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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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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論用兵之勝而敗之處 反覆痛快하니 長公 蓋亦鑑於當時熙河之役故云이라
楚晨壓晉師而陣이어늘 諸將請從之한대 范文子獨不欲戰이러니 晉卒敗楚하야 하고 하니라
蘇子曰
料敵勢彊弱하야 而知(率)[帥]之勝負 此將率之能也 不求一時之功하고 愛君以德하야 而全其宗嗣니라
鄢陵之役 范文子獨不欲戰이러니 晉卒敗楚하니 范文子疑若懦而無謀者矣
이나 不及一年 하야 晉國大亂 鄢陵之功 實使之然也니라
有非常之人然後 有非常之功이니 非常之功 聖人所甚懼也
明月之珠 夜光之璧 無因而至前이면 匹夫猶或按劒이어든 而況非常之功乎
聖人 必自反하야 曰 此天之所以厚於我乎
抑天之禍予也아하시니
雖有大功이나 而不忘戒懼하나니라
中常之主 銳於立事하고 忽於天戒하야 日尋干戈하야 而殘民以逞이라
天欲全之인댄 則必折其萌芽하고 挫其鋒芒하야 使知其所悔하며
天欲亡之인댄 則必先之以美利하고 誘之以得志하야
使之有功以驕士하고 玩於寇讐而侮其民人하야
至於亡國殺身而不悟者 天絶之也니라
嗚呼
小民之家 一朝而獲千金이면 非有大福이요 必有大咎니라
何則
彼之所獲者 終日勤勞호되 不過數金耳 所得者微 所用狹하나니
無故而得千金이면 豈不驕其志하야 喪其所守哉
由是言之하면 天下者 得之艱難이면 則失之不易하고 得之旣易 則失之亦然이니라
終其身토록 不事遠略하야 民亦不勞하며 繼之文景不言兵하니라
이나 天下始定 外攘四夷하야 伐高昌하고 破突厥하야 終其身토록 師旅不解하야 幾至於亂者 以其親見取天下之易也일새라
兵之勝敗 足以爲國之彊弱이요 而國之彊弱 足以爲治亂之兆하니 蓋有勝而亡하고 有敗而興者矣
晉果滅虢하니 此范文子所以不得不諫이어늘
諫而不納하야 而又有功하니 敢逃其死哉
彼其不死 則厲公逞志하야 必先圖於范氏하리니
趙盾 雖免於死 而不免於惡名하니 則范文子之智 過于趙宣子 遠矣니라


05. 범문자范文子에 대한
군대를 운용하여 승리하고도 패한 경우를 논한 부분이 반복하여 통쾌하니, 장공長公은 아마도 당시 희하熙河의 싸움을 거울삼았을 것이다.
언릉鄢陵의 싸움에서 나라가 새벽에 나라 군대를 압박하여 을 치자, 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따라 싸울 것을 청하였으나, 범문자范文子(사섭士燮)는 홀로 싸우려고 하지 않았는데, 나라가 끝내 나라를 패퇴시켜 초자楚子(초 공왕楚 共王)가 눈을 잃었고 나라 장수 자반子反이 목숨을 끊었다.
소자蘇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적군의 강약을 헤아려서 군대의 승부를 아는 것은 장수의 재능이고, 한때의 성공을 바라지 않고 군주를 덕으로써 사랑하여 종사宗嗣를 온전히 하는 것은 사직社稷의 신하이다.
언릉鄢陵의 싸움에서 범문자范文子가 홀로 싸우려고 하지 않았는데, 나라가 끝내 나라를 패퇴시켰으니, 범문자范文子는 나약하고 계책이 없는 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채 1년이 못 되어서 세 각씨卻氏주벌誅罰을 당하고 여공厲公시해弑害를 당하였으며, 서동胥童이 죽고 난서欒書중항언中行偃이 거의 화를 면치 못하여 나라가 크게 혼란하였으니, 이것은 언릉鄢陵전공戰功이 실로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뒤에야 비상한 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니, 비상한 공은 성인聖人이 매우 두려워하는 바이다.
명월明月의 진주와 야광夜光의 구슬이 까닭 없이 앞에 이르면 필부匹夫도 오히려 욕심을 내어 을 어루만지며 상대방을 노려보는데, 하물며 비상非常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반드시 스스로 돌이켜 ‘이것은 하늘이 나를 좋게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하늘이 나에게 를 내리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한다.
그러므로 비록 큰 공이 있더라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 정도의 일반 군주들은 사공事功을 세우는 데 예민하고 하늘의 경계를 소홀히 해서 날마다 창과 방패를 가지고 전쟁을 하여 백성들을 해치면서 자기 욕심을 부린다.
하늘이 어떤 사람을 온전히 해주려고 하면 반드시 돋아나는 나쁜 싹을 잘라내고 그 예봉銳鋒을 꺾어서 그로 하여금 후회할 바를 알게 한다.
그리고 하늘이 어떤 사람을 망치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아름다운 이익을 주고 뜻하는 바를 얻도록 유인한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전공을 세워 선비들을 오만하게 대하며 적과 원수를 소홀하게 여기고 백성들을 업신여기게 한다.
그리하여 나라를 망치고 몸이 죽음에 이르면서도 깨닫지 못하게 하니, 이는 하늘이 그를 완전히 끊어 버리는 것이다.
아!
가난한 백성의 집안이 하루아침에 천금千金을 얻는다면 이것은 큰 복을 받은 것이 아니고 반드시 큰 재앙이 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저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루 종일 수고하여도 몇 근의 에 불과할 뿐이니, 이들은 소득이 적기 때문에 쓰는 것도 적기 마련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까닭 없이 천금千金을 얻는다면 어찌 그 마음이 교만해져 그동안 지켜오던 절도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천하를 어렵게 얻으면 천하를 쉽게 잃지 않고, 천하를 쉽게 얻으면 또한 쉽게 잃는 것이다.
한 고황제漢 高皇帝(고조高祖)는 천하天下를 얻을 적에 직접 화살과 포석砲石을 무릅쓰고 나라․나라와 다투어 이곳저곳에서 5년 동안 싸웠으나 일찍이 뜻을 얻지 못하였고, 천하를 평정하고 나서는 또다시 평성平城에서 흉노匈奴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멀리 경략함을 일삼지 아니하여 백성들 또한 수고롭지 않았으며, 뒤이어 문제文帝경제景帝는 아예 병사兵事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 태종唐 太宗진양晉陽에서 군대를 일으켜 두건덕竇建德을 격파하고 왕세충王世充을 사로잡아 지나가는 곳마다 적들을 항복시켜, 승리하는 것이 대나무를 쪼개는 것보다도 쉬웠다.
그러나 천하天下가 처음 안정되자 밖으로 사이四夷들을 물리쳐 고창국高昌國을 정벌하고 돌궐突厥을 격파해서 종신토록 군대를 해산하지 아니하여 거의 혼란에 이르렀으니, 이는 천하를 점령하는 것이 쉬움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전쟁의 승패는 나라의 강약이 될 수 없고, 나라의 강약은 충분히 치란治亂의 조짐이 될 수 있는 것이니, 승리하고서 멸망한 자도 있고 패전하고서 다시 흥왕한 자도 있는 것이다.
월왕 구천越王 句踐은 궁지에 몰려〉 회계산會稽山에 깃들여 있음으로 인해 이로써 패자霸者가 되었고, 오왕 부차吳王 夫差황지黃池의 회맹에서 소원을 얻음으로 인해 이로써 패망하였으니, 〈이는 승리와 패전이〉 이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괵공虢公서융西戎상전桑田에서 패퇴시키자, 나라 대부인 복언卜偃괵공虢公이 반드시 패망할 것을 알고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그의 거울(귀감)을 빼앗아 그의 교만한 을 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라가 과연 나라를 멸망시켰으니, 이것이 범문자范文子가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그런데 범문자范文子간언諫言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또다시 싸워 공을 세웠으니, 범문자范文子가 감히 그 죽음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범문자范文子가 만일 죽지 않았더라면 여공厲公이 멋대로 자기 생각을 펴서 반드시 먼저 범씨范氏를 도모했을 것이니, 조돈趙盾의 일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
조돈趙盾은 비록 죽음을 면했으나 군주를 시해했다는 악명을 면치 못했으니, 그렇다면 범문자范文子의 지혜가 조돈趙盾의 지혜보다 크게 뛰어난 것이다.


역주
역주1 范文子論 : 이 글 또한 〈進論〉 50편 중의 하나로 정확한 저작 연도는 미상이다. 范文子는 춘추시대 晉나라의 대부로 文子는 시호이고 이름은 士燮이다. 本集에는 이 글의 제목이 〈士燮論〉으로 되어 있다.
역주2 鄢陵之役 : 鄢陵은 지금의 河南省 鄢陵縣으로 춘추시대에는 鄭나라의 영토였다. 魯 成公 16년(B.C. 576)에 晉 厲公이 鄭나라를 침공하자, 楚 共王이 동맹국인 鄭나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서 두 나라가 鄢陵에서 싸웠다. 이를 鄢陵의 役이라고 하는데, 이 전쟁은 晉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이때 晉나라의 대부 士燮은 中軍의 佐將으로 참전하였는데,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외환이 없어져 내부의 우환이 심해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홀로 싸우지 않고 회군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다른 장수들의 반대로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역주3 楚子傷目 : 楚子는 楚 共王으로 鄢陵의 싸움에서 共王은 눈을 잃는 부상을 당하였다. 당시 楚나라는 왕의 칭호를 참람하게 칭하였으나 《春秋》에는 모두 楚子라고 표기하였는바, 楚나라는 南蠻으로 인식되어 吳나라와 함께 公․侯․伯․子․男의 제후 가운데 가장 낮은 子를 붙인 것이다.
역주4 子反殞命 : 子反은 楚나라 대부로 若敖氏의 후예이다. 城濮의 싸움에서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살한 令尹 子玉의 아들로 鄢陵의 싸움에서 司馬가 되어 중군을 이끌었는데, 패전하자 책임을 지고 또한 자살하였다.
역주5 社稷之臣 : 오직 국가를 위하여 충성하는 신하를 이른다. 옛날 土神을 모시는 社와 穀神을 모시는 稷은 宗廟와 함께 국가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역주6 三郤誅……幾不免於禍 : 三郤은 郤至․郤錡․郤犫의 세 사람을 이른다. 三郤과 欒書와 中行偃은 모두 晉나라의 卿들로 鄢陵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이다.
鄢陵의 싸움이 승리로 끝나자, 范文子는 晉나라가 승리에 자만하여 내환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고 스스로 죽기를 축원하였는데, 1년 뒤인 魯 成公 17년 6월에 죽었다.
晉 厲公은 鄢陵의 승리에 도취되어 이를 기회로 세력이 강한 여러 대부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평소 총애하던 대부 胥童과 長魚矯로 하여금 일을 진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長魚矯는 郤氏의 집을 기습하여 세 郤氏를 죽였으며 胥童은 조정에서 欒書와 中行偃을 겁박하고 있었는데, 長魚矯가 이들도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우유부단한 厲公은 일이 너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여 이들을 풀어주었다.
겨우 화를 면한 欒書와 中行偃은 절치부심한 나머지 이듬해 정월에 마침내 胥童을 죽이고 厲公을 시해한 다음 悼公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春秋左氏傳 成公 17년》
역주7 漢高皇帝之得天下……未嘗得志 : 高皇帝는 漢나라를 일으킨 劉邦으로 廟號는 高祖이다. 劉邦은 秦나라 말기 起兵하여 秦나라를 격퇴하고 漢中王에 봉해졌으나, 천하를 두고 楚나라의 項羽와 대결하여 여러 차례 패전하다가 결국 垓下의 一戰으로 項羽를 무너뜨리고 5년 만에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성하였다.
역주8 平城之圍 : 平城은 지금의 河北省 定襄縣이다. 漢 高祖가 직접 군대를 인솔하고 흉노의 冒頓單于(묵특선우)를 공격했다가, 平城 인근의 白登山에서 흉노의 30만 대군에게 7일 동안이나 포위되어 곤경에 빠졌던 일을 말한다. 이때 陳平이 계책을 내어 單于의 부인 閼氏(연지)에게 후한 뇌물을 바치고 겨우 포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史記 陳丞相世家》
역주9 唐太宗……易於破竹 : 唐 太宗은 이름이 世民으로 唐나라를 개국한 高祖 李淵의 아들이다. 隋 煬帝의 失政이 도를 넘자, 李世民은 隋나라의 멸망을 예측하고 남몰래 인재들을 결집하여 晉陽令 劉文靜과 대사를 모의하고 당시 晉陽宮監으로 있던 아버지 李淵을 설득하여 隋나라에 반기를 들고 唐나라를 건국하였다.
竇建德은 貝州 漳南縣 사람으로 邢州와 越州, 滄州를 기반으로 夏王을 칭하면서 李世民과 세력을 다투고 있었는데, 唐 高祖 武德 4년(621)에 王世充의 거점인 洛陽이 李世民의 군대에게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했다가 虎牢城에서 李世民에게 기습공격을 받아 사로잡혔다. 《新唐書 竇建德傳》
王世充은 본래 서역의 이민족 출신으로 일찍이 隋나라 장군 楊素를 따라 출전하여 공을 세우고 江都通守가 되었다. 洛陽에서 반란을 일으킨 李密의 군대와 교전 중에 煬帝가 宇文化及에게 시해되자 李密을 격파하고 스스로 鄭王에 올랐다. 그러나 李世民의 군대에 포위되어 있던 중 구원하러 오던 竇建德이 패하자 李世民에게 항복하였다. 《新唐書 王世充傳》
역주10 會稽之棲……而夫差以亡 : 會稽는 會稽山으로 지금의 浙江省 紹興縣 동남쪽에 있다. 越王 句踐이 吳王 夫差와 싸워 대패하고는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會稽山으로 들어가 죽음을 각오하고 농성하였는데, 대부 文種의 계책을 따라 吳나라 太宰 伯嚭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였다. 越나라로 돌아온 句踐은 절치부심하여 쓸개를 씹으며 올바른 정사를 펴서 나라의 중흥을 이루어 마침내 吳나라를 멸망시키고 패업을 이룩하였다.
吳王 夫差는 越나라를 제압한 후 기세등등하여 제후들과 패권을 다투었으며, 黃池에서 晉 定公과 여러 제후들을 불러 회맹하여 패업을 이루었다. 이로부터 夫差는 더욱 교만해져서 마침내 越나라에게 패하여 나라는 패망하고 자신은 자살하고 말았다.
역주11 夫虢公敗戎于桑田……晉果滅虢 : 虢은 춘추시대 나라 이름으로 故城이 지금의 陝西省 寶鷄市 虢縣에 있었으며, 桑田은 지명으로 河南省 闅鄕縣에 있었다.
虢公이 桑田에서 戎을 패배시키자, 晉나라 卜偃이 “虢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下陽을 잃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또 전쟁하여 공을 세웠으니, 이는 하늘이 그의 거울을 빼앗아 그의 죄악을 더하게 한 것이다. 그는 반드시 晉나라를 경시하여 백성들을 돌보지 않을 것이니, 5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는데, 과연 虢나라는 3년 만에 晉나라에게 멸망을 당하였다.
卜偃은 晉나라 대부인데, 그의 이 말은 예전에 晉나라가 虢나라를 공격하여 下陽城을 함락시켰는데도, 虢나라가 이 일에서 교훈을 얻어 올바른 정사를 펴지 못하니, 하늘이 그를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여 그의 교만심을 키워주어서 결국 나라를 잃게 만들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2․5년》
역주12 趙盾之事……而不免於惡名 : 趙盾은 晉 靈公 때의 上卿으로 시호는 宣子이다. 惡名은 군주를 시해했다는 나쁜 평판을 이른다.
靈公은 趙盾에 의해 옹립되었는데, 천성이 사치를 좋아하고 포악하여 무도한 짓을 자행하였다. 이에 趙盾이 직간을 하자, 靈公이 趙盾을 미워하여 술자리에 군사를 매복하여 죽이려 하였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趙盾이 국외로 망명하고자 하였는데, 趙盾이 아직 국경을 넘기 전에 그의 一族인 趙穿이 靈公을 시해하였다. 이에 趙盾은 국경을 넘지 않고 돌아와 成公을 맞이하여 군주로 세웠다.
그러자 太史 董狐가 사책에 “趙盾이 그 임금을 죽였다.”라고 써서 조정의 신하들에게 보였다. 趙盾이 이것을 보고 자신이 靈公을 弑害하지 않았음을 항변하자, 董狐가 이르기를 “그대가 正卿으로서 도망을 갔으나 국경을 넘어가지 않았고 돌아와서는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그대가 弑害한 것이 아니라면 누가 했다는 것인가?”라고 꾸짖었다. 이에 趙盾은 “아! 《詩經》에 ‘나의 그리움이여, 스스로 이런 우환을 만들었구나.’라는 말은 나를 두고 한 말이로다.”라고 탄식하였다.
이에 대해 孔子가 말씀하시기를 “董狐는 옛날의 어진 史官이었기에 법에 의거해 곧바로 쓰고 숨기지 않았으며, 趙宣子는 옛날의 어진 大夫이었기에 史官의 書法을 세우기 위해 임금을 弑害했다는 惡名을 받아들였다. 애석하다. 만약 국경을 넘어갔더라면 이런 惡名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宣公 2년》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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