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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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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遷客思故鄕風致 婉然이라
吾州之俗 有近古者三이라
其士大夫 貴經術而重氏族하고 其民장리而畏法하고 其農夫 合耦以相助하니 蓋有三代, , 唐之遺風하야 而他郡之所莫及也
始朝廷 하니以前 로되 獨吾州之士 通經學古하야 爲宗師하니 方是時하야 四方指以爲迂闊이라
至於郡縣胥史하야도 皆挾經載筆하고 應對進退 有足觀者
而大家顯人 以門族相上하야 推次甲乙하야 皆有定品하고 謂之江鄕이라하니 非此族也 雖貴且富라도 不通婚姻하니라
其民, 현령縣令 如古君臣하야 旣去 輒畫像事之하고 而其賢者 則記錄其行事하야 以爲口實하야 至四五十年不忘하고
商賈小民 常儲善物而別異之하야 以待官吏之求하며 家藏律令하야 往往通念而不以爲非하야 雖薄刑小罪라도 終身有不敢犯者하니라
歲二月 農事始作하나니 四月初吉 穀稚而草壯이어든 耘者畢出하야 數十百人爲曹하야 立表下漏하고 鳴鼓以致衆이라
擇其徒 爲衆所畏信者二人하야 一人 掌鼓하고 一人 掌漏하야 進退作止 惟二人之聽호되
鼓之而不至하고 至而不力이면 皆有罰하며 量田計功하야 終事而會之하야 田多而丁少하면 則出錢以償衆이라
七月旣望 穀艾而草衰어든 則仆鼓決漏하고 取罰金與償衆之錢하야 買羊豕酒醴하야 하고 作樂飮食하야 醉飽而去하야 歲以爲常하니라
其風俗 蓋如此 其民 皆聰明才智하고 하야 易治而難服이라
수령守令始至 視其言語動作하면 輒了其爲人하야 其明且能者 不復以事試하야 終日寂然하고 苟不以其道하면 則陳義秉法以譏切之
不知者以爲難治라하나니라
태수太守 軾先君子之友人也
簡而文하고 剛而仁하며 明而不苛하니 衆以爲易事
旣滿將代할새 不忍其去하야 相率而留之한대 不奪其請하야 旣留三年 民益信하야 遂以無事
因守居之北墉하야 而增築之하야원경루遠景樓하고 日與賓客僚吏 遊處其上이라
方爲서주徐州러니서주之人 以書相往來 未嘗不道여후黎侯之善하고 而求文以爲記하니라
嗟夫
軾之去鄕 久矣 所謂원경루遠景樓 雖想見其處 而不能道其詳矣
이나 州人之所以樂斯원경루之成하야 而欲記焉者 豈非上有易事之長하고 而下有易治之俗也哉리오
라하시니 是二者 於道 未有大損益也로되 然且錄之하시니라
今吾州近古之俗 獨能累世而不遷이요 而賢守令撫循敎誨不倦之力也 可不錄乎
若夫登臨覽觀之樂 山川風物之美 軾將歸老於故丘하야 布衣幅巾으로 從邦君於其上하야 酒酣樂作이어든 援筆而賦之하야 라도 尙未晩也리라
당형천唐荊川
此文 造意亦奇하니 更不在作樓與遠景上說이니라


04. 미주眉州원경루遠景樓에 대한 기문記文
떠돌아다니는 나그네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풍치가 완연하다.
우리 고을의 풍속에 옛날과 가까운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사대부士大夫들은 경학經學을 귀하게 여기고 씨족을 소중히 여기며, 백성들은 장리長吏(수령守令)를 높이고 법을 두려워하며, 농부들은 힘을 합해 농사일을 하여 서로 도와주니, 이는 삼대三代의 유풍이 남아 있어서 딴 고을에서는 미칠 수 없는 것들이다.
처음에 조정에서 (시부詩賦)로 선비를 뽑으니, 천성天聖 연간 이전에는 배우는 자들이 여전히 오대시대五代時代문폐文弊를 답습하였는데, 유독 우리 고을의 선비들은 경전經典을 통달하고 옛것을 배워서 서한西漢의 문장을 종사宗師로 삼으니, 이때를 당하여 사방에서는 우리 고을을 보고 우활迂闊하다고 지목하였다.
군현郡縣서리胥吏에 이르러서도 모두 경전을 옆에 끼고 붓을 갖고 다니며 응대하고 진퇴함에 볼 만한 것이 있었다.
그리고 대가大家의 현달한 사람들은 문벌을 가지고 서로 높여 로 차례를 매겨서 모두 정해진 등급이 있었고 이것을 강향江鄕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집안이 아니면 비록 신분이 귀하고 또 부유하더라도 혼인을 통하지 않았다.
우리 고을 백성들은 태수太守현령縣令을 옛날 군신君臣간과 같이 여겨서 떠나가면 번번이 화상畫像을 그려 그를 섬겼고, 그중에 훌륭한 수령은 그가 행한 일을 기록하여 입에 올려서 4, 50년이 지나도록 잊지 않았다.
그리고 상인商人들은 항상 좋은 물건을 특별히 따로 보관해서 관리官吏들의 요구에 대비하였으며, 집집마다 율령律令을 보관하고 종종 이것을 모두 외워서 나쁜 짓을 하지 아니하여, 비록 하찮은 형벌과 작은 죄라도 종신토록 감히 범하지 않았다.
매년 2월이면 농사가 시작되는데, 4월 초순에 곡식의 싹이 어리고 잡초가 무성하면, 김매는 자들이 모두 나와서 수십 명 내지 백 명으로 한 무리가 되어 (해시계)를 세우고 (물시계)에 물을 담아놓고서 북을 울려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무리 중에 사람들이 평소 존경하고 신임하는 두 사람을 뽑아서, 한 사람은 북치는 것을 관장하고 한 사람은 해시계와 물시계를 관장하여, 나아가고 물러가고 농사일하고 멈추는 것을 오직 두 사람의 명령을 따르게 하였다.
만일 북을 쳐도 오지 않고 와서도 힘쓰지 않으면 모두 벌금이 있었으며, 전지田地를 헤아리고 일을 계산해서 일이 끝나면 이것을 회계하여, 전지가 많고 장정이 적으면 돈을 내어 여러 사람들에게 보상하였다.
7월 보름에 곡식을 베고 풀이 시들면 북을 눕히고 물시계의 물을 쏟아버리고, 거둔 벌금과 무리에게 보상한 돈으로 양과 돼지와 술과 단술을 사서 전조田祖신농씨神農氏에게 제사하고, 풍악을 일으키고 음식을 마시고 먹어서 취하고 배불러야 떠나갔는데, 해마다 항상 이렇게 하였다.
그 풍속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총명하고 재주 있고 지혜로우며, 본업本業인 농업에 힘쓰고 열심히 일하여, 다스리기는 쉬워도 복종시키기는 어려웠다.
수령守令이 처음 부임해 왔을 적에 수령의 언어言語동작動作을 살펴보면 곧바로 그의 사람됨을 환히 알아서, 현명하고 유능한 자에게는 더 이상 일을 가지고 시험하지 아니하여 종일토록 조용하였고, 만일 올바른 로써 다스리지 않으면 의리義理를 진열하고 에 의거하여 심하게 비난하였다.
그러므로 모르는 자들은 지방이 다스리기 어렵다고 말한다.
지금 태수太守여후 희성黎侯 希聲은 나의 선친의 친구이시다.
소탈하면서도 문채가 나고 강하면서도 어질고 밝으면서도 까다롭지 않으니, 백성들이 모두 섬기기 쉽다고 말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 교대하게 되었을 적에, 백성들이 그가 떠나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 서로 거느리고 와서 만류하자, 성상聖上께서 백성들의 요청을 빼앗지 않아서 3년을 더 유임하게 하시니, 백성들이 더욱더 신임하여 마침내 일이 없어 태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태수가 거처하는 북쪽 담을 따라 증축해서 원경루遠景樓를 짓고, 날마다 빈객과 요리僚吏들과 함께 그 위에서 노닐며 지냈다.
나는 이때 막 서주徐州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우리 고을 사람들이 나와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적에 일찍이 여후黎侯선정善政을 말하고, 글로써 이것을 기록해줄 것을 요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
내가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으니, 이른바 원경루遠景樓라는 것을 비록 그곳을 상상해볼 수는 있으나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을 사람들이 이 원경루遠景樓가 이루어진 것을 즐거워하여 이것을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어찌 위에는 섬기기 쉬운 관장官長이 있고 아래에는 다스리기 쉬운 풍속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까지도 오히려 사관史官이 글을 빼놓고 기록하지 않는 것과 말()을 소유한 자가 남에게 빌려주어 타게 하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라고 하셨으니, 이 두 가지는 에 있어서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닌데도 공자孔子께서는 이것을 기록하셨다.
지금 우리 고을의 옛날과 가까운 순후淳厚한 풍속이 유독 여러 (왕조王朝)가 지나도 바뀌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기로耆老와 옛날 어른들의 온화하고 공손한 은택이요, 어진 태수가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공력일 것이니, 이것을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경루遠景樓에 올라 구경하는 즐거움과 산천山川풍물風物의 아름다운 것으로 말하면, 내 장차 벼슬을 내놓고 고향 언덕으로 돌아가 포의布衣를 입고 복건幅巾을 쓰고 방군邦君(태수)을 따라 누대 위로 올라가서, 술에 취하고 풍악이 울려 퍼지면 붓을 잡고 이것을 읊어 여후黎侯유애遺愛를 칭송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이 글은 조의造意가 또한 기이하니, 에 대한 것과 먼 풍경[원경遠景]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역주
역주1 眉州遠景樓記 : 本集에는 이 글의 말미에 ‘元豐元年七月十五日記’라고 표기되어 있어, 元豐 원년(1078) 7월 15일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眉州는 宋나라 때 州의 하나로 治所는 지금의 四川省 眉山縣에 있었다. 遠景樓는 당시 知眉州事인 黎希聲이 창건하였다.
역주2 以聲律取士 : 聲․律은 詩를 지음에 있어 지켜야 하는 음률의 법칙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聲․律을 맞추는 詩文과 辭賦를 가리켜 말하였다. 取士는 선비를 뽑는 科擧를 이른다. 당시 進士科의 주요 과목이 詩文과 辭賦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3 天聖 : 宋 仁宗의 연호로 1023년부터 1032년까지이다.
역주4 學者猶襲五代文弊 : 五代는 唐나라가 멸망한 이후의 혼란기인 五代時代로 唐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宋나라가 건국된 960년까지를 이르는데, 이때에 後梁․後唐․後晉․後漢․後周가 차례로 일어났다가 멸망하였다. 이 당시의 문장은 수사만 화려하고 형식을 중요시하는 騈儷體의 문장들로 품격이 낮고 내용이 없는 폐단이 있었다.
역주5 西漢文詞 : 漢 高祖가 개국한 B.C. 206년부터 王莽에 의해 멸망한 A.D 8년까지를 보통 前漢이라고 칭하는데 서쪽인 長安에 도읍하였으므로 西漢이라고 칭하고, 後漢은 동쪽인 洛陽에 도읍하여 東漢이라고 칭한다.
西漢時代의 문장가는 賈誼와 司馬遷, 司馬相如와 揚雄 등 기라성 같은 文人이 많으며, 이들의 문장은 고졸하고 담박하였으므로 唐나라와 宋나라 때의 古文復興運動은 바로 이 시대의 문장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었다.
역주6 太守 : 본래 漢 景帝가 秦나라의 郡守를 바꿔 이름한 것으로 이후 널리 쓰였다. 宋나라는 郡을 州로 개칭하였으므로 공식적으로는 知州事가 쓰였으나 太守 또한 병용되었다.
역주7 以祀田祖 : 田祖는 전설상 처음으로 농사짓는 방법을 창제하였다고 전해지는 神農氏로 周나라 이래로 제사하였다.
역주8 務本而力作 : 本은 本業으로 바로 農業을 이른다. 고대에는 農業을 생산의 근본이라 하여 本業이라 하고, 商業과 工業을 末業이라 하였다.
역주9 黎侯希聲 : 黎錞(1015~1093)으로 侯는 지방관에 대한 존칭이고 希聲은 그의 字이며 廣安 사람이다. 仁宗 慶曆 6년(1046)에 진사로 출사하여 大理寺丞․太常博士․國子監直講 등을 역임하였고 蜀州와 眉州의 知事를 지냈다. 저서에는 《黎氏春秋解》․《校勘荀子》 등이 있다.
역주10 孔子曰……今亡矣夫 : 이 내용은 《論語》 〈衛靈公〉에 그대로 보이는데, 朱子의 《論語集註》에 “史官이 글을 빼놓음과 말을 남에게 빌려주는 이 두 가지 일을 孔子께서도 오히려 미쳐 보셨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하셨으니, 시대가 더욱 야박해짐을 서글퍼하신 것이다.”라는 楊時의 說을 들고, 이어서 “내가 생각하건대 이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어서 하신 말씀일 것이니, 비록 하찮은 문제(연고)이나 時變의 큼을 알 수 있다.”라고 注하였다.
역주11 耆老昔人豈弟(愷悌)之澤 : 耆老는 老人을 이른다. 《國語》 〈吳語〉에 “耆老인 부모를 모시고 형제가 없는 자[有父母耆老而無昆弟者]”라고 보이는데, 그 注에 “60세를 耆라 하고, 70세를 老라 한다.”라고 하였다.
豈弟는 愷悌로 성품이 화락하고 평이함을 이른다. 《詩經》 〈大雅 旱麓〉에 “豈弟한 君子여, 祿을 구함이 豈弟하도다.[豈弟君子 干祿豈弟]”라고 보이는데, 朱子의 《詩經集傳》에 “豈弟는 즐겁고 화평함이다.[樂易]”라고 注하였다.
역주12 以頌黎侯之遺愛 : 遺愛는 지방관이 고을을 잘 다스리고 백성들을 사랑한 것을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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