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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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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盛服在躬 無復曳婁之歎이요 名駒出廐 遂忘奔走之勞하오니
施重丘山이요 身輕毫末이니이다
伏念 臣 少賤而鄙하고 이라
衣敝縕袍 未嘗有恥하고 自以爲安하오니 豈意晩年 屢膺此寵이릿고
此蓋伏遇皇帝陛下 紹隆景命하사 總攬群英하니이다
이니 勢已加於이요 惟德其物이니 恩有重於千金이라
臣敢不上體眷懷하야 勉思報稱이릿고
愧不能謀어니와 하노이다


09.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제수되고 대의對衣금대金帶와 말을 하사함에 사례한
훌륭한 의복이 몸에 있으니 다시는 남루한 옷을 끌고 다닌다는 한탄이 없게 되었고, 유명한 망아지가 마구간에서 나오니 마침내 분주하게 달려가는 수고로움을 잊게 되었습니다.
은혜는 산보다도 무겁고 몸은 털끝보다도 가볍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은 어려서부터 미천하고 비루하였으며 성질은 질박하고 문아文雅가 부족합니다.
해진 솜옷을 입고도 일찍이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조랑말을 타고도 스스로 편안하다고 여겼으니, 어찌 말년에 이런 은총을 여러 번 받으리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이는 황제 폐하께서 하늘의 큰 명을 계승하고 광대히 펴셔서 여러 영재들을 모두 아우르고 계심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인재를 등용하는 것보다 더 강한 것이 없으니 권세가 이미 구정九鼎보다도 더하고, 오직 그 물건을 덕으로 여기니 은혜가 천금千金보다도 중합니다.
이 감히 위로 성상이 돌보시는 은혜를 체찰體察해서 힘써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요조繞朝의 채찍을 주는 것은 제가 제대로 도모하지 못하여 부끄럽지마는, 굴원屈原의 옷을 떨쳐서 스스로 몸을 깨끗이 할 것을 기약합니다.


역주
역주1 謝除兵部尙書賜對衣金帶馬表 : 이 글은 哲宗 元祐 7년(1092)에 쓰여졌다. 당시 蘇軾은 57세로 知潁州事를 맡고 있었는데, 2월에 知揚州事로 제수되었다가 8월에 兵部尙書를 제수받고 京師로 소환되었다. 이에 사례하기 위해 이 表를 올렸다.
역주2 性椎少文 : 椎는 꾸밈이 없이 질박함을 이르고, 文은 文雅로 문화적인 교양을 이른다.
역주3 款段馬 : 키가 낮고 잘 달리지 못하는 조랑말을 가리킨다.
역주4 無競維人 : 無競은 莫强과 같은 뜻이다. 이 내용은 《詩經》 〈大雅 抑〉에 “인재 등용보다 더 강한 것이 없으니,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면 사방이 본받는다.[無競維人 四方其訓之]”라고 보인다.
역주5 九鼎 : 禹임금이 水土를 평정한 후 九州에서 바친 쇠붙이를 한데 모아 만든 솥인데, 國統이나 권위를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역주6 贈繞朝之策 : 繞朝는 春秋時代 秦나라의 대부로 지혜가 출중하였다. 晉나라의 謀士인 士會가 정변으로 秦나라에 망명해 와 있었는데, 晉나라에서는 秦나라가 士會를 중용할까 우려한 나머지 魏壽餘를 시켜 士會를 유인해서 데려가려 하였다. 繞朝는 士會를 晉나라로 보내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자신의 계책이 쓰여지지 못하여 士會가 결국 晉나라로 가게 되자, 그에게 채찍을 주면서 “자네는 우리 秦나라에 지혜로운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다만 나의 계책이 쓰여지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 13年》
역주7 振屈原之衣 期於自潔 : 屈原은 이름이 平인데 字로 더 알려졌으며, 《楚辭》의 저자이다. 戰國時代 楚나라의 忠臣으로 간신들에게 미움을 받고 湘江으로 쫓겨났다가 깨끗한 몸을 혼탁한 세상에 물들일 수 없다며 汨羅水에 빠져 죽었다. 그가 지은 〈離騷經〉에 난초와 혜초, 연꽃 등의 향기로운 재료로 만든 옷을 입은 자신을 묘사하여 결백을 강조한 내용이 자주 보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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