竹之始生에 一寸之萌耳로되 而節葉具焉하야 自蜩腹蛇蚹로 以至於劍拔十尋者히 生而有之也어늘
今畫者乃節節而爲之하고 葉葉而累之하니 豈復有竹乎아
故로 畫竹은 必先得成竹於胸中하고 執筆熟視하야 乃見其所欲畫者하면 急起從之하야 振筆直遂하야 以追其所見호되 如兎起鶻落이니 少縱則逝矣라
문여가與可之敎予 如此하니 予不能然也나 而心識其所以然이로라
夫旣心識其所以然이로되 而不能者는 內外不一하야 心手不相應이니 不學之過也라
故로 凡有見於中이로되 而操之不熟者는 平居自視了然이나 而臨事忽焉喪之하니 豈獨竹乎리오
爲
묵죽부墨竹賦하야 以遺
문여가與可하고 曰
하고 輪扁
은 斲
라
今부자夫부자夫子之託於斯竹也에 而予以爲有道者則非耶아하니라
자유子由는 未嘗畫也라 故로 得其意而已어니와 若予者는 豈獨得其意리오
문여가與可畫竹에 初不自貴重하야 四方之人이 持縑素而請者 足相躡於其門하니 문여가與可厭之하야 投諸地而罵曰 吾將以爲韈이라하니
及
문여가與可自
還
에 而余爲
지서주사徐州러니 문여가與可以書遺余
하야 曰
近語士大夫
호되 吾
하니 可往求之
라하니 韈材當萃於子矣
리라하고
書尾에 復寫一詩하니 其略曰 擬將一段鵝谿絹하야 掃取寒梢萬尺長이라하니라
予謂
문여가與可호되 竹長萬尺
이면 이니 知公倦於筆硯
하야 願得此絹而已
라하니
문여가與可無以答하야 則曰 吾言妄矣니 世豈有萬尺竹也哉아하니라
余因而實之
하야 答其詩曰 世間亦有千尋竹
하니 이라한대
然二百五十匹은 吾將買田而歸老焉이라하고 因以所畫篔簹谷偃竹遺予하고 曰 此竹은 數尺耳로되 而有萬尺之勢라하니라
문여가與可是日에 문여가與其妻로 遊谷中하야 燒筍晩食이라가 發函得詩하고 失笑하야 噴飯滿案하니라
원풍元豐二年正月二十日에 문여가與可歿於진주陳州하다
是歲七月七日에 予在호주湖州하야 曝書畫라가 見此竹하고 廢卷而哭失聲이라
昔
에 하니 而予亦載
문여가與可疇昔戱笑之言者
는 以見
문여가與可於予
에 親厚無間
이 如此也
로라
11. 문여가文與可가 그린 운당곡篔簹谷의 언죽偃竹에 대한 기문記文
문장 가운데 해학의 말이 많으나, 대나무 그리는 것을 논한 것은 아주 초탈한 경지에 들어갔다.
대나무가 처음 나올 적에는 한 치쯤 되는 작은 싹이지만, 마디와 잎이 모두 구비되어서, 매미의 배와 뱀의 껍질 같은 것으로부터 열 길이나 뽑은 검劍과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땅에서 솟아 나오면서부터 여러 가지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대나무를 그리는 자들은 마디마다 만들고 잎마다 포개니, 어찌 다시 제대로 된 대나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대나무를 그릴 적에는 반드시 먼저 가슴속에서 완전한 대나무를 구상해놓은 다음, 붓을 잡고 익숙히 보다가 마침내 그리고자 하는 대나무를 보면(구상하면) 급히 일어나 뒤따라 그려서, 붓을 휘둘러 곧바로 구상한 바를 따라 그리되, 마치 토끼가 놀라 일어나고 새매가 토끼를 잡기 위해 내려앉듯이 해야 하니, 조금이라도 느슨히 하면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문여가文與可가 나에게 대나무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내가 이렇게 그리지는 못하나 마음속으로 이렇게 하는 방법은 알고 있다.
마음속에 이미 이렇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것은 안과 밖이 일치되지 못해 마음과 손이 서로 응하지 못해서이니, 이것은 배우지 않은 탓이다.
그러므로 무릇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으나 그것을 익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은, 평소에 스스로 분명하게 보았으나 일을 당하면 갑자기 잃어버리기 때문이니, 어찌 오직 대나무를 그리는 것뿐이겠는가?
자유子由(소철蘇轍)가 〈묵죽부墨竹賦〉를 지어서 문여가文與可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포정庖丁은 소를 해체하는 자인데 양생養生하는 자가 그 법을 취하였고, 윤편輪扁은 수레바퀴를 깎는 자인데 독서하는 자가 인정하였습니다.
지금 부자夫子가 이 대나무에 의탁하시는데, 나는 부자夫子가 도道가 있는 분이 아니겠는가라고 여겨집니다.”라고 하였다.
자유子由는 일찍이 그림을 그린 적이 없으므로 그 뜻만 알 뿐이지만, 나와 같은 사람은 어찌 그 뜻만 알 뿐이겠는가?
문여가文與可가 대나무를 그릴 적에 애당초 자신의 솜씨를 귀중히 여기지 않아서, 사방의 사람들이 흰 비단을 가지고 와서 그림을 청하는 자의 발걸음이 집에 이어지니, 문여가文與可가 이것을 싫증 내어 비단을 땅에 던지며 성을 내어 “내 장차 이 비단으로 발싸개를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대부士大夫들은 이 말을 전하여 이야깃거리로 삼고 있다.
문여가文與可가 양주洋州에서 돌아왔을 적에 나는 지서주사知徐州事를 맡고 있었는데, 문여가文與可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근래 내가 사대부士大夫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묵죽墨竹 한 파派가 가까이 팽성彭城에 있으니, 당신들은 그곳으로 가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라.’고 하였으니, 발싸개 재료가 마땅히 그대에게 모일 것이오.”라고 하였다.
문여가文與可는 편지 끝에 다시 시詩 한 수를 썼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한 필의 아계견鵝谿絹을 가지고서 1만 자나 되는 차가운 대나무 가지를 모두 취하여 그리겠다.”라고 하였다.
내가 문여가文與可에게 이르기를 “대나무 길이가 1만 자이면 마땅히 비단 250필을 써서 그려야 하니, 그대가 붓과 벼루에 지쳐서 이러한 그림은 그리지 못하고, 다만 이 비단을 얻고자 할 뿐임을 알겠다.”라고 하였더니,
문여가文與可가 답변할 말이 없자 말하기를 “내 말이 망령된 것이니, 세상에 어찌 1만 자나 되는 대나무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인하여 그 말을 실증하여 그의 시詩에 답하기를 “세상에 또한 천 길의 대나무가 있으니, 달이 지고 뜰이 비었을 적에 대나무의 그림자가 이와 같이 길다.”라고 하였다.
이에 문여가文與可는 웃으며 말하기를 “소자蘇子가 참 말은 잘한다.
그러나 250필이 있으면 내 장차 이것을 팔아 토지를 사서 돌아가 노년을 보내겠다.”라고 하고, 인하여 자기가 그린 ‘운당곡언죽篔簹谷偃竹’을 나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 대나무는 길이가 몇 자에 불과하지만 1만 자의 기세가 있다.”라고 하였다.
문여가文與可가 일찍이 나로 하여금 〈양주삼십영洋州三十詠〉의 시詩를 짓게 하였는데, 운당곡篔簹谷은 그중의 하나이다.
나의 시詩에 이르기를 “한천漢川의 긴 대나무 쑥대처럼 천하나, 도끼와 자귀 어찌 일찍이 죽순을 놓아주겠는가?
헤아려보건대 청빈淸貧하면서도 욕심 많은 태수太守(문여가文與可)의 가슴속에는, 위수渭水 가의 천 묘千 畝의 대나무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문여가文與可가 이날 자기 아내와 골짝 가운데에서 놀면서 죽순을 구워 저녁밥을 먹다가, 나의 편지를 뜯어 내가 지은 시詩를 펴보고는 크게 실소失笑하여 밥상 가득히 밥을 뿜어내었다.
원풍元豐 2년 정월 20일에 문여가文與可가 진주陳州에서 별세하였다.
이해 7월 7일에 나는 호주湖州에서 서화를 햇볕에 말리다가 이 묵죽墨竹을 보고는, 그림책을 덮어놓고 목이 쉬도록 울었다.
옛날에 조맹덕曹孟德(조조曹操)이 교공橋公(교현橋玄)에 대한 제문에 “그대에게 제사 지내지 않고 그대로 수레가 지나가면 복통이 날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나 또한 문여가文與可와 옛날 농담하고 웃던 말을 여기에 기재하는 것은 문여가文與可가 나와 친숙하여 간격이 없음이 이와 같음을 나타내려고 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