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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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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文 論大小情事 刺骨하니라
用兵 有可以逆爲數十年之計者하고 有朝不可以謀夕者하니이다
攻守之方 戰鬪之術 一日百變이라도 猶以爲拙하니 若此者 朝不可以謀夕者也니이다
古之欲謀人之國者 必有一定之計하니 句踐之取吳 秦之取諸侯 高祖之取項籍 皆得其至計而固執之
是故 有利, 有不利하고 有進, 有退하야 百變而不同이로되 而其一定之計 未始易也니이다
此其至計 不可易者 雖百年이라도 可知也니이다
今天下晏然하야 未有用兵之形이로되 而臣以爲必至於戰이라호니 則其攻守之方 戰鬪之術 固未可以豫論而臆斷也
이나 至於用兵之大計 所以固執而不變者하야는 臣請得以豫言之호리이다
夫西戎, 北胡 皆爲中國之患이로되 而西戎之患하고 北胡之患하니 天下之所明知也니이다
二者皆所以爲憂로되 而臣以爲兵之所加 宜先於西
先論所以制御西戎之大略하노이다
이면 則天下莫不以爲魯勝 大小之勢異也일새니이다
然而勢有所激이면 則大者失其所以爲大하고 而小者忘其所以爲小
有以鄒勝魯者矣니이다
夫大有所短하고 小有所長하니 地廣而備多하고 備多而力分하나니
小國聚而大國分이면 則彊弱之勢 將有所反이니이다
大國之人 譬如千金之子하야 自重而多疑하고 小國之人 計窮而無所恃하면 則致死而不顧
是以 小國常勇하고 而大國常怯하며 恃大而不戒하면 則輕戰而屢敗하고 知小而自畏하면 則深謀而必克하니 此又其理然也니이다
夫民之所以守戰하야 至死而不去者 以其君臣上下 歡欣相得之際也일새니이다
國大 則君尊而上下不交하고 將軍貴而吏士不親하고 法令繁而民無所措其手足이니이다
若夫小國之民 截然其若一家也하야 有憂則相恤하고 有急則相赴하니 凡此數者 是小國之所長이요 而大國之所短也니이다
大國而不用其所長하고 使小國常出於其所短이면 雖百戰而百屈이라도 豈足怪哉릿가
且夫大國 則固有所長矣 長於戰이요 而不長於守니이다
夫守者 出於不足而已 譬之於物 大而不用이면 則易以腐敗
凡擊搏進取 所以用大也니이다
自敵以上者 未嘗有不戰也
自敵以上而不戰이면 則是 以有餘而用不足之計 固已失其所長矣니이다
凡大國之所恃 吾能分兵이로되 而彼不能分이요 吾能數出이로되 而彼不能應이니
譬如千金之家 日出其財하야 以罔(網)市利로되 而販夫小民 終莫能與之競者 非智不若이요 其財少也
是故 販夫小民 雖有桀黠之才 過人之智라도 而其勢不得不折而入於千金之家하나니 何則
其所長者 不可以與較也일새니이다
西戎之於中國 可謂小國矣어늘
嚮者 惟不用其所長이라
是以 聚兵連年이로되 而終莫能服하니이다
今欲用吾之所長인댄 則莫若數出이요 數出 莫若分兵이니이다
臣之所謂分兵者 非分屯之謂也 分其居者與行者而已니이다
惟患其多而莫之適用이라
其便 莫若分兵이니
使其十一而行이면 則一歲可以十出이요 十二而行이면 則一歲可以五出이니 十一而十出하고 十二而五出이면 則是一人而歲一出也
吾一歲而一出하고 彼一歲而十被兵焉이면 則衆寡之不侔 勞逸之不敵 亦已明矣니이다
夫用兵 必出於敵人之所不能이니 我大而敵小
是故 我能分而彼不能하니 인저
夫御戎之術 不可以逆知其詳이나 而其大略 臣未見有過此者也니이다


05. 책단 중
이 글은 크고 작은 사정을 논한 것이 골수에 사무친다.
용병用兵(전쟁)은 수십 년 뒤의 계책을 미리 세울 수 있는 것이 있고, 아침에 저녁 일을 도모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공격하고 수비하는 방법과 전투하는 방식은 하루에 백 번 변하더라도 오히려 졸렬하다고 하니, 이와 같은 것은 아침에 저녁 일을 도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에 남의 나라를 도모하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일정한 계책이 있었으니, 월왕 구천越王 句踐나라를 점령한 것과 나라가 여러 제후諸侯들을 제압한 것과 한 고조漢 高祖항적項籍에게 승리한 것은 모두 지극히 좋은 계책을 얻고서 굳게 지킨 결과입니다.
이 때문에 전쟁에는 이로울 때가 있고 불리할 때가 있고 진격할 때가 있고 후퇴할 때가 있어서 상황이 백 번 변화하여 똑같지 않았으나, 한 번 정해진 계책은 일찍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월왕 구천越王 句踐나라를 점령한 것은 나라를 교만하게 했을 뿐이고, 나라가 여러 제후諸侯들을 제압한 것은 합종合從을 해산시켰을 뿐이고, 한 고조漢 高祖항적項籍에게 승리한 것은 군주와 신하를 이간질하고 소원하게 했을 뿐입니다.
이것은 지극한 계책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니, 비록 백 년이 지나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천하天下가 편안하여 용병用兵할 형세가 있지 않으나, 은 생각하건대 ‘반드시 전쟁에 이를 것이다.’라고 여기니, 그렇다면 공격하고 수비하는 방법과 전투하는 방식을 진실로 미리 논하여 억측으로 결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용병하는 큰 계책으로서 굳게 지켜 바꿀 수 없는 것에 이르러서는 이 청컨대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융西戎(서하西夏)과 북호北胡()가 모두 중국의 우환이 되고 있으나 서융西戎의 환란은 작고 북호北胡의 환란은 크니, 이는 천하天下 사람들이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관중管仲이 말하기를 “적의 견고한 곳을 공격하면 적의 약한 곳이 견고해지고, 적의 약한 곳을 공격하면 적의 견고한 곳이 약해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서융西戎북호北胡가 모두 중국의 우환이 되지만 은 생각하건대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하는 것은 마땅히 서융西戎을 먼저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먼저 서융西戎을 제어하는 대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작은 나라가 큰 나라와 싸우면 천하天下 사람들이 모두 나라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는 나라의 크고 작은 형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세에 격발될 경우에는 큰 나라가 큰 나라가 된 이유를 잃고, 작은 나라가 작은 나라가 된 이유를 잊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나라를 이기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큰 나라에도 단점이 있고 작은 나라에도 장점이 있으니, 땅이 넓으면 수비하는 곳이 많고 수비하는 곳이 많으면 힘이 분산됩니다.
그리하여 작은 나라가 힘이 한 곳으로 모이고 큰 나라가 힘이 분산되면, 강하고 약한 형세가 장차 뒤집히게 되는 것입니다.
큰 나라의 사람들은 비유하면 천금千金을 가진 부잣집 자식과 같아서 스스로 몸을 소중히 여겨 의심이 많고, 작은 나라의 사람들은 계책이 곤궁하여 믿을 곳이 없으면 목숨을 바치고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작은 나라의 병사들은 항상 용감하고 큰 나라의 병사들은 항상 겁이 많으며, 큰 나라가 자기 나라가 큰 것을 믿고 경계하지 않으면 가볍게 싸워서 자주 패하고, 작은 나라가 자기 나라가 적은 것을 알고 스스로 조심하면 깊이 계책하여 반드시 승리하니, 이는 또 그 이치가 그러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수비하고 전투하여 죽음에 이르더라도 떠나지 않는 까닭은 인군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좋아하여 마음이 맞는 교분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크면, 군주의 지위가 너무 높아져서 상하간上下間에 교제를 하지 못하고, 장군의 신분이 몹시 귀하여 관리와 군사들과의 관계가 친밀하지 못하고, 법령이 너무 번잡해서 백성들이 손과 발을 둘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나라의 백성으로 말하면 한 집안과 같이 똘똘 뭉쳐서 우환이 있으면 서로 구휼하고 위급함이 있으면 서로 달려가니, 무릇 이 몇 가지는 작은 나라의 장점이고 큰 나라의 단점입니다.
큰 나라가 자신의 장점을 쓰지 못하고 작은 나라로 하여금 항상 자기(큰 나라)의 단점으로 나오게 하면 비록 백 번 싸워 백 번 굴복하더라도 어찌 이상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 큰 나라는 진실로 장점이 있으니, 싸우는 데 장점이 있고 수비에는 능하지 못합니다.
수비라는 것은 부족함에서 나올 뿐이니, 물건에 비유할 경우, 큰 물건을 쓰지 않으면 부패하기 쉬운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공격하고 진취함은 큰 나라에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손무孫武의 병법에 “병력이 적보다 열 배가 되면 포위하고 다섯 배가 되면 적을 공격하고 두 배가 되면 병력을 분산시키고 대등하면 적과 싸우고 병력이 적으면 도망가고 그만 못하면 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등한 병력 이상은 일찍이 싸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대등한 병력 이상인데도 싸우지 않으면 이는 유여有餘함을 부족하게 쓰는 계책이니, 진실로 그 장점을 잃게 됩니다.
무릇 큰 나라가 믿는 것은 자기들은 병력을 분산할 수 있으나 (작은 나라)은 분산하지 못하고, 자기들은 자주 출동할 수 있으나 적은 이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비유하면 천금을 소유한 집안은 날마다 재물을 내어 시장의 이익을 망라할 수 있으나 하찮은 물건을 파는 지아비와 가난한 상인들은 끝내 부잣집과 다툴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지혜가 그만 못해서가 아니요 재물(밑천)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찮은 물건을 파는 지아비와 가난한 상인들은 비록 매우 뛰어나고 약삭빠른 재주와 남다른 지혜가 있더라도, 그 형세가 꺾여서 천금의 부잣집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어째서이겠습니까?
장점을 부잣집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융西戎은 중국에 비하면 약소국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종전에 중국에서는 장점을 활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병력을 모아 몇 년을 전쟁하였으나 끝내 서융西戎을 굴복시키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장점을 활용하고자 한다면 자주 출병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고, 자주 출병한다면 병력을 분산시키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이 말하는 ‘병력을 분산시킨다.’는 것은 나누어 주둔하는 것이 아니고, 머무는 자와 전쟁하러 가는 자를 나누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하서河西의 수자리하는 병졸들은 너무 많은데도 적당히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병통입니다.
그러므로 병력을 분산하는 방법처럼 편리한 것이 없습니다.
만일 그 10분의 1을 출동시킨다면 1년에 열 번 출전시킬 수 있고, 10분의 2를 출동시킨다면 1년에 다섯 번 출전시킬 수 있으니, 10분의 1을 동원하여 열 번 출전시키고 10분의 2를 동원하여 다섯 번 출전시킨다면, 이는 한 사람이 1년에 한 번 출전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1년에 한 번 출전하고 적은 우리로부터 1년에 열 번 공격을 받게 된다면, 병력의 많고 적음이 대등하지 않은 것과 수고롭고 편안함이 똑같지 않은 것이 또한 너무 분명합니다.
용병할 적에는 반드시 적들이 능하지 못한 곳으로 나와야 하니, 우리는 나라가 크고 적들은 나라가 작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병력을 분산시킬 수 있으나 적은 분산시키지 못하니, 이는 옛날 나라가 나라를 수고롭게 하였고, 나라가 나라를 자주 넘보았던 방법입니다.
서융西戎을 제어하는 방법은 자세한 내용을 미리 알 수 없으나, 그 대략으로 말하면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음을 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역주
역주1 策斷 中 : 이 글은 〈策斷〉 3편 가운데 두 번째 편으로 본래의 제목은 〈策斷 二〉이다. 本集에는 편 머리에 ‘臣聞’ 두 字가 있다.
역주2 句踐之取吳 是驕之而已 : 춘추시대에 吳王 夫差가 越王 句踐과 會稽山에서 싸워 승리하였는데, 句踐이 목숨을 구걸하자 夫差는 句踐을 죽여야 한다는 伍員(伍子胥)의 말을 듣지 않고, 많은 공물을 받고 句踐을 풀어주었다.
그 후 句踐은 范蠡와 文種을 등용하고 선정을 베풀어 국력을 강화시키면서 외면으로는 吳나라를 臣妾처럼 지극정성으로 받들어 吳王 夫差의 의심을 풀고 그를 교만에 빠지게 하였다. 그 결과, 吳王 夫差는 패업을 이루기 위해 국력을 낭비하다가 笠澤의 싸움에서 句踐에게 대패하여 마침내 자신은 죽고 나라는 멸망하였다.
역주3 秦之取諸侯 是散其從而已 : 秦나라가 날로 강성해지자 列國들이 두려워하였는데, 蘇秦이 합종책으로 제후들을 설득하여 六國을 연합시켜서 스스로 六國의 재상을 겸하고 從約長이 되어 秦나라에 대항하니, 秦나라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秦나라는 張儀를 등용하여 제후들에게 자국의 이익을 우선할 것을 설득하여 合從을 해산하고 개별적으로 秦나라와 우호관계를 맺는 連橫策을 따르게 하였다. 이후 秦나라는 차례로 제후들을 정벌하여 天下를 통일할 수 있었다.
역주4 高祖之取項籍 是間疏其君臣而已 : 項籍은 項羽를 칭한 것으로 羽는 그의 字이다.
漢 高祖인 劉邦이 項羽에게 연전연패하였는데, B.C. 205년에 陳平에게 계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項王(項羽)의 꼿꼿한 신하는 亞父인 范增과 鍾離昧, 龍且, 周殷 등 몇 명에 불과합니다. 大王께서 진실로 수만 근의 黃金을 내놓으시어 反間의 계책을 써서 저 楚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을 이간시킨다면, 項羽는 의심이 많은 인물이므로 반드시 남의 모함하는 말을 듣고 그들을 제거할 것이니, 이 틈을 타서 우리가 공격하면 틀림없이 楚나라를 격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劉邦은 황금 4만 근을 내어 陳平에게 주고 出納을 일체 묻지 않았다.
陳平은 이 황금을 가지고 수많은 첩자들을 매수하여 楚나라에 소문을 퍼뜨리기를 “鍾離昧 등은 項王의 장수가 되어 많은 공을 세웠으나 지금까지 봉지를 받아 王이 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漢나라와 은밀히 연합하여 項氏를 멸망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지려 한다.”라고 하였다. 項王은 그 말을 듣고 鍾離昧 등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또 項羽와 范增을 이간시키기 위하여 項羽의 사자가 漢王의 진영에 당도하자 太牢의 禮로 성대하게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가, 이윽고 사자가 연회석에 당도하자 漢王이 갑자기 거짓 놀라는 체하며 ‘나는 范亞父의 사자인 줄 알았더니, 뜻밖에 項王의 사자였구려!’라고 하고 侍者들을 불러 들여오던 음식을 가져가도록 하고, 項王의 사자를 위해서 간단하게 차린 음식상을 들여오도록 명하였다. 사자가 돌아와 그 사실을 고하자, 項王은 范增이 漢나라와 비밀리에 내통하고 있지나 않은가 의심하여 范增의 권력을 서서히 빼앗았다. 이에 范增은 화가 나서 벼슬자리를 내놓고 ‘天下의 일이 크게 정해졌으니, 大王께서 직접 하소서.’라고 하고, 떠났는데 彭城에 이르기 전에 등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項羽는 이후 謀士다운 謀士가 없어 더욱 고립되었으며 또 鍾離昧 등의 장수들까지 제거하여 결국 멸망에 이르렀다. 太牢는 소와 양과 돼지를 각각 한 마리씩 잡아 통째로 올리는 것으로, 옛날 제왕의 큰 제사나 큰 손님에게 올리는 성대한 상차림이며, 亞父는 范增에 대한 項羽의 존칭이다.
역주5 管仲曰……攻瑕則堅者瑕 : 管仲은 春秋時代 齊나라의 名相으로 이름이 夷吾이며, 仲은 그의 字인데 평소 字로 행세하였다. 潁上 사람으로 원래 桓公의 政敵이었으나 桓公의 중신인 鮑叔牙의 천거로 재상이 되어 桓公을 도와 齊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며 최초로 제후를 규합하여 天下의 패업을 이루었다. 이 내용은 그의 저서인 《管子》 〈制分〉에 보인다.
역주6 夫鄒與魯戰 : 鄒는 춘추시대의 邾나라로 전국시대에 鄒나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약소국이었다. 魯나라와 인접하여 자주 싸우다가 결국 魯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孟子》 〈梁惠王 下〉에 “鄒나라가 魯나라와 싸웠는데, 鄒나라 穆公이 孟子에게 ‘나의 관리들이 싸우다가 죽은 자가 33명이나 되는데도 백성들은 죽은 자가 없으니, 백성들을 처벌하여 죽이자니 너무 많아 다 죽일 수 없고 죽이지 않자니 백성들이 윗사람의 죽음을 疾視하면서 구원하지 않았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라고 물었다.[鄒與魯鬨 穆公問曰 吾有司死者三十三人 而民莫之死也 誅之則不可勝誅 不誅則疾視其長上之死而不救 如之何則可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疾視는 미워하는 눈초리로 상대방을 봄을 이른다.
역주7 孫武之法……不若則能避之 : 孫武之法은 병법서인 《孫子兵法》을 이른다. 孫武는 춘추시대 齊나라 사람으로 자는 長卿이다. 뛰어난 병법가로 吳王 闔閭의 軍師가 되어 楚나라를 격파하고 齊나라와 晉나라를 위협하여 제후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으며 후세에 병법의 시조로 불린다. 저서로 《孫子兵法》 13편이 있는데, 이 내용은 〈謀功〉에 보인다.
역주8 河西之戍卒 : 河西는 黃河의 서쪽 지방으로 지금의 陝西省 북부, 甘肅省, 寧夏 일대를 이른다. 이 지역은 宋나라와 西夏의 국경 지대로 많은 병사들이 주둔해 있었다.
역주9 此吳之所以肄楚 : 肄楚는 楚나라를 수고롭게 함을 이른다. 춘추시대 吳王 闔閭가 楚나라를 정벌할 적에 伍員과 孫武의 계책을 따라 唐나라와 蔡나라와 동맹하고 연합군을 편성하여 漢水를 끼고 楚나라와 대치하였는데, 이때 吳나라는 3軍을 만들어 번갈아 출동시켜 楚나라 군대를 피곤하게 해서 楚나라 군대를 대파하였는바, 이를 말한 것이다.
역주10 隋之所以狃陳 : 狃陳은 陳나라를 자주 정벌하는 것으로, 南北朝時代 말엽, 北朝를 정복한 隋 文帝가 南朝의 陳나라를 멸망시키고 天下를 통일할 적에 썼던 계책이다.
《隋書》 〈高熲傳〉에 “上(文帝)이 高熲에게 陳나라를 점령할 계책을 물었다.
高熲이 대답하기를 ‘강북은 날씨가 추워 밭작물의 수확이 다소 늦고 강남은 땅이 따뜻하여 논의 작물이 일찍 익습니다. 陳나라가 수확할 시기를 헤아려 약간의 병사와 군마를 징발하여 기습공격을 하겠다고 소문을 퍼뜨리면, 저들은 반드시 군대를 주둔시키고 방어하느라 수확할 시기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저들이 군대를 집결시키면 우리는 군대를 해산시키기를 두세 차례 되풀이하면, 저들은 이를 平常의 일로 여겨서 나중에 우리가 다시 군대를 집결시켜도 저들은 반드시 믿지 않고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우리가 군대를 도강시켜 육지로 올라가 싸우면 군대의 사기가 배가될 것입니다.
또 강남은 땅이 척박하여 집집마다 띠풀과 대나무를 많이 저장해 놓았고 곡식을 쌓아둔 것이 모두 땅속의 굴이 아니니, 은밀히 行人들을 보내서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 태우고, 저들이 다시 수리해 세우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불을 지르면, 수년이 지나지 않아 저절로 저들의 재력을 모두 소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文帝가 이 계책을 실행에 옮겼다. 이로부터 陳나라가 피폐해졌다.[上嘗問熲取陳之策 熲曰 江北地寒 田收差晩 江南土熱 水田早熟 量彼收穫之際 微徵士馬 聲言掩襲 彼必屯兵禦守 足得廢其農時 彼旣聚兵 我便解甲 再三若此 賊以爲常 後更集兵 彼必不信 猶豫之頃 我乃濟師 登陸而戰 兵氣益倍 又江南土薄 舍多竹茅 所有儲積 皆非地窖 密遣行人 因風縱火 待彼脩立 復更燒之 不出數年 自可財力俱盡 上行其策 由是陳人益弊]”라고 보인다.
行人은 원래 外交를 맡은 官名이고 또 使者를 일컫는 말이나 여기서는 왕래하는 사람을 가리킨 것으로 추측된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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