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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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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氣之一字 爲一篇하니라
軾聞호니 天下之所少者 非才也
才滿於天下而事不立하나니 天下之所少者 非才也 氣也라하니이다
何謂氣
曰 是不可名者也 若有鬼神焉而陰相之
今夫事之利害 計之得失 天下之能者 擧知之而不能辦하며 能辦其小로되 而不能辦其大 則氣有所不足也니이다
夫氣之所加 則己大而物小하니 於是乎受其至大而不爲之驚하고 納其至繁而不爲之亂하고 任其至難而不爲之憂하고 享其至樂而不爲之蕩이라
是氣也 受之於天하고 得之於不可知之間하야 傑然有以蓋天下之人하고 而出萬物之上하야
非有君長之位 殺奪施予之權이로되 而天下環嚮而歸之하나니 此必有所得者矣니이다
多才而敗者 世之所謂不幸者也 若無能焉而每以成者 世之所謂天幸者也
夫幸與不幸 君子之論 不施於成敗之間하고 而施於窮達之際
凡所以成者 其氣也 其所以敗者 其才也 氣不能守其才 則焉往而不敗리오
世之所以多敗者 皆知求其才하고 而不知論其氣也니이다
若夫明公 其亦有所得矣 非敢以虛詞而曲說이요 誠有所見焉耳니이다
夫天下有分하니 得其分則安이요 非其分而以一毫取於人이면 則群起而爭之니이다
天下 有無窮之利하니 自一命以上으로 至於公相 其利可愛하고 其塗甚夷하야 設爲科條하야 而待天下之擇取
이나 天下之人 翹足跂首而群望之로되 逡巡而不敢進者 何也
其分 有所止也일새니이다
天下 有無功而遷一級者하면 則衆指之矣하야 遷者 不容於下하고 遷之者 不容於上하니 而況其甚者乎잇가
明公 起於徒步之中하야 執五寸之翰하고 書方尺之簡하야 而列於士大夫之上이라
橫翔捷出하야 冠壓百吏하야 而爲之表로되 猶以爲未也하고하니 則古之方伯連帥 所不能有也니이다
하고 非有汗馬之勞 米鹽之能이요 以擅富貴之美로되 而天下不以爲無功하고 抗顔高議하야 自以無前이로되 而天下不以爲無讓하니 其氣固有以大服於天下矣니이다
天下 無大事也어니와 天下而有大事인댄 非其氣之過人者 則誰實辦之리잇고
遠方之鄙人으로 遊於京師하야 聞明公之風이라
幸其未至於公相하야 而猶可以誦其才氣之盛美하야 而庶幾於知言이러니 惜其將遂西去하야 而不得從也
請間於門下하야 以願望見其風采하노이다
不宣하노이다


03. 유시독劉侍讀에게 올린 글
라는 한 글자가 한 편의 명문命門이 되었다.
제가 들으니, “천하에 부족한 것은 재주가 아니다.
재주 있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해도 일이 성취되지 않으니, 천하에 부족한 것은 재주가 아니요 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라고 하는가?
이것은 쉽게 필설로 형용할 수가 없으니, 마치 귀신이 있어 남모르게 도와주는 듯합니다.
이제 일의 이해와 계책의 득실을 천하에 재능이 있는 자들이 모두 알지만 이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또 능히 작은 것은 해내지만 큰 것은 해내지 못하는 것은 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가 가해지는 경우에는 자신은 커지고 상대방은 작아지니, 이에 지극히 큰 임무를 받아도 이 때문에 놀라지 않고, 지극히 번잡한 것을 받아도 이 때문에 혼란하지 않고, 지극히 어려운 일을 맡아도 이 때문에 근심하지 않고, 지극한 즐거움을 누려도 이 때문에 방탕하지 않는 것입니다.
는 하늘에서 받고 알 수 없는 사이에서 얻어져서 걸출하게 천하 사람들을 덮고 만물의 위로 솟아납니다.
그리하여 군장君長의 지위와 생사여탈의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천하 사람들이 사방에서 머리를 돌려 귀의하니, 이것은 반드시 에서 얻은 바가 있어서입니다.
재주가 많은데도 실패하는 자는 세상에서 이른바 불행不幸이라는 것이요, 무능한 듯하면서도 매번 성공하는 자는 세상에서 이른바 천행天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과 불행에 대한 군자의 의논은 성공과 실패의 사이에는 시행하지 않고, 곤궁과 영달의 즈음에만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무릇 성공하는 것은 때문이고 실패하는 것은 재주 때문이니, 로 재주를 지켜내지 못하면 어디를 간들 실패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실패가 많은 까닭은 모두 재주에서 구할 줄만 알고 를 논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명공明公과 같은 분은 또한 에서 얻은 바가 있으니, 제가 감히 빈말로 왜곡하여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요, 진실로 본 바가 있어서입니다.
천하 사람들에게는 분수가 있으니, 그 분수를 얻으면 편안하지만 그 분수가 아니면서 털끝 하나라도 남에게서 취하면 사람들이 떼를 지어 일어나서 다툽니다.
천하에 무궁한 이로움이 있는데, 삼공三公과 재상에 이르기까지 그 이로움이 좋아할 만하고 그 길이 매우 평탄하니, 이는 바로 과거科擧의 조례를 만들어 천하 사람들이 선택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 사람들이 발돋움하고 머리를 들고서 떼를 지어 바라보면서도 머뭇거리고 앞으로 감히 나아가지 못함은 어째서입니까?
분수가 가로막는 바가 있어서입니다.
천하에 이 없으면서 한 계급이라도 승진한 자가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그를 손가락질하여, 승진한 자는 아래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그를 승진시킨 자는 위에서 용납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보다 더 심한 경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명공明公께서는 평민 중에서 몸을 일으켜 다섯 치의 붓을 잡고 사방 한 자의 간책簡冊에 글을 써서 사대부의 위에 나열되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승진하여 모든 관리들의 으뜸이 되시어 사람들의 표준이 되었으나, 천자께서 아직도 부족하다고 여기시고 사우師友의 직책을 가하여 전진全秦의 땅 사방 천 리를 맡겨주셨으니, 이는 옛날 방백方伯연수連帥도 능히 소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전진全秦의 땅은〉 동쪽은 효산崤山민지澠池로 막혀 있고 북쪽은 황하黃河위하渭河가 흐르고 남쪽으로는 에 기대고 서쪽으로는 서융西戎서하西夏를 제어하니, 이는 옛날 나라 소왕昭王상군商君백기白起의 무리가 자기 몸을 해치고 백성들을 해치면서 백 번 싸우고서야 소유한 것이었습니다.
팔을 휘두르고 일어나 10여 년이 못 되어 양제兩制의 지위를 취하였으나 천하 사람들이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말하지 않고, 전쟁에서 쌓은 공로와 미곡米穀과 소금의 세수稅收를 다스리는 재능이 없으면서도 부귀의 아름다움을 독점하였으나 천하 사람들이 공로가 없다고 말하지 않고, 고개를 들고 높이 의논하여 스스로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다고 여기나 천하 사람들이 겸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으니, 이는 가 진실로 천하 사람들을 크게 굴복시킴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하에 큰 일이 없어서 그렇지, 만일 천하에 큰 일이 있게 되면 가 남보다 뛰어난 분이 아니면 누가 실제로 이것을 다스리겠습니까?
저는 먼 지방의 비천한 사람으로 경사京師에 와서 명공明公의 풍모를 들었습니다.
다행히 명공明公께서 아직 공상公相의 지위에 이르기 전이라서 그 재기才氣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여 행여 저의 말씀을 알아주실 것을 바랐는데, 명공明公께서 장차 서쪽으로 떠나가시어 따라갈 수 없음을 애석히 여깁니다.
그러므로 문하에게 한가한 틈을 청하여 풍채를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역주
역주1 上劉侍讀書 : 이 글은 嘉祐 5년(1060) 말에 쓰여졌다. 劉侍讀은 劉敞(1019~1068)으로 字가 原父이며 臨江軍 新幽(江西省 新余) 사람이다. 慶曆 6년(1046)에 진사과에 1등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嘉祐 5년에 知永興軍 兼翰林侍讀學士에 제수되었다. 학문이 깊어 諸家에 두루 통달하였는데 특히 《春秋》에 정통하였다.
역주2 命門 : 생명의 관문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콩팥의 오른쪽을 가리키기도 하고 눈을 가리키기도 한다. 콩팥의 오른쪽은 남자는 정액을 보관하고 여자는 胞胎와 연관된다고 하여 중요시한다.
역주3 加之師友之職 付之全秦之地地方千里 : 師友는 군주의 스승과 벗으로, 師友之職은 翰林侍讀學士를 가리킨다. 晉나라 때에 처음 師友館을 설치하고 이곳의 學士들을 師友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 全秦之地地方千里는 옛날 秦나라의 사방 천 리의 땅이란 말로 바로 永興軍을 가리킨다. 이때 劉敞이 翰林侍讀學士로 知永興軍에 제수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4 東障崤澠(효민) : 崤澠은 崤山과 澠池를 이른다. 崤山은 河南省 서쪽에 있는 秦嶺山脈의 동쪽 지맥을 이르는데, 東崤山과 西崤山으로 나뉘며 황하와 낙하 사이에 뻗어 있다. 澠池는 지금 河南省 澠池縣 서쪽에 있던 옛 城의 이름인데, 남쪽에 澠池(연못)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려졌다.
역주5 戎夏 :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西夏를 이르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吐藩을 西戎이라고도 하므로 西戎과 西夏로 나누어 번역하였다.
역주6 古之秦昭王商君白起之徒……百戰而有之者也 : 秦 昭王(B.C. 325~B.C. 251)은 秦나라 昭襄王으로 이름은 稷이다. 惠文王의 아들이며 武王의 이복동생으로 武王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내란을 평정하고 왕권을 강화한 뒤에 魏冉과 范睢를 재상으로 삼아 內政을 다졌으며, 司馬錯와 白起 등의 명장을 등용하여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황제인 周나라 赧王의 투항을 이끌어내는 등 天下統一의 기초를 닦았다. 商君은 商鞅(B.C. 390~B.C. 338)으로 商於라는 땅에 봉해져 商君이라고 칭하였다. 衛나라 公族 출신으로 法家의 대표적 인물인데, 秦나라 孝公에게 등용되자 많은 반대파들을 무력으로 탄압하며 국가의 법령과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어 秦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白起(?~B.C. 257)는 秦나라 昭王 때의 명장으로 郿邑 사람이다. 昭王 14년에 재상 魏冉의 천거로 장군에 임명되어 원정에 오르고 이후 수많은 전공을 세워 昭王 28년(B.C. 279)에 武安君에 봉해졌으며, 昭王 47년(B.C. 260)에 長平 전투에서 趙나라와 싸워 대파하고 趙軍 40만을 사로잡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그러나 白起는 재상 范睢와 사이가 나빠 昭王의 신임을 잃고 마침내 昭王 50년(B.C. 257)에 昭王의 명을 받고 자살함으로써 생애를 마쳤다.
역주7 奮臂而取兩制……而天下不以爲速 : 兩制는 翰林學士와 知制誥를 이른다. 劉敞은 慶曆 6년(1046)에 진사로 출사하여 13년 만인 嘉祐 4년(1059)에 翰林侍讀學士 知制誥에 제수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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