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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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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中多詼諧之言이나 而論畫竹 入解하니라
竹之始生 一寸之萌耳로되 而節葉具焉하야 自蜩腹蛇蚹 以至於劍拔十尋者 生而有之也어늘
今畫者乃節節而爲之하고 葉葉而累之하니 豈復有竹乎
畫竹 必先得成竹於胸中하고 執筆熟視하야 乃見其所欲畫者하면 急起從之하야 振筆直遂하야 以追其所見호되 如兎起鶻落이니 少縱則逝矣
문여가與可之敎予 如此하니 予不能然也 而心識其所以然이로라
夫旣心識其所以然이로되 而不能者 內外不一하야 心手不相應이니 不學之過也
凡有見於中이로되 而操之不熟者 平居自視了然이나 而臨事忽焉喪之하니 豈獨竹乎리오
묵죽부墨竹賦하야 以遺문여가與可하고하고 輪扁
부자부자夫子之託於斯竹也 而予以爲有道者則非耶아하니라
자유子由 未嘗畫也 得其意而已어니와 若予者 豈獨得其意리오
幷得其法이로라
문여가與可畫竹 初不自貴重하야 四方之人 持縑素而請者 足相躡於其門하니 문여가與可厭之하야 投諸地而罵曰 吾將以爲韈이라하니
士大夫傳之하야 以爲口實하니라
문여가與可 而余爲지서주사徐州러니 문여가與可以書遺余하야
近語士大夫호되하니 可往求之라하니 韈材當萃於子矣리라하고
書尾 復寫一詩하니 其略曰 擬將一段鵝谿絹하야 掃取寒梢萬尺長이라하니라
予謂문여가與可호되 竹長萬尺이면 이니 知公倦於筆硯하야 願得此絹而已라하니
문여가與可無以答하야 則曰 吾言妄矣 世豈有萬尺竹也哉아하니라
余因而實之하야 答其詩曰 世間亦有千尋竹하니 이라한대
문여가與可笑曰 소자蘇子辯則辯矣
然二百五十匹 吾將買田而歸老焉이라하고 因以所畫篔簹谷偃竹遺予하고 曰 此竹 數尺耳로되 而有萬尺之勢라하니라
篔簹谷양주洋州
문여가與可嘗令予作하니 篔簹谷 其一也
予詩曰 한천漢川修竹賤如蓬이나 斤斧何曾赦籜龍
料得淸貧饞태수太守하니 이라하다
문여가與可是日 문여가其妻 遊谷中하야 燒筍晩食이라가 發函得詩하고 失笑하야 噴飯滿案하니라
원풍元豐二年正月二十日 문여가與可歿於진주陳州하다
是歲七月七日 予在호주湖州하야 曝書畫라가 見此竹하고 廢卷而哭失聲이라
하니 而予亦載문여가與可疇昔戱笑之言者 以見문여가與可於予 親厚無間 如此也로라


11. 문여가文與可가 그린 운당곡篔簹谷언죽偃竹에 대한 기문記文
문장 가운데 해학의 말이 많으나, 대나무 그리는 것을 논한 것은 아주 초탈한 경지에 들어갔다.
대나무가 처음 나올 적에는 한 치쯤 되는 작은 싹이지만, 마디와 잎이 모두 구비되어서, 매미의 배와 뱀의 껍질 같은 것으로부터 열 길이나 뽑은 과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땅에서 솟아 나오면서부터 여러 가지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대나무를 그리는 자들은 마디마다 만들고 잎마다 포개니, 어찌 다시 제대로 된 대나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대나무를 그릴 적에는 반드시 먼저 가슴속에서 완전한 대나무를 구상해놓은 다음, 붓을 잡고 익숙히 보다가 마침내 그리고자 하는 대나무를 보면(구상하면) 급히 일어나 뒤따라 그려서, 붓을 휘둘러 곧바로 구상한 바를 따라 그리되, 마치 토끼가 놀라 일어나고 새매가 토끼를 잡기 위해 내려앉듯이 해야 하니, 조금이라도 느슨히 하면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문여가文與可가 나에게 대나무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내가 이렇게 그리지는 못하나 마음속으로 이렇게 하는 방법은 알고 있다.
마음속에 이미 이렇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것은 안과 밖이 일치되지 못해 마음과 손이 서로 응하지 못해서이니, 이것은 배우지 않은 탓이다.
그러므로 무릇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으나 그것을 익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은, 평소에 스스로 분명하게 보았으나 일을 당하면 갑자기 잃어버리기 때문이니, 어찌 오직 대나무를 그리는 것뿐이겠는가?
자유子由(소철蘇轍)가 〈묵죽부墨竹賦〉를 지어서 문여가文與可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포정庖丁은 소를 해체하는 자인데 양생養生하는 자가 그 법을 취하였고, 윤편輪扁은 수레바퀴를 깎는 자인데 독서하는 자가 인정하였습니다.
지금 부자夫子가 이 대나무에 의탁하시는데, 나는 부자夫子가 있는 분이 아니겠는가라고 여겨집니다.”라고 하였다.
자유子由는 일찍이 그림을 그린 적이 없으므로 그 뜻만 알 뿐이지만, 나와 같은 사람은 어찌 그 뜻만 알 뿐이겠는가?
아울러 그림 그리는 방법까지 알고 있다.
문여가文與可가 대나무를 그릴 적에 애당초 자신의 솜씨를 귀중히 여기지 않아서, 사방의 사람들이 흰 비단을 가지고 와서 그림을 청하는 자의 발걸음이 집에 이어지니, 문여가文與可가 이것을 싫증 내어 비단을 땅에 던지며 성을 내어 “내 장차 이 비단으로 발싸개를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대부士大夫들은 이 말을 전하여 이야깃거리로 삼고 있다.
문여가文與可양주洋州에서 돌아왔을 적에 나는 지서주사知徐州事를 맡고 있었는데, 문여가文與可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근래 내가 사대부士大夫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묵죽墨竹가 가까이 팽성彭城에 있으니, 당신들은 그곳으로 가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라.’고 하였으니, 발싸개 재료가 마땅히 그대에게 모일 것이오.”라고 하였다.
문여가文與可는 편지 끝에 다시 한 수를 썼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한 필의 아계견鵝谿絹을 가지고서 1만 자나 되는 차가운 대나무 가지를 모두 취하여 그리겠다.”라고 하였다.
내가 문여가文與可에게 이르기를 “대나무 길이가 1만 자이면 마땅히 비단 250필을 써서 그려야 하니, 그대가 붓과 벼루에 지쳐서 이러한 그림은 그리지 못하고, 다만 이 비단을 얻고자 할 뿐임을 알겠다.”라고 하였더니,
문여가文與可가 답변할 말이 없자 말하기를 “내 말이 망령된 것이니, 세상에 어찌 1만 자나 되는 대나무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인하여 그 말을 실증하여 그의 에 답하기를 “세상에 또한 천 길의 대나무가 있으니, 달이 지고 뜰이 비었을 적에 대나무의 그림자가 이와 같이 길다.”라고 하였다.
이에 문여가文與可는 웃으며 말하기를 “소자蘇子가 참 말은 잘한다.
그러나 250필이 있으면 내 장차 이것을 팔아 토지를 사서 돌아가 노년을 보내겠다.”라고 하고, 인하여 자기가 그린 ‘운당곡언죽篔簹谷偃竹’을 나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 대나무는 길이가 몇 자에 불과하지만 1만 자의 기세가 있다.”라고 하였다.
운당곡篔簹谷양주洋州에 있다.
문여가文與可가 일찍이 나로 하여금 〈양주삼십영洋州三十詠〉의 를 짓게 하였는데, 운당곡篔簹谷은 그중의 하나이다.
나의 에 이르기를 “한천漢川의 긴 대나무 쑥대처럼 천하나, 도끼와 자귀 어찌 일찍이 죽순을 놓아주겠는가?
헤아려보건대 청빈淸貧하면서도 욕심 많은 태수太守(문여가文與可)의 가슴속에는, 위수渭水 가의 천 묘千 畝의 대나무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문여가文與可가 이날 자기 아내와 골짝 가운데에서 놀면서 죽순을 구워 저녁밥을 먹다가, 나의 편지를 뜯어 내가 지은 를 펴보고는 크게 실소失笑하여 밥상 가득히 밥을 뿜어내었다.
원풍元豐 2년 정월 20일에 문여가文與可진주陳州에서 별세하였다.
이해 7월 7일에 나는 호주湖州에서 서화를 햇볕에 말리다가 이 묵죽墨竹을 보고는, 그림책을 덮어놓고 목이 쉬도록 울었다.
옛날에 조맹덕曹孟德(조조曹操)이 교공橋公(교현橋玄)에 대한 제문에 “그대에게 제사 지내지 않고 그대로 수레가 지나가면 복통이 날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나 또한 문여가文與可와 옛날 농담하고 웃던 말을 여기에 기재하는 것은 문여가文與可가 나와 친숙하여 간격이 없음이 이와 같음을 나타내려고 해서이다.


역주
역주1 文與可畫篔簹谷偃竹記 : 이 글은 元豐 2년(1079)에 지어졌다. 이해 정월에 文與可(文同)가 湖州로 부임하는 도중에 죽었고, 4월에 東坡는 知徐州事에서 知湖州事로 자리를 옮겼는데, 7월에 書畫를 햇볕에 말리다가 文與可가 그에게 증정한 墨竹畫인 ‘篔簹谷偃竹’을 보고 슬픔을 참지 못하여 이 글을 지어 추모하였다. 文與可에 대한 注는 앞의 〈墨君堂記〉에 나와 있다.
역주2 子由 : 蘇轍(1039~1112)의 字이다. 號가 潁濱이며 東坡의 아우로 아버지 蘇洵과 함께 三蘇로 칭해지는데, 이들 三父子는 모두 唐宋八大家에 속해 있다. 일찍이 진사로 출사하여 門下侍郞, 太中大夫에 올랐으나 致仕하고 許州(지금의 河南省 許昌市)에 은둔하였다. 저서로는 《欒城集》, 《春秋集解》, 《老子解》 등이 있다.
역주3 庖丁解牛者也 而養生者取之 : 庖丁은 전국시대 이름난 白丁으로 소를 잡아 해체하는 데에 神技에 가까운 기술을 가져 유명하였으며, 養生은 몸을 잘 보양하여 해치지 않음을 이른다.
《莊子》 〈養生主〉에 文惠君이 庖丁이 소를 잡는 것을 보고는 감탄하고, 또 소 잡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나서, “훌륭하구나. 나는 庖丁의 말을 듣고 養生의 도를 터득했다.”라고 말한 내용이 보인다. 庖丁은 소를 잡아 해체할 적에 칼로 힘줄과 뼈를 건드리지 않고 오직 살이 있는 부위만을 처리하였다. 사람이 養生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감정을 잘 조절하면 長生不死할 수 있으므로 말한 것이다.
역주4 輪扁斲輪者也 而讀書者與之 : 輪扁은 춘추시대 齊나라의 유명한 목공으로 수레바퀴를 제작하는 기술자이며, 讀書者는 齊 桓公을 이른다.
이 내용은 《莊子》 〈天道〉에 “齊 桓公이 堂上에서 책을 잃고 있었는데, 堂下에서 輪扁이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올라가 桓公에게 묻기를 ‘감히 여쭙겠습니다. 임금께서 읽고 계신 것이 무슨 내용입니까?’라고 하니, 桓公이 답하기를 ‘聖人의 말씀이다.’ 하였다. 輪扁이 묻기를 ‘聖人께서 지금 살아계십니까?’ 하니, 桓公이 답하기를 ‘벌써 돌아가셨다.’ 하였다. 輪扁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임금께서 읽는 것은 古人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라고 하자, 桓公이 ‘과인이 책을 읽는데 목수 따위가 어찌 시비를 건단 말인가? 이치에 맞는 설명이 있으면 괜찮지만, 아니면 죽이겠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輪扁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제가 저의 일로 보건대, 수레바퀴를 만들 적에 너무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 것은 손짐작으로 터득하여 마음속으로 알 뿐이니, 입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묘수가 있습니다만 제가 제 자식에게 전수해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제게서 전수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 70인 제가 늘그막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도 그 전수해줄 수 없는 것과 함께 죽어버렸으니, 임금께서 읽고 있는 것은 古人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桓公讀書於堂上 輪扁斲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 敢問公之所讀者爲何言邪 公曰 聖人之言也 曰 聖人在乎 公曰 已死矣 曰 然則君之所讀者 古人之糟粕已夫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無說則死 輪扁曰 臣也 以臣之事觀之 斲輪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 而應於心 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年七十而老斲輪 古之人與其不可傳也死矣 然則君之所讀者 古人之糟粕已夫]”라고 보인다.
역주5 洋州 : 宋나라 때 州의 하나로 지금의 陝西省 洋縣이다.
역주6 墨竹一派 近在彭城 : 彭城은 徐州를 이른다. 文與可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墨竹畫家로 그가 그린 墨竹을 세상 사람들이 湖州竹派라고 칭하며 높였는데, 東坡는 墨竹을 文與可에게 배워, 이때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文與可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신과 같은 솜씨가 徐州에도 있다고 말한 것이다.
역주7 當用絹二百五十匹 : 비단 한 필에 40자짜리 대나무를 그릴 수 있으므로 1만 자짜리 대나무를 그리기 위해서는 비단 250필이 필요하다고 농담한 것이다.
역주8 月落庭空影許長 : 기울어가는 달빛에 어린 그림자가 빈 뜰에 길게 드리운 것을 이른 것이다.
역주9 洋州三十詠 : 東坡의 문집 가운데 있는 〈和文與可洋州園亭三十詠〉을 이른다.
역주10 渭濱千畝在胸中 : 渭는 陝西省의 渭水를 이른다. 이곳은 대나무가 잘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루는 곳이다. 청빈하나 대나무를 사랑하는 文與可의 흉중에 渭水 유역의 넓은 대나무 밭이 있다고 농담한 것이다.
《史記》 〈貨殖列傳〉에 “渭川 유역의 대나무 숲 1천 畝가 있으면……그런 사람은 1천 戶를 가진 제후와 같다.[渭川千畝竹 其人與千戶侯等]”라고 하였다.
역주11 曹孟德祭橋公文 有車過腹痛之語 : 曹孟德은 魏 武帝인 曹操를 이르며, 橋公은 後漢 때 太尉 橋玄을 높여 칭한 것이다.
《三國志》 〈武帝紀〉에 “建安 7년(202) 봄 정월에 曹操가 浚儀에 이르러 睢陽城의 해자를 수리하고 사람을 보내 橋玄을 太牢의 禮로 제사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그 注에 “橋玄이 그의 벗 曹操에게 ‘내가 죽은 뒤에 그대가 혹시 내 무덤 앞을 지나가게 되거든 술 한 말과 닭 한 마리를 내 무덤에 차려놓게.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탄 수레가 세 바퀴를 굴러가기 전에 배가 아프더라도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말했다.”라고 하였다, 太牢는 소와 돼지와 양을 각 1마리씩 올리는 성대한 祭需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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