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非於老氏에 若不相及이어늘 而太史遷이 獨以爲申韓竝原於道德之意라하니 東坡亦識得此意하니라
하야 盡力而排之者
는 非異端之能亂天下
요 而天下之亂
이 所由出也
라
昔周之衰
에 有老聃, 莊周,
之徒 更爲虛無淡泊之言
하야 而治其猖狂浮游之說
하야 紛紜顚倒
하야 而
하니 由其道者 蕩然莫得其當
이라
是以
로 하니 此
는 不得志於天下
하야 高世遠擧之人
이 所以放心而無憂
니 雖非聖人之道
나 而其用意
는 固亦無惡於天下
하니라
自老聃之死
로 百餘年
에 有
, 韓非著書
하야 言治天下無若刑名之賢
이러니
秦以不祀하고 而天下被其毒하니 後世之學者 知申, 韓之罪하고 而不知老聃, 莊周之使然하니라
仁義之道는 起於夫婦, 父子, 兄弟相愛之間하고 而禮法刑政之原은 出於君臣上下相忌之際하나니
相愛則有所不忍이요 相忌則有所不敢이니 不敢與不忍之心이 合而後에 聖人之道 得存乎其中이라
今老聃, 莊周는 論君臣, 父子之間을 汎汎乎若萍游於江湖而適相値也라
不忌其君하고 不愛其父면 則仁不足以懷요 義不足以勸이요 禮樂不足以化니 此四者皆不足用하야 而欲置天下於無有라
商鞅, 韓非求爲其說而不得하고 得其所以輕天下而齊萬物之術이라
今夫不忍殺人而不足以爲仁이요 而仁亦不足以治民이면 則是殺人不足以爲不仁이요 而不仁亦不足以亂天下니
如此면 則擧天下唯吾之所爲니 刀鋸斧鉞을 何施而不可리오
昔者에 夫子未嘗一日易其言하사 雖天下之小物이라도 亦莫不有所畏어시늘 今其視天下眇然하야 若不足爲者하니 此其所以輕殺人歟인저
太史遷曰 申子는 卑卑하야 施於名實하고 韓子는 引繩墨하야 切事情하고 明是非하야 其極慘核少恩하니 皆原於道德之意라하니
嘗讀而思之컨대 事固有不相謀而相感者하니 莊, 老之後에 其禍爲申, 韓이라
由三代之衰로 至於今히 凡所以亂聖人之道者 其弊固已多矣하야 而未知其所終하니 奈何其不爲之所也리오
한비韓非는 노씨老氏에 있어서 서로 상관이 없는 듯한데, 태사공 사마천太史公 司馬遷이 홀로 “신불해申不害와 한비韓非가 모두 《도덕경道德經》의 뜻에서 근원했다.”라고 하였으니, 동파東坡 또한 이 뜻을 안 것이다.
성인聖人이 저 이단異端을 미워하여 힘을 다해서 배척하는 까닭은 이단異端이 천하를 어지럽힐 수 있어서가 아니요, 천하의 혼란이 이단異端으로 말미암아 나오기 때문이다.
옛날 주周나라가 쇠퇴할 적에 노담老聃, 장주莊周, 열어구列禦寇의 무리가 번갈아 허무虛無와 담박淡泊을 주장하는 말을 해서 사람들이 그 창광猖狂하고 근거없는 말을 전공하여 분분하고 전도되어서 끝내 무유無有로 돌아가니, 그 도道를 따르는 자들이 너무 넓어서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부귀의 즐거움을 잊고 사생의 분별을 똑같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천하에서 뜻을 얻지 못하고서 세상에 높이 초월하여 멀리 떠나가는 사람들이 마음을 놓아 근심이 없었던 이유이니, 이는 비록 성인聖人의 도道는 아니나 그 마음 씀은 진실로 또한 천하에 나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노담老聃이 죽은 이후로 백여 년 만에 상앙商鞅과 한비韓非가 책을 지어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형명刑名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진秦나라 때에 그들의 말을 따랐다가 끝내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이 일어나서 교화敎化가 부족하고 법치法治가 유여하였다.
진秦나라가 이 때문에 망하여 제사받지 못하고 천하가 그 해독을 입었는데, 후세의 학자들은 신불해申不害와 한비韓非의 죄만 알고 노담老聃과 장주莊周가 이렇게 만든 것은 알지 못한다.
인의仁義의 도道는 부부夫婦와 부자父子와 형제兄弟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 시작되고, 예법禮法과 형정刑政의 근원은 군신君臣과 상하上下가 서로 두려워하는 사이에서 나온다.
서로 사랑하면 차마 못하는 바가 있고 서로 두려워하면 감히 하지 못하는 바가 있으니, 감히 하지 못하는 것과 차마 못하는 마음이 합쳐진 뒤에야 성인聖人의 도道가 그 사이에서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노담老聃과 장주莊周는 군신간君臣間과 부자간父子間을 논하기를 마치 부평초가 물결을 따라 강호江湖를 떠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서로 만난 것처럼 여긴다.
이 때문에 아버지가 사랑할 대상이 못 되고 인군이 두려워할 대상이 못 된다.
인군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인仁이 사람들을 품어줄 수가 없고 의義가 사람들을 권장할 수가 없고 예악禮樂이 사람들을 교화할 수가 없게 되니, 인仁과 의義, 예禮와 악樂 이 네 가지가 모두 쓸 것이 못 된다고 하여 천하를 무유無有에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저 무유無有라는 것이 어찌 진실로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겠는가?
상앙商鞅과 한비韓非는 그 설을 알려고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고, 노담老聃과 장주莊周가 천하를 가볍게 여겨서 만물을 똑같이 하는 방법만을 얻었다.
이 때문에 과감히 잔인한 짓을 하면서도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차마 남을 죽이지 못하는데도 이것이 인仁이 될 수 없고 인仁 또한 백성을 다스릴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불인不仁이 될 수 없고 불인不仁 또한 천하를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온 천하를 오직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니, 형벌의 도구인 칼과 톱과 부월斧鉞을 어디에 베푼들 불가하겠는가?
옛날 부자夫子께서는 일찍이 단 하루도 그 말씀을 쉽게 하지 않으셔서 비록 천하의 작은 사물이라도 또한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으셨는데, 지금 이들은 천하를 하찮게 보아서 굳이 할 것이 없는 것처럼 여겼으니, 이것이 가볍게 사람을 죽인 이유일 것이다.
태사공 사마천太史公 司馬遷이 말하기를 “신자申子(신불해申不害)는 아주 분발하고 힘써서 명실名實에 베풀었고, 한자韓子는 승묵繩墨(법률)을 이끌어서 사정事情에 절실하고 시비를 밝혀 지극히 혹독하여 은혜가 적었으니, 이는 모두 《도덕경道德經》의 뜻에서 근원하였다.”라고 하였다.
내 일찍이 이 글을 읽고 생각해보건대 일은 진실로 서로 도모하지 않아도 서로 감동되는 것이 있으니, 장주莊周와 노담老聃의 뒤에 그 화禍가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가 된 것이다.
삼대三代가 쇠퇴할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릇 성인聖人의 도를 어지럽히는 것들이 그 병폐가 진실로 너무 많아서 끝마칠 바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에 대한 대처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