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其百金而治之
하야 飮以
하야 攻伐其腎
내장腸하고 燒灼其體膚
하고 禁切其飮食之美者
러니
期月而百疾作
하야 內熱惡寒而欬不已
하야 眞蠱者也
라
又求於醫
한대 醫以爲熱
이라하야 授之以
하야 旦朝吐之
하고 暮夜下之
하니 於是
에 始不能食
이라
懼而反之
하야 則
를 雜然幷進
에 而
이 無所不至
하야 三易醫而疾愈甚
이라
人之生也에 以氣爲主하고 食爲輔어늘 今子終日藥不釋口하야 臭味亂于外하고 而百毒戰于內하야 勞其主하고 隔其輔라 是以病也니
子退而休之하야 謝醫却藥하고 而進所嗜하면 氣完而食美矣리니 則夫藥之良者를 可以一飮而效리라
吾觀夫
진秦히 立法更制
하야 以鐫磨鍛鍊其民
이 可謂極矣
라
이 親見其斲喪之禍
하야 而收其民於百戰之餘
하고 知其厭苦憔悴無聊
하야 而不可與有爲也
라
始에 조참參爲제齊相하야 召長老諸先生하야 問所以安集百姓한대 而제齊故諸儒以百數에 言人人殊하야 조참參未知所定이라
聞교서膠西有개공蓋개공公이 善治黃老言하고 使人請之한대 개공蓋公이 爲言호되 治道는 貴淸靜而民自定이라하고 推此類具言之라
조참參於是에 避正堂以舍개공蓋公하고 用其言而제齊大治러니
하야 知公之爲邦人也
하고 求其墳墓子孫
이나 而不可得
하니 慨然懷之
라
重門洞開
하야 盡城之南北
하야 하고 名之曰 蓋公堂
이라하야 時從賓客僚吏
하야 遊息其間
하고 而不敢居
하야 以待如公者焉
이로라
夫
조참曹參은 이어늘 而
개공蓋公이 爲之師
하니 可謂盛矣
로되
교서膠西는 東竝(傍)海
하고 하니 其中
에 多隱君子
하야 可聞而不可見
하고 可見而不可致
하니 安知
개공蓋公不往來其間乎
리오마는
의원醫員을 가지고 비유해서 의논을 시작하여 극진히 말하면서도 바른 뜻을 가지고 별도로 증거를 대었다.
예전에 내가 시골에 살 적에 한병寒病(냉병冷病)을 앓아 기침을 하는 자가 있었다.
의원에게 묻자, 의원이 말하기를 “이것은 고병蠱病이니, 치료하지 않으면 장차 사람을 죽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백금百金을 가지고 고약蠱藥을 사서 치료하였는데, 고약蠱藥을 마시자마자 부작용이 일어나 신장腎臟과 내장內腸을 공격하고 몸과 피부를 태우며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였다.
한 달이 지나자 온갖 병이 생겨서 속에 열이 나고 오한이 들고 기침이 그치지 않아서 비쩍 마른 것이 영락없이 고병蠱病을 앓는 자였다.
또다시 의원을 찾아가서 물으니, 의원이 열병熱病이라고 하면서 열을 내리게 하는 한약寒藥을 지어주어 먹었으나, 아침에는 토하고 저녁과 밤에는 설사하니, 이에 비로소 음식도 먹지 못하게 되었다.
두려워하여 반대로 열약熱藥인 석종유石鍾乳와 오훼烏喙를 뒤섞어 함께 복용하자, 생인손과 종기와 옴 그리고 현기증 등의 증상이 모두 나타나서 세 번째로 의원을 바꾸었는데도 병이 더욱 심해졌다.
“이것은 의원이 약을 잘못 쓴 탓이니, 그대에게 무슨 병이 있겠는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기운을 주체로 삼고 음식을 보조로 삼는데, 지금 그대는 종일토록 약을 입에서 떼지 않아서 약의 냄새와 맛이 밖에서 어지럽히고, 온갖 약의 독이 안에서 싸워 주체(기운)를 수고롭게 하고 보좌(음식물)를 막았기 때문에 병든 것이다.
그대가 물러가 편안히 쉬면서 의원을 사절하고 약을 끊고서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면 기운이 완전해지고 음식이 맛있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그때 좋은 약을 한 번만 마셔도 효험이 날 것이다.”
이에 노인의 말대로 하였더니, 한 달이 지나자 병이 참으로 나았다.
내가 보니, 진秦나라는 효공孝公 이래로 시황제始皇帝에 이르기까지 법法을 세우고 제도를 변경해서 백성들을 연마하고 단련한 것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은 진秦나라의 가혹한 법령이 백성들에게 큰 폐해가 되는 것을 직접 보고서 수많은 전란을 겪은 뒤에 백성들을 수습하려 하였고, 백성들이 전쟁을 고통스럽게 여겨 초췌하고 무료해서, 이 백성들과 더불어 무슨 일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 때문에 일체 백성들에게 휴식을 주어서 천하가 편안하였던 것이다.
조참曹參이 처음 제齊나라 정승이 되어서 장로長老와 여러 선생先生들을 불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는 방법을 물었으나, 제齊나라의 옛 학자들이 백 명으로 헤아려졌는데 사람마다 말이 달라서 조참曹參이 결정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교서膠西에 개공蓋公이란 분이 황로黃老의 학설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서 초청하자, 개공蓋公이 말하기를 “정치하는 방도는 깨끗하고 고요함을 귀하게 여기니, 이렇게 하면 백성들이 저절로 안정된다.”라고 하고는 유추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에 조참曹參이 정당正堂을 피하여 개공蓋公을 여기에 머물게 하고 그의 말을 따르자, 제齊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그 뒤에 조참曹參이 제齊나라를 다스리던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리니, 천하天下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조참曹參을 어진 정승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내가 교서膠西의 태수가 되어서 공公이 이 고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의 묘소와 자손을 찾았으나 얻을 수 없으니, 서글피 그를 흠모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말을 스승삼고 인품을 상상해보고서 행여 다시 공公과 같은 분을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랐다.
이에 황당黃堂의 북쪽에 새로운 사당을 짓고는 해지고 누추한 것을 바꾸고, 가리고 막힌 것을 통하게 하였다.
이중문을 활짝 열어서 성城의 남쪽과 북쪽을 다하여, 서로 바라보이는 것이 마치 노끈으로 이은 것과 같게 한 다음 ‘개공당蓋公堂’이라 이름하고서, 때로 빈객賓客과 요리僚吏들을 거느리고 그 사이에 노닐며 쉬되 감히 거처하지 아니하여 공公과 같은 분을 기다린다.
조참曹參은 한漢나라의 종신宗臣인데 개공蓋公이 그의 스승이 되었으니, 훌륭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도 역사책에 그가 죽은 것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어찌 옛날의 지인至人으로서 도道를 얻어 죽지 않은 자가 아니겠는가?
교서膠西는 동쪽으로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구선九僊에 이르고 북쪽으로 뇌산牢山에 연결되었는데, 이 가운데에는 은군자隱君子가 많아서 이름은 들을 수 있으나 만나볼 수 없고 만나볼 수는 있으나 데려올 수 없으니, 개공蓋公이 그 사이에 왕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