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에 有詔
여산廬山하고 召對
하야 問佛法
대각선사大意
한대 奏對稱旨
어늘 賜號
대각선사大覺禪師하다
以故로 士之聰明超軼者 皆鄙其言하야 詆爲蠻夷下俚之說이라
회련璉은 獨指其妙與
合者
하야 其言
이 文而眞
하고 其行
이 峻而通
이라
故로 一時士大夫喜從之游하야 遇休沐日이면 회련璉未盥漱에 而戶外之屨滿矣러라
與회련璉問答하시고 親書頌詩以賜之하시니 凡十有七篇이라
中
에 上書
하야 乞歸老山中
한대 上曰
也
니 將安歸乎
아하시고 不許
하시다
中
에 再乞堅甚
한대 영종황제英宗皇帝留之不可
하야 賜詔許自便
이라
四明之人이 相與出力하야 建大신규각閣하야 藏所賜頌詩하고 榜之曰신규각宸奎라하다
時
에 경사京師始建
하니 詔取其副本藏焉
하고 且命歲度僧一人
하다
臣出守항주杭州하니 其徒使來告曰 신규각宸奎閣에 未有銘이라
君
은 逮事
하고 而與吾師游最舊
하니 其可以辭
리오하니라
臣謹按 古之人君
에 號知佛者
는 必曰
라하니 其徒蓋嘗以藉口
하고 而繪其像于壁者
라
恭惟
에 未嘗
하고 崇侈寺廟
하시며 로되 而升遐之日
에 하니
上嘗賜以
한대 회련璉對使者
하야 焚之
하고 曰 吾法
은 以壞色衣
하고 以瓦鐵食
하니 此鉢非法
이라하니
의론議論이 대체를 유지한 부분을 볼 수 있다.
황우皇祐 연간에 여산廬山의 승려인 회련懷璉에게 명하여 경사京師의 십방정인선원十方淨因禪院에 거주하게 하고 화성전化成殿에 불러서 불법佛法의 대의를 물었는데, 회련懷璉이 상주하고 대답한 것이 임금의 뜻에 맞았으므로 대각선사大覺禪師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이때 북방에서 불교를 하는 자들은 모두 명예와 이익에 마음을 두고 인과응보설에 얽매여 있었다.
이 때문에 선비 중에 총명하고 뛰어난 자들은 모두 불가佛家의 말을 비루하게 여겨서 만이蠻夷의 저속한 말이라고 비방하였다.
그런데 유독 회련懷璉은 불교의 묘리가 공자孔子와 노자老子와 부합하는 것들을 지적해서 그 말이 문채나면서도 진실하고 행실이 준엄하면서도 화통하였다.
그러므로 사대부士大夫들이 한때 그를 따라 교유交遊하기를 좋아해서 휴가일이 되면 회련懷璉이 아직 세수하고 양치질하기도 전에 찾아온 사람들의 신발이 문밖에 가득하곤 하였다.
인종황제仁宗皇帝께서는 하늘이 내신 재능으로 스승의 전수를 따르지 않고 저절로 득도得道하셨다.
그리하여 회련懷璉과 문답을 하시고는 친히 송시頌詩를 써서 하사하시니, 모두 열일곱 편이었다.
지화至和 연간에 회련懷璉이 글을 올려 산중에 돌아가 늙을 것을 청원하자, 상上(인종仁宗)께서 말씀하시기를 “산山이 바로 여여如如의 체體이니,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하시고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치평治平 연간에 재차 더욱 견고히 청원하니, 영종황제英宗皇帝께서 만류할 수 없으므로 조칙을 내려서 편한 대로 하라고 허락하셨다.
회련懷璉이 양자강을 건너가서 금산金山과 서호西湖에서 잠시 머물다가 마침내 사명四明의 아육왕산 광리사阿育王山 廣利寺에 돌아가 늙으니,
사명四明 사람들이 서로 재력을 내어 큰 누각을 세워서 황제께서 하사한 송시頌詩를 보관하고 ‘신규각宸奎閣’이라 써 붙였다.
이때 경사京師에 처음으로 보문각寶文閣을 세우니, 명하여 그 부본副本을 가져다가 보문각寶文閣에 보관하게 하고, 또 명하여 해마다 승려 한 사람을 도度하여(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다.
회련懷璉이 산으로 돌아온 지 23년에 나이가 83세였다.
신臣이 외직으로 나와 항주杭州를 맡으니, 그 무리들이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신규각宸奎閣에 아직 명문銘文이 없습니다.
그대는 소릉昭陵(인종仁宗)을 섬기셨고 우리 선사先師와 매우 오래 교유하셨으니, 〈명문銘文 쓰는 일을〉 어떻게 사양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니, 옛날 군주君主 중에 불법佛法을 잘 안다고 이름난 자로는 반드시 한 명제漢 明帝와 양 무제梁 武帝를 말하는데, 그 무리(승려)들이 항상 이것을 이야기하고 그 화상을 벽에 그려놓곤 하였다.
〈그러나〉 한 명제漢 明帝는 까다롭게 살핌을 총명함으로 여겼고 양 무제梁 武帝는 나약함을 인仁으로 여겼으니, 모두 이름만 따르고 실제를 잃어서 불교와의 거리가 매우 멀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인종황제仁宗皇帝께서는 재위하신 42년 동안 일찍이 승니僧尼들을 많이 도度하고(출가시키고) 사찰을 크게 꾸미고 높이지 않으셨으며, 창과 방패와 형벌하는 도끼들을 일찍이 사사로이 쓰신 적이 없었으나, 승하하시던 날에 천하 사람들이 인군仁君이라고 허여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부처의 심법心法을 얻었다는 것이니, 이는 고금에 우리 인종황제仁宗皇帝 한 분뿐이시다.
회련懷璉은 비록 출세법出世法으로 사람들을 구제하였으나, 율법을 매우 엄격히 지켰다.
상上께서 일찍이 용뇌수龍腦樹로 만든 발우鉢盂(바리때)를 하사하자, 회련懷璉이 사자를 마주하고서 이것을 불태우며 말하기를 “우리 불법佛法은 색이 바랜 옷을 입고 질그릇과 쇠그릇으로 먹으니, 이 용뇌수龍腦樹의 발우鉢盂는 불법佛法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사자가 돌아가서 이 말을 상주하자, 상上께서 가상히 여기고 오랫동안 감탄하셨다.
정신이 밝아 득도하시니, 스승의 전수함이 있지 않았다오.
오직 도인道人인 회련懷璉이 소요逍遙하여 자유자재하니,
참선參禪과 계률戒律을 병행하여 서로 장애되지 않았도다.
부처와 부처라야 비로소 그 진실을 알 수 있네.
시절마다 조회 와서 여기에 보관한 것을 삼가 지킬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