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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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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소공蘇公 往往有此一段曠達處하나 却於진태수陳太守 少回護하니라
하니 宜若起居飮食남산接也
이요이라 以至近으로 求最高 其勢必得이어늘태수太守之居 未嘗知有종남산하니
雖非事之所以損益이나 而物理有不當然者하니 此凌虛之所爲築也
方其未築也 杖屨逍遙於其下라가
見山之出於林木之上者 纍纍如人之旅行於墻外而見其髻也하고 曰 是必有異라하고
使工鑿其前하야 爲方池하고 以其土築臺하야 高出於屋之簷而止하니
然後 人之至於其上者 怳然不知臺之高하고 而以爲山之踊躍奮迅而出也
公曰 是宜名凌虛라하고 以告其종사관從事蘇軾하야 而求文以爲記하니라
復於公曰
物之廢興成毁 不可得而知也
昔者 荒草野田 霜露之所蒙翳狐虺之所竄伏이니 方是時 豈知有凌虛臺耶리오
廢興成毁 相尋於無窮하니 則臺之復爲荒草野田 皆不可知也
嘗試與公登臺而望하니 其東則 其南則이요 而其北則
計其一時之盛컨댄 宏傑詭麗하고 堅固而不可動者 豈特百倍於臺而已哉리오
然而數世之後 欲求其髣髴이나 而破屋頹垣 無復存者하야 旣已化爲禾黍荊棘 丘墟隴畝矣어든 而況於此臺歟잇가
夫臺猶不足恃以長久어든 而況於人事之得喪 忽往而忽來者歟잇가
而或者欲以夸世而自足則過矣
旣已言於公하고 退而爲之記하니라


06. 능허대凌虛臺에 대한 기문記文
소공蘇公이 이처럼 광달曠達한 부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진태수陳太守에게는 회호回護(비호庇護)함이 적었다.
남산南山의 아래에 를 지으니, 기거起居하고 먹고 마심에 마치 과 접할 듯하였다.
사방의 중에 종남산終南山보다 더 높은 이 없고, 도읍 중에 과 근접해 있기로는 부풍扶風보다 더 가까운 곳이 없으니, 지극히 가까운 것으로 가장 높은 을 구하면 그 형세가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인데, 태수太守가 거처할 적에 일찍이 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이는 비록 일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사물의 이치에 당연하지 않은 점이 있으니, 이것이 능허대凌虛臺를 쌓은 이유이다.
능허대凌虛臺를 쌓기 전에 태수 진공太守 陳公이 그 아래에서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걷고 소요하다가,
이 숲 위로 우뚝하게 나온 것이 마치 사람들이 담 밖으로 지나갈 적에 옹기종기 상투가 보이는 것과 같음을 보고는 “반드시 특이한 볼거리가 있을 것이다.”라 생각하고,
공인工人들로 하여금 그 앞을 파서 네모진 못을 만들고, 여기에서 나온 흙을 가지고 를 쌓아 의 높이가 지붕의 처마를 벗어나게 하고 그쳤다.
이렇게 한 뒤에는 이곳에 오르는 자들이 어리둥절하여 가 높아진 것은 알지 못하고 이 솟구쳐 달려 나왔다고 여겼다.
은 “이것은 마땅히 능허대凌虛臺라고 이름하여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종사관從事官인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으라고 하였다.
나는 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물건이 폐하고 흥하고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옛날에는 황폐한 풀과 들밭이 서리와 이슬에 덮여 있었고 여우와 뱀이 숨어 있던 곳이었으니, 이때에 어찌 능허대凌虛臺가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폐하고 흥하고 이루어지고 허물어짐이 서로 이어져 무궁하게 순환하니, 이 가 다시 황폐한 풀과 들밭이 될지를 모두 알 수 없습니다.
내 일찍이 과 누대에 올라가 바라보니, 동쪽은 진 목공秦 穆公기년궁祈年宮탁천궁槖泉宮이요, 남쪽은 한 무제漢 武帝장양궁長楊宮오작궁五柞宮이며, 북쪽은 나라의 인수궁仁壽宮이요 나라의 구성궁九成宮이 있었습니다.
그 한때의 성함을 헤아려보면 크고 웅장하고 화려하고 견고하여 동요할 수 없음이 어찌 다만 이 보다 백배만 될 뿐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몇 대가 지난 후에 대충 비슷한 모습이라도 찾고자 하나, 깨진 기왓장과 무너진 담도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이미 기장밭과 가시덩굴과 폐허와 밭두둑이 되었으니, 하물며 이 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도 장구함을 믿을 수 없는데, 하물며 갑자기 갔다가 갑자기 오는 인사人事의 득실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런데도 혹자들은 이것(부귀영화)을 세상에 과시하고 스스로 만족하고자 하니, 이는 잘못입니다.
세상에 믿을 만한 것이 있으나 의 있고 없음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에게 말씀드리고 나서 물러나와 이것을 기록하였다.


역주
역주1 凌虛臺記 : 이 글에 대하여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 4권에 “嘉祐 8년 4월에 太守 陳希亮이 菜園 뒤에 凌虛臺를 세우고 南山을 조망하였는데, 東坡公에게 記文을 쓰게 하니, 公이 이를 인하여 풍자하였다.”라고 보인다.
凌虛는 하늘을 오른다는 뜻이다. 嘉祐 8년 정월에 東坡를 몹시 아끼던 太守 宋選이 물러나고 陳希亮이 부임하였는데, 陳希亮의 성격이 剛正하여 자유분방한 東坡와 여러 번 충돌이 있었다. 이 때문에 東坡가 〈凌虛臺記〉를 쓰면서 은근히 太守를 풍자한 것인데, 나중에 陳希亮의 진심을 알고 후회하였다고 한다.
郎曄의 《經進東坡文集事略》 48권의 注에 의하면 東坡가 〈凌虛臺記〉를 지어 올리자, 陳希亮은 “내가 蘇明允(蘇洵) 보기를 아들처럼 여기고 蘇軾을 손자처럼 여긴다. 그런데 내 평일에 말소리와 얼굴빛을 너그럽게 하지 않은 까닭은 蘇軾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큰 이름을 얻으니, 너무 가득 차서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서였다. 내 이제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하고는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빨리 碑石에 새기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陳希亮이 東坡로 하여금 이 글을 짓게 한 사실이 《古文眞寶後集》의 〈凌虛臺記〉 아래에 보이므로 함께 수록하며, 여기에 실려 있는, 이 글에 대한 評을 끝에 附錄한다.
○ 陳希亮은 자가 公弼인데 剛正한 사람이었다. 嘉祐 연간에 鳳翔府를 맡았는데 東坡가 처음 制科에 급제하여 簽書判官이 되었다. 이에 아전들이 東坡를 蘇賢良이라고 부르자, 陳公은 노하여 말하기를 “府의 判官이 무슨 賢良인가?” 하고는 그 아전을 곤장을 치고 돌아보지 않았다.
東坡가 齋醮祈禱文을 짓자, 公弼은 반드시 먹을 칠하여 고쳐서 여러 차례 오갔었는데, 東坡가 公弼을 위하여 〈凌虛臺記〉를 짓자 公弼이 이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내 蘇明允(蘇洵) 보기를 아들처럼 여기고 蘇軾을 손자처럼 여긴다. 그런데 내 평일에 말과 얼굴빛을 너그럽게 하지 않은 까닭은 蘇軾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큰 이름을 얻으니, 너무 가득 차서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서였다. 내 이제 즐겁지 않겠는가?” 하고는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빨리 碑石에 새기라고 명하였다.[陳希亮 字公弼 剛正人也 嘉祐中 知鳳翔府 東坡初擢制科 簽書判官事 吏呼蘇賢良 公怒曰 府判官 何賢良也 杖其吏不顧 坡作齋醮祈禱文 公弼必塗墨改正 數往返 至爲公弼作凌虛臺記 公弼覽之 笑曰 吾視蘇明允猶子也 軾猶孫也 平日不以辭色假之者 以其年少 暴得大名 懼夫滿而不勝也 乃不吾樂也 不易一字 亟命刻之石]
역주2 臺於南山之下 : 南山은 終南山으로 秦嶺山脈의 동쪽에 있는데, 長安(지금의 陝西省 西安)의 남쪽에 있다 하여 南山으로도 불린다.
역주3 四方之山 莫高於終南 : 終南山의 주봉은 해발고도 2,604m로 인근에서 가장 높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4 都邑之麗山者 莫近於扶風 : 終南山은 지금의 陝西省 咸陽 武功縣에 있는데, 당시의 扶風(鳳翔府)이 武功縣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古文眞寶後集》에는 ‘麗山’이 ‘最麗’로 표기되어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읽어야 하나, 麗山의 경우에는 ‘麗’를 ‘附’의 뜻으로 보아 音을 ‘리’로 읽어야 할 것이다.
역주5 太守陳公 : 陳希亮(1000~1065)으로 字가 公弼인데 眉州 靑神(지금의 四川省) 사람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23권의 〈陳公弼傳〉에 보인다.
역주6 秦穆之祈年槖泉 : 秦穆은 秦 穆公(?~B.C. 621)으로 姓은 嬴이고 이름은 任好인데 형인 成公을 이어 즉위하였다. 秦나라를 강성하게 하여 중원의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흔히 春秋時代 五霸의 하나로 꼽힌다. 祈年과 槖泉은 모두 秦나라 궁궐의 이름인데, 《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槖泉宮은 孝公(B.C. 362~B.C. 338) 때에, 祈年宮은 惠公(B.C. 400~B.C. 387) 때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역주7 漢武之長楊五柞 : 漢武는 漢 武帝 劉徹(B.C. 156~B.C. 87)인데 景帝의 11번째 아들로 즉위하고 사방을 정벌하여 漢나라의 영토를 가장 크게 넓혔으며, 《史記》와 《漢書》에 本紀가 있다. 長楊과 五柞은 모두 궁궐의 이름으로 지금의 陝西省 盩庢(주지)縣에 있었는데, 秦나라 때에 축조된 궁궐로 武帝가 離宮으로 사용하였다.
역주8 隋之仁壽 唐之九成 : 仁壽는 궁궐 이름으로 隋나라 재상 楊素가 文帝를 위하여 축조하였다고 한다. 楊素(?~606)는 隋나라의 재상으로 字가 處道이며 弘農 華陰 사람인데, 아버지 楊敷는 北周의 재상이었다. 楊素는 北周가 北齊를 평정할 적에 공을 세워 安縣公에 봉해졌으나, 아버지 楊敷가 北周의 武帝에게 숙청당하자 당시 北周의 재상으로 있던 楊堅(隋 文帝)을 도와 北周를 멸망시키고 隋나라를 건국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여 隋나라 개국 일등공신이 되고 재상이 되었다.
九成 또한 당나라 때의 궁궐 이름인데, 《新唐書》 〈地理誌〉에 “長安의 서쪽 5里에 九成宮이 있는데 이는 본래 隋나라 仁壽宮이었다.”라고 보인다.
역주9 世有足恃者 而不在乎臺之存亡 : 足恃는 충분히 믿을 만한 것으로 不朽를 가리킨다. 不朽는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업적으로 立德, 立功, 立言을 말한다. 立德은 훌륭한 德을 세우는 것이고, 立功은 훌륭한 功을 세우는 것이고, 立言은 훌륭한 文章을 남기는 것이다. 東坡가 여기서 말한 것은 文章을 가리킨 것으로, 자신은 文章을 잘하여 후대에 이름이 길이 남을 것이나 太守는 그렇지 못함을 풍자한 것이라 한다. 아래에 이 글에 대한 評을 함께 싣는다.
○ 嘉祐 8년 癸卯에 東坡의 나이 28세였는데 이 記文을 지었다. 그 起句는 우뚝하여 起句가 없는 듯하였고, 그 이하는 구절구절이 기묘하다. ‘누대에 올라 그 동쪽을 바라본다.’는 이하는 바로 習鑿齒가 그 아우에게 준 편지를 본뜬 것이다. 蘇東坡는 또 〈超然臺記〉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한 단락도 이 格調를 사용하였다. 뒤에 또 이것을 본뜬 자가 있으니, 汪彦章의 〈月觀記〉가 이것이다. 이제 모두 이 글을 뒤에 붙인다.
東坡가 陳公을 風切(風諫)한 것이 깊으니, 세상에 족히 믿을 만한 것은 立德, 立功, 立言의 세 不朽를 말함일 것이다. 이제 凌虛臺는 반드시 잡초가 우거진 들판이 되었을 것인데, 도리어 東坡의 文章에 힘입어 천년 동안 不朽로 남아 있으니, 이른바 족히 믿을 만하다는 것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嘉祐八年癸卯 坡時年二十八 作此記 起句突然 似乎無頭 自起以下 節節奇妙 登臺而望其東以下 乃法習鑿齒與其弟書 坡又作超然臺記 其中一段 亦用此格調 後又有法之者 汪彦章月觀記是也 今皆附見于後 坡所以風切陳公者 深矣 世有足恃者 立德, 立功, 立言三不朽之謂乎 今臺必爲荒草野田 而反賴坡之文章 以千載不朽 則所謂足恃者 豈不信然哉]
○ 習鑿齒가 그의 아우 秘에게 준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지난해 5월 3일에 襄陽으로 오니, 눈에 보이는 것마다 슬픈 감회가 들어서 조금도 기쁜 정이 없다. 매양 家舅(外叔)를 문안할 적마다 북문으로 들어오면서 서쪽으로 隆中을 바라보고는 臥龍(諸葛亮)의 詩 읊던 것을 생각하고, 동쪽으로 白沙를 보면서 鳳雛(龐統)의 목소리를 생각하며, 북쪽으로 樊墟에 임하여 鄧老(鄧禹)의 높음을 추억하고 남쪽으로 城邑을 바라보면서 羊公(羊祜)의 風度를 생각하며, 檀溪에 눈을 돌려 崔․徐(崔州平과 徐庶)의 벗을 생각하고, 漁梁을 바라보면서 二德(司馬德操(司馬徽)와 龐德公)의 먼 자취를 추모하니, 일찍이 배회하면서 날을 보내어 서글퍼함이 지극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東坡의 密州 〈超然臺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남쪽으로 馬耳山과 常山을 바라보면 산의 모습이 나왔다 없어졌다 숨었다 나타났다 해서 가까운 듯하다가 다시 먼 듯하니, 어쩌면 여기에 隱君子가 있는가 보다. 그 동쪽은 盧山이니 秦나라 사람 盧敖가 따라 은둔한 곳이요, 서쪽으로 穆陵을 바라보니 우뚝하여 성곽과 같은데, 스승 尙父와 齊 桓公의 遺烈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북쪽으로 濰水를 굽어보고 서글피 탄식하면서 淮陰侯(韓信)의 功을 생각하고 제대로 끝마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다.”
汪彦章은 劉季高를 위하여 〈鎭江月觀記〉를 지었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일찍이 그대와 사방을 돌아보니 그 동쪽은 海門인데 鴟夷子皮(伍子胥)가 은둔한 곳이요, 서쪽은 瓜步인데 魏佛貍(後魏 太武帝)가 일찍이 이르렀던 곳이며, 북쪽인 廣陵은 謝太傅(謝安)가 둑을 쌓고 거주하던 곳이요, 江中에 흐르는 물은 祖豫州(祖逖)가 노를 치며 나라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던 곳이다.
한때의 영웅들이 비분강개하여 中原을 회복하지 못하고 배반한 오랑캐들을 사로잡지 못함을 분해하여, 忠義의 기운으로써 삼켜 비록 우주를 좁게 여기고 九州를 작게 여겼으나, 그 흉중에 쌓인 바는 또한 江山의 유발함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런 것들을 취하여 몇 기둥 되는 땅에 넣어서 천 년 전의 일을 분명하게 내 눈 안에 있게 하려 하니, 季高의 높은 뜻을 알 수 있다.”[習鑿齒與其弟秘書曰 吾以去年五月三日 來達襄陽 觸目悲感 略無歡情 每定省家舅 從北門入 西望隆中 想臥龍之吟 東眺白沙 思鳳雛之聲 北臨樊墟 存鄧老之高 南睠城邑 懷羊公之風 縱目檀溪 念崔徐之友 肆眺漁梁 追二德之遠 未嘗不徘徊移日 惆悵極多云云 東坡密州超然臺記內 有曰南望馬耳常山 出沒隱見 若近若遠 庶幾有隱君子乎 而其東則盧山 秦人盧敖之所從遁也 西望穆陵 隱然如城郭 師尙父, 齊桓公之遺烈 猶有存者 北俯濰水 慨然太息 思淮陰之功而弔其不終 汪彦章 爲劉季高 作鎭江月觀記曰 嘗與子四顧而望之 其東曰海門 鴟夷子皮之所從遁也 其西曰瓜步 魏佛貍之所嘗至也 若其北廣陵 則謝太傅之所築埭而居也 江中之流 則祖豫州之所擊楫而誓也 計其一時英雄 慷慨憤中原之未復 反虜之未禽 欲呑之以忠義之氣 雖狹宇宙而隘九州 自其胸中所積 亦江山有以發之 今攬而納諸數楹之地 使千載之事 了然在吾目中 則季高之志 可見矣]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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