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多名言하니라
商鞅 用於秦하야 變法定令하야 行之十年 秦民大悅이라
道不拾遺하고 山無盜賊하고 家給人足하며
民勇於公戰하고 怯於私鬪하야 秦人富彊한대
蘇子曰
皆戰國之游士 邪說詭論이어늘 而司馬遷 暗於大道하야 取以爲史하니라
吾嘗以爲 遷有大罪二하니 蓋其小小者耳 所謂大罪二 則論商鞅, 之功也
自漢以來 學者恥言商鞅, 桑弘羊이어늘 而世主獨甘心焉하야 皆陽諱其名이나 而陰用其實하고 甚者 則名實皆宗之하야 庶幾其成功하니 此則司馬遷之罪也니라
固天下之彊國이요 而孝公亦有志之君也
修其政刑十年 不爲聲色畋游之所敗 雖微商鞅이라도 有不富彊乎
秦之所以富彊者 孝公之效 非鞅之功也 而秦之所以見疾於民하야 如豺狼毒藥하야 則鞅實使之
至於桑弘羊하야는 無足言者어늘이라하니라
善乎
曰 天下安有此理리오
天地所生財貨百物 止有此數하야 不在民則在官하니 譬如雨澤 夏澇則秋旱이라
不加賦而上用足 不過設法하야 陰奪其民이니 其害甚於加賦也라하니라
二子之名 在天下者 如蛆蠅糞穢也하야 言之則汚口舌하고 書之則汚簡牘하며
二子之術 用於世者 滅國殘民하고 覆族亡軀者 相踵也어늘 而世主獨甘心焉 何哉
樂其言之便己也일새니라
夫堯, 舜, 禹 世主之父師也 諫臣拂(弼)士 世主之藥石也 恭敬慈儉 勤勞憂畏 世主之繩約也
今使世主 日臨父師而親藥石하고 履繩約 非其所樂也
爲商鞅, 桑弘羊之術者 하야 曰 所謂賢王者 專以天下適己而已라하니 此世主之所以人人甘心而不悟也니라
晏少而富貴하야 以濟其欲하니 無足怪者
彼其所爲 足以者 日相繼也하니 得死於寒食散 豈不幸哉리오
而吾獨何爲效之리오
世之服寒食散하야 疽背嘔血者 相踵也하니 用商鞅, 桑弘羊之術하야 破國亡宗者 皆是也
然而終不悟者 樂其言之美便하야 而忘其禍之慘烈也니라


02. 상군商君에 대한
내용에 명언名言이 많다.
상앙商鞅나라에 등용되어 법을 바꾸고 명령을 개정하여 시행한 지 10년에 나라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백성들이 도로에 흘린 것을 줍지 않고 산에는 도적이 없었으며, 가가호호家家戶戶마다 모두 풍족하였다.
또한 적국과의 전투에는 용감하고 사사로운 싸움에는 겁을 먹어서 나라는 인민人民이 부유하고 강성하였다.
그러자 천자天子가 제사 지낸 고기를 효공孝公에게 내리고 제후諸侯들은 모두 축하하였다.
소자蘇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이는 모두 전국시대의 유세하는 선비들의 간사한 말과 괴이한 의논인데, 사마천司馬遷대도大道를 알지 못하고 이것을 취하여 역사책(사기史記)으로 만들었다.
내가 일찍이 생각하건대, 사마천司馬遷에게는 큰 죄가 두 가지가 있으니, 그가 황로黃老를 먼저 하고 육경六經을 뒤에 하며 처사處士를 물리치고 간웅姦雄을 앞세운 것은 소소한 것들일 뿐이요, 이른바 큰 죄 두 가지라는 것은 상앙商鞅상홍양桑弘羊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나라 이래로 배우는 자들이 상앙商鞅상홍양桑弘羊에 대해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였는데, 세상의 군주들이 유독 이들을 마음에 달갑게 여겨서 모두 겉으로는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을 꺼리는 체하나 속으로는 그 실제를 사용하였고, 심한 자는 을 모두 높여 행여 을 이루기를 바랐으니, 이것은 사마천司馬遷의 죄이다.
나라는 진실로 천하의 강대국이고, 효공孝公 또한 훌륭한 뜻을 간직한 군주였다.
그가 정사와 형벌을 닦은 10년 동안 음악과 여색, 사냥과 유람에 무너지지 않았다면, 비록 상앙商鞅이 없었더라도 나라가 부강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라가 부강해진 것은 효공孝公본업本業에 힘쓰고 농사에 힘쓴 효험이요, 상앙商鞅이 피를 흘리고 뼈를 깎은 때문이 아니며, 뒤에 백성들이 나라를 마치 시랑豺狼독약毒藥처럼 미워하여 한 명의 필부匹夫(진승陳勝)가 난을 일으키자 자손들이 남은 종자가 없었던 것은 상앙商鞅이 실로 이렇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상홍양桑弘羊에 이르러서는 하찮은 국량의 보잘것없는 재주요 남의 집 담을 뚫고 담을 넘어가 도둑질하는 작은 지혜로 말할 만한 것이 못 되는데, 사마천司馬遷이 그를 칭찬하기를 “세금을 더 부과하지 않고도 나라의 재용을 풍족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훌륭하다!
사마광司馬光의 말씀이여.
그의 말씀에 이르기를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는가?
하늘과 땅에서 생산되는 재화와 모든 물건은 오직 정해진 숫자가 있어서 이것이 백성들에게 있지 않으면 관청에게 있게 마련이니, 비유하면 빗물이 여름에 홍수가 지면 가을에 가무는 것과 같다.
세금을 올리지 않고 윗사람의 재용을 풍족하게 하는 것은 단지 법을 교묘하게 만들어서 은밀히 백성들을 수탈한 것에 불과하니, 그 폐해가 세금을 올린 것보다 심하다.”라고 하였다.
상앙商鞅상홍양桑弘羊의 이름이 천하에 남아 있는 것은 구더기와 쉬파리나 더러운 똥과 같으니, 이것을 말하면 사람의 입과 혀를 더럽히고 이것을 책에 쓰면 간독簡牘을 더럽힌다.
이 두 사람의 이재理財 방법을 세상에서 이용하는 자들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종족을 전복시키고 몸을 망치는 자가 서로 이어지는데도, 세상의 군주들이 유독 이들의 이재理財 방법을 마음에 달갑게 여기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 말이 자기들을 편리하게 해주는 것을 좋아해서이다.
는 세상 군주들의 부사父師이고, 간쟁하는 신하와 보필하는 선비는 세상 군주들의 약석藥石이며, 공경하고 자애롭고 검소하며 근로하고 조심하고 두려워함은 세상 군주들을 속박하는 끈이다.
지금 세상 군주들로 하여금 날마다 부사父師 앞에 임하고 약석藥石을 가까이하고 속박하는 끈을 밟게 하는 것은 군주들이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상앙商鞅상홍양桑弘羊의 계책을 따르는 자들은 반드시 먼저 을 비웃고 임금을 누추하게 여겨서 말하기를 “이른바 훌륭한 군주는 오로지 천하를 가지고 자신에게 적당하게 할 뿐이다.”라고 하니, 이것이 세상의 군주들 모두가 두 사람의 이재理財 방법을 마음에 달갑게 여기면서 깨닫지 못하는 이유인 것이다.
세상에 석종유石鍾乳오훼烏喙를 먹고 마음껏 주색酒色을 누리면서도 장수하기를 바라는 자가 있으니, 이는 아마도 하안何晏에게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안何晏은 젊어서부터 부귀하였으므로 한식산寒食散을 먹어서 그 욕망을 이루려 하였으니, 이는 괴이하게 여길 만한 것이 못 된다.
그가 한 짓은 자기 몸을 죽이고 집안을 망치기에 충분하였는데도 이러한 짓이 날마다 이어졌으니, 그가 한식산寒食散 때문에 죽은 것이 어찌 불행이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들이 어찌 이것을 본받는단 말인가?
한식산寒食散을 먹고서 등에 등창이 나고 피를 토하여 죽는 자가 세상에 이어지고 있으니, 상앙商鞅상홍양桑弘羊이재理財 방법을 사용하여 나라를 패망시키고 집안을 망친 자들은 모두 이들과 같은 부류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끝내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 말이 자기들 귀에 아름답고 편리함을 좋아해서 그 화의 참혹함을 잊기 때문이다.


역주
역주1 商君論 : 이 글은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에 東坡가 젊은 시절에 지은 것이라고 하였으나, 글 가운데에 王安石과 國用에 대하여 논쟁한 司馬光의 말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神宗 熙寧 원년(1068) 이후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國用은 국가의 재정으로, 熙寧 원년 河朔 지방에 큰 가뭄이 들자 神宗은 司馬光과 滕甫에게 명하여 國用을 재정하게 하였다.
《經進東坡文集事略》에는 이 글 제목을 〈商鞅論〉이라 하고 아울러 注를 달기를 “長公이 《戰國策》을 읽었는데, 여기에 商君의 功과 罪를 논하면서 ‘후세의 君子들이 商君의 罪만 말하고 商君의 功은 말하지 않는데, 商君의 福을 누리고 商君의 禍를 받은 자는 있지 않다.’라는 내용이 있었으므로 長公은 이것을 염려하여 이 글을 지었다. 그렇다면 이 論 또한 王荊公(王安石)을 위해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전국시대 초까지만 해도 秦나라는 중국의 서쪽인 雍州(지금의 陝西省)에 위치하여 西戎과 가까웠으므로,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제후들은 秦나라를 오랑캐로 취급하여 회맹에 참여시키지도 않았다. 周 顯王 7년(B.C. 362) 秦 孝公은 즉위하자 국중에 명령하기를 “외국에서 온 빈객과 여러 신하들 중에 기이한 계책을 내어 우리 秦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우선 높은 벼슬을 내리고 장차 땅을 떼어 봉하겠다.” 하였다.
이에 衛나라의 종실(公孫)인 商鞅이 서쪽으로 秦나라에 들어가 부국강병하는 계책으로 孝公을 설득하여 左庶長에 임명되고 개혁정책을 단행함으로써 10년 만에 秦나라는 강대국으로 변하였다.
商鞅(B.C. 390~B.C. 338)은 商於라는 땅에 봉해져 商君 또는 商鞅이라고 칭하였으며, 衛나라의 公族이므로 衛鞅 또는 公孫鞅이라 칭하였다. 그는 法家의 대표적 인물로, 孝公에게 등용되자 많은 반대파들을 형벌로 탄압하였으며, 국가의 법령과 제도를 대대적으로 변혁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秦나라는 商鞅의 變法으로 비로소 강국의 면모를 갖춰 天下統一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법령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이를 무리하게 추진하여 수많은 사람을 처벌한 결과 원성이 자자하였고, 사람들이 도덕을 버리고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商鞅을 중용한 孝公이 죽고 惠王이 즉위하자, 평소 商鞅을 미워하던 자들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商鞅을 참소하니, 商鞅은 魏나라로 도망하였으나 秦나라를 두려워한 魏나라는 오히려 商鞅을 체포하여 秦나라에 넘겨주었다. 도중에 도주한 商鞅은 자신의 식읍의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체포되어 車裂刑에 처해지고 시신은 조리돌려졌다. 《史記 商君列傳》
역주2 天子致胙於孝公 諸侯畢賀 : 天子는 周나라의 顯王을 가리키며, 胙는 제사고기이다. 옛날 周나라는 국가에 큰 제사가 있으면 殷나라의 후손인 宋나라를 우대하여 제사고기를 보내곤 하였는데, 이때 秦나라가 강대국이 되자 顯王은 그를 두려워하여 제사고기를 보냈으며, 이것을 제후국인 三晉(韓․魏․趙)과 齊나라가 모두 축하하였다. 《史記 商君列傳》
역주3 先黃老後六經 退處士進姦雄 : 黃老는 黃帝와 老子를 이르는데, 이들에 의해 道家가 창시되었으므로 道家나 道家의 경전을 이르기도 한다. 六經은 儒家의 《詩經》, 《書經》, 《易經》, 《禮經》, 《春秋》, 《樂經》의 여섯 가지 經典을 이르며, 姦雄은 간사한 英雄이란 뜻으로 권모술수를 사용하는 사람을 이른다.
班固의 《漢書》 〈司馬遷傳〉에 司馬遷의 《史記》를 폄하하여 “시비를 논할 적에는 聖人을 그르다 하고, 大道를 논할 적에는 黃老를 앞세우고 六經을 뒤로 하였으며, 遊俠을 차례할 적에는 處士를 뒤로 하고 姦雄을 내세웠으며, 貨殖을 말할 적에는 세력을 높이고 貧賤을 부끄럽게 여겼다.”라고 보인다.
이제 《史記》를 살펴보면 맨 앞에 帝王들의 本紀가 있고 禮․樂․律․曆․天官 등의 書가 있고 제후들의 世家가 다음에 있고 끝에 列傳이 있는데, 司馬穰苴와 孫子(孫武)․吳起․伍子胥의 列傳이 앞에 있고 그 뒤에 〈仲尼弟子列傳〉이 있으며, 商君․蘇秦․張儀의 列傳과 白起․王翦 등의 列傳이 앞에 있고 그 뒤에 孟軻․荀卿 등의 列傳이 있어 대체로 名將과 辯士들을 앞에 놓았다.
역주4 桑弘羊 : B.C. 152~B.C. 80. 西漢 武帝 때의 문신으로 理財에 밝아 財政을 담당하였다. 洛陽 사람으로 商人 집안 출신인데, 武帝 때에 大司農 丞이 되어 천하의 鹽鐵을 專賣하고 平準法을 시행하여 나라의 재정을 풍족하게 하였다. 이 공으로 武帝의 신임을 받아 御史大夫에 올라 대장군 霍光과 함께 武帝의 遺詔를 받들어 정치를 보좌했으나, 霍光과 반목하다가 燕王 劉旦과 上官桀 등과 함께 모반을 획책한 죄로 멸족을 당하였다.
역주5 務本力穡 : 務本은 本業 즉 農業에 힘쓴다는 말이다. 옛날에 ‘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여 農業을 本業이라 하고 商業과 工業을 末業이라 하였다. 여기의 ‘務本力穡’은 《史記》 〈秦本紀〉의 ‘內務耕稼’라는 말을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秦本紀〉에 “孝公 3년(B.C. 359) 衛鞅이 孝公에게 新法의 실행과 형벌의 정비를 권하였으며, 안으로는 農事에 힘쓰고 밖으로는 외국과 싸우다가 戰死한 사람들에게 賞罰을 분명히 할 것을 설파하자 孝公이 그 말을 좋게 여겼다.” 하였다.
〈商君列傳〉에는 “商鞅이 법을 변경하려 하였으나 秦나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衛鞅이 孝公에게 말하기를 ‘백성들은 시작은 함께 도모할 수 없고 성공은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지극한 德을 논하는 자는 세속과 화합하지 못하고, 큰 功을 이루는 자는 민중과 상의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聖人이 만일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으면 옛것을 그대로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法을 만들면 어리석은 자가 제재를 가하고, 어진 자가 禮를 바꾸면 不肖한 자가 견제합니다.’ 하였다. 公은 ‘좋다.’ 하고는 衛鞅을 左庶長으로 삼아 마침내 法을 변경하는 법령을 정하였다.
衛鞅은 백성들로 하여금 什과 伍를 만들어 서로 糾察하고 連坐하게 하되, 간악함을 고발하지 않는 자는 허리를 베어 죽이고, 간악함을 고발하는 자는 적의 수급을 벤 것과 똑같은 상을 내리고, 간악함을 숨겨준 자는 적에게 항복한 것과 똑같이 처벌하며, 軍功이 있는 자는 각기 비율에 따라 높은 관작을 받고, 사사로운 싸움을 하는 자는 각기 輕重에 따라 형벌을 받으며, 크고 작은 사람이 힘을 합하여 밭을 갈고 비단을 짜는 것을 本業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곡식과 비단을 많이 바친 자는 그 身役을 면제해주고, 상공업인 末業의 이익에 종사하거나 또는 게을러 가난한 자는 적발하여 처자를 노비로 삼았으며, 戰功이 있는 자는 현달하고 戰功이 없는 자는 비록 부유하더라도 화려한 바가 없게 했다.” 하였다.
역주6 流血刻骨 : 商鞅이 법령을 개혁하면서 무리하게 추진하여 많은 반대파들을 형벌로 탄압하였으며, 형벌이 가혹하여 백성들이 사형을 가벼운 법으로 여기고 三族을 멸하는 것을 일상의 법으로 여길 정도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商鞅은 新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일체 私情을 두지 않아서 太子가 법을 범하자 “太子는 군주의 뒤를 이을 아들이니, 형벌할 수 없다.” 하고는 그의 師傅인 公子 虔과 公孫賈를 형벌하였으며, 일찍이 渭水가에서 죄수들을 논죄하였는데, 죄인을 모두 죽여 피가 유입되어 渭水가 모두 붉어지니, 그가 정승이 된 지 10년에 사람들이 많이 원망하였다. 《史記 商君列傳》
역주7 一夫作亂 而子孫無遺種 : 一夫는 匹夫와 같은 말로 하찮은 한 남자를 가리키는데 秦나라 말기에 봉기한 陳勝과 吳廣을 지칭한 것이며, 遺種은 남은 후손을 이른다.
秦나라는 韓․魏․燕․趙․楚․齊의 6國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始皇帝가 죽자 趙高와 李斯의 간악한 책략으로 長子 扶蘇를 죽이고 작은 아들 胡亥를 세우니, 이가 바로 二世皇帝이다. 二世皇帝는 姦臣 趙高의 말을 믿고 李斯를 살해하였으며, 무능하고 혼우하여 백성들을 형벌로 몰아 민심을 크게 잃었다. 이에 陳勝과 吳廣이 봉기하자 각처에서 豪傑들이 일어났으며, 二世皇帝는 결국 趙高에게 시해당하였다. 뒤를 이어 子嬰이 즉위하였으나 漢나라의 劉邦에게 항복함으로써 秦나라는 2代 만에 멸망하고 자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賈誼의 〈過秦論〉에 “秦나라가 조그마한 영토로 萬乘天子의 권력을 이루어 八州를 점령하고 同列들에게 조회받은 것이 백여 년이었다. 그런 뒤에 六合을 집으로 삼고 崤山과 函谷關을 궁궐로 삼았는데, 한 匹夫가 난을 일으키자 天子의 일곱 사당이 허물어지고 몸이 남의 손에 죽어서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된 것은 어째서인가? 仁義를 베풀지 않았고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다르기 때문이었다.[秦以區區之地 致萬乘之權 招八州而朝同列 百有餘年矣 然後以六合爲家 崤函爲宮 一夫作難 而七廟墮 身死人手 爲天下笑者 何也 仁誼(義)不施 而攻守之勢異也]” 하였다.
八州는 당시 여러 제후들을 가리킨 것이다. 옛날 중국을 九州로 나누었는 바, 秦나라는 雍州에 해당되고 나머지 나라들은 冀州, 兗州, 靑州, 徐州, 揚州, 荊州, 梁州, 豫州의 여덟 주에 해당되므로 八州라 한 것이다.
역주8 斗筲之才 穿窬之智 : 斗는 말이고 筲는 대나무로 만든 작은 용기인데, 斗는 10升을 담고 筲는 1斗 2升을 담으므로, 인신하여 기량이 협소하고 변변치 못한 재주나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의 비유로 쓰인다.
穿窬는 도둑이 남의 담을 뚫거나 넘어가서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穿窬之智는 좀도둑의 작은 지혜를 말한다.
역주9 遷稱之曰 不加賦而上用足 : 이 내용은 《史記》 〈平準書〉에 아래와 같이 보인다. “桑弘羊은 관리들이 곡식을 관아에 바치면 그 직위를 높여주고 죄인들이 곡식을 바치면 속죄할 수 있도록 奏請하였다.
또 甘泉宮의 창고에 곡식을 바치는 백성들에게는 차등에 따라 종신토록 賦役을 면제시켰으며, 물자가 급히 필요한 지역에는 여유가 있는 다른 군현에서 보내주도록 하고, 전국의 郡縣에 주재하고 있던 農官들은 각기 그곳의 곡식들을 관장하여 京師로 올려 보내니, 山東에서 漕運하는 곡식이 매년 증가하여 연간 6백만 석에 이르렀다. 1년 내내 太倉과 甘泉倉은 곡식으로 가득 찼고, 변경 지방에도 양식과 기타 물품이 여유가 있었다.
均輸官이 均輸法에 따라 賦稅로 받은 물품들을 다른 지방으로 운송하여 판매하니, 그 이윤으로 얻은 비단이 연간 5백만 필에 달하였다. 이윽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지 않고도 나라의 재용이 풍족하게 되었다.”
역주10 司馬光之言也……其害甚於加賦也 : 司馬光(1019~1086)은 字가 君實이고 號가 迂夫로 北宋의 名相인데, 죽은 뒤 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司馬溫公이라고도 칭하였다. 仁宗의 寶元 元年(1038)에 진사에 급제하고 翰林學士, 御史中丞 등 중앙 요직을 역임하였다. 神宗이 王安石을 발탁하여 新法을 단행하자, 이에 반대하여 樞密副使를 사퇴하고 熙寧 3년(1070)에 외직으로 나갔다가 哲宗 元祐 元年(1086)에 입조하여 재상이 되었으며, 皇命으로 《資治通鑑》을 편찬하였다.
이 내용은 東坡가 지은 〈司馬溫公行狀〉에 자세히 보이는바, 神宗 熙寧 원년(1068)에 河朔의 災傷으로 國用이 부족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大臣들이 學士院에서 토론하였는데, 王安石이 “理財에 능한 자가 없기 때문에 國用이 부족하다.”라고 말하자, 이에 대해 司馬光이 반론한 것이다.
역주11 必先鄙堯笑舜而陋禹也 : 堯․舜․禹의 공손하고 검소함을 비웃고 누추하게 여김을 이른다. 堯․舜․禹는 모두 공손하고 겸양하였으며 또한 검소하기로 유명하였다.
《史記》 〈五帝本紀〉에 “堯와 舜은 궁궐의 계단을 흙으로 3척만 쌓고 지붕의 이엉을 자르지 않았다.[土階三尺 茅茨不翦]”라고 보인다.
또한 《論語》 〈泰伯〉에는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禹임금은 내 흠잡을 데가 없으시다. 평소의 음식은 간략하게 하시면서도 〈제사에는〉 鬼神에게 孝誠을 다하시고, 평소의 의복은 검소하게 하시면서도 黻․冕의 祭服에는 아름다움을 다하시고, 宮室은 낮게 하시면서도 〈도랑을 만드는〉 治水 사업에는 힘을 다하셨으니, 禹임금은 내 흠잡을 데가 없으시다.’ 하셨다.[子曰 禹吾無間然矣 菲飮食而致孝乎鬼神 惡衣服而致美乎黻冕 卑宮室而盡力乎溝洫 禹吾無間然矣]”라는 내용이 보인다. 黻은 제복의 일종으로 무릎에 대는 슬갑이며, 冕은 면류관으로 이 역시 제복이다.
역주12 世有食鍾乳烏喙……蓋始於何晏 : 鍾乳는 石鍾乳로 仙人들이 補陽彊壯劑로 복용했다고 하는데, 성질은 따뜻하고 맛은 달며 성욕을 강화하고 사나운 기를 다스리며 정기를 굳게 하고 눈을 밝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毒性이 있어 효과를 얻기보다는 해로운 경우가 더 많았다.
何晏(195~249)은 삼국시대 魏나라의 문인이자 정치가로 字가 平叔이고 南陽 宛縣 사람이다. 東漢 때에 대장군을 지낸 何進의 손자인데 어려서 神童으로 이름을 떨쳤다. 어머니 尹氏가 曹操의 첩이 되어 궁에서 자랐으며, 뒤에 魏나라의 공주와 결혼하였다. 曹操의 큰아들인 曹丕가 魏나라를 세운 뒤에 궁 밖으로 쫓겨났으나, 권력을 잡은 曹爽의 심복이 되어 吏部尙書에 올랐다가 曹爽과 함께 司馬懿에게 살해당하였다. 玄學과 淸談에 심취하였고 《論語》에도 注를 달았으며, 養生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역주13 寒食散 : 後漢 때에 만들어진 마약의 일종으로 황화수은이 주성분인 丹砂와 砒素, 雄黃 등이 주성분이다. 魏나라 때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는 淸談思想과 어우러져 풍류의 도구이자 神仙이 되는 비방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독성이 강하고 熱藥이어서 이것을 복용한 자들은 등창이 나고 피를 토하였으며, 정신착란 등의 후유증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何晏이 복용하여 처음 신비한 효능을 얻자,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역주14 殺身滅族 : 何晏이 이 寒食散을 먹고 죽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何晏이 결국 曹爽에게 붙었다가 죽임을 당하고 온 집안이 망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는 何晏이 寒食散을 먹고 그 후유증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교만방자한 曹爽에게 붙음으로써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본 듯하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