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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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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蘇公 以繁而曲으로 爲守하고 以簡而直으로 爲決勝하니 未盡兵之情하니라
嘗讀하야 得軍旅러니 其後하야 又得管子所以變周之制로라
蓋王者之兵 出於不得已 而非以求勝敵也
其爲法 要以不可敗而已러니 至於桓文하야는 非決勝이면 無以定霸
其法 在必勝하니 繁而曲者 所以爲不可敗也 簡而直者 所以爲必勝也니라
周之制 萬二千五百人而爲軍하니
萬之有二千하고 二千之有五百하야 其數奇而不齊하니 唯其奇而不齊 是以 知其繁且曲也로라
使天度而無奇 則千載之日 雖婦人孺子라도 皆可以坐而計언마는 唯其奇而不齊 是故 巧曆 有所不能盡也니라
聖人 知其然이라
夫以萬二千五百人으로 而均之八陣之中이면 宜其有奇而不齊者
是以 多爲之曲折하야 以盡其數하고 以極其變하야 하야 各有條理
三代之興 治其兵農軍賦호되 皆數十百年而後 得志於天下하니라
自周之亡으로 秦漢陣法 不復三代러니 其後 하고 以爲可用以取天下
이나 相持數歲 魏人不敢決戰하고 而孔明亦卒無尺寸之功하니 豈八陣者 先王所以爲不可敗 而非以逐利爭勝者邪리오
若夫管仲之制其兵 可謂截然而易曉矣
三分其國하야 以爲三軍호되 五人爲軌하야 軌有長하고 十軌爲里하야 里有司하고 四里爲連하야 連有長하고 十連爲鄕하야 鄕有鄕良人하고 五鄕一帥하야 萬人而爲一軍하니라
하야 三軍三萬人 如貫繩하고 如畫棊局하야 疏暢洞達하니 雖有智者라도 無所施其巧
其法令簡一하고 而民有餘力하야 以致其死하니라
昔者 嘗讀左氏春秋하고 以爲丘明 最好兵法이라호라
蓋三代之制 至於列國하야도 猶有存者 以區區之鄭으로 見於其書일새라
及至管仲相桓公하야 南伐楚하고 北伐孤竹하고 하야 威震天下로되 而其軍壘陣法 不少槪見者 何哉
蓋管仲 欲以歲月服天下 變古司馬法하야 而爲是簡略速勝之兵이라
是以 莫得而見其法也리라
할새 敎夫差以三萬人으로 壓晉壘而陣호되 百人爲行하고 百行爲陣하야 陣皆徹行하야 無有隱蔽하고 援桴而鼓之하야 勇怯盡應하야 三軍皆譁한대
晉師大駭하야 卒以得志하니 由此觀之컨대 不簡而直이면 不可以決勝이라
深惟後世不達繁簡之宜하야 以取敗亡하니 而三代什伍之數 與管子所以治齊之兵者 雖不可盡用이나 而其近於繁而曲者 以之固守하고 近於簡而直者 以之決戰이면 則庶乎其不可敗 而有所必勝矣리라


04. 관중管仲에 대한 2
소공蘇公군제軍制 가운데 내용이 번다繁多하여 위곡委曲(자세)한 것을 수비하는 방법으로 여기고, 간결하여 분명하고 알기 쉬운 것을 결승하는 방법으로 여겼으니, 병법兵法의 실정을 다하지 못하였다.
내가 일찍이 《주관周官》과 《사마법司馬法》을 읽고서 군려軍旅(군대軍隊)에 있어 십오什伍를 알았는데, 그 뒤에 관이오管夷吾(관중管仲)의 책을 읽고서 또 《관자管子》가 나라의 제도를 변경한 것임을 알았다.
왕자王者의 군대는 부득이하여 출동하고, 적을 이기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군대를 운용하는 방법이 요컨대 적이 우리를 패퇴시킬 수 없음에 있을 뿐인데, 제 환공齊 桓公진 문공晉 文公에 이르러서는 승리를 결단하지 않으면 패업霸業을 이룩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 방법이 필승必勝에 있었으니, 군제軍制 가운데 내용이 번다繁多하여 위곡委曲한 것은 적이 우리를 패퇴시킬 수 없게 하려는 것이요, 간결하여 분명한 것은 필승을 하려는 것이었다.
나라의 군제軍制는 12,500명을 1으로 삼았다.
1만에 2천이 있는 것과 2천에 5백이 있는 것은 그 숫자가 남아서 똑 고르지 않으니, 오직 남아서 똑 고르지 않기 때문에 그 번다하고 위곡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하늘의 도수度數인 360을 12방위에 똑같이 배열하여 한 방위가 30을 얻는 것은 이것이 그 바른 수(정수正數)이고, 5일에 4분의 1이라는 것은 이것이 그 남는 수(기수奇數)이다.
만일 하늘의 도수度數에 이 남는 수가 없다면 천 년의 날짜를 비록 부인과 어린아이라도 앉아서 계산할 수 있겠지만, 남아서 똑 고르지 않기 때문에 역법曆法에 공교로운 자도 다 알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성인聖人이 이러함을 아셨다.
그러므로 , 을 만들어서 그 수를 다하고 그 변화를 지극히 한 것이다.
사마법司馬法》에 이르기를 “5명을 로 만들고, 5으로 만들고, 12,500명을 1으로 만든다.”라고 하였는데, 250명 중에서 10분의 3을 취하여 기병奇兵(유격대)으로 만들고, 나머지 10분의 7을 정병正兵으로 만들어서 4와 4의 8이 생겨난다.
12,500명을 가지고 8의 가운데에 똑 고르게 배합한다면 여기에 남는 것이 있어 똑 고르지 않음이 당연하다.
이 때문에 많은 곡절을 만들어서 그 수를 다하고 그 변화를 다하여 서로 연결되고 엉켜 있어서 각각 조리가 있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대三代가 흥성했을 적에 , 를 다스렸으나 모두 수십 년 내지 혹은 백 년이 지난 뒤에야 뜻을 얻어 천하天下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라가 망한 이후로 진법陣法삼대三代의 제도를 회복하지 못했는데, 그 후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이 홀로 남겨진 제도를 알고서 이것을 이용하여 천하天下를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촉한蜀漢양군兩軍이 몇 년 동안 서로 대치하면서, 나라 사람들은 감히 결전하지 못하였고 제갈공명諸葛孔明 또한 끝내 한 치, 한 자의 공도 세우지 못했으니, 아마도 8선왕先王께서 이 우리를 패퇴시킬 수 없게 한 것이요, 이익을 좇고 승리를 다투게 한 것은 아니었는가 보다.
그런데 관중管仲이 군대를 통제한 것으로 말하면 분명하여 알기 쉽다고 이를 수 있다.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서 삼군三軍을 만들었는데, 5명을 로 하여 에는 을 두고, 10로 하여 에는 를 두고, 4으로 하여 에는 을 두고, 10으로 하여 에는 향량인鄕良人을 두고, 5을 1로 하여 1만 인萬 人을 1으로 편제하였다.
그리하여 환공桓公은 이 가운데 한 를 거느리고 고자高子국자國子는 두 을 거느려서 삼군三軍의 3만 명이 마치 끈으로 꿴 것과 같고 바둑판을 그린 것과 같아서, 소창疏暢하고 통달하여 비록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그 공교로운 계책을 쓸 수 없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법령이 간결하고 한결같으며 백성들이 여력이 있어서 사력을 다 바쳤던 것이다.
옛날 내가 일찍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읽고 ‘좌구명左丘明이 가장 병법兵法을 좋아하였다.’라고 생각하였다.
삼대三代의 제도가 열국列國에 이르러서도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은 하찮은 나라의 어리진魚麗陣아진鵞陣관진鸛陣이 이 책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중管仲환공桓公을 도와 남쪽으로 나라를 정벌하고 북쪽으로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고 제후諸侯들을 규합하여 위엄이 천하를 진동하였으나, 그 군루軍壘진법陣法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아마도 관중管仲이 1년 또는 몇 달 안에 천하를 복종시키고자 해서 옛날 《사마법司馬法》을 변경하여 이처럼 간결하고 속전속결할 수 있는 군대를 만들었던 듯하다.
이 때문에 그 진법을 볼 수 없는 것이리라.
그 뒤에 나라와 나라가 황지黃池에서 맹주盟主의 자리를 놓고 다툴 적에 왕손웅王孫雄오왕 부차吳王 夫差에게 3만 명을 거느리고 진군晉軍의 보루를 압박하여 을 치되, 100명을 1으로 만들고 100을 1으로 만들어서 이 모두 으로 통하여 은폐되는 바가 없게 하고, 북채를 당겨 북을 쳐서 용감한 병사와 겁쟁이 병사가 모두 싸움에 응하게 하여 삼군三軍이 모두 시끄럽게 떠들며 기세를 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나라 군대가 크게 놀라서 나라가 끝내 뜻을 얻어 승리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관찰하건대 군제軍制가 간결하고 분명하지 않다면 승리를 결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깊이 생각하건대, 후세에서는 번다하고 간결한 군제軍制의 마땅함을 알지 못해서 패망을 취하였으니, 삼대三代십오什伍의 숫자와 관자管子(관중管仲)가 나라의 군대를 다스린 것을 비록 다 따를 수는 없으나, 번다繁多하여 위곡委曲함에 가까운 제도를 가지고 굳게 나라를 지키고, 간결하여 분명함에 가까운 제도를 가지고 결전을 한다면, 거의 상대방이 우리를 패퇴시킬 수 없을 것이요, 반드시 승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역주
역주1 管仲論 二 : 이 글은 郎曄의 《經進東坡文集事略》 〈進論〉에 실려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이 嘉祐 5년(1060)에 올린 50편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저작 연도는 미상이다.
역주2 周官司馬法 : ‘周官’은 책의 이름으로 《周禮》라고도 부르는데, 周나라의 관직 제도를 기술한 내용이며, 周公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班固의 《漢書》 〈藝文志〉에 처음으로 《周官》을 《周禮》로 고쳐 불렀는데, 이후 흔히 《周禮》로 칭해진다. 이 책은 후세의 吏部인 冢宰와 戶部인 司徒, 禮部인 宗伯, 兵部인 司馬, 刑部인 司寇가 있으며, 工部인 司空은 원래 빠져 있던 것을 漢代의 《考工記》로 대체하였다. 唐나라 때에 이를 원조로 六典을 제정하자, 여러 왕조에서 인습하였는데, 이 가운데 司馬에 軍의 편제 등이 수록되어 있다.
《司馬法》은 《司馬穰苴兵法》으로도 불리는데, 춘추시대에 齊나라의 大司馬인 田穰苴가 지은 병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증에 의하면 실제로는 전국시대 齊 威王 때에 여러 대부들이 옛날의 병법을 모아 엮으면서 司馬穰苴의 병법을 덧붙였다고 한다. 書錄家들에 의하면 “춘추시대는 三代와 멀지 않기 때문에, 남아 있는 軍制 등을 이 책에서 볼 수 있다.”라고 한다.
역주3 什伍之數 : 군대를 편성하는 대오의 數를 이른다. 상고시대에는 군대를 편성함에 있어 5의 숫자를 기초로 하여 5명마다 伍長을 두고 10명마다 什長을 두고 25명마다 隊正을 두었으며, 750명을 1旅, 2,500명을 1師, 12,500명을 1軍으로 편성하였다.
역주4 管夷吾書 : 춘추시대 齊나라 管仲이 지은 《管子》를 이르며, 夷吾는 管仲의 이름이다. 원본은 86편이나 현재 76편만이 전한다. 軍制뿐만 아니라 法家의 사상과 經濟政策이 주로 서술되어 있고, 기타 道家․名家의 사상과 天文․曆數․地理․農業까지도 언급되어 있다.
역주5 天度三百六十……此其奇也 : 天度는 周天의 度數로, 하늘의 별자리를 가지고 이것을 추측하는데, 고대에는 天體를 365度와 4분의 1度 즉 365.25度로 보고 천체가 하루에 한 번씩 공전한다고 생각하였다.
《書經》 〈虞書 堯傳〉에 “朞年은 366일이니, 윤달을 사용하여야 四時를 정하고 한 해를 이루어 진실로 百官을 다스려서 모든 공적이 다 넓혀질 것이다.[朞 三百有六旬有六日 以閏月 定四時成歲 允釐百工 庶績咸熙]”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朱子의 《書經集傳》에 “天體는 지극히 둥그니, 주위가 365度와 4분의 1度이다. 天體는 땅을 왼쪽으로 한 바퀴 돌되 항상 하루에 한 바퀴를 돌고 1度를 더 가며, 해는 하늘에 걸려 있는데 이보다 다소 늦다. 그러므로 해의 운행은 하루에 또한 땅을 한 바퀴 돌되 하늘에 있어 1度를 미치지 못하게 된다. 365일과 940분의 235일을 쌓아 하늘과 만나니, 이는 1년 동안 해가 운행하는 수이다.
달은 하늘에 걸려 있는데 더욱 느려서 하루에 항상 하늘보다 13度와 19분의 7度를 미치지 못한다. 29일과 940분의 499일을 쌓아 해와 만나니, 열두 번 만나면 온전한 날을 얻은 것이 348일이요 여분을 모은 것이 940분의 5,988이니, 날짜를 계산하는 법식에 940과 같이 하여 1일을 여섯 번 얻으면 나누어지지 않고 남는 수가 348이니, 얻은 날을 통틀어 계산하면 354일과 940분의 348일이 되니, 이는 1년 동안 달이 운행하는 수이다.
해에는 12개월이 있고 달에는 30일이 있으니, 360은 1년의 떳떳한 수이다. 그러므로 해가 하늘과 만날 적에는 5일과 940분의 235일이 더 많은데 이것을 氣盈이라 하고, 달이 해와 만날 적에는 5일과 940분의 592일이 적은데 이것을 朔虛라 하니, 氣盈과 朔虛를 합쳐서 윤달이 생긴다. 그러므로 1년에 윤달의 비율은 10일과 940분의 827일이 되니, 3년에 한 번 윤달을 두면 32일과 940분의 601일이 되고, 5년에 두 번 윤달을 두면 54일과 940분의 75일이 되며, 19년에 일곱 번 윤달을 두면 氣盈과 朔虛가 分限이 똑 고르게 되니, 이를 1章이라 한다.
그러므로 3년에 윤달을 두지 않으면 봄의 한 달이 여름으로 들어가서 철이 점점 정해지지 못하고, 子月(11월)의 한 달이 丑月(12월)로 들어가서 해가 점점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렇게 쌓인 것이 오래되어 세 번 윤달을 잃게 되면 봄이 다 여름으로 들어가서 철이 전혀 정해지지 못하고, 열두 번 윤달을 잃으면 子月이 모두 丑月로 들어가서 해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그 명칭과 실제가 괴리되고 추위와 더위가 뒤바뀌어 農桑의 모든 일이 다 때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남는 날짜를 가지고 윤달을 그 사이에 둔 뒤에야 四時가 어그러지지 않고 歲功이 이루어지니, 이로써 진실로 백관을 다스려서 모든 공적이 다 넓혀지게 되는 것이다.[天體至圓 周圍三百六十五度四分度之一 繞地左旋 常一日一周而過一度 日麗天而少遲 故 日行一日亦繞地一周 而在天 爲不及一度 積三百六十五日九百四十分日之二百三十五而與天會 是一歲日行之數也 月麗天而尤遲 一日常不及天十三度十九分度之七 積二十九日九百四十分日之四百九十九而與日會 十二會 得全日三百四十八 餘分之積 又五千九百八十八 如日法九百四十 而一得六 不盡 三百四十八 通計得日 三百五十四九百四十分日之三百四十八 是一歲月行之數也 歲有十二月 月有三十日 三百六十者 一歲之常數也 故日與天會 而多五日九百四十分日之二百三十五者 爲氣盈 月與日會 而少五日九百四十分日之五百九十二者 爲朔虛 合氣盈朔虛而閏生焉 故一歲閏率 則十日九百四十分日之八百二十七 三歲一閏 則三十二日九百四十分日之六百單一 五歲再閏 則五十四日九百四十分日之三百七十五 十有九歲七閏 則氣朔分齊 是爲一章也 故三年而不置閏 則春之一月 入于夏而時漸不定矣 子之一月 入于丑而歲漸不成矣 積之之久 至於三失閏 則春皆入夏 而時全不定矣 十二失閏 子皆入丑 歲全不成矣 其名實乖戾 寒暑反易 農桑庶務 皆失其時 故必以此餘日 置閏月於其間 然後四時不差而歲功得成 以此信治百官而衆功皆廣也]”라고 하였다.
十二辰은 12地支로 12개월에 分屬시켰다. 天度에서 12地支에 30씩을 배정하면 총 360이 되니, 이것이 바른 수(正數)이고 남은 5와 4분의 1은 남는 수(奇數)가 된다. 또한 음력은 한 달에 30일씩 계산하여 1년을 360일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작은 달이 있어 354일 남짓하여 윤달을 두지 않으면 天體를 맞출 수 없다. 氣盈과 朔虛는 365일하고 남는 것이 있어 생기는바, 지금 사용하고 있는 양력에 3년마다 2월을 29일로 하여 閏日을 두는 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옛날 陰曆은 12개월을 12方에 맞추어 배정하였는바, 北斗七星의 자루가 子方을 가리키는 달을 子月이라 하는데, 11월에 해당하며, 丑月은 12월, 寅月은 正月에 해당한다.
역주6 爲之章會統元……以極其變 : 章․會․統․元은 고대 역법의 용어이다. 19년에 7번 윤달을 두면 氣盈과 朔虛가 똑 고르게 되는데 이를 1章이라 한다. 1會는 27章을 이르고, 1統은 3會를 이르고, 1元은 3統을 이른다.
역주7 司馬法曰……四奇四正而八陣生焉 : 八陣은 원래 黃帝氏 때에 風后가 지은 여덟 가지 형태의 兵陣으로, 天ㆍ地ㆍ風ㆍ雲ㆍ虎翼ㆍ蛇蟠ㆍ飛龍ㆍ鳥翔이 있었는데, 諸葛亮이 이에 의거하여 洞當․中黃․龍騰․鳥飛․虎翼․折衝․衡․握機의 陣法을 만들었다고 한다. 위의 八陣 중에 虎翼․蛇蟠․飛龍․鳥翔를 四奇라 하고 天․地․風․雲을 四正이라 하는데, 전투에서 서로 陣을 치고 정면으로 대치하는 군대를 正이라 하고 매복하여 기습하는 유격부대를 奇라 한다.
역주8 鉤聯蟠踞 : 진법의 변화가 다채로워 종잡을 수 없음을 묘사한 것이다. 갈고리와 띠가 연결된 듯하고 뱀과 용이 웅크리고 서려 있는 듯하여 변화무쌍함을 말한 것이다.
역주9 諸葛孔明獨識其遺制 : 諸葛孔明은 삼국시대 蜀漢의 諸葛亮으로 孔明은 그의 字인데, 諸葛亮이 삼대의 陣法에 관한 제도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東坡志林》에 “諸葛孔明이 魚腹浦 平沙 위에 八陣圖를 만들었다. 돌을 쌓아 8行을 만들었는데 각 行 사이의 거리는 두 길이다.”라고 하였고, 《寰宇記》에 “八陣圖는 奉節縣 서남쪽 7里에 있다.”라고 하였다.
역주10 公將其一 高子國子將其二 : 이 내용은 《管子》에 “管子가 이에 나라를 21개의 鄕으로 나누었는데, 工과 商의 鄕이 여섯이고, 士의 鄕이 열다섯이었다. 이 가운데에 公이 5鄕을 통솔하고, 國子가 5鄕을 통솔하고, 高子가 5鄕을 통솔하였다.”라고 보인다. 5鄕은 1軍으로 군주인 桓公이 직접 지휘하였으며, 國子와 高子는 齊나라의 대부들인데 이들에 관한 자세한 인적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역주11 魚麗鵞鸛之陣 : 魚麗陣과 鵞陣과 鸛陣으로 모두 고대의 陣法이다. 魚麗陣은 전차부대가 앞서면 보병부대가 뒤따르면서 마치 물고기 떼가 가듯이 촘촘하게 전차의 사이를 연결하는 陣法이다.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桓公 5년에 “曼伯이 右拒의 將을 맡고, 祭仲足이 左拒의 將을 맡고, 原繁과 高渠彌가 中軍將으로 鄭 莊公을 호위하면서 魚麗陣을 만들어 偏을 앞에, 伍를 뒤에 배치하여 偏의 빈틈을 伍가 彌縫하게 하였다.[曼伯爲右拒 祭仲足爲左拒 原繁高渠彌以中軍奉公 爲魚麗之陳 伍承彌縫]”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杜預는 《春秋左氏經傳集解》에서 “司馬法에 ‘車戰에는 25乘으로 한 偏隊를 만들어 수레를 앞에, 伍를 뒤에 배치하여 偏隊와 偏隊 사이에 공간이 생기면 伍가 뒤따라가며 그 공간을 彌縫한다.’고 하였다. 5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伍라고 한다. 이것이 아마도 魚麗陣法인 듯하다.[司馬法 車戰二十五乘爲偏 以車居前 以伍次之 承偏之隙而彌縫闕漏也 五人爲伍 此蓋魚麗陣法]”라고 해설하였다.
鵞陣과 鸛陣은 《春秋左氏傳》 昭公 21년에 “〈宋나라 華督이 난을 일으키자〉 11월 癸未日에 宋나라 公子 成이 晉나라 군대를 이끌고 오니, 曹나라 翰胡가 晉나라 荀吳, 齊나라 苑何忌, 衛나라 公子 朝와 회합하여 宋나라를 구원하였다. 丙戌日에 華氏와 赭丘에서 전투하였는데, 鄭翩은 鸛陣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그 御者는 鵞陣을 펼치고자 하였다.”라고 보인다. 그러나 陣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鄭翩은 華氏의 무리였다.
역주12 九合諸侯 : 《論語》 〈憲問〉에 “齊 桓公이 諸侯들을 규합하되 兵車를 쓰지 않은 것은 管仲의 힘이었다.[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라고 보이는데, 九合은 아홉 번 제후들을 모은 것으로 보기도 하고, 九를 糾와 통용하는 것으로 보아 糾合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朱子는 糾合으로 풀이하였다.
역주13 吳晉爭長於黃池 : 黃池는 지명으로 지금 河南省 封丘縣 남쪽 지역이다. 魯 哀公 13년 여름에 晉 定公과 吳王 夫差 등이 黃池에서 會盟하였는데, 이때 定公과 夫差가 서로 맹주의 자리를 다투었다. 《春秋左氏傳 哀公 13년》
역주14 王孫雄 : 吳나라 대부로 夫差의 심복이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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