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當與으로 參看이니라
以義正君而無害於國이면 可謂大臣矣
天下不幸而無明君하야 使小人執其權이면 當此之時하야 天下之忠臣義士 莫不欲奮臂而擊之하나니라
夫小人者 必先得於其君하야 而自固於天下
是故 法不可擊이니 擊之而不勝이면 身死하야 其禍止於一身이요 擊之而勝이면 君臣不相安하야 天下必亡이라
是以 春秋之法 不待君命而誅其側之惡人 謂之叛이라하니 是也니라
世之君子 將有志於天下하야 欲扶其衰而救其危者 必先計其後하야 而爲可居之功이니 其濟不濟 則命也
是故 功成而天下安之하나니라
今小人 君不誅어늘 而吾誅之 則是侵君之權하야 而不可居之功也
夫旣已侵君之權하고 而能北面就人臣之位하야 使君不吾疑者 天下未嘗有也니라
國之有小人 猶人之有癭하니 今人之癭 必生於頸而附於咽이라 是以 不可去
有賤丈夫者 不勝其忿하야 而決去之하나니
夫是以 去疾而得死하니 漢之亡 唐之滅 由此故也
하야 賢人君子 進不容於朝하고 退不容於野하니 天下之怒 可謂極矣
當此之時하야 議者以爲 天下之患 獨在宦官하니 宦官去 則天下無事라하니라
然而李訓, 鄭注, 元載之徒 擊之不勝하야 止于身死러니 至於崔昌遐하야는 擊之而勝하야 唐亦以亡하니라
方其未去 是纍然者 癭而已矣러니 及其旣去하야는 則潰裂四出하야 而繼之以死하니 何者
此侵君之權而不可居之功也일새라
且爲人臣而不顧其君하고 捐其身於一決하야 以快天下之望 亦已危矣
其成則爲袁爲崔하고 敗則爲何竇爲訓注하니 然則忠臣義士 亦奚取於此哉리오
夫竇武何進之亡 天下悲之하야 以爲不幸이라
이나 亦幸而不成이니 使其成也 二子者將何以居之리오
故曰 以義正君而無害於國이면 可謂大臣矣라하노라
[참고] 歐陽脩 〈朋黨論〉:臣聞朋黨之說 自古有之하니 惟幸人君 辨其君子小人而已
大凡君子 與君子 以同道爲朋하고 小人 與小人으로 以同利爲朋하나니 此自然之理也
이나 臣謂小人無朋이요 惟君子則有之라하노니 其故 何哉
小人 所好者利祿也 所貪者財貨也
當其同利之時하야 暫相黨引以爲朋者 僞也
及其見利而爭先하고 或利盡而交疎하야는 甚者 反相賊害하야 雖其兄弟親戚이라도 不能相保
臣謂小人無朋이요 其暫爲朋者 僞也라하노이다
君子則不然하야 所守者道義 所行者忠信이요 所惜者名節이라
以之修身이면 則同道而相益하고 以之事國이면 則同心而共濟하야 終始如一하니 此君子之朋也
爲人君者 但當退小人之僞朋하고 用君子之眞朋이면 則天下治矣리이다
堯之時 小人共工, 驩兜等四人 爲一朋하고 君子八元, 八愷(凱)十六人 爲一朋이어늘 舜佐堯하사 退四凶小人之朋하시고 而進元愷君子之朋하시니 堯之天下大治하고 及舜自爲天子하야는 而皐夔稷契等二十二人 竝列于朝하야 更相稱美하며 更相推讓하야 凡二十二人 爲一朋이어늘 而舜皆用之하사 天下亦大治하니이다
書曰 紂有臣億萬호되 惟億萬心이어니와 周有臣三千하니 惟一心이라하니
紂之時 億萬人 各異心하니 可謂不爲朋矣로되
이나 紂以此亡國하고 周武王之臣 三千人 爲一大朋이로되 而周用以興하니이다
後漢獻帝時 盡取天下名士하야 囚禁之하고 目爲黨人이러니
及黃巾賊起하야 漢室大亂일새 後方悔悟하야 盡解黨人而釋之 然已無救矣
唐之晩年 漸起朋黨之論이러니
及昭宗時 盡殺朝之名士하야 或投之黃河하고 曰 此輩 淸流 可投濁流라하니 而唐遂亡矣니이다
夫前世之主 能使人人異心하야 不爲朋 莫如紂 能禁絶善人爲朋 莫如漢獻帝 能誅戮淸流之朋 莫如唐昭宗之世니이다
이나 皆亂亡其國하고 更相稱美推讓하야 而不自疑 莫如舜之二十二人이요 舜亦不疑而皆用之하니이다 然而後世 不誚舜爲二十二人朋黨所欺하고 而稱舜爲聰明之聖者 以其能辨君子與小人也일새니이다
周武之世 擧其國之臣三千人 共爲一朋하니 自古爲朋之多且大莫如周니이다이나 周用此以興者 善人 雖多而不厭也일새니
夫興亡治亂之迹 爲人君者 可以鑑矣니이다


06. 대신大臣에 대한 논 상論 上
마땅히 구양공歐陽公의 〈붕당론朋黨論〉과 참작하여 보아야 한다.
로써 군주를 바로잡으면서 나라에 폐해가 없게 한다면 대신大臣이라고 이를 만하다.
천하에 불행하게도 현명한 군주가 없어서 소인小人으로 하여금 권력을 잡게 하면, 이때 천하의 충신忠臣의사義士들이 모두 팔뚝을 걷어붙이고 소인小人을 공격하고자 한다.
소인小人이란 자는 반드시 먼저 군주에게 신임을 얻어서 스스로 지위를 천하에 견고하게 한다.
이 때문에 법으로는 공격할 수가 없으니,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면 자신이 죽어서 그 가 자기 한 몸에 그치고, 공격하여 이기면 군주와 신하가 서로 보전하지 못해서 천하가 반드시 망한다.
이 때문에 《춘추春秋》의 법에 군주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측근의 악한 사람을 주벌하는 것을 반역[]이라고 일렀으니, “나라 조앙趙鞅진양晉陽에 들어가서 배반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세상의 군자君子들이 장차 천하에 뜻을 두어 그 쇠약함을 붙들어주고 그 위태로움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먼저 후일을 헤아려 자신이 오랫동안 차지할 수 있는 공을 세워야 하니, 성공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천명天命이다.
이 때문에 이 이루어지면 천하가 편안해지는 것이다.
지금 소인小人을 군주가 주벌하지 않는데, 자신이 주벌한다면 이는 군주의 권세를 침탈하여 차지할 수 없는 인 것이다.
군주의 권세를 침탈하고도 북면北面하여 신하의 지위에 있으면서 군주로 하여금 자신을 의심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자는 일찍이 천하에 있지 않았다.
나라에 소인小人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혹이 있는 것과 같은데, 사람의 혹은 반드시 목에 생기고 목구멍에 붙어 있으므로 제거할 수 없다.
그런데 못난 장부丈夫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 혹을 잘라서 제거한다.
이 때문에 병을 제거하면 죽음을 얻는 것이니, 나라의 멸망과 나라의 멸망은 여기에 연유한 것이었다.
나라는 환제桓帝영제靈帝로부터 헌제獻帝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권세가 내수內豎(환관宦官)에게 돌아가서, 현인賢人군자君子들이 나아가서는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고 물러가서는 초야草野에 용납되지 못하니, 천하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고 이를 만하였다.
이때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천하의 병통은 오로지 환관宦官에게 있으니 환관宦官을 제거하기만 하면 천하가 무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두무竇武하진何進의 무리들은 환관宦官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해서 자기 몸이 죽음에 그쳤고, 원소袁紹환관宦官을 공격하여 승리해서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는데, 나라의 쇠망도 그 자취가 또한 크게 이와 유사하다.
이보국李輔國정원진程元振 이후로 천자를 폐하고 옹립하는 것이 환관宦官에 의해 결정되었으니, 이때 사대부들의 의논은 오직 환관宦官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훈李訓정주鄭注, 원재元載의 무리는 공격하였다가 이기지 못해서 자기 한 몸이 죽음에 그쳤고, 최창하崔昌遐의 경우에는 공격하였다가 승리하여 나라가 또한 망하였다.
그 혹을 제거하지 않았을 적에는 달려 있는 것이 혹일 뿐이었는데, 이미 제거한 뒤에는 혹이 터져서 피가 사방으로 나와 뒤이어 죽음에 이르니, 어째서인가?
이는 군주의 권세를 침탈하여 차지할 수 없는 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신하가 되어서 군주를 돌보지 않고 한 번 결단함에 자기 몸을 버려서 천하 사람들의 바람을 쾌하게 하는 것 또한 위태로운 짓이다.
그러므로 성공하면 원소袁紹가 되고 최창하崔昌遐가 되고, 실패하면 두무竇武하진何進이 되고 이훈李訓정주鄭注가 되는 것이니, 그렇다면 충신忠臣의사義士들이 무엇 때문에 이것을 취하겠는가?
두무竇武하진何進이 망한 것을 천하 사람들이 슬퍼하면서 불행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한 다행히 성공하지 못한 것이니, 만일 성공했다면 두 사람이 장차 어떻게 그 자리에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로써 군주를 바로잡으면서 나라에 폐해가 없게 한다면 대신大臣이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은 듣자오니, 붕당朋黨에 대한 말이 예로부터 있었으니, 오직 다행히 군주가 그 군자君子소인小人을 분별할 뿐입니다.
대범 군자君子군자君子와 더불어 를 함께하여 이 되고, 소인小人소인小人과 더불어 이익을 함께하여 이 되니,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은 생각하건대, 소인小人이 없고 오직 군자君子만이 있다고 여기오니, 그 연고는 어째서이겠습니까?
소인小人은 좋아하는 것이 祿이요, 탐하는 것이 재화財貨입니다.
이익을 함께할 때를 당하여 잠시 서로 당을 만들어 끌어들여서 붕당을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러가다 이익을 보게 되면 앞을 다투고 혹 이익이 다하면 교분이 소원해져서 심한 경우에는 도리어 서로 해쳐서 비록 형제와 친척 사이라도 서로 보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은 이르기를 “소인은 이 없으니, 잠시 을 하는 것은 거짓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군자君子는 그렇지 않아서 지키는 바가 도의道義이고 행하는 바가 충신忠信이며 아까워하는 것이 명절名節입니다.
이것으로써 몸을 닦으면 를 함께하여 서로 유익하고, 이것으로써 나라를 섬기면 마음을 함께하여 공을 이루어 시종여일하니, 이것이 군자君子입니다.
그러므로 군주가 된 자는 마땅히 소인의 거짓 을 물리치고 군자君子의 참된 을 쓴다면 천하가 다스려질 것입니다.
임금 때에 소인인 공공共工환도驩兜 등 네 사람이 한 이 되었고, 군자君子팔원八元, 팔개八愷 등 16명이 한 이 되었었는데, 임금은 임금을 도와 사흉四凶소인小人을 물리치고 팔원八元, 팔개八愷군자君子을 등용하여 임금의 천하天下가 크게 다스려졌으며, 임금이 스스로 천자가 됨에 이르러서는 고요皐陶, , 등의 22명이 함께 조정에 나열되어 돌려가며 함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돌려가면서 벼슬자리를 상대방에게 미루어주고 사양하여 22명이 한 이 되었는데, 임금은 이들을 모두 등용하여 천하가 또한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주왕紂王은 신하 억만 명이 있으나 억만 가지 마음을 품었지만, 나라는 신하 3천 명이 있으나 오직 한마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왕紂王의 때에 억만 사람이 각기 마음을 달리하였으니, 을 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주왕紂王은 이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하였고, 나라 무왕武王의 신하는 3천 명이 하나의 큰 이 되었으나 나라는 이들을 등용하여 흥왕하였습니다.
후한 헌제後漢 獻帝 때에 천하天下명사名士들을 모두 잡아 가두고 금고하여 당인黨人이라 지목하였는데,
황건적黃巾賊이 일어나 나라 황실이 크게 혼란하자, 뒤늦게 비로소 뉘우치고 깨달아 당인黨人들을 모두 풀어 석방하였으나 이미 구원할 수가 없었으며,
나라 말년에 점점 붕당론朋黨論이 일어났는데
소종昭宗 때에 이르러는 조정의 명사들을 모두 죽이고 혹은 이들을 황하黃河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들은 청류淸流이니 탁류濁流에 던질 만하다.”라고 하여 나라는 마침내 망하였습니다.
전대前代의 군주 중에 사람마다 마음을 달리하여 붕당朋黨을 하지 못하게 함은 주왕紂王만 한 이가 없고, 선인善人붕당朋黨을 함을 금한 것은 후한後漢헌제獻帝만 한 이가 없고, 청류淸流붕당朋黨을 주륙함은 나라 소종昭宗의 시대만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그 나라를 혼란시키고 멸망하게 하였으며, 돌려가면서 서로 찬미하고 벼슬자리를 상대방에게 미루어주고 사양하여 서로 의심하지 않음은 임금의 22명만 한 이가 없고, 임금 또한 의심하지 않고 모두 썼으나 후세에서 임금이 22명의 붕당朋黨에게 속임을 당하였다고 꾸짖지 않고, 임금을 총명한 성군聖君이라고 칭찬하는 것은 군자君子소인小人을 분별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라 무왕武王의 세대에 온 나라의 신하 3천 명이 함께 한 이 되었으니, 옛부터 을 함이 많고 또 큼은 나라만 한 나라가 없으나 나라에서 이들을 등용하여 흥왕한 것은 선인은 비록 많더라도 싫지 않기 때문입니다.
흥망興亡치란治亂의 자취를 군주가 된 자는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역주
역주1 大臣論 上 : 이 글은 蘇軾이 젊었을 때 과거공부를 위해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주2 歐陽公朋黨論 : 歐陽公은 歐陽脩를 이른다. 본문의 이해를 위해 끝에 〈朋黨論〉을 첨부한다.
역주3 晉趙鞅入於晉陽以叛 : 趙鞅은 晉나라 六卿의 하나로 시호는 簡子이다. 《春秋公羊傳》 定公 13년 가을에 “晉나라 趙鞅이 晉陽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켜서 晉陽의 군대를 동원해 荀寅과 士吉射를 축출하였다. 荀寅과 士吉射는 임금 곁에 있는 나쁜 사람들이었는데, 이 나쁜 사람들을 축출하였는데도 배반했다고 말한 것은 人君의 명령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역주4 自桓靈之後……歸於內豎 : 後漢은 桓帝 이후 宦官들이 극성을 부려 黨錮의 禍를 일으키는 등 막대한 폐해가 되었다. 그러나 靈帝가 죽은 다음 袁紹에 의해 宦官들이 모두 제거되어 마지막 황제인 獻帝時代에는 전횡하는 宦官이 없었다. 內豎는 內侍로 宦官을 이른다.
역주5 竇武何進之徒……漢遂以亡 : 竇武는 桓帝의 國舅로 經學에 밝고 행실이 훌륭하여 명성이 높았다. 桓帝가 후사 없이 죽자 靈帝를 迎立하고 大將軍이 되어 陳蕃과 함께 國政을 맡았다. 太傅 陳蕃은 은밀히 竇武에게 말하기를 “中常侍 曹節과 王甫 등이 桓帝 때부터 國權을 쥐고 나라를 혼란시켜 왔으니, 지금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뒤에는 반드시 도모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이들을 주륙할 것을 竇武와 모의하였다. 竇武는 황제에게 아뢰어 曹節 등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계책이 누설되어 王甫 등이 천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竇武와 대치하였다. 그러나 竇武의 군사들이 차츰 王甫에게 귀순하여 결국 竇武는 패주하였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獻帝 때에 錄尙書事로 있던 何進은 사람들이 모두 宦官을 미워하는 것을 알고 이들을 제거할 것을 은밀히 도모하였는데, 袁紹가 또다시 계책을 내어 사방의 용맹한 장수들을 많이 불러오게 하였다. 何進은 董卓 등을 불러 關中에 주둔하게 하였으나, 오랫동안 결행하지 못하다가 계책이 그만 누설되고 말았다. 宦官인 張讓은 常侍 段珪 등 수십 명을 尙書省 안에 매복시키고, 황제의 명령을 위조하여 何進을 불러 尙書省에 들어오게 한 다음 체포하고 嘉德殿 앞에서 참수하였다. 袁紹는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자 北宮의 문을 걸어 잠근 뒤에 군대를 거느리고 宦官을 체포하여 남김없이 모두 죽였다. 이후로 漢나라는 점점 쇠퇴하여 결국 멸망하였다. 《後漢書 竇武何進傳》 中常侍와 常侍는 宦官의 관명이다.
역주6 自輔國元振之後……唐亦以亡 : 輔國은 李輔國이고 元振은 程元振으로 모두 唐나라 때에 발호한 宦官들이다. 李輔國은 肅宗에게 신임을 받아 정권을 농단하였고 代宗을 세운 공로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횡포가 극심하였으며, 程元振은 李輔國에게 붙어 함께 정사를 농단하였다. 唐나라는 이후 황제를 폐출하고 세우는 것이 대부분 宦官인 劉存良․仇士良․王守澄의 무리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楊復恭은 스스로 定策國老라 칭하고 天子를 門生이라 부를 정도로 참람하였다. 文宗이 즉위하자 宋申錫에게 의지하여 王守澄을 주살하려 하였으나 宋申錫이 끝내 승리하지 못하고 죽자 宦官들이 더욱 발호하였다. 이에 文宗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李訓, 鄭注를 등용하여 환관들을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들은 복병을 배치하고 金吾臺廳 뒤의 석류나무에 甘露가 내렸다고 말해서 仇士良과 魚洪志 등 宦官들을 유인하여 이들을 일거에 척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계책이 발각되어 환관 仇士良에게 역습을 당해 죽임을 당하였고, 당시 조정에 있던 6백여 명의 관리들도 모두 목숨을 잃었다. 昭宗 때에 宦官 韓全誨는 崔昌遐와 권력을 다투었는데, 崔昌遐는 군벌인 朱全忠을 불러들여 宦官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이에 朱全忠이 군대를 거느리고 도성으로 들어와 韓全誨 등을 모두 죽였으며, 이어서 환관 8백 명을 內侍省에서 주살하였다. 이로 인해 君主의 곁에 있던 宦官들은 제거되었으나, 朱全忠의 세력이 커져 昭帝는 마침내 시해당하고 唐나라는 멸망하였다. 《唐書 宦官傳》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