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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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嗚咽然이요 亦情悃洒然하니라
再拜하노이다
孟夏漸熱 恭惟留守太尉執事 台候萬福이닛고
承以元功하고 正位兵府하야 備物典冊하야 首冠三公하시니이다
하니 眞古今之異事 聖朝之光華也니이다
有自京師來하야 轉示所賜書敎一通하니 行草爛然하야 使 復增之重이니이다
始得罪하고 倉皇出獄하니 死生未分이요 六親不相保
이나 私心所念 不暇及他 但顧 平生所存 名義至重하니 不知今日所犯 爲已見絶於聖賢하야 不得復爲君子乎 抑雖有罪不可赦 而猶可改也니이다
伏念五六日하야 至於旬時호되 終莫能決이라
輒復强顔忍恥하야 飾鄙陋之詞하고 道疇昔之眷하야 以卜於左右러니 遽辱還答하야 恩禮有加하시니
豈非察其無他하고 而恕其不及 亦如聖天子所以貸而不殺之意乎잇가
伏讀洒然하니이다
知其不肖之軀 未死之間 猶可以洗濯磨治하야 復入於道德之場하야 니이다
始就逮赴獄할새稍長이러니 徒步相隨하고 其餘守舍 皆婦女幼稚
至宿州 하야 就家取文書한대 州郡望風하야 遣吏發卒하야 圍船搜取하니 老幼幾怖死
旣去 恚罵曰 是好著書러니 書成何所得이완대 而怖我如此오하고 悉取燒之
比事定 重復尋理하니 十亡其七八矣니이다
到黃州하야 無所用心일새 輒復覃思於易論語하야 端居深念하니 若有所得이라
遂因先子之學하야 作易傳九卷하고 又自以意 作論語說五卷하니이다
窮苦多難하야 壽命不可期하니 恐此書一旦復淪沒不傳이라
意欲寫數本하야 留人間이나 念新以文字得罪하니 人必以爲凶衰不祥之書라하야 莫肯收藏이요 又自思호니 非一代偉人이면 不足託以必傳者하니 莫若獻之明公이니이다
而易傳 文多하야 未有力裝寫하고 獨致論語說五卷하오니 公退閒暇 一爲讀之하시면 就使無取라도 亦足見其窮不忘道하야 老而能學也하시리이다
軾在徐州時 見諸郡盜賊爲患하고 而察其人하니 多凶俠不遜이라
因之以饑饉이면 恐其憂不止於竊攘剽殺也일새
輒草具其事上之러니 會有旨移湖州而止하니이다
家所藏書 旣多亡軼(佚)이나 本以爲故紙糊籠篋하야 獨得不燒
籠破見之하니 不覺惘然하야 如夢中事
輒錄其本以獻하노이다
廢逐至此하니 豈敢復言天下事리오마는 但惜此事粗有益於世어늘 旣不復施行이나 猶欲公知之하니 此則宿昔之心 掃除未盡者也니이다
公一讀訖 卽燒之而已니이다
黃州 食物賤하고 風土稍可安하며
旣未得去 去亦無所歸 必老於此하야 拜見無期하리니 臨紙於邑(悒)이니이다
惟冀以時爲國自重하소서


07. 황주黃州에서 문로공文潞公에게 올린 글
오열하는 듯하고 또한 정성스러운 정이 간곡하다.
소식蘇軾재배再拜합니다.
점점 더워지는 맹하孟夏에 공손히 생각하건대 유수 태위집사留守 太尉執事께서는 태후台候가 만복하신지요?
큰 공을 세우시고 병부兵府의 최고 지위에 올라 온갖 물건을 구비해서 책명冊命하여 삼공三公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비록 증손曾孫을 만난 일을 입을 닫고 말하지 않았으나 〈금등金縢〉의 글이 다른 일로 인하여 스스로 드러났으니, 진실로 고금의 기이한 일이요 성조聖朝의 영광입니다.
경사京師에서 인편이 와서 보내주신 서교書敎 한 통을 전달하니, 행초서行草書가 찬란하여 깨진 시루와 해진 빗자루와 같은 저에게 다시 구정九鼎의 중함을 더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처음 죄를 얻고 창황히 감옥을 나오니, 사생死生을 구분하지 못하고 육친六親들이 서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사로운 마음에 염려하는 바는 딴 일에 미칠 겨를이 없고, 오직 돌아보건대 평생 동안 보존하여 지극히 소중하게 여긴 것이 명분과 의리인데, 오늘날 범한 죄로 이미 성현聖賢들에게 절교를 당해서 다시는 군자가 될 수 없는지, 아니면 비록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으나 아직은 고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엎드려 5, 6일 동안 생각하여 열흘과 한 철에 이르렀으나 끝내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다시 뻔뻔스런 얼굴로 부끄러움을 참고서 비루한 말을 꾸미고 지난날에 베풀어주신 사랑을 말씀드려서 좌우(태위집사太尉執事)의 뜻을 헤아려보고자 하였는데, 집사(태위집사太尉執事)께서는 은혜와 예우를 더하시어 급히 답서를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집사께서 저에게 딴 마음이 없음을 살피시고 미치지 못함을 용서하시기를, 어찌 또한 스러운 천자께서 용서하고 죽이지 않은 뜻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편지를 읽고 속이 후련하였습니다.
불초한 이 몸이 죽지 않은 동안에 아직도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 잘못을 고치고 다스려, 다시 도덕의 마당에 들어가서 신도가申徒嘉를 따라 자산子産을 사절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체포되어 감옥에 나아갈 적에 약간 장성한 자식이 있어 도보로 따라왔고, 그 나머지 집을 지킨 자들은 모두 부녀자와 어린아이였습니다.
숙주宿州에 이르러, 어사대御史臺비문秘文이 내려져 집에 가서 문서를 가져오게 하자, 주군州郡에서는 어사대御史臺의 뜻을 받들어 아전을 보내고 병졸을 출동시켜 배를 포위하고 수색하니, 노인과 어린이들이 거의 공포에 떨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떠난 다음 부인이 화를 내며 꾸짖기를 “이는 글을 짓기를 좋아해서이니, 글이 이루어진들 무슨 소득이 있기에 우리를 이처럼 공포에 떨게 하십니까.”라고 하고는 책을 모두 가져다가 불태웠습니다.
일이 진정되자 다시 문고文稿를 찾아보니, 열 가운데 일고여덟이 없어졌습니다.
황주黃州에 이르게 되자 마음 쓸 곳이 없으므로 다시 《주역周易》과 《논어論語》를 깊이 연구하여 단정히 앉아 깊이 생각해보니, 마치 터득한 바가 있는 듯하였습니다.
마침내 선친의 학문을 이어서 《역전易傳》 9권을 지었고, 또 제 뜻으로 《논어설論語說》 5권을 지었습니다.
이제 곤궁하고 어려움이 많아서 수명을 기약할 수 없으니, 이 책이 하루아침에 없어져서 세상에 전해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마음속에 몇 부를 등사하여 세상에 남기고 싶으나 생각해보니 지금 막 문자로 죄를 얻었으니, 사람들이 반드시 흉하고 쇠망하며 불길한 책이라고 여겨서 즐겨 수장하지 않을 것이요, 또 생각해보니 한 시대의 위인이 아니면 의탁하여 전할 수 없으니 이것을 명공明公에게 바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역전易傳》은 글이 많기 때문에 여력이 없어 장정과 등사를 못하였고 다만 《논어설論語說》 5권을 바치오니, 공무에서 물러나 한가로운 여가에 한번 읽어보시면 가령 취할 점이 없더라도 제가 곤궁한 가운데에도 를 잊지 아니하여 늙어서도 학문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제가 서주徐州에 있을 적에 여러 고을의 도적들이 화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그들을 살펴보니, 대부분 흉악하고 협기俠氣가 있고 불손한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에 기근이 겹친다면 그 우환이 도둑질하고 노략질하고 죽이는 데 그치지 않을까 염려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일을 자세히 올리려고 하였는데, 마침 호주湖州로 이임하라는 명령이 있어서 그만두었습니다.
집에 보관한 글들은 이미 없어진 것이 많으나 이 글은 본래 폐지(휴지)라고 여기고 이 종이로 농과 상자를 발라서 유독 불태워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농을 깨고 바른 종이를 떼어내어 보니 저도 모르게 아득하여 꿈속의 일만 같았습니다.
이에 곧바로 원본을 기록하여 올립니다.
저는 폐출당하여 쫓겨나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감히 다시 천하의 일을 말하겠습니까마는, 다만 이 일이 다소나마 세상에 유익한데, 이제 다시 시행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께서 아시기를 바라는 것이니, 이는 예전의 마음이 완전히 없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께서 한번 읽어보신 다음에 즉시 불태우시면 될 것입니다.
이곳 황주黃州는 음식물 값이 싸고 풍토가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이미 갈 수도 없고 가도 또한 돌아갈 곳이 없어서 반드시 이곳에서 늙을 것이라 배알할 기약이 없으니, 종이를 앞에 놓고 서글퍼합니다.
오직 바라건대 철따라 나라를 위해서 자중하소서.


역주
역주1 黃州上文潞公書 : 이 글은 元豐 4년(1081) 4월에 쓰여졌다. 文潞公은 文彦博(1006~1097)으로 字가 寬夫이며 汾州 介休(現 山西省 介休縣) 사람이다. 仁宗 天聖 5년(1027)에 進士로 출사하여 監察御史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仁宗 慶曆 말년(1048)에 貝州의 반란군 王則을 평정한 공으로 宰相에 제수되고 潞國公에 봉해졌다. 蘇軾은 元豐 2년 8월에 烏臺詩案으로 하옥되었다가, 12월에 黃州 유배 명령을 받고 출옥하여, 元豐 3년 2월에 黃州에 도착하였다. 黃州에서 蘇軾이 먼저 서신을 보내고 이어 文彦博이 답서를 보내자 이 글로써 다시 답한 것이다. 黃州 유배는 蘇軾의 삶의 태도나 思想에 있어 일대 전환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는데, 이 글은 이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역주2 曾孫之遇……因事自顯 : 曾孫은 漢나라 武帝의 曾孫인 劉病已(劉詢으로 개명, 훗날의 宣帝)를 이른다. B.C. 91년 巫蠱의 옥사 때 丙吉이 廷尉監으로 이 사건을 처리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젖먹이로 옥에 갇힌 戾太子의 손자 劉病已의 목숨을 구하였으나, 그가 帝位에 오른 뒤에도 끝내 함구하고 있다가 다른 일 때문에 宣帝(劉病已)가 이를 알게 된 일을 이른다. 巫蠱의 옥사란, 武帝 때에 江充이 太子 劉據의 집에서 군주를 저주한 것으로 보이는 木像이 많이 나왔다고 무고하여 太子를 궁지에 몰아넣자, 武帝가 甘泉宮에 행차한 틈을 타서 太子가 군대를 징발하여 江充을 죽였으며, 武帝는 太子가 반란한 것으로 알고 크게 노하여 결국 太子가 자살하고 그의 처첩과 자녀들이 모두 화를 입은 일을 이른다. 金縢의 일은 周나라 武王의 병이 위독해지자 周公이 선조들에게 武王을 대신하여 자신을 죽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린 다음 이를 金縢(쇠사슬로 묶어 봉함한)의 궤에 보관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나중에 成王이 궤를 열어보고 周公의 충심을 알게 된 사실을 이른다. 文彦博이 후사가 없는 仁宗에게 조카 趙曙를 후사로 삼을 것을 건의하여, 趙曙가 英宗으로 즉위하였는데도 文彦博이 이 일을 함구하고 말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다른 일로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일을 말한 것이다.
역주3 破甑敝帚 : 깨진 시루와 해진 빗자루로 모두 자신의 미천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역주4 九鼎 : 禹임금이 水土를 평정한 후 九州에서 바친 쇠붙이를 모아 九州를 상징하는 아홉 개의 솥을 만들었는데, 夏․殷․周 三代가 국가의 보물로 전수하였는바, 여기서는 존귀함의 비유로 쓰였다.
역주5 追申徒而謝子産也 : 申徒는 申徒嘉를 이른다. 《莊子》 〈德充符〉에 鄭나라의 申徒嘉와 子産은 伯昏無人에게 동문수학하였는데, 申徒嘉가 형벌을 받아 발 하나가 잘려 절뚝거리는 것을 子産이 수치스럽게 여겨 함께 다니는 것을 꺼려하자, 申徒嘉가 ‘스승인 伯昏無人은 申徒嘉가 발병신임을 아예 알지 못함’을 들어 子産을 꾸짖은 우화가 있다. 여기서는 蘇軾이 덕으로 죄인을 감화시킨 伯昏無人을 文彦博에게, 申徒嘉를 자신에게, 子産을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비유한 것이다.
역주6 一子 : 蘇軾의 큰아들인 蘇邁를 이른다.
역주7 御史符下 : 체포와 수색을 명하는 御史臺의 符信과 문서가 내려온 것을 이른다.
역주8 婦女 : 蘇軾의 부인인 王氏를 이른다.
역주9 此書 : 본서의 권3에 있는 〈徐州上皇帝書〉를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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