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增之罪案 一一刺骨하니라
增大怒曰 天下事大定矣 君王 自爲之하라
願賜骸骨歸卒伍라하더니 歸未至彭城하야 疽發背死하니라
蘇子曰
增之去 善矣
不去 羽必殺增하리니 獨恨其不蚤(早)耳로라
然則當以何事去
勸羽殺沛公이어늘 羽不聽하야 終以此失天下하니 當於是去耶
曰 否
增之欲殺沛公 人臣之分也 羽之不殺 猶有人君之度也 曷爲以此去哉리오
인저하고 이라하니 增之去 當於羽殺時也니라
且義帝之立 增爲謀主矣 義帝之存亡 豈獨爲楚之盛衰리오
亦增之所與同禍福也 未有義帝亡而增獨能久存者也
羽之殺卿子冠軍也 是弑義帝之兆也 其弑義帝 則疑增之本也 豈必待陳平哉리오
物必先腐也而後 蟲生之하고 人必先疑也而後 讒入之하나니 陳平雖智 安能間無疑之主哉리오
吾嘗論義帝 天下之賢主也
하며 識卿子冠軍於稠人之中하야 而擢以爲上將하니 不賢而能如是乎
羽旣矯殺卿子冠軍하니 義帝必不能堪하리니
非羽弑帝 則帝殺羽 不待智者而後知也
始勸項梁하야 立義帝하야
諸侯以此服從하니 中道而弑之 非增之意也
夫豈獨非其意리오
將必力爭而不聽也리라
不用其言하고 殺(弑)其所立하니 羽之疑增 必自是始矣리라
方羽殺卿子冠軍하야 與羽 比肩而事義帝하야 君臣之分 未定也하니 爲增計者컨대 力能誅羽則誅之 不能則去之 豈不毅然大丈夫也哉
年已七十이라
合則留 不合則去어늘 不以此時明去就之分하고 而欲依羽以成功하니 陋矣
雖然이나 高帝之所畏也
增不去 項羽不亡하리니 嗚呼
增亦人傑也哉인저


04. 범증范增에 대한
범증范增죄안罪案을 하나하나 뼈를 찌르게 깊이 논하였다.
나라가 진평陳平의 계책을 따라 나라의 임금과 신하를 이간질하여 소원하게 하니, 항우項羽범증范增나라와 내통함이 있는가 의심하여 차츰 그 권한을 빼앗았다.
그러자 범증范增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일이 크게 결정되었으니, 군왕君王께서 스스로 하소서.
원컨대 해골을 돌려받아 졸오卒伍(졸병卒兵)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는데, 돌아가다가 도성인 팽성彭城에 이르기 전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소자蘇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범증范增이 떠나간 것은 잘한 일이었다.
떠나가지 않았으면 항우項羽가 반드시 범증范增을 죽였을 것이니, 다만 일찍 떠나가지 않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무슨 일로 떠나가야 하였는가?
범증范增항우項羽에게 패공沛公(유방劉邦)을 죽일 것을 권하였으나 항우項羽가 듣지 않아서 끝내 이 때문에 천하를 잃었으니, 마땅히 이때 떠났어야 했는가?
아니다.
범증范增패공沛公을 죽이고자 한 것은 신하의 직분이요, 항우項羽패공沛公을 죽이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인군人君의 도량이 있는 것이니, 범증范增이 어찌 이것 때문에 떠날 수 있었겠는가?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기미를 아는 것이 참으로 과 같구나!”라고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저 함박눈이 내리는 것을 보건대 먼저 싸락눈이 모인다.”라고 하였으니, 범증范增은 마땅히 항우項羽경자관군卿子冠軍(송의宋義)을 죽였을 적에 떠나갔어야 했다.
진섭陳涉이 민심을 얻은 것은 항연項燕부소扶蘇를 내세웠기 때문이고, 항씨項氏가 흥왕한 것은 초 회왕楚 懷王의 손자인 을 세웠기 때문이며, 제후諸侯들이 항씨項氏를 배반한 것은 의제義帝를 시해했기 때문이었다.
의제義帝가 즉위할 적에 범증范增모주謀主가 되었으니, 의제義帝의 존망이 어찌 다만 나라의 성쇠가 될 뿐이겠는가?
또한 범증范增이 화복을 함께하는 바였으니, 의제義帝가 죽고 범증范增이 홀로 오래 보존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항우項羽경자관군卿子冠軍을 죽인 것은 바로 의제義帝를 시해할 조짐이고, 의제義帝를 시해한 것은 범증范增을 의심하는 근본이니, 어찌 반드시 진평陳平의 이간질을 기다렸겠는가?
물건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 벌레가 생기고, 사람은 반드시 먼저 의심한 뒤에 모함하는 말이 먹혀드는 법이니, 진평陳平이 비록 지혜로웠으나 어찌 의심이 없는 군주를 이간질할 수 있었겠는가?
내 일찍이 논하건대, 의제義帝천하天下의 어진 군주였다.
홀로 패공沛公을 보내어 관문關門으로 들어가게 하고 항우項羽를 보내지 않았으며, 경자관군卿子冠軍을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알아보고 발탁하여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았으니, 어질지 않고서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항우項羽가 이미 의제義帝의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경자관군卿子冠軍을 죽였으니 의제義帝는 반드시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항우項羽의제義帝를 시해하지 않으면 의제義帝항우項羽를 죽이리라는 것은 지혜로운 자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범증范增이 처음 항량項梁에게 권하여 의제義帝를 세우게 하였다.
제후諸侯들이 이 때문에 복종하였으니, 중도에 의제義帝를 시해하는 것은 범증范增의 본의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 다만 본의가 아닐 뿐이었겠는가?
아마도 틀림없이 항우項羽에게 강력히 간쟁諫爭하여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항우項羽범증范增의 말을 따르지 않고 범증范增이 세운 의제義帝를 시해하였으니, 항우項羽범증范增을 의심함은 반드시 이로부터 비롯하였을 것이다.
항우項羽경자관군卿子冠軍을 죽였을 적에 범증范增항우項羽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의제義帝를 섬겨 군신君臣간의 신분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내가 범증范增을 위하여 헤아려보건대 자기 힘이 능히 항우項羽를 처형할 만하면 처형하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가는 것이 어찌 의연한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범증范增은 이때 나이가 이미 70세였다.
뜻이 합하면 머물고 합하지 않으면 떠나가야 하는데, 이때에 거취의 구분을 밝히지 않고 항우項羽에게 의지하여 공명을 이루고자 하였으니, 누추하다.
그러나 범증范增고제高帝가 경외하는 존재였다.
범증范增이 떠나가지 않았으면 항우項羽가 망하지 않았을 것이니, 아!
범증范增은 또한 걸출한 인물이라 하겠다.


역주
역주1 范增論 : 이 글은 蘇軾이 젊은 시절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范增(B.C. 227~B.C. 204)은 楚霸王 項羽의 軍師로 居鄛 사람이다. 나이 70세가 되도록 향리에 은거하고 있으면서 기이한 計策을 연구하기를 좋아하였다. 秦나라 二世皇帝 때에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項羽의 季父인 項梁을 따라 거병하였다가 項梁이 죽자 項羽를 섬겼는데, 項羽는 그를 亜父라고 부르며 존경하였으며 자신이 楚霸王이 되자 歷陽侯에 봉하였다.
范增이 漢 高祖(劉邦)의 인물을 알아보고 鴻門의 연회에서 劉邦을 죽이려 하였으나, 劉邦의 인물을 아낀 項伯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劉邦은 滎陽의 싸움에서 陳平의 반간계를 써서 項羽로 하여금 范增을 의심하게 하여 그를 제거하였는데, 이로부터 전세는 漢나라로 기울게 되었다.
역주2 漢用陳平計……稍奪其權 : 陳平은 陽武 사람으로 漢 高祖의 책사가 되어 여섯 번이나 기이한 계책을 내어 高祖를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어릴 적에 집이 가난하였으나 독서하기를 좋아하였다. 마을에서 풍년을 기원하여 土地神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 陳平이 고기를 나누어주는 宰가 되었는데 사람들에게 골고루 고기를 분배하자, 나이 많은 父老들이 “陳孺子가 宰 노릇을 잘한다.”고 칭찬하니, 陳平은 “내가 만일 宰相이 되면 천하 사람들을 위하여 이처럼 공평하게 政事를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 후 魏王 咎를 섬겼으나 모함하는 자가 있자 도망하여 項羽를 섬기다가 다시 漢王(劉邦)에게 귀의하니 劉邦이 크게 신임하였다.
劉邦이 項羽에게 연전연패하다가 B. C. 205년에 陳平에게 계책을 물으니, 陳平은 대답하기를 “項王(項羽)의 꼿꼿한 신하는 亞父인 范增과 鍾離昧, 龍且, 周殷의 등속으로 몇 명에 불과합니다. 大王께서 진실로 수만 근의 黃金을 내놓으시어 反間의 계책을 써서 저 楚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을 이간질한다면, 項羽는 의심이 많은 인물이므로 반드시 남의 모함하는 말을 듣고 그들을 제거할 것이니, 이 틈을 타서 우리가 공격하면 틀림없이 楚나라를 격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劉邦은 황금 4만 근을 내어 陳平에게 주고 出納을 일절 묻지 않았다.
陳平은 이 황금을 가지고 수많은 첩자들을 매수하여 楚나라에 소문을 퍼뜨리기를 “鍾離昧 등은 項王의 장수가 되어 많은 공을 세웠으나 지금까지 봉지를 받아 왕이 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漢나라와 은밀히 연합하여 項氏를 멸망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지려 한다.”라고 하였다. 項王은 그 말을 듣고 鍾離昧 등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또 項羽와 范增을 이간하기 위하여 項羽의 사자가 漢王의 진영에 당도했을 때 太牢의 禮로 성대하게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가, 이윽고 사자가 연회석에 당도하자 漢王이 갑자기 거짓 놀라는 체하며, ‘나는 范亞父의 사자인 줄 알았더니 뜻밖에 項王의 사자였구려!’라고 하고, 侍者들을 불러 들여오던 음식상을 가져가고, 項王의 사자를 위해서 간단하게 차린 음식상을 들여오도록 명하였다. 사자가 돌아가 이 일을 고하자, 項王은 范增이 漢나라와 비밀리에 내통하고 있지 않을까 의심하여 范增의 권력을 서서히 빼앗았다.
이에 范增은 화가 나서 벼슬자리를 내놓고 “천하의 일이 크게 정해졌으니, 大王께서 직접 하소서.”라고 하고 떠나가다가 彭城에 이르기 전에 등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項羽는 이후 謀士다운 謀士가 없어 더욱 고립되었으며, 또 鍾離昧 등의 장수들까지 제거하여 결국 멸망에 이르렀다. 《史記 陳平列傳》
孺子는 젊은이를 이르며, 亞父는 項羽가 范增을 높인 칭호이다. 太牢는 성대한 음식상을 이른다.
역주3 易曰 知幾其神乎 : 知幾는 기미를 알고 미리 대처하는 것을 이르며, 神은 神明처럼 神妙함을 이른다.
이 내용은 《周易》 〈繫辭傳 下〉에 “기미를 앎이 神妙할 것이다. 군자는 위로 사귀되 아첨하지 않고 아래로 사귀되 모독하지 않으니, 기미를 아는 것이다. 幾는 動함의 은미함으로 吉․凶이 먼저 나타나는 것이니, 군자는 기미를 보고 일어나서 하루가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知幾其神乎 君子上交不諂 下交不瀆 其知幾乎 幾者動之微 吉[凶]之先見者也 君子見幾而作 不俟終日]”라고 보인다.
역주4 詩曰……先集維霰 : 雨雪은 눈이 비처럼 내리는 것으로 함박눈을 가리키며, 霰은 싸락눈이다.
이 내용은 《詩經》 〈小雅 頍弁〉의 한 구절인데, 朱子가 주하기를 “霰은 눈이 처음 응결된 것이다. 장차 크게 함박눈이 내리려 하면 반드시 먼저 날씨가 조금 더워지니, 눈이 위에서 내려오다가 溫氣를 만나 녹아서 뭉쳐진 것을 霰이라 한다. 그러다가 오래되어 寒氣가 이기면 큰 눈이 내리는 것이다. 이는 싸락눈이 모이면 장차 큰 눈이 올 징후임을 말해서 늙음이 이르면 장차 죽을 징조임을 비유하였다.[霰 雪之始凝者也 將大雨雪 必先微溫 雪自上下 遇溫氣而摶 謂之霰 久而寒勝 則大雪矣 言霰集則將雪之候 以比老至則將死之徵也]”라고 하였다.
역주5 卿子冠軍 : 楚나라의 上將軍 宋義를 이른다. 卿子는 公子라는 뜻이고, 冠軍은 上將軍이라는 뜻으로, 楚 懷王이 宋義를 높여 부른 칭호이다. 秦나라 二世皇帝 때에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項梁이 조카인 項羽와 함께 거병하였는데, 范增의 계책을 따라 楚 懷王의 손자인 心을 찾아 懷王(나중의 義帝)으로 세워 대세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되어 교만해진 項梁이 패전하여 죽자, 懷王이 전열을 정비한 다음 宋義를 上將으로, 項羽를 次將으로, 范增을 末將으로 임명하여 북으로 나아가 趙나라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宋義가 형세를 관망하느라 진격하지 않는 것을 빌미로 項羽가 宋義를 죽였다. 《史記 項羽本紀》
역주6 陳涉之得民也 以項燕扶蘇 : 陳涉은 陳勝으로 勝은 그의 字인데, 秦나라 二世皇帝 때 처음으로 봉기하였다.
項燕은 전국시대 말기 楚나라의 명장인데, 項梁의 부친으로 下相(지금의 江蘇省 宿遷縣) 사람이다. 秦 始皇 23년(B.C. 224)에 項燕은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李信을 격퇴하고 楚나라의 南郡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에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王翦에게 대패를 당하고, 楚王 負芻는 秦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項燕은 昌平君을 荊王으로 세우고 淮南으로 들어가 秦나라에 계속 저항하였으나, 다음 해에 荊王이 다시 공격해온 王翦에게 죽임을 당하자 項燕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扶蘇는 秦나라 始皇帝의 長子로 二世皇帝 胡亥의 형이다. 성품이 인자했으나 始皇帝의 노여움을 사고 북쪽으로 쫓겨가서 장군 蒙恬의 監軍이 되었는데, 始皇帝가 죽자 李斯와 趙高 등이 始皇帝의 詔書를 거짓으로 꾸며 자살하게 하였다.
陳涉이 項燕과 扶蘇를 내세운 일은 《史記》 〈陳涉世家〉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陳勝과 吳廣은 二世皇帝 때 부역 가는 병졸들을 거느리고 난을 일으키며 이르기를 ‘천하가 秦나라의 虐政에 오래도록 시달려왔다. 듣자 하니 二世皇帝는 始皇帝의 작은 아들이라 하니, 마땅히 황제가 되어야 할 사람은 長子 扶蘇이다. 扶蘇가 자주 直諫하다가 始皇帝의 노여움을 사서 밖으로 쫓겨 갔는데 죄없이 二世皇帝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扶蘇가 어질다는 소문만 들었지 참으로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또 楚나라 장군 項燕은 여러 차례 공을 세우고 병졸들을 사랑하다가 싸움터에서 죽어 楚나라 사람들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楚나라 사람들 가운데에는 項燕이 죽지 않고 도망쳐 숨어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도 많다. 이제 우리가 公子 扶蘇와 項燕이라고 자칭하여 사람들을 속인다면 천하가 모두 호응하여 따르는 자가 많을 것이다.’라고 하고, 스스로 자신이 扶蘇라고 소문을 내었다.”
역주7 項氏之興也……以弑義帝也 : 懷王은 전국시대 말기 楚나라의 임금으로, 성은 熊이고 이름은 槐이다. 蘇秦의 합종책에 의해 6國을 이끌고 秦나라를 공격했으나 대패하였는데, 뒤에 秦나라의 땅을 떼어주겠다는 張儀의 계략에 넘어가서 齊나라와 절교하였지만 땅을 받지 못하였다.
懷王 30년에 秦 昭王이 楚나라가 齊나라와 강화한 것을 트집잡으면서 楚나라와 국경지대인 武關에서 회맹하자고 청하자, 懷王이 이를 따랐다가 秦나라 都城인 咸陽으로 끌려가 강제로 억류당하였다. 秦 昭王은 懷王에게 楚나라의 巫邑과 黔中의 땅을 할양하면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하였으나, 懷王은 이를 거절하고 다음 해에 秦나라에서 병이 나서 죽었다.
앞서 楚나라의 충신인 屈原은 懷王에게 秦나라에 들어가지 말 것을 간하였으나, 懷王은 땅을 찾겠다는 욕심으로 秦나라에 무리하게 들어갔다가 억울하게 죽고 말았다. 《史記 楚世家》
項梁은 거병한 뒤에, 楚나라 사람들이 적국에서 죽은 懷王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이용하기 위해 懷王의 손자인 熊心을 찾아 楚王으로 세우고, 왕의 칭호도 그대로 懷王이라고 칭하였다.
項羽가 卿子冠軍(宋義)을 죽이고 병권을 잡은 다음 咸陽으로 들어가 秦나라를 멸망시키고 懷王을 높여 義帝라고 칭하였으나, 실제로는 그의 명령을 받지 않다가 뒤에 長沙의 郴縣으로 옮기고 英布를 시켜 弑害하였다. 漢 高祖(劉邦)가 이 사실을 알고 三老 董公의 진언을 받아들여 義帝를 위해 國喪을 발표하고 통곡한 다음, 군사들에게 소복을 입히고 천하의 제후들에게 項羽를 토벌할 것을 호소하자, 많은 제후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그 결과 劉邦은 이들을 거느리고 項羽와 싸워 끝내 項羽를 죽이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역주8 獨遣沛公入關 而不遣項羽 : 처음에 楚 懷王이 여러 장수들과 약속하기를 “먼저 秦나라의 도성인 關中(咸陽)에 들어가 秦나라를 평정하는 자가 있으면 王으로 봉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秦나라 군대가 아직도 강성하므로 장수들이 먼저 關中으로 들어가는 것을 불리하게 생각하였는데, 오직 項羽는 숙부인 項梁이 秦나라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원망하여 몸을 떨치고 일어나 沛公(劉邦)과 함께 서쪽으로 關中에 들어갈 것을 자원하였다.
이에 懷王의 늙은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項羽는 인물이 표독하고 사람을 함부로 해쳐서 지난번에 襄城를 공격하여 襄城 사람들을 도륙하였고, 지나가는 곳마다 쑥대밭을 만들지 않은 곳이 없으니, 寬厚한 長者를 보내야 합니다.”라고 하며 沛公을 보낼 것을 청하였다.
마침내 懷王이 결단을 내려 項羽를 보내지 않고 沛公을 서쪽으로 보내 秦나라를 경략하게 하였다. 그 결과 B.C. 207년 10월에 沛公은 關中에 입성하여 秦王 子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