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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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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係國家大利害文字
臣伏見호니 河北, 京東 比年以來 蝗旱相仍하야 盜賊漸熾하고 今又不雨하야 自秋至冬 方數千里 麥不入土하니 竊料明年春夏之際 寇攘爲患 甚於今日이라
是以 輒陳狂瞽하야 庶補萬一하노이다
謹按山東 自上世以來 爲腹心根本之地하야 其與中原離合 常係社稷安危하니이다
宋武帝以英雄絶人之資 用武歷年이로되 而不能幷中原者 以不得河北也 隋文帝以庸夫穿窬之智로도 竊位數年 而一海內者 以得河北故也니이다
以爲山東之地 王者得之以爲王하고 霸者得之以爲霸하고 猾賊得之以爲亂天下라하니이다
自唐天寶以後 姦臣僭峙於山東하야 하야 竭天下之力호되 終不能取하야 以至於亡하고
近世하고 하니 由此觀之컨대 天下存亡之權 在河北 無疑也니이다
陛下卽位以來 北方之民 流移相屬하고 天災譴告 亦甚於四方이로되 五六年間 未有以塞大異者하니이다
至於京東하야는 雖號無事 亦當常使其民安逸富强하야 緩急 足以灌輸河北이니이다
脣亡則齒寒이어늘
而近年以來 公私匱乏하야 民不堪命이니이다
今流離饑饉이어늘 議者不過欲散賣常平之粟하고 勸誘蓄積之家하며 盜賊縱橫이어늘 議者不過欲增開告賞之門하고 申嚴緝捕之法하니 皆未見其益也리이다
常平之粟 累經振發하야 所存無幾矣 而饑寒之民 所在皆是하니 人得升合이나 官費丘山이요 蓄積之家 例皆困乏하니 貧者 未蒙其利하고 富者 先被其災하니이다
乃知上不盡利하면 則民有以爲生이니 苟有以爲生이면 亦何苦而爲盜리잇가
其間凶殘之黨 樂禍不悛 則須勅法以峻刑하야 誅一以警百이어니와 今中民以下 擧皆闕食하니
冒法而爲盜則死하고 畏法而不盜則饑하나니 饑寒之與 均是死亡이로되 而賖死之與忍饑 禍有遲速이라
相率爲盜 正理之常이니 雖日殺百人이라도 勢必不止하리이다
特於財利 少有所捐하사 衣食之門一開하야 骨髓之恩皆徧이니
然後 信賞必罰하야 以威克恩하야 不以僥倖廢刑하고 不以災傷撓法이니이다
如此而人心不革하고 盜賊不衰者 未之有也니이다
謹條其事하야 畫一如左하노이다
一. 臣所領密州 自今歲秋旱하야 種麥不得이라가 直至十月十三日하야 方得數寸雨雪이나
而地冷難種이요 雖種不生하야 比常年하면 十分中 只種得二三하니이다
竊聞河北, 京東 例皆如此라하니이다
尋常 依法須是檢行根苗하야 以定所放分數로되 今來二麥 元不曾種하야 卽無根苗可檢하니 官吏守法이면 無緣直放이니이다
若夏稅 一例不放이면 則人戶必至逃移하리니
尋常逃移 猶有逐熟去處어니와 今數千里無麥하니 去將安往이리잇고
但恐良民擧爲盜矣니이다
且天上無雨하고 地下無麥 有眼者共見하고 有耳者共聞이라
決非欺罔朝廷이니 豈可坐觀不放이리잇고
欲乞河北, 京東 逐路選差臣僚一員하야 하고 更不檢視하소서
若未欲如此施行이신댄 卽乞將하야 取今日以前五年酌中一年實直(値)하야 取便하야 納見錢或正色하고 其四等以下 且行이니이다
緣今來麥田空閑하니 若春雨調勻이면 却可以廣種秋稼리니 候至秋熟하야 竝將秋色하야 折納夏稅니이다
若是已種苗麥 委有災傷이어든 仍與依條檢放하시고 其闕麥去處 官吏諸軍 請受하야 且支白米하고 或支見錢하소서
所貴 小民不致大段失所니이다
一. 河北, 京東 自來 官不榷鹽하야 小民仰以爲生하니이다
近日臣僚上章하야 輒欲禁榷이러니 賴朝廷體察하야 不行其言하시니 兩路吏民 無不相慶이니이다
然臣勘會호니 近年鹽稅日增하야 元本兩路 三十三萬二千餘貫이러니 至熙寧六年하야 增至四十九萬九千餘貫하고 七年에도 亦至四十三萬五千餘貫하야
顯見刑法日峻하야 告捕日繁하니 是致小民愈難興販이니이다
朝廷 本爲 而煮海之利 天以養活小民이라하야
是以 不忍盡取其利하야 濟惠鰥寡하야 陰消盜賊하니이다
舊時 孤貧無業 惟務販鹽하니 所以五六年前 盜賊稀少
是時 告捕之賞 未嘗破하고 惟是犯人催納하고 이러니 今鹽課浩大하야 告訐如麻하니이다
貧民販鹽 不過一兩貫錢本하야偸稅則賞重하고 納稅則利輕하며 欲爲農夫 又値凶歲하니 若不爲盜 惟有忍饑
所以五六年來 課利日增하고 盜賊日衆하니이다
臣勘會密州鹽稅호니 去年一年 比祖額하야 增二萬貫이요 却支捉賊賞錢 一萬一千餘貫이로되 其餘未獲賊人尙多하니 以此較之하면 利害得失 斷可見矣니이다
欲乞特勅兩路하야 截自三百斤以下하야 竝與權免收稅하고 仍官給印本 하야하고 逐旋書塡月日, 姓名, 斤兩與小客호되 限十日更不行用하고
如敢借名하야 하야 分減鹽貨어든 許諸人陳告하고 重立賞罰하며 候將來秋熟日하여 仍舊幷하야 明言出自聖意하시고 令所在雕印하야 散牓鄕村하소서
人非木石이니 寧不感動이리오
一飮一食 皆誦聖恩하리이다
以至舊來貧賤之民 近日饑寒之黨하야도 不待驅率하고 一歸於鹽하야 奔走爭先하리니 何暇爲盜리오
人情不遠하니 必不肯捨安穩衣食之門하고 而趨冒法危亡之地也리이다
議者必謂 今用度不足하니 若行此法이면 則鹽稅大虧하야 必致闕事라하리니 臣以爲不然하노이다
凡小客 本少力微하야 不過行得三兩程이니
若三兩程外 須藉大商興販이요 決非三百斤以下小客所能行運이니 無緣大段走失이니이다
且平時大商所苦 以鹽遲而無人買 小民之病 以僻遠而難得鹽이니다
今小商不出稅錢이면 則所在爭來分買 大商旣不積滯 則輪流販賣하야
收稅必多 而鄕村僻遠 無不食鹽하야 所賣亦廣하리니 損益相補 必無大虧之理니이다
縱使虧失이라도 不過却只得祖額元錢이니 當時官司 有何闕用이리오
苟朝廷捐十萬貫錢하야 買此兩路之人하야 不爲盜賊이면 所獲多矣니이다
今使朝廷爲此兩路饑饉하야 特出一二十萬貫見錢하야 散與人戶하면 人得一貫 只及二十萬人이요
而一貫見錢 亦未能濟其性命이니이다
若特放三百斤以下鹽稅半年이면 則兩路之民 人人受賜하야 貧民 有衣食之路하고 富民 無盜賊之憂하리니 其利 豈可勝言哉잇가
若使小民無以爲生하야 擧爲盜賊이면 則朝廷之憂 恐非十萬貫錢所能了辦이요 又況所支捉賊賞錢 未必少於所失鹽課하리이다
臣所謂較得喪之孰多하고 權禍福之孰重者 爲此也니이다
一. 勘會諸處盜賊호니 太半是按問減等 災傷免死之人으로 走還舊處하야 挾恨報讐하야 爲害最甚이니이다
盜賊 自知不死하야 旣輕犯法하고 而人戶亦憂其復來하야 不敢告捕하니
是致盜賊公行하니이다
호니 皆是詞窮理屈하야 勢必不免하야 本無改過自新之意하니 有何可愍이완대 獨使從輕하고 同黨之中 獨不免死리잇가
其災傷 勅雖不下 與行下同하야 而盜賊小民 無不知者 但不傷 免死無疑니이다
且不傷變主 情理未必輕於偶傷變主之人이라
或多聚徒衆하고 或廣置兵仗하고 或標異服飾하고 或質劫變主하고 或驅虜平人하고 或賂遺貧民하야 令作耳目하고 或書寫道店하야 恐動官私하니 如此之類 雖偶不傷人이라도 情理至重하야 非止闕食之人 苟營餱糧而已니이다
欲乞今後盜賊 贓證未明이요 但已經考掠하야 方始承認者 竝不爲按問減等하고 其災傷地分 委自長吏하야 相度情理輕重하야 內情理重者 依法施行이니
所貴 凶民稍有畏忌하고 而良民敢於捕告니이다
臣所謂衣食之門一開하야 骨髓之恩皆徧이니
然後 信賞必罰하야 以威克恩하야 不以僥倖廢刑하고 不以災傷撓法者 爲此也니이다
謹具如前하노이다
自古立法制刑 皆以盜賊爲急하니 盜竊不已 必爲强劫이요 强劫不已 必至戰攻하야 或爲豪傑之資하야 而致이니이다
而況京東之貧富 係河北之休戚하고 河北之治亂 係天下之安危하니 識者共知 非臣私說이니이다
願陛下深察此事至重하고 所捐小利至輕하사 斷自聖心하야 決行此策하소서
臣聞 蔡齊知密州러니 是時東方饑饉이라
齊乞放行(監)[鹽]禁한대 先帝從之하시니 一方之人 不覺饑旱이라하니이다
臣愚且賤하야 雖不敢望於蔡齊 而陛下聖明 度(渡)越堯禹하시니 豈不能行此小事하야 有愧先朝리잇고
所以越職獻言하야 不敢自外하오니 伏望聖慈 察其區區之意하고 赦其狂僭之誅하소서
臣無任悚慄待罪之至로소이다


05. 하북河北경동京東의 도적을 논한 글
국가의 큰 이해에 관계되는 글이다
이 엎드려 보니, 하북河北경동京東은 근년 이래로 황충蝗蟲과 가뭄의 폐해가 서로 이어져서 도적의 창궐이 점점 심해지고, 게다가 지금 비가 오지 않아 가을로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수천 리 지역이 밭에 보리를 심지 못했으니, 내년 봄과 여름 사이에 도적의 우환이 지금보다 더 심해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때문에 번번이 미치광이와 봉사처럼 망령된 말씀을 아뢰어 행여 만에 하나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산동山東 지방은 상고上古 이래로 복심腹心과 같은 근본의 땅이 되어서 중원中原과 서로 떨어져 있거나 합쳐져 있는 것이 항상 사직社稷(국가國家)의 안위安危에 관계되었습니다.
옛날에 나라가 천하를 겸병할 적에 제일 먼저 삼진三晉을 거두자 나머지 강적들이 서로 이어서 멸망하였고, 나라 고조高祖나라의 진여陳餘를 죽이고 나라의 전횡田橫을 패퇴시키자 항씨項氏가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광무제光武帝 역시 어양漁陽상곡上谷으로부터 돌격기병을 징발해서 천하를 석권하여 겸병하였고, 나라 무제武帝원씨 부자袁氏 父子를 패망시켜 죽이고 기주冀州를 수복한 뒤에야 사방에서 감히 대적하지 못했습니다.
남조南朝나라 무제武帝가 남보다 뛰어난 영웅의 자질로 무력을 쓴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중원中原을 겸병하지 못했던 것은 하북河北 지방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며, 나라 문제文帝가 좀도둑질이나 하는 용렬한 지혜로 지위를 도둑질한 지 수년 만에 해내海內를 통일한 것은 하북河北 지방을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두목杜牧이 논하기를 “산동山東 지방을 왕자王者가 얻으면 왕자王者가 되고, 패자霸者가 얻으면 패자霸者가 되고, 교활한 도적이 얻으면 천하를 어지럽힌다.”라고 한 것입니다.
나라는 천보天寶 연간 이후로 간신들이 산동山東 지방에서 참람하게 버티고 있어서 11대에 걸쳐 천하의 힘을 다 기울였으나 끝내 이들을 장악하지 못해서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근래에 하덕륜賀德倫 지방을 가지고 후당後唐에 항복하자 나라가 망하였으며, 나라 고조高祖업도鄴都로부터 경사京師(개봉開封)로 들어오자 나라가 망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관찰하건대 천하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를 결정하는 대세가 하북河北 지방에 달려 있음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북방(하북河北)의 백성들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으며, 하늘이 재앙으로 견책하고 경고하는 것이 또한 어느 지방보다도 심한데, 5, 6년 사이에 큰 재이災異를 막은 적이 있지 못합니다.
경동京東에 이르러는 비록 무사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마땅히 항상 이 지방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하고 부강하게 하여야 위급할 때에 하북河北으로 필요한 물자를 수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그릇에 물건이 고갈되는 것은 큰 그릇의 수치이며,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공사公私의 재정이 궁핍하여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이리저리 떠돌고 기근에 허덕이고 있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내놓은 방책은 겨우 상평창常平倉의 곡식을 방매放賣하고 곡식을 비축하고 있는 집안들에게 곡식을 방출하여 팔도록 권유하는 데에 지나지 않으며, 도적들이 횡행하는데도 의논하는 자들이 내놓은 방책은 겨우 도적들을 고발하면 상을 주는 길을 더 많이 열어놓고 도적들을 체포하는 법을 거듭 엄하게 시행하려 하는 데에 지나지 않으니, 이는 모두 그 유익함을 볼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상평창常平倉의 곡식은 여러 번의 진휼賑恤을 거쳐서 남아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으며, 백성들은 곳곳마다 굶주리고 추위에 시달리고 있으니, 백성들은 한 되나 한 홉의 곡식을 얻을 뿐이지만 관청에서는 언덕과 산처럼 많은 곡식을 허비하게 되며, 또 곡식을 비축하고 있던 집안들도 대부분 모두 궁핍해졌으니, 가난한 자들은 이익을 얻지 못하고 부자들은 먼저 재앙을 당합니다.
예전에 계강자季康子가 도둑을 걱정해서 공자孔子에게 여쭙자, 공자孔子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일 그대가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비록 백성들에게 상을 주면서 도둑질을 하라 해도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윗사람이 이익을 다 차지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니, 만일 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다면 또한 어찌 괴롭게 도둑이 되겠습니까?
그 사이에 흉악하고 잔인한 무리로 화란禍亂을 일으키기 좋아하고 마음을 고치지 않는 자들은 모름지기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형벌을 준엄하게 시행해서 한 사람을 처벌하여 백 사람을 경계해야 하겠지만, 지금 중민中民 이하는 거개가 다 식량이 없는 실정입니다.
법을 범하여 도적질을 하면 법으로 죽고, 법이 두려워 도적질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으니, 기한饑寒기시棄市는 똑같이 죽는 것이나 도적이 되어 조금 늦게 죽는 것과 굶주림을 참다가 죽는 것은 에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따라 도적질하는 것은 정상적인 이치이니, 비록 날마다 수많은 도적들을 죽인다 하더라도 형편상 백성들이 도적이 되는 것은 반드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로 폐하께서는 지극히 밝으시고 지극히 성스럽고 지극히 인자하시니, 이 무엇이 더 많은가를 비교하고 이 무엇이 더 중한가를 저울질하소서.
그리하여 특별히 재리財利를 다소 덜어내셔서 백성들이 의식衣食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을 한번 열어주시어 골수에 사무치는 은혜가 모두 두루 미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야 신상필벌信賞必罰을 행하여 위엄으로써 은혜를 이겨서 요행으로 형벌을 폐지하지 않고 재상災傷으로 법을 굽히지 않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도 인심이 고쳐지지 않고 도적이 줄어들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삼가 그 일을 조목조목 열거해서 하나하나 아래와 같이 아룁니다.
1. 이 맡고 있는 밀주密州는 금년 가을부터 날씨가 가물어서 보리를 심을 수 없다가 곧바로 10월 13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몇 치의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그러나 땅이 얼어서 곡식을 심기가 어렵고 비록 심었더라도 싹이 나지 않아서 평년에 비하면 10에 겨우 2, 3만을 심었습니다.
엎드려 들으니, 하북河北경동京東도 모두 이와 같다고 합니다.
평상시에 재상災傷을 조사하여 세금을 면제해줄 적에는 법에 따라 반드시 곡식의 뿌리와 싹을 조사하여 세금을 감면하는 비율을 정하였는데, 지금은 대맥大麥소맥小麥을 애당초 심지를 못하여 조사할 만한 곡식의 뿌리와 싹이 없으니, 관리들이 법대로 시행한다면 곧바로 세금을 면제해줄 길이 없습니다.
만약 여름에 내는 세금을 일례一例로 방면해주지 않는다면 인호人戶들이 반드시 도망하기에 이를 것입니다.
평상시 도망할 적에는 그래도 곡식이 잘 익은 곳으로 갈 수가 있었지만, 지금 수천 리 지역에 보리가 없으니 간들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다만 양민들이 모두 도적떼가 될까 두렵습니다.
또 위로 하늘에는 비가 없고 아래로 땅에는 보리가 없는 것을 눈이 있는 자가 함께 보고 귀가 있는 자가 함께 듣고 있습니다.
결코 조정을 속일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백성들이 굶어죽는 것을 보기만 하고 세금을 면제해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하북河北경동京東에는 마다 관료 한 사람을 선임하여 자세히 살펴서 세금을 면제해주시고, 다시는 조사하지 않게 하소서.
만약 이렇게 시행하려 하지 않으신다면, 바라건대 하세夏稅로 내야 될 斛㪷는 이전 5년 동안의 연평균 수치를 취하여 결정한 다음, 3등 이상의 인호人戶들로 하여금 형편대로 현금이나 혹은 정색正色(곡식)으로 바치게 하고, 4등 이하의 인호人戶는 우선 의각倚閣을 행하소서.
지금 보리밭이 텅 비어 있는데, 만약 봄비가 제때에 고르게 내린다면 가을에 수확할 곡식을 널리 파종할 수가 있으니, 가을에 곡식이 익기를 기다려서 가을곡식으로 세금을 내면서 연기해준 하세夏稅도 함께 납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보리를 심은 경우에는 확실하게 재상災傷이 있으면 법에 따라 조사해서 세금을 면제해주고, 보리를 거둘 수 없는 곳은 관리와 군사들로 하여금 체납을 접수하게 하고 우선 백미를 지급하거나 혹은 현금을 지급하게 하소서.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살 곳을 크게 잃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1. 하북河北경동京東은 예로부터 관청에서 소금을 전매專賣하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이에 의지해 생활해왔습니다.
그런데 근일에 신료들이 글을 올려서 곧바로 사사로운 판매를 금하고 나라에서 전매하고자 하였는데, 조정에서 체찰體察하여 그 말을 시행하지 않으시니, 양로兩路(하북河北경동京東)의 관리와 백성들이 서로 경하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살펴보니, 근년에 염세鹽稅가 날로 증가하여 원래 33만 2천여 이었던 양로兩路의 세액이 희령熙寧 6년(1073)에는 49만 9천여 으로 증가하였고, 7년에도 또한 43만 5천여 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형법이 날로 준엄해져서 염세鹽稅 때문에 고발하고 체포하는 것이 날로 더욱 많아지는 것이 크게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더욱 소금을 판매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본래 ‘이 양로兩路는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요, 또 바닷물을 달여서 소금을 굽는 이익은 하늘이 이로써 백성들을 길러주려고 하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 이익을 차마 다 취하지 않아 홀아비와 과부들을 구제하고 은혜를 끼쳐서 모르는 사이에 도적들이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외롭고 가난하여 생업生業이 없는 자들이 오직 소금을 파는 일에만 힘썼으니, 이 때문에 5, 6년 전에는 도적이 매우 적었습니다.
이때에는 도적을 고발하여 체포할 경우 고발한 자에게 주는 상금 때문에 일찍이 나라의 재정이 축난 적이 없었고, 오직 범인에게 독촉하여 벌금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부역하는 사람이 자신이 부역할 날수를 헤아려서 돈을 냈었는데, 지금 염세鹽稅를 부과하는 규모가 매우 커져서 부정을 고발하는 것이 늘어서 있는 삼대[]처럼 많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소금을 팔 적에 본전本錢이 한두 에 지나지 않아서 세금을 도둑질하면 이익이 많이 남고 세금을 제대로 바치면 이익이 적으며, 소금 장사를 그만두고 농부가 되고자 하면 또 흉년을 만나니, 만약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오직 굶주림을 참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5, 6년 이래로 부과되는 세금이 날로 증가하고 도적들이 날로 많아진 것입니다.
밀주密州의 지난 한 해 염세鹽稅를 살펴보니, 본래 세액에 비하여 2만 이 늘어났고 도적을 잡는 상금賞金으로 지출한 것이 1만 1천여 이었으나 나머지 잡지 못한 도적이 아직도 많으니, 이것을 가지고 비교해보면 이해와 득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양로兩路에 특별히 조칙을 내리셔서, 소금을 파는 소상인들에게 3백 근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하는 모두 세금을 거두는 것을 임시로 면제해주시고, 뒤이어 관청에서 인쇄한 인본印本공두관자空頭關子조호竈戶장인대객長引大客에게 주어 저들로 하여금 일일이 사용한 비용을 장부에 기록하게 하고, 날마다 여기에 판매한 날짜와 성명姓名과 수량과 소상인의 이름을 써넣되, 10일을 기한으로 다시 사용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 만일 감히 남의 이름을 빌려 이것을 모사摹寫하여 가지고 다니면서 소금의 매상을 분산시켜 줄이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고발하는 것을 허락하고 상벌을 무겁게 세우며, 앞으로 가을곡식이 익을 때를 기다려서 면제한 세금을 예전처럼 다시 내도록 하되, 아울러 처음부터 칙방勅牓을 내려서 이것이 성상聖上의 뜻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소재지마다 인쇄해서 향촌의 이곳저곳에 을 붙이게 하소서.
사람은 목석이 아니니, 이렇게 하시면 어찌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은 한 번 마시고 한 번 먹을 때마다 모두 성상聖上의 은혜를 칭송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예전의 가난하고 천한 백성들과 근일에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무리에 이르러도, 굳이 내몰지 않고도 한결같이 소금 파는 데로 돌아가서 분주하게 앞다투어 소금을 팔 것이니, 어느 겨를에 도적이 되겠습니까?
인정人情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 반드시 편안하게 옷 입고 밥 먹는 길을 버리고 법을 범하여 위태롭고 망할 자리로 달려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의논하는 자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지금 용도用度가 부족한데, 만약 이 법을 시행하면 염세鹽稅가 크게 줄어서 반드시 일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할 지경에 이를 것이다.”라고 할 것이나, 은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무릇 소상인들은 자본이 적고 재력이 미약하여 2, 3일의 노정路程으로 장사를 다니는데 불과합니다.
만약 2, 3일의 노정路程을 넘어서는 경우에는 반드시 큰 염상鹽商의 판매를 빌려야 하고, 3백 근 이하를 파는 소상인이 다니며 운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세금이 크게 손실될 이유가 없습니다.
또 평상시에 큰 염상鹽商들이 괴로워하는 것은 소금이 늦게 팔리고 사는 사람이 없는 것이요, 가난한 백성들의 병통은 거주하는 곳이 궁벽하고 멀어서 소금을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소상인들이 세금을 내지 않게 되면 사람이 사는 곳마다 다투어 가서 나누어 소금을 살 것이요, 큰 염상鹽商들은 소금이 적체되지 않으면 수레로 멀리까지 다니면서 소금을 팔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걷히는 세금이 반드시 많아질 것이요, 궁벽하고 멀리 떨어진 향촌에서도 소금을 먹지 않는 곳이 없어서 판매량 또한 증가할 것이니, 줄어드는 것과 늘어나는 것이 서로 보충되어 세금이 크게 줄어들 리가 절대로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세금이 줄어든다 하더라도 다만 백성들에게서 거두었던 원래의 세액稅額에 불과할 것이니, 당시의 관사官司에서 어찌 재용財用이 부족할 일이 있겠습니까?
가령 조정에서 10만 의 돈을 덜어내어 이 양로兩路인민人民들을 사서 도적이 되지 않게 한다면 이것은 얻은 것이 많은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서 이 양로兩路기근饑饉을 구제하기 위하여 특별히 1, 2십만 의 현금을 내어서 인호人戶들에게 흩어 준다면, 사람마다 1을 얻을 경우 다만 20만 명에 그칠 뿐입니다.
게다가 1의 현금으로는 또한 사람의 생명을 구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특별히 3백 근 이하를 파는 소상인의 염세鹽稅를 반년 동안만 면제해준다면 양로兩路의 백성들이 사람마다 혜택을 입어서 가난한 백성들은 의식衣食을 장만할 길이 있게 되고 부유한 백성들은 도적에게 침탈당할 우려가 없을 것이니, 그 이익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가난한 백성들이 살아갈 길이 없어서 모두 도적떼가 된다면 조정의 우환은 10만 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또 더구나 도적을 잡는 데 지출되는 상금賞金염세鹽稅에서 줄어든 것보다 반드시 적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드린 ‘이 무엇이 더 많은가를 비교하고, 이 무엇이 더 중한가를 저울질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1. 여러 곳의 도적을 살펴보니, 태반은 조사를 받고 감형減刑을 받았거나 재상災傷을 당한 지방에서 사형死刑을 사면받은 사람들로, 이들이 옛날 살던 곳으로 돌아와서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하여 이것이 가장 심한 폐해가 되고 있습니다.
도적들은 자신을 죽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서 가볍게 법을 범하고, 인호人戶들은 그들이 다시 올 것을 우려하여 감히 고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도적들이 공공연히 횡행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을 자세히 조사해보니, 이들은 모두 말이 궁하고 논리가 어긋나 형편상 반드시 죄를 면할 수가 없는 자들로, 본래 개과천선하고자 하는 뜻이 없는데, 무슨 민망히 여길 일이 있어서 홀로 이들의 죄를 가볍게 하여 이들로 하여금 다시 죄를 범하게 하고, 같은 무리들 가운데 홀로 죽음을 면치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재상災傷으로 도적이 된 경우는 비록 칙령을 내리지 않았으나 칙령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로 실행되고 있어서 도적과 소민小民들이 이를 모르는 자가 없는데, 다만 변주變主를 상해하지 않았으면 죽음을 면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변주變主를 상해하지 않은 자들은 정리상情理上 우연히 변주變主를 상해한 자들보다 죄가 가볍지 않습니다.
혹 무리를 많이 모으고 혹 병기를 많이 마련하며 혹 복식을 남과 다르게 표시하고 혹 변주變主를 인질로 삼아 겁박하며 혹 평민들을 사로잡아 몰아치며 혹 가난한 백성들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의 이목耳目(첩자)으로 만들며 혹 길가나 노점에다가 나쁜 말을 써붙여서 관청과 백성들에게 공갈을 치니, 이와 같은 부류들은 비록 우연히 사람을 상해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정리상情理上 죄가 지극히 무거워서, 양식이 없는 사람이 구차하게 하찮은 양식을 도둑질한 죄에 그칠 뿐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지금 이후로는 도적 중에 도적질한 증거가 분명하지 않고 다만 고문拷問을 거쳐서 비로소 승복한 자들에 있어서는 모두 신문하지 말고 감형해주며, 또 재상災傷이 있는 지역은 장리長吏(수령守令)들에게 맡겨 정리情理의 경중을 헤아리게 해서 그중에 정리情理가 무거운 자는 법대로 엄벌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여길 것은 흉포한 백성들에게는 조금이나마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있게 하고, 양민들은 용감하게 도적을 고발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앞에서 말씀드린 “백성들이 의식衣食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을 한번 열어주시어 골수에 사무치는 은혜가 모두 두루 미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야 신상필벌信賞必罰을 행하여 위엄으로써 은혜를 이겨서 요행으로 형벌을 폐지하지 않고 재상災傷으로 법을 굽히지 않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상은 신이 삼가 위와 같이 갖추었습니다.
예로부터 법을 확립하고 형벌을 제정할 적에 모두 도적을 없애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으니, 도둑질을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강도질을 하게 되고 강도질을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싸우고 남을 공격함에 이르러, 혹은 호걸들의 기반이 되어 점차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반란을 이루게 됩니다.
더구나 경동京東빈부貧富하북河北의 편안함과 근심스러움에 관계되고 하북河北치란治亂은 천하의 안위에 관계되니, 이것은 식견 있는 자가 다 아는 일이요, 혼자만의 말이 아닙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 일이 지극히 중요하고, 이 일을 위해 버리는 작은 이익이 지극히 가벼움을 깊이 살피셔서 스러운 마음으로 결단하시어 이 계책을 결행하소서.
신이 듣건대 천성天聖 연간에 채제蔡齊밀주密州를 맡고 있었는데, 이때 동쪽 지방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채제蔡齊가 민간인의 소금판매 금지를 해제하여 줄 것을 청원하자 선제先帝께서 이것을 따르시니, 한 지방 사람들이 기근과 가뭄이 든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은 어리석고 또 미천하여 비록 감히 채제蔡齊와 같기를 바랄 수는 없으나, 폐하께서는 임금과 임금보다도 더 스럽고 현명하시니, 어찌 이 작은 일을 실행하지 못해서 선왕조先王朝에 부끄러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은 이 때문에 직책을 뛰어넘어 말씀을 올려서 감히 스스로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스럽고 인자하신 폐하께서는 의 구구한 뜻을 살피시어, 경망하고 주제넘은 의 말에 대한 처벌을 용서해주소서.
은 황송하여 죄를 내리시기를 기다리는 지극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역주
역주1 論河北京東盜賊狀 : 本集에는 이 편 머리에 ‘熙寧七年十一月日 太常博士 直史館 權知密州軍州事 蘇軾狀奏’라는 26字가 있다. 그러나 蘇軾이 이해(1074) 5월 知密州事의 命을 받고 11월 3일에 임지에 도착하였는데,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이 글을 쓰기는 어려웠을 듯하다. 王文浩의 《總案》에는 ‘이해 12월에 쓰여졌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이치에 맞을 듯하다. 河北과 京東은 宋나라 때 路의 이름인데, 이 두 路는 때로는 합쳐져 河北․京東의 두 路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나뉘어 河北東․河北西와 京東東․京東西의 네 路가 되기도 하였다. 太常은 禮部의 官署인 太常寺로 宗廟禮儀를 관장하였으며, 博士는 太常寺의 屬官으로 古今의 禮를 관장하였다. 權知는 임시로 직무를 담당하는 것을 말하는데 宋代에는 외직으로 내보내 州를 맡기고는 權知軍州事라고 칭하였다.
역주2 秦幷天下……相繼滅亡 : 三晉은 韓, 魏, 趙 세 나라를 가리킨다. 戰國時代에 晉나라의 대부인 魏斯, 趙籍, 韓虔 세 사람이 晉나라를 삼등분하여 차지하고 자신의 성씨를 따라 나라 이름을 정하였으므로 三晉이라 칭하였다. 秦나라는 B.C. 229년에 韓나라를, B.C. 225년에 魏나라를, B.C. 222년에 趙나라를 점령하였으며, 燕나라, 楚나라, 齊나라를 차례로 평정하여 통일천하를 이룩하였다.
역주3 漢高祖殺陳餘……則項氏不支 : 陳餘는 趙王 趙歇의 장군으로 漢나라 韓信과 張耳의 공격을 받고 패망하였으며, 田橫은 齊王 田榮의 아우로 田榮이 項羽에게 죽은 다음 잠시 왕위에 올랐으나 高祖(劉邦)가 천하를 통일하고 압박을 가하자 결국 자살하였다. 본문의 田橫은 田榮의 오기인 듯하다. 項氏는 項羽를 가리킨다. 趙나라는 바로 河北 지방이고 齊나라는 바로 山東 지방이다.
역주4 光武亦自漁陽上谷……席卷以幷天下 : 漁陽과 上谷은 河北의 고을들인데, 王郞이 劉氏의 후손이라 칭하고 趙 지방을 점령하자, 光武帝 劉秀는 漁陽과 上谷의 병력을 동원하여 王郞을 토벌하고 결국 천하를 점령하였다.
역주5 魏武帝破殺袁氏父子……四方莫敢敵 : 魏나라 武帝는 後漢 말기의 曹操를 가리키는데 曹操는 일찍이 魏王에 봉해졌으며, 아들 曹丕가 황제에 오르자 武帝라 시호하였다. 袁氏 부자는 袁紹와 그의 아들 袁尙과 袁譚을 가리킨다. 曹操는 官渡에서 袁紹를 격파하고, 袁紹의 두 아들이 반목하여 싸우는 틈을 타서 이들을 토벌하고 河北 지방을 점령한 다음, 呂布와 馬超, 張魯 등을 차례로 평정하여 후일 魏, 蜀, 吳 가운데 가장 강대한 나라를 보유하게 되었다. 冀州는 바로 河北 지방이다.
역주6 杜牧之論 : 牧之는 杜牧의 字이며, 論은 그가 지은 〈罪言〉을 이른다. 〈罪言〉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宋나라 武帝인 劉裕는 영웅이라고 이름나 蜀과 關中 지방을 점령하고 河南 지역의 10분의 8을 차지하였으나, 단 한 번도 黃河를 건너 북쪽 오랑캐 지역을 엿보지 못하였는데, 隋나라의 文帝는 北周의 宇文氏가 점령하였던 山東 지방을 점령하여 세력을 떨쳐 마침내 南朝의 陳을 멸망시킴으로써 5백 년간 南北朝로 나뉘었던 중국이 통일되었다. 隋나라 文帝는 宋나라 武帝의 적수가 아닌데, 宋나라 武帝는 山東 지방을 차지하지 못하였고 隋나라 文帝는 山東 지방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隋나라는 황제국이 되고 宋나라는 단지 霸者가 되었다.”
역주7 更(경)十一世 : 唐나라는 安祿山과 史思明의 반란 이후 肅宗, 代宗, 德宗, 順宗, 憲宗, 穆宗, 敬宗, 文宗, 武宗, 宣宗, 懿宗, 僖宗, 昭宗, 哀帝 등 모두 14대 만에 멸망하였는데, 여기에서 蘇軾이 11세라고 한 것은 잘못으로 보인다.
역주8 賀德倫……而梁亡 : 賀德倫은 원래 後梁의 天雄軍節度使였는데, 軍將 張彦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를 협박하여 함께 後唐의 莊宗 李存勖에게 항복하자 後梁이 마침내 망하였다. 後梁의 末帝는 貞明 元年(915)에 魏州의 楊師厚가 죽자, 魏州의 병사가 평소 교만하여 통제하기 어렵다 하여 魏州를 相州, 澶州, 衛州의 세 州로 나눈 다음 昭德軍을 만들어 張筠을 節度使로 임명하고, 魏州, 博州, 貝州를 天雄軍으로 만들어 賀德倫을 節度使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들 지역이 반란을 일으키자, 後梁은 하루아침에 멸망하고 말았다. 《五代史 賀德倫傳》
역주9 周高祖……而漢亡 : 周 高祖는 後周의 太祖인 郭威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郭威는 後漢 乾祐 3년(950) 鄴都留守로 있었는데, 後漢의 隱帝가 史弘肇를 살해한 다음 자신도 살해하라는 밀조를 내린 것을 알고는 군대를 일으켜 황하를 건너가서 隱帝를 시해하고 황제에 올라 周나라를 세웠다. 《五代史 周太祖本紀》
역주10 缾竭則罍恥 : 缾과 罍는 모두 술그릇인데 缾은 작고 罍는 크다. 《詩經》 〈小雅 蓼莪〉에 “缾에 담겨진 것이 모두 고갈되니, 이는 罍의 수치이다.[缾之罄矣 維罍之恥]” 하였다. 본래 작은 缾은 큰 罍에게 의뢰하는데, 이제 작은 缾이 고갈되었다면 이는 큰 罍가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 것이 되므로 수치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바로 지방의 재정이 궁핍되면 국가의 수치임을 비유한 것이다.
역주11 季康子患盜……不竊 : 季康子는 季孫氏로 이름은 肥이며 康子는 시호이다. 이 내용은 《論語》 〈顔淵〉에 보인다.
역주12 棄市 : 사형에 처해 시신을 시장에 버리는 것을 말한다.
역주13 苟(非)陛下至明至聖至仁至慈……權禍福之孰重 : 非字가 있어 뜻이 연결되지 않으므로 非字를 빼고 해석하였다. 혹 較得喪 위에 ‘誰能’의 두 글자가 빠진 것으로 보고 ‘至慈시면……權禍福之孰重이리오’로 현토하여 ‘폐하께서 이러한 분이 아니시면……누가 禍와 福이 무엇이 더 중한가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역주14 檢放災傷 : 災害의 상태를 조사하여 賑恤을 베풂을 이른다.
역주15 體量放稅 : 體量은 災害의 상태를 조사하는 것이고, 放稅는 세금을 면제하거나 탕감함을 이른다.
역주16 夏稅斛㪷 : 斛은 10斗이고, 㪷는 斗와 같다. 夏稅는 여름철 곡식을 수확한 뒤에 내는 세금으로 가을에 내는 秋稅와 상대된다.
역주17 三等已上人戶 : 宋나라는 民家를 5등으로 나누었는데, 3등 이상은 부유한 家戶로서 衙前役의 差役 등 여러 의무가 부과되었다.
역주18 倚閣 : 세금의 납부를 잠시 보류하는 것을 말한다.
역주19 祖額 : 원래의 액수를 이른다. 底本에 ‘租額’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역주20 此兩路 根本之地 : 兩路는 河北路와 京東路를 이른 것으로, 두 路가 국가의 주요한 지역임을 말한 것이다.
역주21 省錢 : 尙書省의 돈으로, 곧 국가의 재정을 이른다.
역주22 役人量出 : 差役할 사람이 자신이 담당해야 할 부역 일수 등을 헤아려 돈을 냄을 이른다.
역주23 販鹽小客 : 소금을 판매하는 소상인을 이른다.
역주24 空頭關子 : 윗부분을 비워둔 납세문서이다.
역주25 竈戶及長引大客 : 竈戶는 소금을 제조하는 업자로 宋나라 제도에 소금을 파는 지역을 亭場이라 하고, 그 지역의 백성을 亭戶 또는 竈戶라 하였다. 長引大客은 장거리까지 소금을 운반하여 파는 대상인을 말한다.
역주26 上曆破使 : 破使는 비용을 이르며, 上曆은 내용을 자세히 기록함을 이른다.
역주27 爲人影帶 : 남의 이름을 빌려 이를 모사하여 가지고 다니는 것을 이른 것으로 보인다.
역주28 元降勅牓 : 원래 황제가 칙령을 내려 공포한 榜文을 이른다.
역주29 切詳按問自言 : 또다시 자세히 심문하여 그들이 스스로 말한 것을 살펴봄을 이른다.
역주30 變主 : 강도 등에게 재변을 당한 사람(피해자)을 이른다.
역주31 勝廣之漸 : 勝廣은 陳勝과 吳廣으로 이들은 본래 秦나라 戍卒들이었는데, 장맛비로 인해 도착시기를 놓쳐 사형을 받게 될 처지에 놓이자 봉기하여 秦나라의 虐政에 맨 먼저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들이 봉기하자 이곳저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秦나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끝내 멸망하였다.
역주32 天聖 : 宋나라 仁宗의 연호(1023~1031)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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