此一事는 予未嘗躬爲相度이나 覽睹當時所遺利害하니 而其言自有次하야 若指掌하니라
臣謹按史記호니 秦始皇三十(六)[七]年에 東游至錢塘하야 臨浙江하니 水波惡하야 乃西去二十里하야 從狹中渡라하니이다
始皇帝以天下之力으로 徇其意하야 意之所欲出이면 赭山橋海無難이어늘 而獨畏浙江水波惡하야 不敢徑渡하니 以此로 知錢塘江은 天下之嶮이 無出其右者니이다
自溫, 台, 明, 越往來者
는 皆由
徑渡
하야 不涉浮山之嶮
하야 時有覆舟
나 然尙希少
어니와
自衢, 睦, 處, 婺, 宣, 歙, 饒, 信及福建路八州往來者는 皆出入龍山하야 沿泝此江하니 江水灘淺하야 必乘潮而行이니이다
潮自海門東來하야 勢若雷霆하고 而浮山이 峙於江中하야 與魚捕諸山相望하야 犬牙錯入하야 以亂潮水하니
洄洑激射하야 其怒自倍하고 沙磧轉移하야 狀如鬼神이니이다
往往於淵潭中에 湧出陵阜十數里라가 旦夕之間에 又復失去하니 雖舟師沒人이라도 不能前知其深淺이라
老弱叫號하야 求救於湍沙之間하나 聲未及終에 已爲潮水卷去하니 行路爲之流涕而已니이다
縱有勇悍敢往之人이나 又多是盜賊이 利其財物하야 或因而擠之하야 能自全者 百無一二하니 性命之外에 公私亡失이 不知一歲에 凡幾千萬이니이다
而衢, 睦等州는 人衆地狹하야 所産五穀이 不足於食일새 歲常漕蘇, 秀米하야 至桐廬하야 散入諸郡하며 錢塘億萬生齒 待上江薪炭而活이어늘
以浮山之嶮하야 覆溺留礙之故로 此數州薪米常貴하니이다
又衢, 婺, 睦, 歙等州와 及杭之富陽, 新城二邑은 公私所食鹽이 取足於杭, 秀諸場이어늘
以浮山之嶮하야 覆溺留礙之故로 官給脚錢甚厚하야 其所亡失과 與依託風水以侵盜者를 不可勝數하니 此最其大者요
臣伏見호니 宣德郞前權知信州軍州事侯臨이 因葬所生母於杭州之南蕩하야 往來江濱하야 相視地形하며 訪問父老하고 參之舟人하야 反覆講求하야 具得其實하고 建議호되
自浙江上流地名石門으로 竝(傍)山而東하야 或因斥鹵棄地하야 鑿爲運河하고 引浙江及谿谷諸水하면 凡二十二里有奇니 以達於江하고
又竝江爲岸호되度潮水所向則用石하고 所不向則用竹하면 大凡八里有奇니 以達於龍山之大慈浦하니이다
自大慈浦로 北折하야 抵小嶺下하야 鑿嶺六十五丈하야 以達於嶺東之古河하고 因古河하야 稍加浚治하야 東南行四里有奇하야 以達於今龍山之運河하야
度用錢十五萬貫
하고 用
三千人
이면 二年而成
이라하니이다
臣與前轉運使葉溫叟와 轉運判官張璹으로 躬往按視하니 皆如臨言하니이다
凡福建兩浙士民이 聞臣與臨이 欲奏開此河하고 萬口同聲하야 以爲莫大無窮之利라하니
臣縱欲不言이나 已爲衆論所迫하야 勢不得黙已니이다
臣聞之父老
호니 에 以江水有
之嶮
이라하야 內出錢數十萬貫
하사 築長蘆
하고 起僧舍
하야 以拯溺者
하시고
又見先帝以長淮之嶮이라하야 賜錢十萬貫과 米十萬石하사 起夫九萬二千人하야 以開龜山河하시니이다
今浮山之嶮은 非特長蘆龜山之比요 而二聖仁慈하사 視民如傷하시니 必將捐十五萬緡하야 以平此積嶮也하시리이다
謹昧死하고 上臨所陳開石門河利害事狀一本과 及臣所差觀察推官董華 用臨之說하야 約度功料及合用錢物料狀一本과 幷地圖一面하오니
伏乞降付
看詳
하시고 或召臨赴省
하야 面加質問
하시고 仍乞下本路監司
어나 或更特差官
하야 同共相視
케하소서
若臣與臨言不妄이어든 乞自朝廷擘畫하야 支賜錢物施行하소서
臣觀古今之事호니 非知之難이요 言之亦易나 難在成之而已니이다
臨之才幹은 衆所共知니 臣謂 此河는 非臨이면 不成이라하노니
伏望 聖慈는 特賜訪問左右近臣하시면 必有知臨者하리이다 乞專差臨하야 監督此役하소서
不惟救活無窮之性命하고 完惜不貲之財物이라 又使數州薪米流通하야 田野市井이 詠歌聖澤하야 子孫不忘하리이다
05. 석문하石門河를 개통할 것을 살피시기를 청한 글
이 한 가지 일은 내가 일찍이 직접 살펴보지는 못했으나 당시에 남겨 놓은 이해를 살펴보니, 그 말이 본래 차례가 있어서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리키는 것처럼 분명하다
신臣이 삼가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記〉를 살펴보니 “진시황秦始皇 37년(B.C. 210)에 동쪽으로 유람하다가 전당錢塘에 이르러 절강浙江에 도착하였는데, 파도가 험악하여 마침내 서쪽으로 20리를 가서 좁은 곳을 따라 강을 건넜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시황秦始皇은 천하의 힘으로 자기의 뜻을 따라 마음에 하고자 하는 것이면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고 바다에 다리를 놓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유독 절강浙江의 물결이 험악함을 두려워해서 감히 곧바로 건너지 못했으니, 이로써 전당강錢塘江의 험함이 천하에 제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臣이 예전에 이 고을의 통판通判을 지냈었고 이제 또다시 군郡을 맡게 되었는데, 20년 동안 배가 전복되고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직접 본 것이 무수히 많습니다.
온주溫州, 태주台州, 명주明州, 월주越州로부터 왕래하는 자들은 모두 서흥진西興津에서 곧바로 강을 건너 부산浮山의 험함을 거치지 않으므로 때로 배가 전복되는 경우가 있으나 그래도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구주衢州, 목주睦州, 처주處州, 무주婺州, 선주宣州, 흡주歙州, 요주饒州, 신주信州와 복건로福建路의 여덟 주州로부터 왕래하는 자들은 모두 용산龍山을 출입하여 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강물이 여울지고 얕으므로 반드시 조수潮水가 들어왔을 때를 틈타서 배가 다닙니다.
조수潮水는 해문海門의 동쪽에서 몰려와서 기세가 천둥 벼락과 같고 또 부산浮山이 강 가운데에 우뚝 솟아 어포魚捕 등의 여러 산과 서로 마주하였는데 개의 이빨처럼 들쭉날쭉하여 조수潮水를 어지럽힙니다.
이 때문에 조수潮水가 소용돌이치고 분탕쳐서 그 격한 기세가 저절로 곱절이 되고 모래톱이 옮겨가서 모습이 귀신처럼 갑자기 있다가 없어졌다가 합니다.
때때로 깊은 못 가운데에 구릉이 십수 리나 솟아 나왔다가 하루아침, 하루저녁 사이에 또다시 없어지곤 하니, 비록 뱃사공과 잠수부라도 그 깊이를 미리 측량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민民과 관官의 배들이 전복되고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그저 앉아서 보기만 할 뿐 어찌하지를 못합니다.
노약자들이 울부짖으며 여울과 모래톱 사이에서 구원을 요청하나 그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미 조수潮水에 휩쓸려 가니, 길을 가던 자들이 이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비록 용맹스럽고 겁이 없어 과감히 구원하러 건너가는 사람이 있으나, 또 대부분 도적들이 그 재물을 탐내기 때문에 물속으로 사람을 떠밀어서 스스로 온전한 자가 백 명에 한두 명도 되지 않으니, 인명피해 말고도 공사公私간에 망실亡失된 것이 1년에 모두 몇천인지 몇만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구주衢州와 목주睦州 등지에는 거주하는 백성이 많고 농지가 좁아서 생산되는 오곡五穀이 먹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해마다 항상 소주蘇州와 수주秀州의 쌀을 조운漕運하여 동려桐廬에 이르러 여러 고을로 나누어 들여가며, 전당錢塘에 사는 수많은 백성들은 상강上江의 땔감과 숯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산浮山이 매우 험하여 배를 전복시키고 사람을 빠지게 해서 조운이 지체되기 때문에 이 몇 고을은 땔감과 쌀이 항상 부족합니다.
또 구주衢州, 무주婺州, 목주睦州, 흡주歙州 등의 고을과 항주杭州의 부양富陽, 신성新城 두 고을은 공사公私간에 필요한 소금을 항주杭州와 수주秀州의 여러 시장에서 구입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산浮山이 험하여 배를 전복시키고 사람을 빠지게 해서 조운이 지체되기 때문에 관官에서 지급하는 각전脚錢(운반비)이 매우 많아서 이로 인한 손실이 크며, 또 풍해와 수해를 핑계로 간사한 자들이 침해하고 도둑질하는 것을 이루 다 셀 수 없으니, 이것이 가장 큰 것입니다.
그 밖에도 공사公私간의 이해를 일일이 다 셀 수가 없습니다.
신臣이 엎드려 보니, 선덕랑 전임宣德郞 前任 권지신주군주사 후림權知信州軍州事 侯臨이 항주杭州의 남탕南蕩에 생모生母를 장례하느라 강가를 왕래하면서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며, 부로父老들에게 물어보고 뱃사공들에게 참고해서 반복하여 강구함으로써 그 실정을 자세히 알고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습니다.
“절강浙江의 상류에 있는 석문石門이란 곳으로부터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혹 갯벌의 버려진 땅을 이용하여 땅을 파서 운하를 만들고 절강浙江과 계곡의 여러 물을 끌어오면 거리가 모두 20여 리 남짓하니, 이렇게 해서 선박이 절강浙江에 도달하게 합니다.
그리고 또 강을 따라 강안江岸을 만들되 살펴보아 조수潮水가 향하는 곳에는 돌을 사용하여 축조하고 조수潮水가 향하지 않는 곳에는 대나무를 사용하면 거리가 대체로 8리 남짓하니, 이렇게 해서 선박이 용산龍山의 대자포大慈浦에 도달하게 합니다.
그리고 대자포大慈浦에서 북쪽으로 꺾어서 작은 고개 아래에 이르러 산 65장丈을 뚫어서 고개 동쪽의 고하古河에 도달하게 하고, 고하古河를 이용하되 약간 준설하여 동남쪽으로 4리 남짓을 가서 지금 용산龍山의 운하에 도달하게 합니다.
이렇게 하면 부산浮山의 험함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헤아려보건대 15만 관貫의 비용을 쓰고 한강병捍江兵 및 여러 군郡의 상군廂軍 3천 명을 동원할 경우, 2년이면 새로운 뱃길을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신臣이 전임 전운사前任 轉運使 섭온수葉溫叟와 전운판관 장숙轉運判官 張璹과 함께 직접 가서 살펴보니, 모두 후림侯臨의 말과 같았습니다.
복건로福建路와 절동浙東, 절서로浙西路의 모든 사민士民들은 신臣과 후림侯臨이 상주하여 이 운하를 개통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모든 사람이 한 목소리로 “더없이 크고 무궁한 이익이다.”라고 말하니,
신臣이 비록 말씀드리고 싶지 않더라도 이미 중론衆論에 떠밀려서 형편상 침묵하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臣이 부로父老에게 들으니, 장헌황후章獻皇后께서 임조臨朝하시던 시기에 “양자강에 황천탕皇天蕩의 험함이 있다.” 하여 내탕전內帑錢 수십만 관貫을 내시어 장로長蘆라는 제방을 쌓고 여기에 사찰을 세우셔서 물에 빠져 죽는 자들을 구원하게 하셨다 하였습니다.
또 보니 선제先帝(신종神宗)께서 장강長江(양자강)과 회하淮河가 험하다 하여 돈 10만 관貫과 쌀 10만 석石을 하사하셔서 인부 9만 2천 명을 동원하여 구산하龜山河를 개통(준설)하셨습니다.
지금 부산浮山의 험함은 다만 장로長蘆와 귀산龜山에 비할 바가 아니요, 두 분 성인聖人께서는 인자하셔서 백성들을 아끼시어 행여 다칠새라 여기시니, 반드시 장차 15만 민緡을 출연하셔서 이 오래된 험함을 평탄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에 삼가 죽을죄를 무릅쓰고, 후림侯臨이 아뢰었던 석문하石門河를 개통하는 이해를 논한 글 한 편과 신臣이 파견한 관찰추관 동화觀察推官 董華가 후림侯臨의 말에 따라 공임과 필요한 경비 및 물료物料(자재비)를 대략 계산한 문서 한 편과 아울러 지도 한 면을 올립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이것을 삼성三省에 회부하셔서 자세히 살펴보게 하시고, 혹 후림侯臨을 중서성中書省으로 불러서 대면하여 질문하시고, 이어서 본로本路의 감사監司에게 하명하거나 혹은 특별히 관원을 파견해서 함께 살펴보게 하소서.
만약 신臣과 후림侯臨의 말이 망령되지 않다면 조정에서 계획하여 돈과 물자를 지급해서 시행하게 하소서.
신臣이 고금의 일을 살펴보니,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말하는 것도 쉬우나 일을 이루는 것이 어려울 뿐입니다.
후림侯臨의 재간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인정하는 바이니, 신臣은 이 운하의 건설은 후림侯臨이 아니면 이룰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엎드려 바라건대 성스럽고 인자하신 폐하께서는 특별히 좌우의 근신近臣들에게 두루 물으시면 반드시 후림侯臨을 잘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니, 청컨대 오로지 후림侯臨에게 위임하시어 이 공사를 감독하게 하소서.
이렇게 되면 비단 무수한 생명을 구제하여 살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물을 온전히 지킬 뿐만 아니라, 또 여러 주州의 땔감과 쌀을 유통시킬 수 있어서 전야田野와 시정市井의 백성들이 성상聖上의 은혜를 노래하고 읊어 자손들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신臣은 큰 소원을 이길 수 없어서 삼가 기록하여 상주上奏하고 엎드려 칙지勅旨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