遇於赤壁 夫操自江陵下 瑜由夏口往逆戰 則赤壁非竟陵之東者與齊安之步下者明矣]” 하였다. 《江夏辨疑》는 송나라 때 王得臣이 지은 책으로 《水經》의 부류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