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로 하야 而不治其他
하야 以之出入周旋
하시니 亂臣彊君
이 莫能加焉
이라
知天下莫之能用也하고 退而治其紀綱條目하야 以遺後世之君子하사되 則又以爲不得親見於行事하야 有其具而無其施設措置之方이라하사
於是
에 하야 一斷於禮
하시니 凡春秋之所褒者
는 禮之所與也
요 其所貶者
는 禮之所否也
라
故로 凡天下之邪正에 君子之所疑而不能決者 皆至於春秋而定하니 非定於春秋요 定於禮也라
爲人君父而不知春秋者는 前有讒而不見하고 後有賊而不知하며 爲人臣子而不知春秋者는 守經事而不知其宜하고 遭變事而不知其權하나니라
夫禮義之失이 至於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로되
使天下凡爲君子者 皆如顔淵하고 凡爲小人者 皆如桀跖이면 雖微春秋라도 天下其孰疑之리오
天下之所疑者는 邪正之間也니 其情則邪나 而其跡若正者 有之矣요 其情以爲正이나 而不知其義하야 以陷於邪者 有之矣니 此는 春秋之所以丁寧反覆於其間也니라
襄公이 不修德하고 而疲弊其民하야 以求諸侯하니 此其心이 豈湯武之心也哉리오마는
非有仁者之素요 而欲一旦竊取其名하야 以欺後世하니 苟春秋不爲正之면 則世之爲仁者 相率而爲僞也니라
荀息之事君也는 君存에 不能正其違하고 歿에 又成其邪志而死焉하니 荀息而爲忠이면 則凡忠於盜賊하고 死於私暱者 皆忠也니 而可乎아
04. 《춘추春秋》는 천하天下의 간사함과 바름을 결정하였다는 논論
예禮라는 글자를 가지고 안案(주제)을 삼았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해설하는 자가 말하기를 “천하天下의 사업을 이루고 천하天下의 간사함과 바름을 결정하는 것은 《춘추春秋》보다 더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나는 그 설을 따라 지극히 말해보겠다.
저 《춘추春秋》는 예禮가 사업에 나타난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삼대三代의 성盛함을 논하실 적에는 반드시 예禮가 크게 이루어진 것에 돌리셨고, 쇠함을 논하실 적에는 반드시 예禮가 점점 폐지됨에 근본하셨으며,
군신간君臣間과 부자간父子間과 상하간上下間의 관계가 예禮를 따라 그 자리를 정하지 않음이 없어서, 심지어는 “예禮가 있으면 살고 예禮가 없으면 죽는다.”라고까지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는 젊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단 하루도 예禮를 배우지 않은 적이 없으셔서, 다른 것은 다스리지 않고 이 예禮로써 나가고 들어오고 주선하시니, 난신亂臣과 강한 군주들이 능히 해害를 가하지 못하였다.
천하天下가 자신을 제대로 등용하지 못할 줄을 아시고는 물러나와 기강과 조목을 다스려서 후세의 군자君子에게 물려주셨는데, 또 생각하시기를 ‘내가 행하는 일에 직접 나타낼 수가 없어서 그 도구만 있고 이것을 시행하고 조처하는 방법이 없다.’라고 여기셨다.
이에 노魯나라 사서史書를 따라 《춘추春秋》를 만들어서 한결같이 예禮에 결단하셨으니, 무릇 《춘추春秋》에서 칭찬한 것은 예禮가 인정한 바였고, 《춘추春秋》에서 폄하한 것은 예禮가 부정하는 바였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예禮라는 것은 혐의를 분별하고 의심스러운 것을 밝히고 이럴까 저럴까 망설여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춘추春秋》는 한결같이 예禮에서 결단을 취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천하天下의 간사하고 바른 것으로 군자君子들이 의심하여 결단하지 못한 것들이 모두 《춘추春秋》에 이르러 결정되었으니, 이는 《춘추春秋》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요 예禮에서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태사공太史公(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춘추春秋》는 예의禮義의 대종大宗이다.”라고 한 것이다.
남의 군부君父가 되어서 《춘추春秋》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앞에 참언讒言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뒤에 자기를 해치는 적賊이 있어도 알지 못하며,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서 《춘추春秋》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정상적인 일을 지키면서도 그 마땅함을 알지 못하고 변고의 일을 만났으면서도 저울질하여 권도權道에 맞출 줄을 알지 못한다.
저 예의禮義를 잃은 것이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함에 이른다.
그런데도 그들 생각에는 모두 잘하는 것이라고 여겼으나 그 의리를 알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공자孔子께서 이것을 빈 말씀에 올렸는데도 감히 그 죄를 사양하지 못한 것이다.
간사함과 바름이 똑같지 않은 것은 흑黑과 백白보다도 더 분명하다.
만일 천하天下의 모든 군자君子들이 모두 안연顔淵처럼 선善하고 모든 소인小人들이 모두 걸왕桀王이나 도척盜跖과 같이 나쁘다면, 비록 《춘추春秋》가 없더라도 천하天下 사람 중에 그 누가 이것을 의심하겠는가?
천하天下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은 간사함과 바름의 중간이니, 그 실정은 간사하나 그 행적은 바른 듯한 자가 있고, 그 실정은 바르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 의義를 알지 못하여 간사함에 빠지는 자도 있으니, 이 때문에 《춘추春秋》는 간사함과 바름의 중간에서 정녕하고 반복한 것이다.
송 양공宋 襄公은 인자仁者인가 의심스러운 자였고, 진晉나라 순식荀息은 충신忠臣인가 의심스러운 자였다.
양공襄公이 평소 덕德을 닦지 않고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면서 제후諸侯들에게 패자霸者가 되기를 바랐으니, 그 마음이 어찌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인의仁義의 마음이었겠는가.
그런데도 유독 전쟁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이모二毛(노인)를 사로잡지 않고 상대방이 전열을 이루지 않았으면 북을 쳐서 진격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평소 인자仁者의 마음이 있지 않으면서 하루아침에 인자仁者라는 명칭을 절취하여 후세를 속이고자 한 것이니, 만일 《춘추春秋》에서 이것을 바로잡지 않았다면 세상에서 인仁을 행하는 자들이 서로 따라서 거짓을 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 쓰기를 “겨울 11월 을사삭일乙巳朔日에 송공宋公(양공襄公)이 초楚나라 사람과 홍수泓水에서 싸워 송宋나라 군대가 크게 패했다.”라고 한 것이니, 《춘추春秋》에 전쟁을 이와 같이 상세하게 쓴 경우가 있지 않다.
이는 군자君子(공자孔子)가 송宋나라 군대가 패한 것이 진실로 당연하여 숨기고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여기신 것이다.
순식荀息이 평소 자기 군주를 섬긴 것은, 군주가 살아 있을 적에는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였고, 군주가 죽었을 적에는 또 군주의 나쁜 뜻을 이루려고 하다가 죽었으니, 순식荀息을 충신忠臣이라고 한다면 도적에게 충성하고 사사로이 친한 자들을 위해서 죽는 자들도 모두 다 충신忠臣이 될 것이니, 되겠는가?
그러므로 《춘추春秋》에 쓰기를 “죽음이 대부 순식大夫 荀息에게 미쳤다.”라고 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순식荀息은 공보孔父의 무리이니, 곧바로 이름을 써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