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韓非於老氏 若不相及이어늘 而太史遷 獨以爲申韓竝原於道德之意라하니 東坡亦識得此意하니라
하야 盡力而排之者 非異端之能亂天下 而天下之亂 所由出也
昔周之衰 有老聃, 莊周, 之徒 更爲虛無淡泊之言하야 而治其猖狂浮游之說하야 紛紜顚倒하야하니 由其道者 蕩然莫得其當이라
是以 하니 不得志於天下하야 高世遠擧之人 所以放心而無憂 雖非聖人之道 而其用意 固亦無惡於天下하니라
自老聃之死 百餘年, 韓非著書하야 言治天下無若刑名之賢이러니
及秦用之하야 終於하야 敎化不足而法有餘하야
秦以不祀하고 而天下被其毒하니 後世之學者 知申, 韓之罪하고 而不知老聃, 莊周之使然하니라
何者
仁義之道 起於夫婦, 父子, 兄弟相愛之間하고 而禮法刑政之原 出於君臣上下相忌之際하나니
相愛則有所不忍이요 相忌則有所不敢이니 不敢與不忍之心 合而後 聖人之道 得存乎其中이라
今老聃, 莊周 論君臣, 父子之間 汎汎乎若萍游於江湖而適相値也
夫是以 父不足愛하고 而君不足忌하니
不忌其君하고 不愛其父 則仁不足以懷 義不足以勸이요 禮樂不足以化 此四者皆不足用하야 而欲置天下於無有
夫無有 豈誠足以治天下哉리오
商鞅, 韓非求爲其說而不得하고 得其所以輕天下而齊萬物之術이라
是以 敢爲殘忍而無疑하니라
今夫不忍殺人而不足以爲仁이요 而仁亦不足以治民이면 則是殺人不足以爲不仁이요 而不仁亦不足以亂天下
如此 則擧天下唯吾之所爲 刀鋸斧鉞 何施而不可리오
昔者 夫子未嘗一日易其言하사 雖天下之小物이라도 亦莫不有所畏어시늘 今其視天下眇然하야 若不足爲者하니 此其所以輕殺人歟인저
太史遷曰 申子 卑卑하야 施於名實하고 韓子 引繩墨하야 切事情하고 明是非하야 其極慘核少恩하니 皆原於道德之意라하니
嘗讀而思之컨대 事固有不相謀而相感者하니 莊, 老之後 其禍爲申, 韓이라
由三代之衰 至於今 凡所以亂聖人之道者 其弊固已多矣하야 而未知其所終하니 奈何其不爲之所也리오


05. 한비韓非에 대한
한비韓非노씨老氏에 있어서 서로 상관이 없는 듯한데, 태사공 사마천太史公 司馬遷이 홀로 “신불해申不害한비韓非가 모두 《도덕경道德經》의 뜻에서 근원했다.”라고 하였으니, 동파東坡 또한 이 뜻을 안 것이다.
성인聖人이 저 이단異端을 미워하여 힘을 다해서 배척하는 까닭은 이단異端이 천하를 어지럽힐 수 있어서가 아니요, 천하의 혼란이 이단異端으로 말미암아 나오기 때문이다.
옛날 나라가 쇠퇴할 적에 노담老聃, 장주莊周, 열어구列禦寇의 무리가 번갈아 허무虛無담박淡泊을 주장하는 말을 해서 사람들이 그 창광猖狂하고 근거없는 말을 전공하여 분분하고 전도되어서 끝내 무유無有로 돌아가니, 그 를 따르는 자들이 너무 넓어서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부귀의 즐거움을 잊고 사생의 분별을 똑같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천하에서 뜻을 얻지 못하고서 세상에 높이 초월하여 멀리 떠나가는 사람들이 마음을 놓아 근심이 없었던 이유이니, 이는 비록 성인聖人는 아니나 그 마음 씀은 진실로 또한 천하에 나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노담老聃이 죽은 이후로 백여 년 만에 상앙商鞅한비韓非가 책을 지어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형명刑名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라 때에 그들의 말을 따랐다가 끝내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이 일어나서 교화敎化가 부족하고 법치法治가 유여하였다.
나라가 이 때문에 망하여 제사받지 못하고 천하가 그 해독을 입었는데, 후세의 학자들은 신불해申不害한비韓非의 죄만 알고 노담老聃장주莊周가 이렇게 만든 것은 알지 못한다.
이는 어째서인가?
인의仁義부부夫婦부자父子형제兄弟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 시작되고, 예법禮法형정刑政의 근원은 군신君臣상하上下가 서로 두려워하는 사이에서 나온다.
서로 사랑하면 차마 못하는 바가 있고 서로 두려워하면 감히 하지 못하는 바가 있으니, 감히 하지 못하는 것과 차마 못하는 마음이 합쳐진 뒤에야 성인聖人가 그 사이에서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노담老聃장주莊周군신간君臣間부자간父子間을 논하기를 마치 부평초가 물결을 따라 강호江湖를 떠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서로 만난 것처럼 여긴다.
이 때문에 아버지가 사랑할 대상이 못 되고 인군이 두려워할 대상이 못 된다.
인군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이 사람들을 품어줄 수가 없고 가 사람들을 권장할 수가 없고 예악禮樂이 사람들을 교화할 수가 없게 되니, , 이 네 가지가 모두 쓸 것이 못 된다고 하여 천하를 무유無有에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저 무유無有라는 것이 어찌 진실로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겠는가?
상앙商鞅한비韓非는 그 설을 알려고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고, 노담老聃장주莊周가 천하를 가볍게 여겨서 만물을 똑같이 하는 방법만을 얻었다.
이 때문에 과감히 잔인한 짓을 하면서도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차마 남을 죽이지 못하는데도 이것이 이 될 수 없고 또한 백성을 다스릴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불인不仁이 될 수 없고 불인不仁 또한 천하를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온 천하를 오직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니, 형벌의 도구인 칼과 톱과 부월斧鉞을 어디에 베푼들 불가하겠는가?
옛날 부자夫子께서는 일찍이 단 하루도 그 말씀을 쉽게 하지 않으셔서 비록 천하의 작은 사물이라도 또한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으셨는데, 지금 이들은 천하를 하찮게 보아서 굳이 할 것이 없는 것처럼 여겼으니, 이것이 가볍게 사람을 죽인 이유일 것이다.
태사공 사마천太史公 司馬遷이 말하기를 “신자申子(신불해申不害)는 아주 분발하고 힘써서 명실名實에 베풀었고, 한자韓子승묵繩墨(법률)을 이끌어서 사정事情에 절실하고 시비를 밝혀 지극히 혹독하여 은혜가 적었으니, 이는 모두 《도덕경道德經》의 뜻에서 근원하였다.”라고 하였다.
내 일찍이 이 글을 읽고 생각해보건대 일은 진실로 서로 도모하지 않아도 서로 감동되는 것이 있으니, 장주莊周노담老聃의 뒤에 그 신불해申不害한비자韓非子가 된 것이다.
삼대三代가 쇠퇴할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릇 성인聖人의 도를 어지럽히는 것들이 그 병폐가 진실로 너무 많아서 끝마칠 바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에 대한 대처를 하지 않겠는가?


역주
역주1 韓非論 : 이 글은 東坡가 젊은 시절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韓非(B.C. 280~B.C. 233)는 전국시대 韓나라의 사상가로 韓王 安의 서자이다. 그는 李斯와 함께 荀卿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諸家의 설을 두로 흡수하여 法家思想을 집대성하였다. 뒤에 秦나라에 사신 갔다가 그의 재능을 질시한 李斯의 무고로 옥에 갇히자 자살하였다. 저서로 《韓非子》가 있다.
역주2 聖人之所爲惡夫異端 : 異端은 고대부터 儒家에서 자신들의 뜻과 다른 諸家의 학설을 이르는 말이다. 시대에 따라 바뀌었는데, 고대에는 주로 楊朱와 墨翟의 학설을 말하였으나, 후대에는 道家와 法家와 佛敎를 주로 가리켜 말하였다. 蘇軾이 韓非를 비판하면서 法家만을 異端으로 들지 않고 道家까지 든 것은 道家가 法家의 한 연원이라고 여겼기 때문인 듯하다.
역주3 列禦寇 : 성이 列이고 이름이 禦寇인데 통칭 列子로 불린다. 춘추시대 鄭나라의 저명한 사상가로 道家의 일맥으로 꼽히며, 黃老學에 근본하여 淸淨無爲를 주장하였다. 저서에 《列子》 8편이 있다.
역주4 卒歸於無有 : 無有는 無를 이르는데, 道家의 중요한 철학적 개념으로 존재의 근원이란 뜻으로 쓰였다. 老子의 《道德經》에는 “천하 만물은 有에서 생겨나고 有는 無에서 생겨난다.[天下萬物生于有 有生于無]”라고 하였으며, 《莊子》 〈天地〉에는 “천지의 태초에는 無가 있었다. 존재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이름도 없었다. 여기에서 一이 생겨났다.[泰初有無 無有無名 一之所起]”라는 표현이 보인다.
역주5 忘乎富貴之樂 而齊乎死生之分 : 道家思想의 근본은 無爲와 절대적 道로의 귀의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道家는 속세를 떠난 淸淨無爲한 삶을 강조하여 세속의 부귀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유일무이의 절대적인 道로 귀의할 것을 주장하여 生․死나 善․惡이나 是․非 등의 분별을 부질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6 商鞅 : B.C. 390~B.C. 338. 衛나라 公族 출신으로 法家의 대표적 인물인데, 저서로 《商君書》 24편이 있다.
역주7 勝廣之亂 : 陳勝과 吳廣의 난을 이른다. 陳勝과 吳廣은 秦나라의 虐政에 맨 먼저 반기를 들고 일어난 인물들이다. 이들은 본래 秦나라 戍卒들이었는데, 장맛비로 인해 도착시기를 놓쳐 사형을 받게 될 처지에 놓이자, 戍卒들을 데리고 봉기하였다. 이들이 봉기하자 이곳저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秦나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끝내 멸망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