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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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或曰 魯郊 僭也 春秋譏焉이라하니 非也
魯郊 僭也로되 而春秋之所譏者 當其罪也
春秋之譏魯郊也인댄 上則譏成王이요 次則譏伯禽이라
成王, 伯禽 不見於春秋하니 而夫子無所致其譏也
無所致其譏而不譏者 春秋之所以求信於天下也
夫以魯而僭天子之郊하야 其罪惡 如此之著也어늘 夫子以爲無所致其譏而不譏焉이면 則其譏之者 固天下之所用而信之也니라
郊之書於春秋者 其類有三하니
譏郊之不時 而不譏郊也
非卜常祀 非養牲之不謹이요 非郊之不時 則不書하니 不書則不譏也
曰 不譏郊也라하노라
郊祀者 先王之大典이로되 而夫子不得見之於周也
因魯之所有天子之禮樂하야 而記郊之變焉耳
成十七年九月辛丑 用郊라한대 公羊傳曰 用者 不宜用者也 九月 非所用郊也라하고
穀梁傳曰 夏之始 猶可以承春이어니와 以秋之末 承春之始 蓋不可矣라하니라
且夫郊未有至九月者也하니 曰用者 著其不時之甚也
이라하고 皆無取焉이니라


02. 교제郊祭를 쓴 것에 대한 논 성공論 成公 17
선유先儒의 의논에 혹자는 말하기를 “나라가 교제郊祭를 지낸 것은 참람한 짓이니, 《춘추春秋》에 용교用郊라고 쓴 것은 참람한 짓을 비판한 것이다.”라고 하니, 이는 잘못된 것이다.
나라가 교제郊祭를 지낸 것은 참람한 짓이지만 《춘추春秋》에서 비판한 것은 그 죄를 받을 자가 따로 있는 것이다.
나라에게 천자天子예악禮樂을 준 자는 성왕成王이고 천자天子예악禮樂을 받은 자는 백금伯禽이니, 《춘추春秋》에서 만일 나라 교제郊祭를 비판했다면, 위로는 성왕成王을 비판한 것이 되고 다음으로는 백금伯禽을 비판한 것이 된다.
그런데 성왕成王백금伯禽이 《춘추春秋》에 보이지 않으니, 이것은 부자夫子께서 비판하실 곳이 없는 것이다.
비판하실 곳이 없으면 비판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천하天下로부터 신뢰받기를 바란 것이다.
나라가 참람하게 천자天子교사郊祀를 지내어 그 죄악이 이와 같이 드러났는데도 부자夫子께서 비판하실 곳이 없다고 여기시어 비판하지 않으셨다면, 《춘추春秋》에서 비판한 것은 진실로 천하天下 사람들이 함께 쓰고 믿는 것일 것이다.
교사郊祀를 《춘추春秋》에 기록한 것이 세 종류가 있다.
교사郊祀를 점쳤으나 불길不吉하자 마침내 희생을 놓아주었다.’라고 쓴 것은 상사常祀(정상적으로 지내는 제사)를 점친 것을 비판한 것이지 교제郊祭를 비판한 것이 아니며,
교제郊祭에 희생으로 쓸 소의 뿔을 생쥐가 갉아 먹고 또 교제郊祭에 희생으로 쓸 소의 입이 상하여 소를 다시 점쳐 다른 소를 선정하였다.’라고 쓴 것은 희생을 기르기를 삼가지 못함을 비판한 것이지 교제郊祭를 비판한 것이 아니며,
‘4월과 5월과 9월에 교제郊祭를 지냈다.’라고 쓴 것은 교제郊祭를 제때에 지내지 않은 것을 비판한 것이지 교제郊祭를 비판한 것이 아니다.
상사常祀를 점치는 경우가 아니고 희생을 기르는 데 삼가지 않은 경우가 아니고 교사郊祀를 제때에 지내지 않은 경우가 아니면 쓰지 않았으니, 쓰지 않았으면 비판하지 않은 것이다.
태묘太廟에서 제사를 지냈다.’라고 쓴 것은 부인夫人(애강哀姜)의 신주를 사당에 모셨기 때문에 쓴 것이고, ‘태묘太廟에 제사가 있었다.’라고 쓴 것은 중수仲遂가 죽었기 때문에 쓴 것이니, 《춘추春秋》에서 교제郊祭를 쓴 것은 이와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춘추春秋》에는 나라가 교제郊祭를 지낸 것을 비판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교사郊祀라는 것은 선왕先王의 큰 예전禮典인데, 부자夫子나라에서 이것을 볼 수가 없으셨다.
그러므로 나라가 소유한 천자天子예악禮樂을 인하여 교사郊祀의 변고를 기록했을 뿐이다.
성공成公 17년 9월 신축일辛丑日교제郊祭를 썼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는 이르기를 “이라는 것은 써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니, 9월은 교제郊祭를 쓸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는 이르기를 “여름의 시작(초여름)은 그래도 봄을 이을 수 있지만, 가을의 끝을 가지고 봄의 시작(초봄)을 잇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교사郊祀는 9월에까지 이른 경우가 있지 않았으니, 여기서 ‘’이라고 말한 것은 제때가 아님을 매우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두예杜預는 “용교用郊라고 쓴 것은 사관史官의 글을 따른 것이다.”라고 하였고, 혹자는 말하기를 “다른 곳에 먼저 제사한 뒤에 교제郊祭를 지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두 은 모두 취할 것이 못된다.


역주
역주1 用郊 成十七年 : 이 글은 東坡가 젊은 시절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本集에는 제목이 〈論用郊〉로 되어 있다. 《春秋》 成公 17년의 ‘九月辛丑 用郊’라는 기사에 대해 그 의미를 논한 것이다. 郊는 郊祭를 이른다. 郊祭는 天地에 지내는 제사로 冬至에는 하늘을 南郊에서 제사 지내고 夏至에는 땅을 北郊에서 제사 지냈는데, 이때 天帝에게 제사하면서 시조를 배향한다. 郊祭는 본래 天子의 禮인데 魯나라가 이를 행하였다.
역주2 先儒之論 : 누구의 論을 가리키는지 아직 고증되어 있지 않다.
역주3 賜魯以天子之禮樂者……伯禽也 : 成王은 周 武王의 아들로 이름이 誦인데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周公이 섭정하였다. 伯禽은 周公의 아들인데 周公이 魯나라에 봉해졌으나 冢宰로서 京師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 伯禽을 魯나라에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史記》 〈魯周公世家〉에 “武王은 殷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紂王의 아들인 武庚을 殷나라에 봉하고 아우인 管叔 鮮 등으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였다. 武王이 죽고 어린 成王이 즉위하자 周公이 冢宰로서 섭정을 하였다. 이에 管叔 鮮 등은 ‘周公이 어린 成王을 축출하고 임금이 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武庚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니, 周公이 이들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成王은 周公에 대한 의구심이 없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周公이 죽고 난 뒤 가을이 되었는데, 추수하기 전에 폭풍우와 벼락이 치면서 벼들이 모두 쓰러지고 큰 나무들까지 다 뽑히는 재변이 일어났다. 周나라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하니, 成王과 대부들이 朝服으로 차려입고 점을 치려고 하다가 金縢을 열고 周公이 武王을 대신해서 죽기를 선조들에게 간구하는 내용을 기재한 글을 읽게 되었다. 太公, 召公과 成王이 史官과 여러 관리들을 불러서 묻자, 史官과 관리들이 아뢰기를 ‘진실로 그렇습니다. 옛날에 周公께서 우리들에게 이 사실을 감히 발설하지 못하도록 명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成王은 이 글을 읽어보고, 周公이 국가를 위하여 얼마나 충성심이 지극했는가를 알고는 감탄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에 成王이 詔命을 내려 魯나라로 하여금 하늘에 郊祀를 드리고 文王에게 제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魯나라가 天子의 禮樂을 소유하게 된 것은 成王이 周公의 은덕을 기리고자 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金縢은 쇠사슬로 묶어 보관한 글인데, 《書經》 〈周書 金縢〉은 바로 이 내용을 기록한 글이다.
역주4 書卜郊不從……而不譏郊也 : ‘卜郊’는 郊祀를 지내는 것이 길한지의 여부에 대해 거북점을 친 것이다. ‘不從’은 不吉과 같다. ‘乃免牲者’는 거북점이 불길하였기 때문에 郊祀에 쓰기로 했던 犧牲을 놓아주고 郊祀를 지내지 않은 것이다. 常祀는 해마다 지내는 정상적인 제사를 이른다. 郊祀는 常祀이므로 희생과 날짜만을 점쳐야 한다.
이 내용은 《春秋》 僖公 31년 “여름 4월에 네 번 卜郊하였으나 모두 不吉하자 희생을 놓아주고, 오히려 세 곳에 望祭를 지냈다.[夏四月 四卜郊 不從 乃免牲 猶三望]”라고 보인다.
그러나 杜預는 成公 10년조의 經文의 “여름 4월에 다섯 차례 卜郊하였으나 불길하니 郊祀를 지내지 않았다.[夏四月 五卜郊 不從 乃不郊]”라고 한 것에 대해 “해마다 지내는 제사에 점을 친 것과 郊祀를 지내지 않은 것은 모두 禮가 아니다. 그러므로 기록한 것이다.”라고 注하였다.
역주5 鼷鼠食郊牛角……而不譏郊也 : ‘鼷鼠’는 생쥐를 이른다. 옛사람들은 생쥐가 사람이나 가축을 갉아 먹기를 잘하나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한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생쥐를 甘口鼠라고도 불렀다.
‘郊牛’는 郊祀에 犧牲으로 쓰기 위해 특별히 관리하는 소를 이르는데, 郊祭의 날짜를 점치기 전까지는 牲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改卜牛’는 다시 점을 쳐서 다른 소를 선정하는 것이다.
생쥐가 소의 뿔을 갉아 먹어서 소를 다시 점친 것은 《春秋》 成公 7년에 “봄 周王 正月에 생쥐가 郊祭에 희생으로 쓸 소의 뿔을 갉아 먹으니, 다시 점을 쳐서 다른 소를 정했다.[春王正月 鼷鼠食郊牛角 改卜牛]”라고 보이며, 또 소의 입이 상하여 소를 다시 점친 것은 《春秋》 宣公 3년에 “봄 周王 正月에 郊祭에 희생으로 쓸 소의 입이 상하여 소를 다시 점을 쳐서 다른 소를 정했다.[春王正月 郊牛之口傷 改卜牛]”라고 보인다.
역주6 書四月五月九月郊者 : 4월에 郊祀를 지낸 것은 《春秋》 僖公 31년 “여름 4월에 네 번 卜郊하였으나 모두 不吉하자 희생을 놓아주고, 오히려 세 곳에 望祭를 지냈다.[夏四月 四卜郊 不從 乃免牲 猶三望]”라고 보이며, 5월에 지낸 것은 定公 15년 “여름 5월 辛亥日에 郊祀를 지냈다.[夏五月 辛亥 郊]”라고 보이며, 9월에 지낸 것은 成公 17년 “9월 辛丑日에 郊祀를 지냈다.[九月 辛丑用郊]”라고 보인다.
역주7 禘于太廟者 爲致夫人而書也 : 禘는 禘祀로 王者가 始祖의 사당을 세우고 여기에서 始祖의 先祖와 始祖를 배향하여 지내는 큰 제사이다. 이 또한 天子의 禮樂인데 魯나라에서 행해졌다.
太廟는 始祖의 사당을 이르는데, 魯나라의 경우는 周公의 사당이다.
致는 새로 죽은 자의 신주를 太廟에 모시고 昭穆에 따라 배열하는 것이다.
夫人은 齊나라의 公女로서 莊公의 夫人이 된 哀姜을 이른다. 哀姜은 莊公의 아우인 慶父와 사통하여 閔公을 시해하는 일에 가담하였으며 邾나라에 머물다가 죽었으므로, 禮에 의하면 그 신주를 종묘에 모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僖公이 夫人이 죽은 뒤에 곧바로 모시지 못하다가 세 번째의 禘祀에서 夫人의 신주를 종묘에 모신 것이다.
蘇軾의 말은 孔子께서 이 일을 《春秋》에 쓰신 것은 이 일이 常禮에 어긋나기 때문에 기록하신 것이지, 魯나라가 天子의 禮인 禘祀를 거행한 것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일은 《春秋》 僖公 8년에 “가을 7월에 太廟에 禘祀를 지내고 夫人의 신주를 太廟에 모셨다.[秋七月 禘于太廟 用致夫人]”라고 보인다.
역주8 有事于太廟者 爲仲遂卒而書也 : 有事는 禘祀를 지낸 것이고 仲遂는 魯나라의 卿으로, 仲遂는 이때 齊나라로 사신 갔다가 병이 들어 돌아오던 도중 齊나라 垂 땅에서 죽었다.
이 일은 《春秋》 宣公 8년에 “여름 6월에 公子 遂가 齊나라에 갔다가 黃 땅에 이르러 되돌아왔다. 辛巳日에 太廟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仲遂가 垂 땅에서 卒하였다. 壬午日에 오히려 繹祭를 지내면서 萬舞를 추되 籥舞는 버리고 쓰지 않았다.[夏六月 公子遂如齊 至黃乃復 辛巳 有事于太廟 仲遂卒于垂 壬午 猶繹 萬入去籥]”라고 보인다.
繹祭는 제사 지낸 다음날 다시 지내는 제사의 이름이다.
‘萬入去籥’은 說이 분분한바, 사전적인 의미로는 萬은 萬舞로 여러 가지 춤의 총칭이고 籥은 籥舞로 피리를 잡고 추는 춤으로 文舞에 속한다.
춤은 文舞와 武舞로 나뉘는데, 창이나 방패 따위를 잡고 추는 것을 武舞라 하고, 꿩의 깃털이나 피리를 잡고 추는 것을 文舞라 한다. ‘文舞와 武舞를 어우르는 萬舞는 사당에서 추었으나 文舞인 籥舞는 제거하고 쓰지 않았다.’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으므로 萬舞를 武舞만을 사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라는 뜻을 가진 萬字를 武舞로 국한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를 듯하다.
蘇軾의 이 말은 여기서 禘祀를 기록한 것은 본래 卿이 죽으면 繹祭를 폐하여야 하는데, 魯나라 사람들이 이를 모르고 음악만을 폐한 것을 비판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지, 魯나라가 天子의 禮인 禘祀를 거행한 것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주9 杜預以爲用郊從史文 : 杜預(224~284)는 晉 武帝 때의 명장이자 경학가로 字가 元凱이다. 鎭南大將軍이 되어 吳나라를 정벌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으며 말년에는 학문에 진력하여 經書에 두루 통달하였는데, 특히 《春秋左氏傳》에 밝아 《春秋左氏經傳集解》를 저술하였다.
杜預는 成公 17년의 經文에 대해 《春秋左氏經傳集解》에서 “9월에 郊祀를 지낸 것은 非禮가 분명한데도 ‘用郊’라고 기록한 것은 史官의 글을 따른 것이다.”라고 注하였다.
역주10 或說用然後郊者 : 이 내용은 《春秋公羊傳》 成公 17년에 “혹자는 말하기를 ‘다른 곳에 먼저 제사한 뒤에 郊祭를 지낸 것이다.’[用然後郊]라고 한다.”라고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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