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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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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中庸論 下
夫君子雖能樂之 而不知中庸이면 則其道必窮이니라
君子非其信道之不篤也 非其力行之不至也로되
得其偏而忘其中하야 不得終日安行乎通塗하면 夫雖欲不廢 其可得耶리오
以爲過者之難歟
復之中者之難歟
宜若過者之難也
이나 天下有能過而未有能中하니 則是復之中者之難也니라
記曰 라하니 旣不可過 又不可[不]及이면 如斯而已乎
曰 未也
皇極者 有所不極而會於極이요 時中者 有所不中而歸於中이니 吾見中庸之至於此而尤難也로라
是以 有小人之中庸焉하니라
有所不中而歸於中 是道也
君子之所以爲時中이요 而小人之所以爲無忌憚이니 記曰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라하니라
嗟夫
道之難言也
有小人焉하야 因其近似而竊其名하니 聖人 憂思恐懼
是故 反覆而言之不厭하시니라
何則
是道也 固小人之所竊以自便者也
君子見危則能死로되 勉而不死하야 以求合於中庸하고 見利則能辭로되 勉而不辭하야 以求合於中庸하나니
小人 貪利而苟免에도 而亦欲以中庸之名으로 私自便也하니 此孔子, 孟子之所爲惡鄕愿也시니라
同乎流俗하고 合乎汚世하야 曰 古之人 行何爲踽踽凉凉
生斯世也하야 善斯可矣라하야
以古之人爲迂하고 而以今世之所善으로 爲足以已矣 則是不亦近似於中庸耶
惡其似也시니라
信矣 中庸之難言也
君子之欲從事乎此인댄 無循其迹이요 而求其味 則幾矣니라
唐荊川曰
數段貫穿하야 作一篇하니라


06. 《중용中庸》에 대한 논 하論 下
군자君子가 비록 를 즐거워할 수 있으나 중용中庸을 알지 못하면 그 가 반드시 궁하게 된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군자君子를 따라 행하다가 중도에 폐지하니, 나는 그만두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군자君子를 믿는 마음이 독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힘써 행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한쪽만 얻고 중도中道를 잊어서 종일토록 사통오달의 큰길을 편안히 가지 못한다면, 비록 폐지하지 않고자 하나 어찌 되겠는가?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나는 가 행해지지 못하는 이유를 알겠으니, 어진 자는 지나치고 불초한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지나치는 것이 어려운가?
중도中道로 돌아오는 것이 어려운가?
당연히 지나치는 것이 어려운 듯하다.
그러나 천하에는 능히 지나친 자는 있어도 능히 중도에 맞는 자는 없으니, 그렇다면 중도中道로 돌아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천하天下(나라와 집안)를 똑 고르게 다스릴 수 있으며 관작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으며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 있으나, 중용中庸은 능히 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지나쳐서도 안 되고 또 미치지 못해서도 안 된다면 이와 같이 중간에 할 뿐인가?
아니다.
맹자孟子가 말씀하시기를 “(중간)을 잡는 것이 에 가까우나 중간을 잡고 권도權道가 없는 것은 어느 한 가지를 잡은 것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에 맞지 않더라도 허물에 걸리지 않으면 임금이 이것을 받아주어야 한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그 에 모이게 하고 그 으로 돌아오게 한다.”라고 하였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군자君子중용中庸군자君子이면서 때에 맞게 한다.”라고 하였다.
황극皇極이라는 것은 에 맞지 않는 바가 있으면 에 모이게 하는 것이고, 시중時中이라는 것은 맞지 않는 바가 있으면 이것을 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니, 나는 중용中庸이 여기에 이르러서 더욱 어려움을 알겠다.
이 때문에 소인小人중용中庸이 있는 것이다.
맞지 않는 바가 있더라도 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바로 이다.
이는 군자君子시중時中이 되고 소인小人이 기탄함이 없는 이유이니,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소인小人중용中庸소인小人이면서 기탄함이 없다.”라고 하였다.
아!
를 말하기 어려움이여.
소인小人이 있어서 와 유사한 것을 가지고 그 이름을 도둑질하니, 성인聖人이 이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이 때문에 싫어하지 않고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어째서인가?
는 진실로 소인小人들이 도둑질하여 스스로 편리하게 하는 것들이다.
군자君子는 위태로움을 보면 능히 죽을 수 있으나 억지로 참고 죽지 않아서 중용中庸에 부합하기를 구하고, 이익을 보면 능히 사양할 수 있으나 억지로 참고 사양하지 않아서 중용中庸에 부합하기를 구한다.
그런데 소인小人들이 이익을 탐하고 죽음을 구차히 면할 적에도 중용中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사사로이 스스로 편리하게 하고자 하니, 이것이 공자孔子맹자孟子향원鄕愿을 미워하신 이유인 것이다.
한 지방 사람들이 모두 삼가는 사람(원인愿人)이라고 칭찬한다면 가는 곳마다 삼가는 사람이 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유속流俗에 동화하고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여 “옛날 사람들은 행실이 어찌 이렇게도 외롭고 쓸쓸하였는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사람들과 잘 지내면 된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옛사람을 오활하다 하고, 지금 세상 사람들이 좋게 여기는 것을 이만 하면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중용中庸에 유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주색을 미워함은 붉은색을 어지럽힐까 염려해서이고, 가라지를 미워함은 벼싹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이다.”라고 하셨으니, 어째서인가?
그 유사함을 미워하신 것이다.
참으로 중용中庸은 말하기가 어렵다.
군자君子가 이 중용中庸에 종사하고자 한다면, 그 행적을 따르지 말고 의미를 찾는다면 거의 가까울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마시고 먹지 않는 이가 없지만 그 맛을 제대로 아는 이는 적다.”라고 하였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몇 단락이 일관되어 한 이 되었다.”


역주
역주1 君子遵道而行……吾弗能已矣 : 《中庸》 제11장에 보이는데, 朱子의 集註에 “道를 따라 행함은 능히 善을 택한 것이요, 中途에 폐함은 힘이 부족한 것이다. 이는 그 知가 비록 충분히 미칠 수 있으나 行이 미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강하게 해야 할 경우에 강하게 하지 않는 자이다. 聖人이 이에 대하여 억지로 힘써서 감히 폐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요, 지극히 성실하고 쉼이 없어서 저절로 그만둘 수 없는 바가 있으신 것이다.[遵道而行 則能擇乎善矣 半塗而廢 則力之不足也 此其知雖足以及之 而行有不逮 當强而不强者也 聖人於此 非勉焉而不敢廢 蓋至誠無息 自有所不能止也]”라고 하였다.
역주2 道之不行也……不肖者不及也 : 《中庸》 제4장에 “道가 행해지지 못하는 이유를 내 알겠으니,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道가 밝아지지 못하는 이유를 내 알겠으니, 어진 자는 지나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智)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朱子는 “道는 天理의 當然함이니, 中일 뿐이다. 智․愚와 賢․不肖의 過하고 不及함은 타고난 資稟이 달라 그 中을 잃은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앎이 지나쳐 이미 道를 행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어리석은 자는 앎에 미치지 못하고 또 행할 바를 알지 못하니, 이것이 道가 항상 행해지지 못하는 이유이다. 어진 자는 行이 지나쳐 이미 道를 알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行에 미치지 못하고 또 알 바를 구하지 않으니, 이것이 道가 항상 밝아지지 못하는 이유이다.”라고 하였다.
역주3 天下國家可均也……中庸不可能也 : 이 내용은 《中庸》 제9장에 보이는데, 이에 대해 朱子는 集註에서 “이 세 가지 또한 智․仁․勇의 일이니, 천하에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모두 한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資稟이 이에 가깝고 功力을 힘쓰는 자는 모두 충분히 할 수 있지만, 中庸에 이르러서는 비록 능하기 쉬울 것 같으나 義가 精하고 仁이 익숙하여 一毫라도 人慾의 私가 없는 자가 아니면 미치지 못한다. 세 가지는 어려우면서도 쉽고 中庸은 쉬우면서도 어려우니, 이는 사람 중에 능한 이가 적은 이유이다.”라고 하였다.
역주4 孟子曰……猶執一也 : 《孟子》 〈盡心 上〉에 “楊子는 자신을 위함을 취하였으니, 한 털을 뽑아서 天下가 이롭더라도 하지 않았다. 墨子는 兼愛를 하였으니, 이마(정수리)를 갈아 발꿈치에 이르더라도 天下에 이로우면 하였다. 子莫은 중간을 잡았으니, 중간을 잡는 것이 道에 가까우나 중간을 잡고 저울질함이 없는 것은 한쪽을 잡는 것과 똑같다. 한쪽을 잡는 것을 미워하는 까닭은 道를 해치기 때문이니, 하나를 들고 백 가지를 폐하는 것이다.[楊子取爲我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 墨子兼愛 摩頂放踵 利天下爲之 子莫執中 執中爲近之 執中無權 猶執一也 所惡執一者 爲其賊道也 擧一而廢百也]”라고 하였다.
楊子는 楊朱이고, 墨子는 墨翟이다. 子莫은 魯나라의 賢者인데 楊朱와 墨翟이 中道를 잃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사이를 헤아려 중간을 잡은 것이다.
權은 저울의 추를 이르는데, 여기서는 물건의 輕重을 달아서 알맞음을 취하듯이 일을 행할 적에 일의 경중을 헤아려서 시의적절하게 처리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그러므로 ‘중간을 잡고 저울질함(權道)이 없다면 일정한 中에 교착되어 변화를 알지 못하니, 이 또한 한쪽을 잡는 것일 뿐이다.’라는 뜻이다.
朱子는 集註에서 “爲我는 仁을 해치고 兼愛는 義를 해치고 중간을 잡는 것은 時中을 해치니, 모두 하나를 들고 백 가지를 폐하는 것이다.[爲我害仁 兼愛害義 執中者 害於時中 皆擧一而廢百者也]”라고 하였다.
역주5 書曰……皇則受之 : 이 내용은 《書經》 〈周書 洪範〉에 보이는데, 蔡沈의 集傳에 “極에 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善에 합하지 않는 것이고, 허물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惡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善에 합하지는 못하나 惡에는 빠지지 않음은 이른바 中人이라는 것이니, 나아가면 더불어 善을 할 수 있고 버리면 惡에 흐르니, 君主가 마땅히 받아주어야 할 바이다.”라고 해석하였다.
역주6 會其有極 歸其有極 : 이 역시 《書經》 〈周書 洪範〉의 皇極에 대한 설명 가운데 한 부분인데, 원문은 아래와 같다.
“偏僻됨이 없고 기욺이 없어 王의 義를 따르며, 뜻에 사사로이 좋아함을 일으키지 말아 王의 道를 따르며, 뜻에 사사로이 미워함을 일으키지 말아 王의 길을 따르라.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王의 道가 蕩蕩하며, 편당함이 없고 편벽됨이 없으면 王의 道가 平平하며, 常道에 위배됨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王의 道가 正直할 것이니, 그 極에 모이고 그 極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無偏無陂 遵王之義 無有作好 遵王之道 無有作惡 遵王之路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
역주7 記曰……君子而時中 : 이 내용은 《中庸》 제2장에 “君子의 中庸은 君子이면서 時中을 하고, 小人의 中庸은 小人이면서 忌憚이 없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朱子는 王肅의 本을 근거로 ‘小人之’ 아래에 反字가 빠진 것으로 보아 ‘小人이 中庸을 반대로 함은’으로 해석하고, 集註에서 아래와 같이 해석하였다.
“君子가 中庸을 하는 까닭은 君子의 德이 있고 또 능히 때에 따라 中에 처하기 때문이요, 小人이 中庸을 반대로 하는 까닭은 小人의 마음이 있고 또 忌憚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中은 一定한 體가 없어 때에 따라 있으니, 이것이 바로 平常의 理이다. 君子는 이것이 자신에게 있음을 안다. 이 때문에 보지 않을 때에도 戒愼하고 듣지 않을 때에도 恐懼하여 때마다 맞지 않음이 없고, 小人은 이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니 욕심을 부리고 망령되이 행동하여 忌憚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君子之所以爲中庸者 以其有君子之德 而又能隨時以處中也 小人之所以反中庸者 以其有小人之心 而又無所忌憚也 蓋中無定體 隨時而在 是乃平常之理也 君子知其在我 故能戒謹不覩 恐懼不聞 而無時不中 小人不知有此 則肆欲妄行 而無所忌憚矣]”
역주8 一鄕皆稱愿人焉……善斯可矣 : 鄕愿은 시골에서 삼가고 공손히 처신하는 사람으로 사이비 有德者를 가리키는데, 《論語》와 《孟子》에는 모두 鄕原으로 표기되었는바, 옛날 原은 愿과 통용하였기 때문이다. 踽踽는 홀로 행하여 외로운 모양을 이르고, 涼涼은 薄함으로 남에게 親厚함을 받지 못하는 모양을 이른다.
이 말은 《孟子》 〈盡心 下〉에 “萬章이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문 앞을 지나면서 내 집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내 서운해하지 않는 자는 오직 鄕原일 것이다. 鄕原은 德의 賊이다.」라고 하셨으니, 어떠하면 鄕原이라 이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孟子께서 말씀하셨다. ‘〈鄕愿이 狂者를 비난하기를〉 어찌하여 이처럼 말과 뜻이 커서 말은 행실을 돌아보지 않으며 행실은 말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기를 「옛사람이여, 옛사람이여.」라고 하는가.’ 하며, 또 〈狷者를 비난하기를〉 「행실을 어찌하여 이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하는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남들이 善하다고 하면 可하다.」라고 하여, 閹然히 세상에 아첨하는 자가 鄕原이다.’
萬章이 묻기를 ‘한 지방이 모두 原人이라고 이른다면 가는 곳마다 原人이 되지 않음이 없을 터인데, 孔子께서 德의 賊이라고 하심은 어째서입니까?’라고 묻자, 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鄕原은 비난하려 해도 들 것이 없으며 풍자하려 해도 풍자할 것이 없어서 流俗과 동화하며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여, 居함에 忠信과 같으며 행함에 淸廉潔白과 같아서 여러 사람들이 다 좋아하거든 스스로 옳다고 여기나, 堯․舜의 道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德의 賊이라고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孔子曰 過我門而不入我室 我不憾焉者 其惟鄕原乎 鄕原 德之賊也 曰 何如 斯可謂之鄕原矣 曰 何以是嘐嘐也 言不顧行 行不顧言 則曰古之人古之人 行何爲踽踽涼涼 生斯世也 爲斯世也 善斯可矣 閹然媚於世也者 是鄕原也 萬章曰 一鄕皆稱原人焉 無所往而不爲原人 孔子以爲德之賊 何哉 曰 非之無擧也 刺之無刺也 同乎流俗 合乎汚世 居之似忠信 行之似廉潔 衆皆悅之 自以爲是 而不可與入堯舜之道 故曰德之賊也]”라고 보인다.
역주9 (似)[惡]紫恐其亂朱也 惡莠恐其亂苗也 : 紫는 間色(黑과 朱의 중간색)이고 朱는 正色(바른 색)으로 옛날에 正色을 좋게 여기고 間色을 좋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莠는 가라지(피)인데, 볏과의 한해살이풀로 벼와 흡사한 잡초이다.
《孟子》 〈盡心 下〉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같으면서 아닌 것[似而非]을 미워하노니, 가라지를 미워함은 벼싹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요, 말재주가 있는 자를 미워함은 義를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요, 말 잘하는 입을 가진 자를 미워함은 信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요, 鄭나라 音樂을 미워함은 正樂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요, 자주색을 미워함은 붉은색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요, 鄕原을 미워함은 德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이다.’라고 하셨다.[孔子曰 惡似而非者 惡莠 恐其亂苗也 惡佞 恐其亂義也 惡利口 恐其亂信也 惡鄭聲 恐其亂樂也 惡紫 恐其亂朱也 惡鄕原 恐其亂德也]”라고 보인다.
역주10 記曰……鮮能知味也 : 이 내용은 《中庸》 제4장의 일부로 사람들이 道를 제대로 알지 못함을 비유한 말인데, 朱子의 集註에 “道는 떠날 수가 없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살피지 않는다. 이 때문에 過하고 不及한 폐단이 있는 것이다.[道不可離 人自不察 是以 有過不及之弊]”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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