臣聞之
호니 이라하니 宗室之有人
은 邦家之光
이요 社稷之衛也
니이다
逮至
하야 을 天下以爲口實
하고 而唐之宗室
에 를 不可以一二數
요 而以功名至宰相者 有
焉
하니이다
自
以來
로 累聖執謙
하사 不私其親
하야 幹國治民
에 不及宗子
하야 雖有文武異才
나 終身不試
하니이다
神宗皇帝實始慨然하사 欲出其英髦하야 與天下共之라
故로 增立敎養選擧之法하야 行之二十年에 出入中外하야 漸就器使로되 而未見有卓然顯聞하야 稱先帝意者하니 豈無其人이리오
臣伏見
호니 令畤
는 事親篤孝
하야 內行純備
하고 博學經史
하야 手不釋卷
하며 吏事通敏
하고 文采俊麗
하며 志節端亮
하고 議論英發
하야 體兼衆器
하야 無適不宜
하니이다
臣嘗見其所著述
컨대 筆力雅健
하고 博貫子史
하니 蓋
이요 也
니이다
使其生於幽遠
이라도 猶當擢用
이어든 而況近託
하야 已蒙試用者乎
잇가
養其高才而遂其遠業하야 以風動宗室하고 勸示海內하야 成先帝之意요
지금 나라에서 종실宗室을 대하기를 자첨子瞻의 이 의논과 같이 할 수 있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신臣이 들으니,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덕德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종자宗子는 나라의 성城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종실宗室에 훌륭한 사람이 있는 것은 나라의 영광이요 사직의 보위保衛입니다.
주周나라가 강성할 적에 그 경사卿士들은 모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 모공毛公과 원백原伯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왕王의 백부와 숙부가 아니면 그 자제들이었습니다.
양한兩漢에 이르러 하간헌왕河間獻王과 동평왕東平王의 덕과 유흠劉歆과 유향劉向의 문장을 천하가 늘 입에 올려 화제로 삼았고, 당唐나라 종실宗室 중에 이도종李道宗과 이효공李孝恭처럼 무략武略이 뛰어난 자와 이백李白과 이하李賀와 같이 문장文章이 훌륭한 자를 한둘로 다 셀 수가 없으며, 공명功名으로 재상에 이른 자가 9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건륭建隆 이래로는 여러 성조聖朝에서 겸손한 마음을 간직하셔서 친척들을 사사로이 대하지 않으시어 국사國事를 주관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 종자宗子(종친宗親)들에게 미치지 않아, 비록 문무文武의 뛰어난 재주가 있더라도 종신토록 등용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실로 처음으로 이것을 개탄스럽게 여기시고 종친宗親 중에 영걸들을 출사시켜 천하를 함께 다스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종친宗親을 교육하고 선발하는 법을 더 많이 세우시고, 이것을 시행한 지 20년에 중외中外의 관직에 출입하게 하여 점점 그릇에 따라 등용하였으나, 아직까지 출중하게 드러나 이름이 알려져 선제先帝(신종神宗)의 뜻에 부응하는 자가 있지 않으니, 어찌 그럴 만한 사람이 없어서이겠습니까?
이는 조정에서 크게 분발시키고 권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엎드려 보니, 승의랑 첨서영주절도판관청공사承議郞 簽書潁州節度判官廳公事인 영치令畤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이 돈독하여 집안에서의 행실이 크게 구비되었으며, 경전經傳과 역사책을 널리 배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관리의 업무에 통달하여 밝게 알고 문채文采가 빼어나고 아름다우며, 지절志節이 단정하고 진실되고 의논이 영발英發하여, 몸에 여러 재주를 겸비해서 무슨 일을 맡기든지 적임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신臣이 일찍이 그가 저술한 것을 보니 문장이 고상하고 굳세며 제자서諸子書와 사서史書를 널리 꿰뚫고 있었으니, 청묘淸廟에 올리는 호瑚와 연璉 같은 귀중한 그릇이요, 명당明堂을 지을 수 있는 기杞나무와 재梓나무 같은 좋은 재목입니다.
만일 그가 멀리 초야草野에서 출생했다 하더라도 마땅히 발탁하여 등용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가까운 황실의 종친으로 이미 등용의 은혜를 입은 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聖스럽고 인자하신 폐하께서는 특별히 고찰考察하는 은전을 내리셔서 불러다가 관각館閣에 두소서.
그리하여 그의 높은 재주를 길러주고 원대한 학업을 이루게 하여, 종실宗室들을 풍동風動(분발)시키고 해내海內에 권장해 보여서 선제先帝의 뜻을 이루셔야 할 것입니다.
신臣의 신분이 미천하고 말이 가볍다 하여 소청疏請을 버리지 마소서.
만약 뒤에 제가 천거한 것과 같지 않다면 신臣은 기꺼이 조정의 법(처벌)을 받겠습니다.
삼가 기록하여 아뢰고 엎드려 칙지勅旨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